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7. 3. 1. 16:22


왼쪽 다리를 다쳐 한동안 술을 자제해야 했다. 내린 눈이 단단히 얼어붙은 날이지만 노안 때문이었다. 회의 시간을 맞춰 서둘러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는데 발을 헛디딘 느낌이 들었다. 짧은 순간 휴대폰을 쥔 오른손이 난간을 거부했고 가방을 맨 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장갑을 낀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지면 생길 귀찮은 일이 오른손을 주저하게 만들었고, 계단 모서리에 찍히고 미끄러진 정강이는 견디기 어려운 통증을 한동안 감수해야 했다.


하루 만보를 걸으려 노력한지 10년이 넘으면서 다리에 근육이 붙었나보다. 흐르는 피를 일회용반창고로 막은 채 만보를 채우고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는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안심시킨다. 눈 때문에 넘어진 거로 짐작한 의사는 노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르는데, 그도 눈길에 넘어진다면 휴대폰을 놓치지 않을 테지. 얽히고설킨 인간세상에서 휴대폰이 없는 자신을 상상하기 싫을지 모른다. 언제부터 휴대폰이 우리를 지배한 걸까?


입춘이 지났으니 곧 봄이다. 뒷골목의 눈이 대부분 녹자 꽃소식이 남녘에서 올라온다. 복수초에 이어 동백이 꽃봉오리를 펼치더니 매화가 봄을 재촉한다고 한다. 아직 꿀벌이 활동하는 계절은 아니다. 남도의 동백은 어여쁜 동박새가 꽃가루를 옮길 텐데 잔설을 뚫고 올라오는 복수초는 누가 꽃가루를 수정할까? 살을 에는 찬바람이 맡아주려나? 매화를 이을 산수유와 진달래는 꿀벌이 있어야 한다. 햇살이 곧 따사로울 터. 벌집 속의 꿀벌들이 기지개를 펴겠지. 계절은 3월에 시작된다. 그래서 그런가. 영어로 3월은 march. 시작이란 뜻이다.


3월인데, 꿀벌이 보이지 않는다. 없는 건 아니다. 근린공원이 아니면 꽃을 드문 도시에 꿀벌이 많지 않지만 요즘처럼 통 보이지 않는데, 그 정도가 해마다 심해진다. 우리나라만의 사정은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은 멀쩡한 벌통을 두고 돌아오지 않는 이른바 꿀벌집단붕괴현상이 발생해 걱정이 태산이다. 곰팡이와 천적을 물리치는 농약이 독성을 강화하면서 발생한 현상이라는데, 우리나라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애벌레가 썩는 낭충봉아부패병이 심각하다.


꿀벌이 사라지면 인간은 4년을 버틸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경고는 아니라지만, 그가 편집에 관여하는 학술잡지에 실렸다니 의미가 있을 것이다. 꿀벌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고, 꿀벌 아니라도 과일이나 화훼의 꽃가루를 수정하는 생물이 있지만, 꿀벌처럼 완벽한 생물은 지구상에 없다. 꽃가루 수정 없이 열리는 곡식도 있고 사육이나 사냥으로 구할 고기도 많지만 꿀벌이 없으면 사람은 생존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꿀벌이 없던 북미원주민처럼 사냥하며 살게 아니라면 꿀벌은 인류의 필수 비빌언덕인데, 우리는 도무지 긴장하지 않는다.


꿀벌이 사라지는 이유가 농약뿐일까? 농약을 없으면 안 될 상황을 만든 이유를 찾고 대안을 모색해야 할 텐데, 농약 이외의 원인에 의혹을 거두지 못하는 시선도 엄존한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휴대폰 전자파가 그 의혹이다. 미국을 비롯해 중남미의 농토에 광범위하게 심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어떤 성분이 꿀벌의 생태와 습성을 교란한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모르지 않지만 막강한 권력과 자본을 가진 관련 다국적기업이 인과관계를 얌전하게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지배하는 다국적기업보다 규모가 큰 휴대폰 관련 기업은 순순히 인과관계를 인정할까? 담배와 건강의 상관관계도 밝혀내기 어려웠는데.


수 십 가지 농화학물질에 찌들은 꿀벌에 새로 도입한 농약이 치명적이라는 주장은 그 농약을 개발한 기업을 발끈하게 만들었다는데, 문제의 농약이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휴대폰 기지국의 전자파가 주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과학적으로 인과관계를 밝히기 무척 어렵기 때문이라기보다 연구 자체를 억압하는 모종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리라. 어떤 과학자가 감히 막강한 다국적기업에 도전할 수 있으랴.


만약,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휴대폰 전자파가 꿀벌의 집단붕괴현상과 직접이든 간접이든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다면, 다국적기업은 순순히 인정하고 대안 모색에 동의할까? 담배의 경우를 미루어 기대하기 어려운데, 소비자는 스스로 대안행동에 나설까? 다시 말해,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회피하고 휴대폰 사용을 자제할 용의가 있을까? 심각성을 인식하는 일부 소비자는 적극 호응하겠지만,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사료로 사용하는 공장식 축산은 사실을 외면하고 싶을 것 같다. 휴대폰 없으면 멍해지는 이는 어떨지.


우리는 싫든 좋든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휴대폰도 외면하기 어렵다. 자본이 제공하는 편의를 질문 없이 받아들이면서 늪에 빠졌다. 그러자 꿀벌이 사라진다. 자동차 없는 세상을 꿈꿀 수 있는가? 아스팔트에서 퍼지는 미세먼지가 보행자는 물론아고 운전자의 호흡기까지 위협하는데? 전기를 사용하지 않을 용의가 있는가? 핵발전소가 폭발하여 해산물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데? 화력발전소에서 배출하는 초미세먼지는 웬만한 마스크로 거를 수 없는데? 화석연료 과다사용으로 심화되는 기상이변은 우리의 삶을 언제 파괴할지 모르는데?


불과 100년도 못돼 나타난 현상들이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며 세상에 등장한지 길게 봐 10만 년이라면, 대부분의 기간은 자연과 어우러지며 살았다. 인간의 몸은 그렇게 적응되었건만 과학기술을 앞세워 교만해졌다. 하지만 그게 부메랑일 줄이야. 인간에 의해 오랜 균형을 잃어가는 지구는 태풍과 지진으로 응대한다. 대자연의 작은 변동에도 속수무책인 인간은 오늘도 부메랑을 던진다. 더 큰 부메랑으로 먼저 던진 부메랑을 막으려 든다.


꿀벌이 사라지는 현상은 작은 경고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흔히 지구촌이라 말하는 우리는 고래가 죽을 정도로 비닐과 플라스틱을 버렸고, 해안과 강변을 개발해 지구의 생태적 순환을 방해했다. 이제 자연은 복원력을 잃어간다. 지구는 하나의 생명체, ‘가이아라고 말한다. 인간에 의해 자신의 균형을 잃은 가이아는 본격적으로 몸부림칠지 모르는데, 계절이 시작되는 3, 우리에게 허락된 행동은 무엇일까? 부메랑을 잡는 일일까? (작은책, 2017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