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5. 23. 13:06

 

후텁지근한 여름이 시작되었다. 이제 물 사용량이 늘어날 것이다. 사실 일인 당 물 사용량은 전에 없이 늘었다. 그렇다고 시민들의 몸과 마음이 전보다 깨끗해진 건 아니다. 외양이야 더 말할 나위 없이 말끔해졌어도 듣거나 보지 못한 질병이 늘었고 다정한 이웃은 줄어들었다. 개인위생이 나아지는 만큼 수인성 전염병이 줄어 수명은 늘었지만 약에 사람들은 의존해야 하고 도무지 믿고 지낼 이웃을 찾지 못한다. 상하수도는 정비되었지만 생태계의 순환은 엉망이 되었다.

 

한 사람이 하루에 마시는 물은 많아야 5리터다. 마시는 물은 그렇고, 밥 먹고 설거지하며 몸을 씻는데 들어가는 물은 하루에 150리터. 아파트 베란다에서 화초를 가꾸거나 단독주택의 텃밭에 푸성귀를 심는다면 그만큼 더 들어가겠지. 참고로, 집 앞 잔디밭에 물을 뿌려 관리하지 않으면 벌금을 무는 미국인은 하루에 400리터의 물을 사용한다고 한다. 한데, 사람이 직접 쓰는 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하자원을 채굴, 운송, 가공, 폐기하는데 요구되는 물을 포함해 우리가 입고 먹는 농축산물을 기르고 가공, 폐기하는데 물이 많이 들어간다. 한 사람이 일 년에 1톤의 물을 마신다면 생활용수는 많아야 100톤이지만 농수축산물에 들어가는 물은 2000톤으로 올림픽 규격 수영장 절반을 채울 정도라고 한다.

 

지구에는 14억㎦에 달하는 물이 있지만 그 중 97퍼센트는 바다에 있고 육지의 3분의2는 빙하로 얼어붙었다. 남은 민물의 대부분은 지하 암석의 대수층에 있으니 사람이 활용할 수 있는 물은 고작 20만㎦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구의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몸을 구성하는 물이 1000㎦이므로 그 정도면 넘친다. 문제는 강, 호수, 낮은 지하수, 그리고 음식에 포함된 물이 제한돼 있다는 거다. 어떤 지역은 물이 넘쳐 문젠데 갈증에 시달리는 곳도 많다. 물은 무겁다. 먼 곳에서 담아오기 어렵다. 물이 부족한 지역이라면 인구가 원래 드물었는데 요즘은 아니다. 크고 작은 송수관이 물을 끌어들이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포항제철이 영천댐에서 물을 받자 금호강은 바싹 말랐다. 갈수기가 되면 공업단지와 농업단지에서 흘러든 물로 주민들은 악취로 고통을 받는다. 물을 재활용하면 금호강은 다시 맑아지겠지만 영천댐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비용이 더 적다며 재활용에 투자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 계산이 잘 못 되었다. 자연이 받는 피해, 맑은 하천에서 누릴 시민과 후손의 권리, 금호강이 말라붙어 발생하는 숱한 문제들은 계산에 넣지 않은 게 분명하지만, 국가 기간산업의 이익을 위해 감내하란다. 그 이익은 자연과 주민과 후손이 입는 피해를 보상하지 않기에 발생할 수 있다.

 

아파트로 뒤덮인 도시는 어떤가. 냉온수가 완비된 부엌과 화장실은 물론이고 앞뒤 베란다의 꼭지를 돌리면 팔당댐의 인공호수에 모여든 물을 쉽게 받아 쓸 수 있는 수도권의 시민들은 상수원 보호를 위해 겪는 주민들의 고통에서 대체로 절연되었다. 북청물장수에게 의지했을 때 몸에 밴 절약 습관은 틀면 쏟아지는 사워 물에 흔적도 없이 씻겨나갔다. 성냥갑 같은 판상형이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탑상형이든, 도시의 아파트는 물이 사흘만 나오지 않으면 피난가야 한다. 싱크대에 쌓인 그릇만이 아니다. 화장실마다 악취가 진동하니 도저히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는다면? 천재지변이나 전쟁, 즉각 대비할 수 없는 사고로 중앙 공급체제가 무너지면, 아파트는 그 순간 사람 살 수 없는 곳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우리는 석유와 달리 물은 수입하지 않는다. ‘물 부족 국가’라는 ‘4대강 사업’ 주체의 터무니없이 낡은 주장과 관계없이 상하수도 관리가 거의 완벽한 우리나라는 현재 일부 도서와 산간지방을 제외하고 사용하는 물이 전혀 모자라지 않다. 오히려 16개나 되는 대형 댐으로 흐름이 차단되어 높아지면 4대 강의 물이 오염될 테고, 당연히 높아지는 지하수가 오염돼 마실 물이 부족해질 것으로 수자원 전문가들은 걱정한다. 그땐 물을 수입해야 하나. 한데 우리나라는 이미 막대한 물을 수입한다. 순수한 물이 아니라 식품과 의복을 생산하는데 들어간 ‘가상수’(假想水 virtual water)를 말한다. 가상수를 수입하지 않으면 우리는 먹고 입을 것이 급격히 줄어든다. 양모와 면화의 거의 100퍼센트, 농작물의 4분의3을 가상수와 함께 수입하지 않던가.

