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7. 11. 15. 12:46

 

     지난 11월 13일, MBC ‘PD수첩’은 색다른 방송을 보여주었다. 전라남도 나주시의 한 천주교 기도원에 있는 피눈물 흘리는 성모상이 22년 동안 많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허위사실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아니 가톨릭도? 어처구니없었다. 교주 역할을 자임하며 치부하는 신자가 가톨릭에도 있다니.

 

“종교를 빙자한 사기행각”으로 규탄한 네티즌들과 더불어 그 성모상을 100일 동안 지켜본 한 신부가 기적의 가능성을 전면 부정해 다행이었는데, 가톨릭 이외의 종교였다면 어떤 반응이 이어졌을까. 우리는 길거리에 흩어진 부흥회 전단을 보곤 한다. 기독교를 내세우는 어떤 목사나 부흥사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내용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려니 하고, 기독교계는 물론, 어떤 네티즌도 전단의 사실 여부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번 방송엔 달랐다. 가톨릭에 대한 세간의 신뢰를 엿보이게 했다.

 

종교(宗敎)는 가르침의 으뜸이자 근본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에서 큰 가르침을 받는다. 이천년 전, 청년 예수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울림이 큰 가르침을 주었고, 그 가르침은 종교가 되었다. 예수만이 아니다. 붓다나 마호메트도 종교로 이끈 가르침을 주었다. 우리는 종교에서 가르침을 구한다. 가르침이 없거나 함량미달일 경우 우리는 종교라 말하지 않는다. 황당무계한 교리를 들고 나오는 경우 우리는 ‘사이비’라는 단어를 그들이 주장하는 종교의 이름 앞에 붙인다. 인간복제를 찬양하는 라엘리언무브먼트도 그런 사이비 종교 중의 하나일 것이다.

 

황우석 전 교수는 사실상 사이비 종교의 교주였다. 과학기술의 근본 한계가 분명한데도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해주겠다고 황우석 전 교수가 외칠 때, 많은 시민들은 할렐루야를 복창했다. 사기극이 들어났을 때, 98대2라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준 98퍼센트의 시민들은 속속 드러나는 증거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아직 그 사이비 종교는 불씨를 남기고 있다. 아직도 가끔 부흥회를 연다. 구호는 애국이다. 태극기를 온몸에 휘감고 황우석의 재림을 갈구하며 여성의 몸과 후손의 생명 착취를 정당화하려 든다.

 

배아복제 연구의 부당성을 제기하는 시민운동에 어렵사리 나설 적에 가톨릭은 활동가에게 적지 않은 힘이 돼 주었다. 교리 이외에도 과학적 논리를 정연하게 제시하여 지친 활동가를 격려했다. 하지만 한계도 보여주었다. 황우석 사태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야 할 가톨릭 신자, 배아복제 연구의 다른 한 축을 담당했던 당시 마리아생명공학연구소의 박세필 박사에게 관대했던 것이다. 사람의 배아줄기세포를 쥐 수정란과 섞은 행위를 자신의 연구 성과로 내세우는 박세필 박사는 가톨릭 신자임을 새삼 강조했건만, 가톨릭은 무응답으로 대응한 것이다.

 

우리는 현재 예수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을까. 청년 예수는 성전 앞에서 부당한 거래를 일삼는 모리배에 채찍을 휘둘렀는데, 우리는 그 채찍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요사이의 사이비 종교는 단연 경제다. 민주주의의 반대가 독재였을 시절, 우리는 싸워야 할 대상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때 가톨릭은 행동했다. 『겅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민주주의의 반대를 ‘경제성장’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성장에 모든 이론과 행동이 종속되어야 하는 요즘,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분명하지 않다. 적은 내 안에도 있다. 그럴 즈음, 생명공학은 윤리적 정당성마저 찬탈한다. 교활하게도 경제와 부가가치를 내세우는 것이다.

 

서울시 중견 사제에게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관련된 생명공학의 문제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황우석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나는 가톨릭 신자도 아닌 주제를 잠시 잊고 박세필 박사를 파문시켜야 한다고 감히 주장했다. 하지만, 남양주시의 연수원에 모인 신부님들은 자못 비장한 비신도의 진지한 제안을 점잖은 웃음으로 받아넘겼고, 나는 그만 개그맨이 되었다. 강의를 마치고 나무가 우거진 연수원을 참담한 기분으로 빠져나가는데 문이 반쯤 열린 신부님 숙소에 골프가방이 보인다. 골프와 배아줄기세포 연구 반대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신부님들은 아실까. 박세필 박사는 현재 제주대학교 교수다. 제2 제3의 황우석은 계속될 분위기다.

 

최근 출간된 『바야돌리드 논쟁』을 읽었다. 16세기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에서 벌어진 도미니크 수도회의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수사와 히네스 데 세풀베다 신학자 사이의 역사적인 논쟁을 소설 형식으로 각색한 책 『바야돌리드 논쟁』은 전해오는 기록을 근거로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썼고 이세욱이 번역해 샘터에서 얼마 전에 출간했다.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격적 권리를 놓고 노회한 신학자와 성마른 수사가 닷새 동안 치룬 격론, 지금은 그런 논쟁은 재현되지 못한다. 논쟁을 진행한 추기경이 인디오의 인격을 존중하기로 결론을 낸 것으로 소설은 그리는데, 저자는 추기경이 노예가 필요한 백인의 실리적 목적도 채워주었다는 걸 암시한다. 아프리카의 흑인의 인격을 무시했던 것이다. 지금의 가톨릭은 어떤가.

 

자칭 중산층이 밀집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훨씬 전에 문을 연 성당은 날이 갈수록 교세가 확장된다. 한적한 농촌이던 시절의 성당은 민중의 이해와 함께했고 소외되는 자의 희로애락을 끌어안았는데, 중산층 신자로 둘러싸인 요즘, 성당은 세상의 고통과 절연된 모습을 보여 가끔씩 맥이 빠진다. 가톨릭을 둘러싼 현실은 경제성장이라는 사이비 교리에 젖어 가난한 이와 여성과 후손의 생명이 착취되고 기후변화 앞에 생태계의 운명은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건만, 비신자는 느끼는 가톨릭의 목소리는 청년 예수와 거리가 있다. 마루 종(宗) 자를 쓰는 가르침, 가톨릭이라는 宗敎의 존재 이유에 충실하지 못하다.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종교는 경제성장에 종속될 리 없는데.

 

그래도 가톨릭이라는 종교에 아직 믿음을 가진다. 황우석 사태 때 일관되게 보여준 자세와 나주의 성모상에 반응한 모습에서 신뢰를 놓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작더라도 제 목소리를 잃지 않은 신부님과 신자들이 많기에 든든하다. 경제성장을 되뇌는 대통령 후보들을 목소리를 높이는 이때, 가톨릭의 존재 이유에 계속 기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 없다. (지금여기, 2007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