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4. 3. 26. 19:50

 

연구소 개소를 축하하는 자리에 초청돼 제주도를 다녀왔다. 모처럼 찾는 제주도. 시간 여유를 갖고 여기저기 들르고 반가운 분과 차 한 잔 나누거나 술잔 기울이고 싶었는데, 서둘러 돌아와 아쉬움이 크다. 김포공항 안개로 두 시간 이상 출발이 늦었고, 이튿날 새벽부터 내린 비는 제주도의 빼어난 경관을 음미할 짧은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중부지방을 덮친 미세먼지에서 해방돼 애월읍의 한 작은 마을을 한 시간 여 거닌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제주의 전통 현무암 담이 보전된 올레를 기웃하며 뚝뚝 떨어진 붉은 동백에 조의를 표하는데 건너편 담 안쪽에서 매화향이 그윽하게 퍼진다. 30여 년 전 성판악의 기슭에서 동박새를 넋 잃고 바라본 적 있는데, 동백꽃 만개했을 때 동박새가 다가왔을까? 매화 향에 취해 발걸음을 늦추었지만 동박새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직박구리가 적막을 깨뜨린다. 도시 근린공원에서 박새를 몰아낸 직박구리가 제주도마저 접수하려나.


제주시에서 애월읍으로 이어지는 중산간의 도로는 제주 특유의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잠시라도 만끽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을 달래려는데 고즈넉한 경관을 난폭하게 밀어내는 도로공사가 눈을 어지럽힌다. 제주시에서 애월읍을 15분으로 단축한다는 4차선 도로는 야트막한 언덕을 무자비하게 자르고, 시간이 천천히 흘렀을 들판에 10여 미터 이상 흙을 쏟으며 마을을 거만하게 짓누를 태세였다. 저 도로가 완공되면 살림살이는 좋아지려나? 그리 생각하는 이가 여전히 많을까?


사람이 다니며 만들어진 길은 결이다. 결을 따라 구불구불 포장된 제주도의 중산간 도로는 애월읍의 현무암 돌담과 돌담 안에서 자라는 푸릇푸릇한 농작물을 차창에서 볼 수 있게 돕는다. 차창 곁을 다가왔다 멀어지는 기생화산을 때때로 보여주고 멀리 파란 바다와 어우러지는 현무암 해안의 풍경을 허락한다. 도로 가장자리를 지켜온 벚나무 물결은 봄철 중산간을 화사하게 굽이굽이 물들일 텐데, 더는 볼 수 없게 되는 건가.


차창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풍경은 지워지겠지. 빠른 속도에 비례해 주변의 경치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마을과 주민을 따뜻하게 느끼는 관광객들은 여행의 과정을 잃겠지. 애월읍을 떠나 15분 만에 제주시에 도착하겠지. 제주 고유의 풍경을 지우고 높게 올라간 빌딩의 한 커피숍에서 서울에서 마신 커피를 똑같이 마시며 제주도에 온 사실조차 잊곤 하겠지. 옛길보다 높고 넓으며 빠른 아스팔트를 내달리며 제주의 결은 느낄 수 없을 테니까.


뜻밖에 주민들은 신설도로를 반긴다고 한다. 결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주민과 마을은 아직 따뜻한데, 제주시까지 고작 10분 앞당기건만, 도로가 생기면 땅값이 오를 것으로 주민들은 기대한다는 거다. 땅값이 오르면 왜 좋아해야 하나. 팔고 떠날 게 아니라면 오히려 부담이 늘어날 텐데, 무슨 환상일까. 감귤밭을 키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것이다. 빠르게 다가왔다 서둘러 빠져나가는 외지인들이 오순도순 마음 맞추던 마을을 투기 목적으로 소유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주민들은 소외될 텐데.


관광객이 많은 시기에도 그리 붐비지 않은 중산간의 도로를 직선으로 새로 만들면 기존 도로는 어찌 될까. 마을과 주민 사이를 잇는 만큼 없애진 않겠지만 관리가 소홀해질 게 틀림없다. 벚나무 가로수도 서서히 제 모습을 잃어가겠지. 아스팔트가 패여도 바로 수선하지 않겠지. 사실 급한 일 드문 주민들은 시간 제주까지 10분 단축하는 도로를 요구하지 않았다. 예산과 그 예산을 집행할 부서가 있으니 도로를 만든 게 아닌가. 연구소 개소식에 참석한 이들은 저급한 행정이라 비웃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골프가방 챙기는 이에게 환영받을 4차선 도로는 제주도 경제에 기여하는 바 크지 않을 것이다. 골프장 업주의 이익에 반비례할지 모른다. 제주도의 경치에 취하며 천천히 움직이는 관광객이라면 차에서 내려 지역의 맛이 담긴 밥도 사먹고 특산 농산물도 구입하겠지만,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도로는 관광객을 내려놓지 못한다. 추억을 품지 못하니 다시 찾을 마음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제주도뿐이 아니다. 섬진강을 지나 지리산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던 도로도 고속도로처럼 확장되었다.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짓누르고 달리는 도로에서 사람들은 섬진강도 지리산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해 일 마치자마자 떠나는 자동차 전용도로는 사고위험을 높인다. 접촉사고로 그치지 않는다. 여행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 도로는 운전자와 동승자를 위협한다.


깎아지른 절벽에 만든 해안의 도로는 자동차 광고와 달리 속도를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중간에 쉴 자리를 만들어 풍경을 담아두도록 배려한다. 그래야 운전자와 동승자는 기념품도 구입하며 지역에 돈을 풀어놓는다. 해안도로가 반드시 해안만 누비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근사해도 해안을 하염없이 지나가면 경치를 만끽하기 어렵다. 지나쳐 아쉬운 해안을 다음 굽이에서 만나야 차에서 내리고 싶어질 것인데, 직선도로는 그런 여유를 방해한다.


중산간에 산업도로가 필요 없는 제주도는 왕벚나무의 자생지다. 일본의 국화 벚나무는 제주도의 왕벚나무와 산벚나무의 잡종으로 알려져 있다. 애월읍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심은 가로수가 왕벚나무인지 알지 못하지만, 검은 현무암과 화사한 벚꽃은 올레와 어우러지는 이른 봄 매화와 더불어 찾는 이의 뇌리에 깊게 자리할 것으로 보인다. 노란 유채도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지만 해안에서 한라산으로 이어지며 아열대에서 아한대 기후를 펼치는 제주도에서 빼어난 풍광은 일일이 손꼽을 수 없다.


제주시까지 15분 만에 도착한 애월읍 주민들은 남는 시간에 일을 더 해야 한다. 땅값이 오른 만큼 재산세가 더 나온다. 인심도 사나워질 것이다. 남의 땅에서 농사짓는 농부는 농산물을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빨라진 도로는 그만큼 사람들의 여유를 빼앗는다. 여가는 여유로운 마음에서 우러난다. 여가를 위해 찾은 관광객을 빠르게 이동시키는 도로는 이율배반이다. 도로 건설업체나 골프장 사업자를 위한 행정이 아니라면 제주도 중산간의 고즈넉함을 짓밟은 도로는 지금이라도 중단하는 게 옳다. 주민의 삶과 관광객의 여유를 부정하므로. (작은책, 2014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