 

최근에 번역 출간된 《강의 죽음》에서 프레드 피어스는 ‘물을 아끼자, 목욕은 친구와 함께’라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단지 재미로 사지는 말자고 권한다. 뜻이야 좋지만 티셔츠 한 벌에 들어가는 목화 250그램을 위해 욕조 25개 분량의 물이 요구되기 때문이란다. 힌두쿠시와 톈진 산맥에서 발원하는 거대한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이 오랜 세월 흘러들어 1000㎦의 물을 담았던 아랄 해는 시방 사라질 정도로 황폐해졌다. 아랄 해가 농도가 높은 3개의 소금물 웅덩이로 버림받은 이유는 목화였다. 구소련에서 이른바 ‘인민 목화’를 위해 40년 이상 사막 지역으로 물길을 돌리자 바싹 말라버린 것이다. 경찰의 감시 하에 할당 목표를 채워야 했던 목화도 이제 생산량이 크게 줄었다. 물을 흥건히 뿌려야 재배되던 목화밭이 소금밭으로 변한 까닭이다. 면화 주 생산지인 미국과 인도의 사정도 비슷하다. 면화를 막대하게 수입하는 우리는 유행이 지났다며 멀쩡한 옷을 버리고, 더 많은 옷을 산다.

 

밀 1킬로그램을 생산하려면 1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쌀은 그 두 배에서 다섯 배지만 우리는 수입하지 않는다. 우리 땅의 논은 홍수와 가뭄을 완충하며 지하수위와 고유 생태계를 보전한다. 쇠고기 1킬로그램을 위해 물 2만4천 리터가 필요하고 우유 1리터를 생산하는데 2천 리터 이상의 물이 들어가는데, 우유를 가공하는 치즈는 1킬로그램을 시장에 내놓는데 5천 리터의 물이 요구된다. 소비를 크게 줄일 수 있는 설탕 1킬로그램에 3천 리터의 물이, 커피 1킬로그램에는 2만 리터의 물이 필요한 반면 토스트 한 쪽에 150리터, 햄버거 하나에 3천 리터, 밥 한 그릇에 100리터의 물이 들어간다. 우리가 어떤 식단을 마련하는가에 따라 소비되는 가상수의 양은 제각각이다. 수입보다 자급, 산업농보다 가족농, 화학농보다 유기농, 육식보다 채식이 물 소비를 줄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가상수 수입이 많은 국가에 속하지만 미국은 가상수 최대 수출국이라고 한다. 자연환경에서 얻는 물의 3분의1을 수출할 정도라고 한다. 식량을 수출하는 국가들 덕분에 우리나라는 물이 부족하지 않게 된 걸까. 지금처럼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버릴 수 있는 건 막대한 가상수를 수입할 수 있기 때문일지 모르지만, 지구온난화가 가속되는 지구촌은 석유위기가 목전인데 이런 호사는 언제까지 가능할까. 분명한 것은 4대강과 갯벌이 자연스럽던 시절, 가상수를 거의 수입하지 않아도 우린 먹고사는데 아무 불편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1주일에 한 번은 꼭 목욕하라고 선생님이 당부해도 지키기 어렵던 시절, 우리 강산의 물은 언제나 맑고 풍부했으며, 하늘은 푸르렀고 이웃은 다정다감했다. (작은책, 2010년 7월호)

치즈, 우유마시는 걸 자제해야 할 판이네요 ㅡ.ㅡ;;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5. 14. 15:37

《강의 죽음》, 프레드 피어스 지음, 김정은 옮김, 브렌즈, 2010.

