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20. 12. 1. 14:29

 

작년과 달리 올겨울은 쌀쌀할 거라는 예보가 나왔다. 그래서 그런가? 11월에 들어서니 찬 바람이 인다. 거리에 오리털외투로 무장한 시민들이 종종걸음이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닐 성싶은데, 추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 아무리 추워도 만보를 쉬지 않고 걸으면 등에 땀이 밴다. 뺨에 스치는 바람이 차도 몸이 더우면 답답하다. 그렇다고 외투 벗으면 느닷없는 한기가 엄습한다. 코로나19가 여전하다. 감기는 피해야 하니, 얇은 옷 한 벌 더 입고 밖에 나선다.

 

코로나19 이후 동네병원에 감기 환자가 무척 줄었다고 한다. 손 씻기가 강조되고 어디를 가나 손 세정제가 비치돼 있으니 그럴 만하겠다. 기침 일으키고 콧물 흘리게 만드는 감기는 코로나19처럼 재채기보다 손으로 쉽게 감염되는 바이러스 질병이라지 않던가. 실내는 물론, 걷는 사람이 드문 거리라 해도 마스크를 습관처럼 착용하는 분위기에서 동네 의원의 수입도 줄었겠지. 추위로 곱은 손이 떼에 찌들 때까지 동네방네 누볐던 1960년대, 누런 콧물을 줄줄 흘릴지언정 조무래기들은 감기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 21세기 아이들은 건강할까?.

 

찬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긴 외투로 몸을 돌돌 마는 아이들은 털모자와 목도리로 빈틈이 없는데, 감기를 달고 산다. 손을 유별나게 세척하는 요즘은 예외겠지만, 피부가 새하얀 도시 아이들은 걸핏하면 병원행이다. 바지춤에 흙을 묻히고 집에 들어서면 목욕탕에 순순히 끌려가는 요즘 아이들이 손 씻기를 거부할 리 없는데, 고기를 원 없이 먹어도 면역력이 떨어진 걸까? 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보다 키와 허우대가 부쩍 커졌지만, 자라는 동안 여름이 겨울 같고 겨울이 여름 같은 실내공간에 머물며 허약해졌는지 모른다.

 

시골에 사는 아이들은 어떨까? 요즘 어느 시골이든 아이가 드무니 그 여부를 짐작하기 어려운데, 도시 어린이도 자연에서 흙을 만지며 놀면 짧은 시간 안에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핀란드의 연구를 최근 한 신문이 전했다. 서너 살 어린이 7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학자는 어린이집 마당을 숲과 비슷하게 바꿨고, 흙에 작은 나무와 이끼 종류를 심으면서 하루 한 시간 반, 한 달 정도 놀도록 유도했더니 뚜렷하게 건강해진 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핀란드 학자는 생물 다양성을 주목했다. 토양 미생물을 만난 도시 어린이에게 사람 피부에 분포하는 프로테오박테리아가 다양해지면서 면역력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날마다 숲을 돌아다니는 시골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높아졌다는데, 핀란드 숲이 특별할 리 없다. 우리도 다양한 토양 미생물이 분포할 게 틀림없다. 위도가 높은 핀란드의 겨울은 무척 매서울 텐데, 감기 잘 걸리는 어린이는 어느 나라가 더 많을까?

 

사진: 수원 드림봉사단 어린이들이 텃밭을 체험하는 모습(인터넷에서)

 

자연을 체험하지 못하는 현대 도시의 생활환경이 어린이의 면역체계를 약화한다고 주장한 핀란드 학자는 도시에 자연의 다양한 요소를 추가한다면 아이들의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자연이 박탈당한 도시에서 아토피, 알레르기, 당뇨, 만성 소화장애, 그리고 면역력이 떨어진 현상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강화 유기농 마을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아토피로 피부가 거칠게 부어오른 도시 아이는 가려움을 이기지 못해 짜증이 심했지만, 6개월 만에 피부가 깨끗해지면서 상냥해졌다. 온갖 치료가 소용없자 강화의 유기농단지를 찾았고, 제철 유기농산물을 먹으며 산과 들을 뛰어놀자 생긴 효과였다.

 

분교 대부분이 통폐합된 읍면 단위의 아이들은 건강할까? 흙을 만질 기회가 있을까? 입시를 위한 선행학습에 주력할수록 산과 들로 돌아다닐 틈이 없는 건 어디나 비슷할 텐데, 주변에서 자연을 찾기 어려운 도시는 말해 뭐랄까. 놀이보다 학과 성적에 치중하는 도시에 텃밭이 있는 학교가 더러 있지만, 모든 학생이 한 시간 이상 놀 규모는 아니다. 없는 것보다 낫더라도 흙 묻기 무섭게 비누로 씻어낼 테니, 피부 박테리아가 늘어나기는커녕 붙어있기도 어렵다.

