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가산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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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등산

2020. 2. 10.

2020년 02월09일 팔공산 가산산성

코스:진남문~산성마을 터~중문~가산바위~중문~산성마을 터~진남문

우리나라는 고대국가 형성기 이전, 성이 곧 국경의 구실을 하던 때부터 많은 성을 쌓았다. 전란이 잦았던 삼국시대에는 그만큼 성도 많이 축조되었을 뿐 아니라 축성술과 그 형태도 이후 천 수백년 동안 큰 변화가 없을 정도로 고도의 발달을 보았다. 고려·조선을 거치면서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고쳐지고 더러는 잊혀지기도 하던 성곽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쟁을 겪으면서 다시 한 번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전쟁을 직접 치른 장군들이나 지배층은 충주·용인·진주성 싸움 등 일부 국지전에서의 패배가 평야전 때문이었다는 분석에 따라 종래의 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는 한편 군사적인 요충지마다 새로운 산성을 구축하여 전란에 대비하였다. 가산산성은 이런 배경 아래 임진왜란 뒤에 새로 만들어졌다.

가산산성은 해발 901m의 가산에 쌓은 석축산성으로 가산면 가산리와 동명면 남원리의 일부에 걸쳐 있다. 골짜기와 능선의 지세를 적절히 이용하여 축조하였기 때문에 포곡식과 테뫼식이 혼합된 산성으로, 내성·중성·외성을 갖추고 있다.


인조 17년(1639),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된 이명웅()은 왕에게 부임 인사를 하면서 경상도 예순 고을 산성 가운데 믿을 만한 곳은 진주·금오·천생의 세 군데밖에 없으므로 적당한 곳을 골라 산성을 쌓을 것을 상주()하였다. 이해 4월 경상감영에 도임한 그는 가산의 지리가 편리함을 다시 조정에 보고하고, 9월부터 인근 고을의 많은 남정()을 징발하여 험한 지형을 따라 성을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 4월에 준공을 보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가산산성의 내성이다. 그러나 이 공사에 10만여 명 이상의 엄청난 인력과 막대한 자금이 동원되고 감사의 가혹한 독려로 공사 도중 많은 사람이 죽기까지 하여 민심이 동요하자, 여러 차례 탄핵을 받은 이명웅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640년 7월 체직()되고 말았다. 이때 이룩된 내성의 규모는 성벽의 둘레가 약 4㎞에 달하는 4,710보(), 여장1)이 1,887첩()이었으며, 동·서·북문의 세 성문이 설치되고 암문도 여덟 개가 있었다. 산성 안에는 네 곳의 포루한 군데의 장대산성에 필수적인 샘이나 우물이 스물하나, 기타 많은 부속시설이 들어서고 절도 넷이나 자리잡고 있었다.

내성이 완성된 지 60년이 지난 숙종 26년(1700)에 외성을 축성했다. 당시의 관찰사 이세재()의 장문()에 따라 수축된 외성은 성벽 길이 3,754보, 여장 1,890첩, 문루 하나, 암문 셋, 군기고를 비롯한 창고, 그밖의 부속건물로 이루어졌다. 이듬해에는 외성 안에 천주사()를 짓고 여기에 승창미()를 보관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가산산성에서는 성안에 절을 짓고 승려를 모집하여 궁술을 연습시켜 봄·가을로 승장()을 뽑는 제도가 있었으며, 이렇게 선발된 승장들이 지휘하는 승병들이 성 일부의 수비를 담당했다는 기록이 『증보문헌비고』에 보인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 관찰사 정익하()의 건의와 주도로 이룩되었으며, 성벽 길이 602보에 여장 402첩, 중문 하나, 문루 하나, 별장()이 머무르는 건물 등이 설치되었다. 4년 뒤에는 중성 안에 빙고()를 축조하기도 하였다. 중성은 주로 비축미를 보관하는 데 이용하였으며 중요시설은 대부분 내성 안에 있었다.

