* 주님 오시는 발자국 소리 *

성경의 예언과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와 분별, 한반도 정세 관련 자료 총모음!

지옥의 문을 여는 '잘못된 사랑'

댓글 0

* 공지사항(필독) *

2020. 11. 4.

지옥의 문을 여는 '잘못된 사랑'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말씀합니다.

 

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예수님이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인데

포도나무에 가지로써 붙어있게 되면

열매를 많이 맺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열매 맺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요 15:10)

 

열매 맺는 일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대로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2)

 

즉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는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란,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살리는 일"이

바로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람을 살리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18,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8-19)

 

여기서 보면,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뭘까요?

 

믿지 않는 세상에서도 

불우이웃들을 돕기 위해

자선행사를 하기도 하고..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시설도 많이 있습니다. 

 

중독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한

상담전화도 24시간 열려있고..

 

누군가가 힘들어하면

다독여주며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며

사랑을 북돋워주기도 합니다.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길가던 사람들이 서로 나서서

돕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일의 기준,

사람을 살리는 일의 기준이..

이런 보여지는 차원에 국한된거라면.. 

 

믿지 않는 세상에서도 

사랑이 느껴지는 일들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딱히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이런 보여지는 차원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은.. 

진리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예수님에게서 오는 진리의 말씀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세상에서도

사랑을 말하고, 평화를 말하고

정의를 말하고, 인권을 말하고 

화해와 연합을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이런 가치들이 

비슷해 보이지만 진리가 아닌 이유는

그 기준이 철저히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사람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이 

절대기준이 됩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 보면

성경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생명을 얻게 한다는 의미는..

육의 생명이 아닌 영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의 진짜 의미는..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믿음 안에서 사람의 본질적 생명인

영이 살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서로 위로하고 도와주고 섬기는 일들은

포함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이 자체가 

진짜 생명인 영이 살도록 하기 위해

서로 사랑하는 일, 

즉 사람을 살리는 일의 본질은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가장 본질적인 일은 바로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

즉 복음(생명)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입니다.

 

티켓이 없어 

입장 자체가 불가능한 이들에게

티켓을 부여받고

좁은 문을 통과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며

좁은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본질적인 죄는

단편적인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모든 행위를

죄로 간주합니다.

(마 7:21, 눅 12:47, 롬 14:23)

 

그래서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받고

좁은 문을 통과했지만 

헤매이며 엉뚱한 길로 가려는 이들에게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종착지에 이르러 입성해야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2절에 보면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 가지를 찍어버리신다”

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대적으로 마지막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람을 살리는 이 두 가지의 일을 해나가는게

더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세상은 더더욱

사람이 기준되는 가치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준되는 절대진리의 가치는 

세상의 인본적 가치와 충돌하게 되고 

세상은 우리를 더욱 미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자체가

제도적으로 불법이 되는가 하면..

 

사람들의 마음안에 인본적 기준이

완강하게 뿌리내려져 있기 때문에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교회안에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가치기준과 혼합된 변질된 가치를

자기 마음에 뿌리내린 이들이 너무나 많아서

 

결국 진리를 거스르는 길로 나아가 버립니다.

 

이런 경우는,

표면상 기독교인이라 칭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세상 사람과 다를바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9절 초반에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기준되는 절대진리가 아닌

세상으로부터 오는 인본적 가치를 사랑하게 됩니다. 

 

믿는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가치기준에 오염돼버린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인권이니, 사랑이니, 차별금지니 하는 

허울좋은 껍데기를 두룬

동성애와 페미니즘 같은 반성경적 사상을 

지지하고 찬성하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납니다.

 

이렇게 되면..

절대진리를 사수하는 이들이

이런 것들을 죄라고 말했을 때..

 

이들을 손가락질 하고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과 궤를 같이 하여.. 

 

극단적이고 사랑없는 이들이라며 

세상 사람들과 같이 손가락질합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의 가치기준에 동화되버린 이들의 특징은..

 

위로하고 다독여주고 기분 나쁘지 않도록 

마음 상하지 않도록 해주는게

사랑으로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표면적인 부분에 기준을 둡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의 본질은..

 

그 사람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인간적인 배려를 해야 한다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인 영이 살도록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감정을 앞세우는 것이 아닌

그가 정말 하나님앞에 바로 서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이 죄 가운데 매여 있는 상태에서

부드러운 말로 해선 듣지 않았을 때..

 

강한 책망을 해서라도 그가 정신을 차리고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진리에 합당한 태도인 것입니다.

 

얼마전에 

부모가 자녀의 체벌을 전면금지하는 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게 무슨 문제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를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

때로는 회초리를 드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바른 훈육임에도..

(잠 22:15, 23:13-14)

 

감정적으로 학대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부의 잘못된 행태를 명분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체벌하는 것 자체를

법으로 금지시켜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상의 판단기준은 철저히 

보여지는 표면적인 행동가치에 기반을 둡니다.

 

그래서 그 행위가 

어떤 본질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심도있게 조명하고 분별하려 하기보다..

 

그져 표면적으로 좋게 보이냐 아니냐만을 따집니다.