 

개구리를 보려고 관광버스를 타야 하는 아이의 눈에 흙은 물론, 모래도 가깝지 않다. 아파트단지의 어린이놀이터는 흙을 철저하게 치웠다. 화학 포장재로 푹신한 바닥 위의 조합놀이대는 천편일률이고, 그네 아래 모래를 깔렸지만 좁고 위험하다. 모래 놀이터는 민원의 대상이다. 주머니에 들어간 모래가 세탁기에 쏟아지지 않나!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젖은 모래 속에 쑥 넣은 주먹 위를 두드리며 부르던 전래동요를 기억하는 어린이가 있을 거라 기대할 수 없다.

 

도시 변두리였던 인천의 주안 일원은 논밭이 넓었지만, 지금 흙은 찾기 어렵다. 대신 다닥다닥 다세대주택으로 어지럽고 좁은 골목에 주차된 자동차가 걷기조차 방해하지만, 얼굴을 그럭저럭 기억하는 주민들이 지나치면서 안부를 묻는 공간이 되었다. 한데,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10여 지구의 재개발로 시방 몹시 어수선하다. 재개발 조합은 초고층 아파트단지로 솟아오를 단꿈에 젖었지만, 정든 주민들은 헤어져야 한다. 다시 만날 기약은 없다.

 

40층을 넘나드는 초고층 아파트단지에 주민을 위한 주차장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 사이의 녹지는 커다란 나무와 아기자기한 조경수목, 그리고 다양한 풀꽃으로 근사하게 장식되지만, 자연을 흉내 내지 못한다. 지하를 파내 챙긴 흙으로 조성한 녹지가 빗물을 머금지 못하는 탓이다. 주민들은 지하의 넓은 콘크리트 공간에 차를 두는데, 큰비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주차장이 자칫 물바다로 변한다. 그뿐인가? 제초제 뿌리는 녹지라면 위험할 수 있다.

 

주택 보급률이 100% 넘어섰다는데, 아파트 가격은 왜 오르는 걸까? 동네의 이야기와 정체성을 훼손하는 초고층 아파트단지가 진정 필요한 걸까? 주택이 낡았더라도, 이웃의 숨결이 유지되는 마을로 가꿀 방안은 없었을까? 일부 자본의 이권보다 훨씬 소중한 다음세대의 행복을 위해, 어릴 적 삶터를 고향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꾸며야 옳지 않을까? 한때 대구시는 담 없는 마을을 만들면서 주민을 지원했는데, 그 사업은 확산되지 않았다. 담과 더불어 주차장을 없애고, 그 자리에 텃밭을 조성했다면 달랐을지 모른다.

 

비타민A가 풍부하지만, 달지 않아 그런지, 아이들은 좀처럼 당근을 먹지 않는다. 좋아하는 카레나 갈비찜에 넣어도 쏙 빼내 엄마 속상하게 하지만, 텃밭에서 가족과 재배했다면 다르다. 당근만이 아니다. 땀 흘리며 심은 씨앗에서 자라오르는 농작물을 주말마다 호기심으로 바라보다 수확하는 기쁨은 기다린 보람을 안겨준다.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유치원이나 학교에 텃밭이 필요한 이유가 그렇다. 자연이 아니라도 텃밭을 경험하는 아이들은 건강하다. 피부 박테리아와 비타민A가 풍부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성도 커진다.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의 시민은 출퇴근 시간에 자동차가 빠르게 달리는 도로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건물의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다. 텃밭이 얼마나 가까운 곳에 조성돼 있는지 관심이 크다. 원하는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크지만, 가족과 이웃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인 까닭이다. 텃밭이 부족한 도시는 스트레스가 많다. 시민들은 다른 도시로 떠나고 싶다. 다음 선거에서 시장 자리를 지키려면 어떻게든 텃밭을 확보해야 한다. 독일 뮌헨은 시내의 낡은 아파트단지를 더 높게 재개발하지 않았다. 텃밭으로 바꿨다.

 

흙은 도시를 건강하게 만든다. 빗물을 땅으로 스며들게 하는 텃밭과 생태공간이 보전되는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 코로나19에 움츠러들 리 없다. 예로부터 아이와 간장독은 겨우내 밖에 내놓아도 얼지 않는다고 했다. 다채로운 토양 미생물을 보전하는 흙이 있기 때문이리라.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생물 다양성을 제거한 도시는 겉보기 휘황찬란해도 허약하기 짝이 없다. 코로나19에 속수무책인 이유가 그렇다.