가산산성은 행정중심지이기도 했다. 1640년 내성의 완성과 더불어 종3품 도호부사(使)가 다스리는 칠곡도호부를 여기에 설치하고 군위·의흥·신녕·하양의 네 현을 관장케 하였다. 그러나 관아가 산성 안에 있다보니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아 백성들은 읍치의 이전을 바랐다. 이에 따라 순조 19년(1819) 당시 경상감사로 있던 추사 선생의 아버지 김노경()의 장계()에 의해 칠곡도호부는 팔거현으로 옮겨졌다. 산성에 80년 가까이 도호부의 관아가 있었던 셈이다. 이보다 앞서 순조 11년(1811) 가산산성에 진()을 두자는 장계가 있어 비변사()에서 이를 논의하게 되고, 이듬해에는 정식으로 가산진을 설치하고 다른 산성의 예에 따라 종9품의 무관으로 별장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우군기의 폭격이 시작되고 뒤를 이어 미군 및 사단 야전포병의 일제사격이 집중되자 가산산성 안은 피비린내 나는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아름드리 낙엽송이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되고 성벽 뒤에 웅크린 적병들이 밤송이 떨어지듯 아래로 곤두박질했다. 가장 치열한 교전을 치른 제4중대는 180명이던 병력 중 몸이 성한 자는 장교 1명과 병사 10여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감소되어 있었다. 가산산성에 침투한 북괴군 제14연대도 1950년 8월 27일 전투에서 와해, 약 400여 명만이 탈출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의 가산산성전투를 전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현대전에서도 산성을 두고 이렇듯 공방이 치열했으니 그 입지의 뛰어남은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하겠으나, 성을 쌓으며 희생되고 전쟁에 숨져간 영혼들이 또 다른 성을 이루고 있지나 않을지.

가산산성은 외성의 남문으로 들어가 등산로를 따라 살펴볼 수 있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3년에 걸쳐 복원한 남문과 문루, 성곽의 일부는 주로 옛 돌을 이용해 복원했으나 솜씨가 거칠다.

“주의 / 이 지역은 성벽 위의 돌이 / 떨어질 위험이 있으니 접근 / 금지하시기 바랍니다. / 1995. 3 / 칠곡군수”

위와 같은 경고문인지 안내문인지 모를 입간판이 성벽 아래 세 개나 서 있는데, 그 ‘주의’의 말마따나 성벽 위의 여장에는 곳곳에 이빠진 것처럼 성돌이 달아나고 없다. 복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고, 옛사람들도 이랬을까 싶다. 문루도 별 볼품이 없어 ‘영남제일관’이라는 편액이 차라리 구차스러워 보인다.


남문을 지나 옛 천주사터에 새로 들어선 해원정사라는 절을 오른쪽으로 비켜 오르면 등산로가 시작된다. 짧지 않은 산길이니 들메끈을 미리 고쳐 매는 게 좋다. 내친걸음이라면 동문·중문을 거쳐 가산바위까지는 오를 일이다. 동문까지가 한 고비, 첫 갈림길에서 왼쪽을 택하면 4.2㎞, 오른쪽을 취하면 5㎞를 걸어야 한다. 오른쪽 길을 권한다. 줄곧 ‘갈 지()’자로 이어지는 길이 평탄하여 쉬엄쉬엄 오르면 한여름에도 숲그늘 덕분에 가볍게 땀이 배어나는 정도로 오를 수 있다.

동문은 거의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바깥쪽은 다듬은 돌을 짜 올려 무지개문을 만들고 그 안쪽은 장대석을 걸쳐 네모지게 마무리한 천장의 모습이 이채롭다. 문 좌우로 날개처럼 성벽이 이어진다. 북창마을로 향하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성벽의 일부가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낸다.

동문에서 다시 1㎞를 가면 중문이 나선다. 근래에 복원하여 모양은 반듯하지만 옛맛은 없다. 중문을 지나 수백 미터 내려가면 가산바위다. 철판으로 만든 층계를 올라 바위 위에 서면 멀리 서쪽으로 다부동의 전적비가 내려다보이고 유학산의 능선이 그 뒤를 막아서며, 골짜기를 뚫고 대구로 이어지는 5번 국도가 굽어보인다. 가산바위에 서면 가산산성의 입지를 살필 수 있고, 왜 다부동에서 그토록 처참한 전투를 치러야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에 있다. 락향정식당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908번 지방도로를 따라 팔공산·군위 쪽으로 1.7㎞ 가면 길 왼쪽으로 가산산성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약 1㎞ 가면 산성 입구의 넓은 주차장에 닿는다.

한편, 략향정식당 앞에서 908번 지방도로를 따라 0.8㎞ 가서 길 왼쪽 산수산장 앞으로 난 길을 따라 0.6㎞ 가면 남원리 원당마을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산성으로 가는 시멘트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0.7㎞ 가면 가산산성 남문 앞에 닿는다.

남문 앞에도 주차장이 있으나 남문으로 가는 시멘트길이 좁아 대형버스가 다니기에는 곤란하다. 대중교통은 기성동 삼층석탑과 동일하다. 삼층석탑이 있는 기성리 삼거리에서 내리거나 기성리 버스종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 산성 주변에는 숙식할 곳이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산산성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초판 1997., 11쇄 2009., 돌베개)



진남문 출발지 모습























가산바위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