 

이런 인본적 관점의 판단기준이 

성경의 진리를 거스르는 지름길이 되는데..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세상의 판단기준에 그대로 동화돼

그 흐름을 좇아갑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을 보면,

진리의 기준을 하나님 말씀에 두는게 아니라..

 

세상이 추구하는 기준과 동일하게

사람에게 그 기준을 둠으로써..

 

기분이 상하지 않게 만들어주고 

뭔가 훈훈한 분위기에 

인간적인 감동이 더해지는 일이라면..

 

이런 것만이 사랑을 전하는 일이고

사랑으로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오히려

죄를 용납하고 진리를 거스르도록

부채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들을 교회안에 초대해서

그들을 우리가 품어야 한다면서

서로 안아주고

"괜찮아 사랑이야"라는 

따뜻한(?) 말로 위로해줍니다..

 

그때 동성애자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 안에서 교인들과 함께 행복한(?) 교제를 나눕니다. 

 

이 상황이 표면적으로만 보면 

아주 훈훈하고 사랑과 감동이 철철 넘치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차원에선..

 

그 죄안에 갇혀서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사슬로 꽁꽁 묶어버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동성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거스르는 다른 상황들도

여기에 무수히 많이 해당됩니다. 

 

말씀되신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기준이 혼합되어

사람에게 그 기준을 두게 되면..

진리는 변질되어 버립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보면

화평과 희락과 온유 등..

성령의 열매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보통 이 성령의 열매를

아무런 영적 기반이 없는 

표면적인 차원에 무조건적으로 

적용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열매들이 성령의 열매로써의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열매가 맺혀질 수 있게 해주는

진리의 터가 기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13절에 보면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고..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성령"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 15:26, 16:13, 요일 5:6)

 

만약 어떤 상황이 

진리를 거스르지 않고 

진리의 터에 기반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그에 따른 열매가 

화평함과 희락과 온유함이라는 

외적인 태도와 모양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 상황이라면..

 

부드럽고 온유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며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일이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2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인 선을 이루기 위해 

이웃을 기쁘게 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허나 그게 아니고.. 앞서 예로 든 것처럼

본질적으로는 진리를 거스르는 상황임에도..

 

온유와 희락이 넘치고 화평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외적인 태도만을 고집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와 아무런 상관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본질은 제껴버린 채

성령의 열매라는 표면적인 것들만 붙들고서..

 

무조건 부드러운 모양으로

환하게 웃고, 싹싹한 태도를 보여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하나로 연합(?)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 같으면

그것을 본질로 착각하며.. 

 

실상은 진리를 거스르는 길로 나아가 버립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은 많은 무리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판 돈을

사도들의 발앞에 두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역시 마찬가지로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소유를 팝니다.

 

그런데 그때 그 마음에 욕심이 들어와

판 값 얼마를 속여서 그 앞에 내놓자

베드로가 그걸 강하게 책망합니다.

 

그 책망의 말을 들은 아나니야와 삽비라는 

그 자리에서 혼이 떠나 바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무리들이 

다 두려워했다고 말씀합니다.

(행 5:5,11)

 

그 얘기를 건너서 들은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 역시

심히 두려워 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사람의 기준으로 본다면,

과연 성령안에 거듭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바람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사람 기준에서 보면..

잠깐의 욕심 때문에 땅값 얼마를 속인 걸 가지고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심하게 책망한 것처럼 보일 것이고..

 

심지어 그로 인해 충격받아 사망을 한거라면..

 

오히려 베드로가 사랑 없는 행동을 해서 

사람을 죽인 것처럼 여길 수도 있습니다.

 

사람 기준에서는

설사 그들이 얼마를 감추었다고 해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며

별거 아닌 것처럼 용납하고 다독이며 

온유하고 화평한 분위기를 이루는 것이

맞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뉘앙스는 전혀 다릅니다.

 

이들의 행위는 이미 그 자체로 

진리를 완전히 거스르는 행동이었기에

베드로는 진리의 기준으로 그들을 책망했고..

 

그로 인해 벌어진 상황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지라도..

 

본질적으론 

죄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분명한 자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시몬이라는 마술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몬이란 마술사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어느날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는 모습을 보고..

 

돈을 줄테니 자신에게도 

그런 권능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사도행전 8:20,22-23)

 

사람 기준으로 본다면..

시몬이 악한 행동을 직접 저지른게 아니라

그런 말만 슬쩍 던졌을 뿐입니다.

 

허나 시몬이 품은 그 생각 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행동이었기에..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해서

말을 빙빙 돌려서 한게 아니라 

아주 강력한 진리의 책망을 그대로 선포함으로써..

 

그나마 그 마음이 회개할 수 있는 

여지가 들도록 이끈 것입니다. 

 

즉 베드로의 이 행동이 본질적으로는 

시몬이란 사람이 하나님앞에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준 행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성경에 기록되었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이와 비슷한 상황들이 

교회안에서, 또 그리스도인들에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는게 아니라

사람에게 그 절대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죄가 좀 허용되더라도

그 죄에 대해 얘기를 꺼냄으로써 

냉랭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보다.. 