 

온난화되는 영구동토에 얼어붙었던 바이러스들이 깨어날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생물 다양성을 잃은 회색도시는 바이러스의 창궐을 차단하지 못한다. 추위가 예고된 올겨울에도 콧물 흘리지 않고 뛰어놀 아이를 위해 흙이 건강한 놀이터를 도시 곳곳에 마련하면 어떨까? 기후변화가 심해지는 시대, 코로나19보다 무서운 질병에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도록. (작은책, 202012월호)

 

 
 
 

자원·에너지

디딤돌 2020. 11. 22. 11:30

 

수소는 자연계 원소 중에 가장 작다. 그 물질은 산소와 만나 분해되기 어려운 화합물인 물이 되어 인체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 그리고 지구 대지를 폭넓게 적신다. 몹시 가벼운 만큼 가없는 우주에 한없이 퍼졌다. 수소가 산소와 만나면 온실가스와 방사능을 내뿜지 않으며 적지 않은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러므로 수소를 연료로 하는 발전소와 자동차를 보급하면 마땅히 친환경일까?

 

수소를 어떤 수단으로 활용할 만큼 모을까? 우주에 있는 수소는 가져올 수 없다. 물을 분해하려면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수소에서 얻는 에너지보다 현저히 많으므로 전기분해 운운하는 자는 멍청하거나 우리를 속이려 한 것이리라. 충분한 핵발전이나 화력발전으로 남아도는 전기를 활용한다고? 천벌 대상이다. 그렇담 그따위 발전소를 당장 없애야 옳다.

 

쉽게 풀이하면, 푹 삶은 천연가스에서 수소를 분리한다. 그 방법이 이제까지 가장 안전하고 경제적이라는데, 그러므로 친환경일까? 모름지기 에너지는 전환할수록 크기가 줄어든다. 천연가스에서 얻는 에너지보다 위축될 뿐 전환 과정에서 불순물과 온실가스가 필연적으로 배출된다. 이산화탄소보다 훨씬 위험한 일산화탄소가 그것인데, 사람 코에서 먼 지점에서 희석되므로 괜찮을까?

 

사진: 수소차 전략보고회에서 현대차 사장의 설명을 듣는 대통령과 고위관료. 하지만 수소차의 장점만 늘어놓는 행사로 정부는 들러리가 되었고 소비자는 속았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이산화탄소, 초미세먼지, 심지어 방사능도 희석되니 괜찮다고 장담했다. 일산화탄소는 뙤약볕에서 오존으로 변할 수 있다. 극미량으로 치명적이라 기상 예보에서 빠트리지 않는데, 안전하다 방심할 물질은 절대 아니다. 문제는 천연가스가 순수한 메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소 추출과정에서 어떤 불순물이 발생해 사람과 생태계에 어떤 피해가 생길지 파악하기 어렵다. 이제까지 별문제 없었다고? 그런데 왜 수소연료전지발전소 세울 때 쉬쉬했을까?

 

쓰레기매립장에서 발생하는 가스, 음식이나 유기물 쓰레기에서 발생하는 가스로 수소를 경제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순물이 나온다. 안전하게 처리할 방법을 쉽게 적용할 수 있다면 활용할 가치는 있겠지만 그 양으로 의미 있는 발전은 무슨. 자동차 몇 대도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정유공장의 정유 과정에서 많은 부생가스가 나온다. 대부분 공중에서 태워 버렸지만, 수소 추출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많은 자동차에 넣을 정도는 못 된다. 지역 트럭의 일부를 충당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의 가치는 있을지 모른다.

 

최근 정부는 승용차를 위한 수소 충전소를 의무적으로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자동차 이외에 거의 홍보하지 않는 수소차는 세계적인 자동차회사에서 왜 외면할까? 우리 정부는 왜 수소차에 유난히 호의적일까? 환경 전문가는 수소를 친환경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데, 촛불이 바꾼 정부는 무슨 영문인지 태동 당시 약속한 투명한 토론을 생략하고 있다. 고루한 고위관료가 방해하는 탓일까? (갯벌과물떼새, 2020년 11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20. 10. 31. 23:08

 

1862년 요절한 미국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의식주를 체온 유지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동물 대부분은 체온 유지를 위해 먹이와 거처가 필요하지만, 사람은 옷을 더 요구한다고 지적한 것인데, 그는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간소한 옷과 가재도구로 2년을 버틴 적 있다.