 

청계천의 본 모습은 어떠했을까. 어릴 적 성북동 고모 손잡고 둘러본 청계천의 기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연탄재와 생활쓰레기가 넘쳐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때 성북천은 달랐다. 깨끗하게 철철 흘러 사촌형과 첨벙이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지금 복원을 자랑한다. 청계천처럼 도로로 활용되던 콘크리트 뚜껑을 열어 요란하게 장식한 인공하천이 된 거다. 한양이 도읍이 되자 주위가 개발돼 빗물이 쓰레기를 휩쓸어야 잠시 깨끗해지던 청계천은 그리 먼 시절의 모습이 아닌데, 기억하는 이는 이제 드물다. 인공하천으로 변모한 뒤로 시민들은 원래 알록달록했다고 여길지 모른다.

 

들판 가득 목화로 출렁이던 아랄 해 주변은 ‘세상의 끝’이 어떤 모습인지 을씨년스럽게 보여준다고 《강의 죽음》의 저자 프레드 피어스는 말한다. 힌두쿠시 산맥에서 세차게 흐르는 아무다리야 강과 티안샨 산맥에서 발원하는 시르다라야 강물이 흘러들던 아랄 해는 현재 소금기가 가득한 3개의 물웅덩이로 위축되었고 물도 10분의1에 불과하다. “목화는 먹을 수 없다”며 반대한 우즈베키스탄 총리를 숙청한 1960년대 소련은 과수원과 밀밭은 물론 학교운동장까지 이른바 ‘인민 목화’를 심도록 강요하며 할당된 목표를 감시했다.

 

아랄 해 주변의 목화밭은 이제 소금밭이 되었다. 척박하고 건조한 지역에 두 배의 물을 뿌리자 소금이 드러났고, 소금기 제거를 위해 더 많은 물을 뿌려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지만, 작황이 줄면서 국영농장의 ‘인민 목화’는 대부분 파산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농경사회였던 카라칼파크스탄 자치공화국은 그만 가난이 질병처럼 퍼졌다. 소금기 넘치는 관개수는 마실 수 없고 지하수는 고갈됐다. 말라붙은 아랄 해에서 이는 흙먼지에 농약 성분이 섞여 어린이의 폐를 공격하고, 아기들이 엄마 젖을 거부할 정도로 소금기가 만연되었다. 여성의 97%가 빈혈이라 87%의 신생아가 빈혈로 태어나는데, 그 중 5%는 기형이다.

 

연간 4만 톤이 넘는 철갑상어와 민물도미 들을 잡았던 아랄 해가 바싹 마른 직접적인 원인은 주변의 목화 재배보다 운하였다. 너비 1㎞에 달하는 카라쿰 운하가 1300㎢ 서쪽의 투르크메니스탄으로 500㎦의 물을 40년 동안 옮기자 그만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인데, 1인당 물 소비량이 세계 2위인 우즈베키스탄보다 두 배 이상의 물을 소비하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실태는 어떤가. 요일 이름을 자신 가족 이름으로 바꾸고 스스로 ‘쿠루크 인의 아버지’라 칭하는 독재자 니야조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모방한 인공 강을 사막에 만들어 호수와 분수를 내뿜게 한다는 게 아닌가.

 

스스로 낙천주의자라고 말하는 프레드 피어스는 영국에서 출발해 파키스탄과 인도로, 리비아와 이란과 팔레스타인으로, 캄보디아와 중국으로, 구소련 지역과 미국으로, 강의 죽음을 기록하는 여정을 떠났고, 근 10년 만에 《강의 죽음》을 탈고했다. 탐욕이 빚은 개발이 강을 어떻게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취재하고, 그 비참한 역사와 현실을 독자에게 알려야 했던 것이다. 한계를 드러내는 순간 개발의 고삐를 더욱 조이려는 탐욕의 망상에서 벗어나야 후손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한 사람이 마시는 물은 1년에 1톤 남짓, 생활용수는 대략 100톤이면 충분하지만 입고 먹는 농작물이나 가축을 기르는데 들어가는 물은 2000톤에 이른다. 국제 규격 수영장을 절반 채울 정도다. 그 물은 어디에서 올까. 분명한 건, 개개인은 분명 그렇게 많은 물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프레드 피어스는 ‘가상수(virtual water)’ 개념을 빌린다. 밀 1킬로그램을 생산하는데 1000리터, 같은 양의 쌀은 그 다섯 배, 감자는 절반, 우유는 4배, 치즈는 5배, 소고기는 24배 들어가고 커피는 20배가 필요하니, 우리가 식료품점에서 사오는 건 결국 물인 셈이라고 해석한다. 날마다 자기 체중의 100배의 물을 소비하는 서구식 식생활의 폐해는 가상수의 수출입과 무관하지 않다. “물을 아끼자, 목욕은 친구와 함께”라는 문구가 달린 티셔츠라도 충동적으로 사지 말아야 할 이유는 가상수다. 티셔츠 하나에 들어가는 목화를 위해 욕조 25개의 물이 소비된다는 게 아닌가.