 

웃으면서 나이스한 태도를 보이고

화평한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 여깁니다. 

 

기록된 성령의 열매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열매를 맺게 하시는 주체이신 

성령의 지혜로 분별하여 

그 인도함따라 나아가려는게 아니라..

 

단지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가

이러이러하다고 하니..

 

그걸 달달 외우고 교리화시켜서

표면적으로만 적용하게 되면..

 

말씀을 앞세운 교리가 오히려

미혹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인 현상 중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2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게바)와 바나바가 외식하는 행위를 하자..

 

바울이 사람들 앞에서 이들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갈라디아서 2:14)

 

바울이 이들을 강하게 책망한 이유는

인간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분명한 진리의 책망을 해야만

공동체 안에서 진리의 공의를 

바로 세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 후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들에 대해 언급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과 5장에 보면..

고린도 교회안에 교만한 이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린도전서 4:21)

 

더 나아가 고린도 교회안에 

음행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고린도전서 5:1-2)

 

진리를 거스르는 이런 상황에서는 

사랑과 온유한 태도가 아니라 

강력한 책망과 공의의 행동을 통해서만

죄가 용납되는 것을 막고,

교회의 거룩함을 지켜낼 수 있기에..

 

바울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즉, 전체적인 말씀을 통해 볼 때,

온전한 진리의 터에 기반되어 있느냐가 

가장 본질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의 정의에 대해 말씀하는데..

 

6절에 보면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이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짜 사랑은

반드시 진리에 기반된 사랑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0절에도 보면..

 

불의하여 거짓에 미혹되는 이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본질적 기준은 오직 

진리에 합당하냐 아니냐이고

표면적인 모양이 어떠한지는 

둘째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함으로써

그 영을 살리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짜 사랑,

즉 진리의 사랑인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에 합당해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옳은 말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친구에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는데

너 그렇게 살면 지옥갈거야ㅋㅋ"

라고 합니다.

 

이 말 자체는 진리에 합당해 보이지만

전하는 사람의 마음상태가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아닌,

자기 감정에 의한 조롱섞인 말이기 때문에..

 

결국은 진리에 합당하지 않은 행위가 됩니다.

 

메세지 자체가 

성경적 진리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마음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마음이여야..

 

결국은 그 행동이 

진리에 합당한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옳게 여기는 태도의 기준과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중심(마음)의 기준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A라는 사람은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초점을 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합니다.

 

표정이나 말투와 상관없이

A의 마음은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앞에 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 메세지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자기 기준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랑(?)없어 보이는 표정과 무뚝뚝한 말투와

사랑(?)없어 보이는 직설적인 메세지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A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B라는 사람은

서글서글한 표정과 밝은 목소리, 

아주 상냥한 태도로 메세지를 전하는데..

 

그 메세지는 

사람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꿈과 희망을 주고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인본적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랑(?)이 넘쳐보이는 외적인 모습과

사랑(?)이 넘쳐보이는 따뜻한(?) 메세지가 

내 마음에 큰 감동을 주기 때문에 

B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극단적인 비교같지만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적나라한 영적 현실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혹여나 상처받거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또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선포하면

혹시나 두려움을 갖진 않을까 염려하여..

 

교인들이 상처받지 않게

배려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진리를 사람 기준에 맞게 변질시켜서

왜곡된 진리를 전합니다.

 

사람의 기분과 감정을 맞춰주고 배려하기 위해

정작 그들의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 역시,

진리냐 아니냐가 기준되는게 아니라

내 감정(마음)이 어떠하냐를 기준삼아.. 

 

두려운 마음이 들거나 

마음이 불편한 메세지라면 거부해버리고 

자기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들만을 

선별해서 받아들이려 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에 

진리의 믿음에서 멀어지는 

대표적인 현상 중 하나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양이 어떠하냐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정작 보이지 않는 가장 본질적 차원인

진리의 사랑을 져버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다면

반드시 그 사랑안에 거함으로써..

 

사람이 기준되는 인본적 사랑이 아닌

진리되신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 따른 

진짜 사랑의 행함이 나와야 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기준을 거스르고

끝까지 진리를 선포하며

사람을 살리기 위한 일을 감당한다면.. 

 

이것이 본질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주님의 계명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너희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받고 

환란에 넘겨질거라 말씀합니다.

(마 24:9)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 일의 진짜 의미는..

 

기독교인이란 타이틀만 붙이고 있다면

받는 미움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끝까지 진리를 붙들고

그 계명대로 나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미움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상황이 마지막 떄인 지금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현상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서도

열매 맺지 못하면.. 

 

아버지께서 그 가지를 제거해 버리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 15:2)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여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사는게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대로 살기 위해 주님앞에 나아가 

그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사랑 없어 보이는 내 모습이

육적인 차원의 내 기준에 의한 것이라면..

 

본인의 그 인본적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께만 그 기준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하라는 계명에 따라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성령 안에서 깨닫고

그 뜻대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의 모든 기준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말씀하신 계명대로 살기 위해

주님과 동행하는 이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주님의 신부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아가 2:13)

 

 

- 엘샤다이

사업자 정보 표시
| | |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