 

요즘 사람의 의식주는 소로가 살던 시절과 비교할 수 없게 화려하고 복잡해졌다. 사냥한 동물을 먹고 가죽을 벗겨 입으며 서식지를 넓히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다. 커다란 초식동물을 울타리에 가둬 키우며 잡아먹고 채취하던 식물의 품종을 개량해 대규모로 재배하면서 인구를 거듭 늘려나갔다. 생태계에 천연의 모습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척추동물을 보자. 무게로 30%는 사람이고 67%는 소와 돼지와 같은 가축이다. ‘동물의 왕국프로그램에 단골로 등장하는 터줏대감은 3%에 지나지 않지만, 여전히 사냥감이다. 그 결과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서식지에 집을 짓는다. 대나무와 넓은 나뭇잎으로 바람과 비를 피하던 집은 보기 어렵다. 비바람은 물론, 초미세먼지와 벌레를 모조리 차단하는 철근 콘크리트 집을 고층으로 짓고 냉난방까지 자동으로 조절한다. 어찌나 높게 짓는지, 고속 승강기가 필요할 정도다. 세상에 어떤 동물도 제 새끼가 떨어지면 죽는 공간에 집이나 둥지를 짓지 않건만, 사람은 예외다. 사실 위험한 집을 지은 지 오래된 건 아니다. 화석 에너지를 마음대로 사용하게 된 이후의 일, 아니,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다.

 

대략 15백 년 전, 나일강에서 중동 메소포타미아 일원으로 이어지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농사가 시작된 이래 최근까지 지구의 온도는 온화했다. 덕분에 농사가 인류사회에 가능했고, 농사를 시작하면서 간빙기를 잃은 지구는 일정한 기온을 유지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해석한다. 그런 주장을 최근 번역 출간된 사피엔스가 장악한 행성의 저자들이 제시한다. 저자들은 지질연대로 지금은 홀로세가 아니라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걸 분명하게 선언하면서 인류의 독보적 에너지 사용의 결과라는 걸 빈틈없이 논술했다. “인류의 위대한 승리!”를 찬미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실은 그 반대다.

 

빈약한 근육과 이빨을 가졌어도 집단으로 사냥하면서 인간은 뇌를 키웠다. 커진 뇌가 요구하는 에너지를 불로 요리해 먹으면서 작은 위장이 너끈히 해결해주자 인류는 생태계에 없던 독선을 이어갔다. 천적을 내몰며 거주지를 넓히고 동물 가죽으로 자신의 체온을 보전한 것이다. 하지만, 그 무렵 인류는 인구를 크게 늘리지 못했다. 가만히 쉴 때의 3배 정도 에너지를 사용하는 데 그친 조상은 필요한 에너지를 그때그때 자연에서 구했다.

 

수렵과 채취로 에너지를 얻을 때, 인구는 대략 500만에 지나지 않았지만, 1만 년이 지나자 5억으로 늘었다. 화석연료 없이 농사짓던 시절이다. 그때 농민과 그 가족은 쉴 때의 15배 에너지를 소비했다. 화석연료를 마구 소비하며 기후를 위기로 몰아가는 요즘은 어떨까?

 

내가 사용하는 에너지를 노예가 자전거를 돌려 생산한 전기로 충당한다면, 미국인 평균 250명의 노예를 착취해야 한다고 에너지 노예저자는 주장한다. 2005년 전후, 석유는 퍼올리는 양보다 소비량이 커졌다. 매장량에 다소 여유가 있다지만, 지금처럼 소비한다면 50년도 버틸 수 없다는데, 석탄도 앞으로 200년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동의한다. 사피엔스가 장악한 행성의 저자들은 영양분이 가득한 배양접시의 미생물을 주목했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배양하는 미생물은 영양분이 있다면 무한정 증식하지만, 고갈되면 한꺼번에 절멸한다. 화석 에너지로 인구를 78억 가깝게 키운 인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사진: 도로를 아무리 넓히고 늘려도 몰려드는 자동차가 넘치면 꼼짝하지 못한다. 코로나19는 고속도로와 비행장을 타고 광범위하게 퍼졌고 내연기관의 화석연료 소비는 기후변화를 위기로 몰아갔다. 이와 같은 개발을 용인할 시간 여유는 얼마 남지 않았을 거 틀림없다. 인류는 절벽으로 돌진하고 있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절벽에서 떨어지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진 궁녀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알 수 없는데, 페스트로 인구 격감을 경험한 서양은 걸핏하면 절벽을 거론한다. 독일 하멜른을 배경으로 하는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보자. 쥐가 들끓는 마을에 고용된 사나이는 피리를 불며 절벽으로 유인한 쥐 떼를 강에 떨어뜨려 죽인다. 다음 이야기는 생략하겠는데, 번식이 왕성한 레밍이라는 북유럽의 쥐는 먹이가 부족하면 절벽에 떼로 떨어져 죽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 레밍은 다양한 이야기로 변주된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서슬 퍼럴 때, 주한 미군 사령관이 "한국인들은 레밍과 같아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 그에게 우르르 몰려든다."라며 조롱해 공분을 일으킨 적 있다. 2017년 걷잡을 수 없는 수해로 충북지역이 휩쓸릴 때, 유람 성격의 유럽 연수에 나선 어떤 도의원도 공분을 샀다. 일정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국민과 언론을 싸잡아 레밍에 비유했다. 뉴스의 초점을 한몸에 받았지만, 그는 다음 선거에 도전할 수 없었다.