 

가상수 수출입으로 챙길 탐욕 때문에 황폐되어가는 현장을 둘러보자. 강과 지하수에서 얻는 물의 70%로 세계 식량의 3분의1을 재배하는데, 대부분 엄청난 물을 요구하는 고수확 품종으로, 녹색혁명이 창조한 종자다. 그런 종자는 유전적 다양성의 폭이 아주 좁아 물이 부족하면 수확이 형편없이 줄게 된다. 이집트는 영국의 5배, 멕시코는 덴마크의 5배나 많은 물이 필요해 강이 마르고 지하수가 고갈되는 이유가 다 그렇다. 물 한 방을 내리지 않는 사막에 목화와 밀을 위해 히말라야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인더스 강을 댐으로 막았더니 얼마 안 가 농경지에 소금이 올라왔다. 파키스탄 이야기다. 미국 텍사스에서 빌리는 물로 미국에 수출하는 목화와 미국 소가 먹을 알팔파를 재배하는 건, 미국에 물을 내주는 일과 다르지 않다. 덕분에 농작물이 풍족했던 멕시코 주민들은 굶주리게 되었다.

 

달팽이처럼 느리게 순환하는 지하수를 고갈시키는 현장도 수두룩하다. 녹색혁명이 요구하는 물을 위해 해마다 양수기가 100만대 씩 늘어나는 인도는 지하수위가 점점 내려가고 우물은 고갈되며 농사는 더욱 힘겨워진다. 수천 명의 농부를 자살하게 한 녹색혁명은 엉뚱하게 지하수 업자를 낳게 했다. 농사 대신 지하수를 퍼올려 이웃 농장이나 공장에 팔아먹는 장사다. 그 때문에 물은 더욱 고갈되고 오염되지만, 누구라도 그 짓을 할 거라며 죄의식이 없다. 부도로 사라진 동아건설도 떠들썩하게 참여했던 리비아 대수로의 실태는 어떤가. 100만 년도 넘을 지하수를 수백 개의 시추공으로 500미터를 뚫어 3500㎞ 옮기는 대수로 공사는 270억 달러를 삼켰지만 밀은 사막에서 자급되지 않았다. 막대한 자금을 밑 빠진 독에 더 붓지 않는다면 수로는 녹이 슨 채 갈라져 흉물처럼 방치될 거로 프레드 피어스는 예상한다. 미국 남서부 목장지대, 오갈랄라 대수층의 실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습지가 사라져 생태계와 삶이 망가진 아프리카 차드 호의 비극은 댐이 원인을 제공했다. 주기적인 홍수가 범람원을 적시지 못하자 발생한 그와 같은 일은 캄보디아의 메콩 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나친 개발로 거대했던 물길을 아예 잃은 중국의 황하 강은 교훈이 되지 못했다. 중국은 양자 강을 산샤 댐으로 막은 것인데, 앞으로 그 운명은 어떻게 될지. 산샤 댐의 막대한 물을 공장이 많은 북쪽으로 옮기려는 중국의 ‘남수복조’ 계획의 뒷모습은 어떨지. 천문학적 예산은 권력자의 탐욕에 멸사봉공하겠지만 후손은 재앙을 물려받을지 모른다. 장마철 이후에 장대비가 국지성으로 쏟아지는 우리나라의 기상이변도 산샤 댐과 무관할까. 물길의 변형 때문에 벌어지는 전쟁도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문호이자 외교관이던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은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 고 했는데, 프레드 피어스의 《강의 죽음》은 탐욕이 이끄는 현대 문명의 묵시록이다. 그는 한국어판 서문에 ‘4대강 사업’은 강을 파괴하는 것이지 살리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하면서 “자연의 요구에 순응할 때 강 살리기는 성공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강의 죽음》은 ‘4대강 사업’의 뒷모습도 조명한다. 낙천주의자 프레드 피어스는 공사를 당장 그만둔다면 후손의 삶이 보전되리라 조언하는 것이다. (불교환경, 2010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