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4. 3. 9. 12:20

우리들 고교 스승이셨던 지창희선생님은 교사의 명예로운 정년을 마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고 지창희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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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초, 고교 수업 첫 시간에 우리 반의 교실 문을 밀고 들어오신 선생님은, 자못 긴장된 표정으로 신입생 겁주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한결같은 선배들의 소식통으로부터 어느 정도 들어 짐작하고 있었던 지창희 아니 꼬챙이선생님이셨다. 꼬챙이? 바싹 마르셔서 꼬챙이일까? 하여튼 여간 무서운 것이 아니시라는데 중학교 때 수학이란 과목만 빼고는 다 잘했다는 평을 듣던 나는 첫 수업 벨이 울리자마자 침을 꼴깍 삼켜야 했고 문이 드르륵 열리자 눈을 감아야 했다.

60여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들어오신 선생님은 별명이 의미하는 바와는 달리 전혀 마른 분이 아니셨다. 배부터 밀고 들어오시는 선생님을 어찌 꼬챙이라 했을까? 수학을 담당하시는 선생님께서 문제를 푸실 때 일일이 지적하며 설명하기 좋고, 원과 선을 바르게 그리기 용이하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멍청한 모습으로 허공을 자주 헤매는 필자와 같은 둔쟁이 학생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한동안은 따끔할 만큼의 강렬한 자극을 엉덩이나 손바닥에 지체없이 전달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가느다란 지시봉, 즉 꼬챙이를 반드시 들고 다니시므로 붙여진 역사적 별명이란 것을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지만 뾰족한 지시봉을 놓지 않고 들고 다니시게 된 동기가 한번 따라가지 못하면 여간해서 따라잡기 어려운 수학이란 과목을 짜여진 시간의 틀 안에서 60명의 학생에게 모두 전달시키시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나 깨달았다.

결코 너그럽다 할 수 없는 표정으로 오답 투성이의 숙제를 검토하시고 문제 풀이의 오류를 지적하실 때마다 이 둔재는 공포와 긴장이 연속이었으나 다음 학기에 만난 까다로운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가망 없다는 진단을 받지 않고 상급 학년으로 오르게 된 결정적 이유가 선생님께서 애지중지하셨던 바로 그 꼬챙이였다는 것을 1973년 당시의 선생님 나이에 가까이 간 지금의 시점에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영철이, 그러니까 필자의 친구로서 영철이를 만난 것은 도서관에서였다. 이 둔재를 향한 선생님의 가열찬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다가오지 않던 수학 문제를 영철이에게 물어 해결해야 했다. 고1 무렵까지 키도 작았고 변성도 마무리 안된 영철이지만 내겐 공포로 다가왔던 꼬챙이 교감(交感)으로부터 다소나마 해방시켜 주었던 은인이었다. 아뿔싸 그런데 그 영철이가 지창희선생님의 아들이라니! 수학 실력도 부전자전이구나! 자신은 수학을 꽤 잘 했었노라고 아직도 주장하는 필자 아버지의 실력을 나는 그때부터 의심해야 했다.

지창희선생님께서 제물포 고등학교에서 공기 좋은 가평의 한 학교로 전근 가시고 대학생이 된 영철이와 우리는 인사도 드릴 겸, 놀 겸 찾아뵈러 갔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는 그렇게 애지중지 하시던 꼬챙이를 전혀 들지 않으신다 한다. 비록 친구의 아버님이시지만 아직도 어렵기만 한 은사님에게 직접 여쭙지 못하고 영철이에게 간접적으로 물었더니 제물포 고등학교 수학 선생 시절, 골치 썩히며 만났던 녀석들에게 효험이 그만이었던 꼬챙이가 여기에선 효과가 없더라는 것이다. 나와 같은 둔재에게 상당한 교감을 주었던 꼬챙이가 여기에서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않더라는 말씀이셨다. 어쩐지 당당하셨던 어깨에 힘이 보이지 않고 눈매의 날카로움도 무디어진 안타까운 모습이셨다.

강화 중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발령 받아 가셨다는 영철이의 말을 전해 들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지방의 대학으로 시간강사 다닐 적의 일이다. 교화(校花)와 교목(校木) 선정을 위해 조언을 부탁하시는 말씀이셨다. 아! 나도 선생님께 뭔가 도움이 되는 순간이구나!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사했지만 동물이 전공이라서 원하시는 만큼의 도움이 돼 드리지 못했다. 식물 전공 교수에게서 자료를 받아 전해 드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선생님의 장남이자 필자의 선배인 지상철 성균관 대학교 교수가 조촐히 마련된 선생님의 환갑 잔치 석상에서 마이크를 잡고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할 적에 선생님을 뵙고 아직 뵙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는 시간과 성의를 용납하지 않는 것인지 지병이신 고혈압과 당뇨가 저으기 염려된다 말하면서도 안부 인사는커녕 연락도 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친구인 영철이와 전화도 드문드문하던 하루, 영철이는 나의 일상을 환기시켰다. 아버님께서 곧 정년이시라는 것이다.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나름대로 정리한 글을 신문과 잡지에 간간이 투고해 오는 필력으로 선생님을 회고할 만한 주제가 결코 되지 못합니다만 스승의 내리 사랑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며 살아왔던 이제까지의 일상을 사죄 드리는 마음으로 팬을 듭니다. 제 친구인 영철이의 아버님이시자 꼬챙이가 두렵기만 했던 둔쟁이의 준엄한 스승이셨던 선생님! 정년 뒤에도 항상 건강하십시오. 시간을 내서 꼭 찾아 뵙겠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하겠사오니 멀리서나마 꼬챙이의 따끔한 교감을 허락해 주십시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보다 완성된 모습으로 뵈옵기 바라는 아직도 어린 제자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1996.8.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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