 

인구절벽이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한 경제학자가 15세에서 64세까지 생산인구의 비율이 급격히 위축되는 현상을 그렇게 표현했다는데, 생산뿐 아니라 소비가 왕성한 인구층이 줄어드는 인구절벽이 오면 경제위기가 심각해진다고 그 학자는 전망한 모양이다. “19801,440만 명이던 한국의 학령인구는 2017846만 명으로 감소했으며, 2040년에 이르면 640만 명, 2060년에는 480만 명으로 감소될 것으로 통계청이 최근 전망한 한국은 어떤가? 2017년 신생아가 30만 명 이하로 줄었고 가구당 아이가 1명 이하로 OECD 최하위를 고수한다. 인구절벽이다. 2700년이면 한 명도 남지 않을 거로 점치는 전문가도 있다.

 

사람은 레밍과 다르다. 먹을 거, 아니 소비할 에너지가 줄어들면 아이를 적게 낳고 회복되면 더 낳을 게 틀림없다. 초저출산국에 초고령사회로 치달아 경제활력이 떨어질지언정 1차함수처럼 규칙적으로 줄어들다 사그라질 리 없다. 한데, 세계인구는 지금 적당한가? 기후위기와 에너지 고갈 상황을 이겨낼 가망이 있을까? 에너지의 90% 이상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는 5000만 인구를 돌파했다. 4000만이 넘었다고 낙담하던 1983년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데, 인구절벽을 과연 모면할까?

 

경제위기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생산인구와 소비인구가 줄어드는 걱정은 한가롭다. 지금의 인구가 탐욕스러운 에너지 소비를 계속한다면 생존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휩쓸릴 수 있다. 1990년에 비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눈에 띄게 줄여가는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오히려 4배 이상 키웠다. 유럽과 미국과 달리, 우리는 식량을 절박하게 걱정해야 한다. 추우면 껴입은 옷으로 견딜 수 있지만, 먹지 못하면 당장 생명을 잃는다. 곡물 기준으로 4분의 1도 자급하지 못하는 처지에 저출산은 눈앞의 파국에서 멀다. 걷잡지 못하는 기상이변과 에너지 고갈이 눈앞으로 닥치지 않았나.

 

동물에서 사람으로 전파된 바이러스는 시시각각 변신하는 독감에서 사스와 메르스로 이어지더니 코로나19는 불과 1년 만에 3천만 넘는 세계인구를 감염시켰다. 시간이 갈수록 독성과 전파력을 강화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언제 잠잠해질까? 탐욕스러운 개발을 멈추지 않는다면 치료제와 백신을 개발해도 안심할 수 없다. 게다가 정밀하고 거대한 과학기술일수록 막대한 에너지를 요구한다. 생태계를 치명적으로 훼손하고 들어선 고속도로와 공항을 타고 인류사회에 빠르게 창궐하는 바이러스와 병균은 치료제와 백신을 번번이 무시할 텐데, 우리는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나?

 

사라질 한국을 지탱할 생명이라 대견했나? 3살 아이들에게 짜장면을 공짜로 나누어주는 중국집 사장님이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을 잉태해 낳고 보듬는 젊은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생명을 이어갈 희망이 없다면 동물은 후손을 줄이거나 생산을 멈춘다. 위기가 눈앞인 마당에 인구가 줄어드는 건 차라리 다행인데, 우리나 세계나 기득권은 탐욕을 줄이지 않는다. 절벽은 급속히 다가온다.

 

황폐해진 생태계를 서둘러 회복시키고 식량과 에너지를 지역에서 자급할 수 있어야 후손의 건강을 다소 연장할 수 있는데, 경제보다 생존을 먼저 생각해야 할 텐데, 코로나바이러스의 노골적 경고에도 엉뚱한 방향으로 뉴딜을 외치는 기득권은 경제성장에 목을 맨다. 머지않아 닥칠 고통을 어이하나. (작은책, 2020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