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6. 1. 00:56

 

《강은 살아있다》, 최병성 지음, 황소걸음, 2010.

 

 

시내가 맑은 시골의 목사 집안에서 형제가 겪는 갈등과 우애를 감동으로 그린 1992년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초보 목사 최병성을 영월의 서강으로 인도했다. 그런데 영월 댐 반대운동으로 알려진 동강과 달리 한적했던 서강이 그의 인생을 바꿀 줄이야. 서강을 더럽히려는 쓰레기매립장이 이끈 그의 행동은 이제 4대강으로 이어지고 있다. 심성이 고와 더욱 뜨거운 그이는 지금 현장에서 목회를 펼친다.

 

최병성, 그는 목사보다 파워 블로거나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열혈 환경운동가로 흔히 소개된다. 그도 그럴 것이 문제가 발생하면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고 주민을 만나며 면밀한 자료조사로 본질을 명민하게 파악한 글을 네티즌과 뜨겁게 나누지 않던가.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이어지는 집회와 시위의 현장, 그리고 토론회에 빠짐없이 참석해 문제의 근원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러므로 파워 블로거이자 환경운동가 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생생하게 전하는 것이리라. 상처받는 자연과 이웃에서 하느님의 고통과 신음을 듣기에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리라.

 

밤이면 소곤거리는 여울물 소리를 듣고 청아한 산새 소리에 새벽을 열던 최병성은 《강은 살아있다》를 썼다. 아니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름치, 돌상어, 꾸구리 들을 구별할 줄 알게 되고 그들이 언제 어디에 알을 낳고 어떻게 자연에서 어우러지는지 이해하면서 새삼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며 영성을 키워온 그는 4대강이 오로지 인간의 탐욕에 의해 스러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만은 없었던 거다. 가증스럽게도 우리 생명을 이어주는 자연까지 파괴하면서 “살리기”라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목회자는 언어가 뒤집히는 세상을 바로 잡아야 했다. 진실을 알려야 했다.

 

사람들은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달라”고 갈구한다. 단순한 수로에 평화를 희구할 리 없다. 삶과 문화와 역사를 품어온 강은 자체로 살아 있기에, 우리는 강과 같은 평화를 기원할 게다. 한데 알량한 기술을 앞세우는 인간은 강을 함부로 변형시킨다. 자원이라며 동식물을 잡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강물을 끌어들여 농사지으며 도시를 넓히더니 댐과 제방으로 가로막아 강물을 독차지하는 만행을 저질러왔다. 그러자 극복할 수 없는 재앙이 거듭되었고, 견딜 수 없던 인간은 강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직선으로 좁혀 챙긴 강폭을 우리보다 먼저 개발한 국가들은 개발비를 훨씬 초과하는 비용을 감당하면서도 복원하려 한다. 그러지 않으면 후손의 삶이 돌이킬 수 없게 황폐해질 게 분명한 까닭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방 생태계의 모태인 강의 모래와 자갈까지 마구 긁어내고 있다. ‘강 살리기’는 진정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 최병성은 독일의 이자강을 주목한다. 콘크리트로 강폭을 좁혀 수로를 만들자 홍수와 지하수 고갈이 빈발했고, 결국 거액의 예산을 순차적으로 들여 넓은 강폭을 확보하고 그 자리에 모래와 자갈을 다시 깔았다는 거다. 그러자 물이 깨끗해진 이자강은 평소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고 범람할 때 피해를 완충하기 시작했다는 게 아닌가.

 

이자강만이 아니다. 스위스의 투어강, 미국 플로리다의 에버글레이즈습지도 그랬다. 죽어가던 우리의 울산시 태화강도 콘크리트 구조물을 철거하자 잃었던 건강을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광주를 짓밟은 5공화국의 수장이 ‘필생의 사업’이라던 한강종합개발로 사라진 모래무지가 밤섬에 다시 나타난 건 모래가 자연스럽게 쌓인 까닭이다. 수중보를 헐어내 모래밭을 재현한다면 완전하지 않더라도 한강은 어느 정도는 제 모습을 회복하리라 최병성은 믿는다. 그렇듯 강은 자연성을 회복해야 건강을 비로소 되찾을 수 있다. 수천억을 들여 요란스레 단장한 청계천을 백억 넘는 비용으로 유지해도 복원과 거리가 멀다. 거짓말로 점철되는 4대강도 마찬가지다.

 

4대강 사업으로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중고등학교 시절보다 일찍 시작한 입시교육으로 청춘이 망가진 이 땅의 젊은이에게 권할 자리인가. 4대강 사업에 들어갈 22조 원은 어떤 예산을 잠식하던가. 22조 원이면 충분하기나 한가. 교량 보강, 도시가스관 이전, 취수장 개보수, 수자원공사가 억지로 떠맡은 비용에 대한 이자, 주변 막개발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 개발 이후 빈발할 풍수해 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물 부족 국가’인 우리나라는 반복되는 홍수와 가뭄을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고? 《강은 살아있다》를 들여다보자. 우리가 ‘물 부족 국가’라는 신화의 출처는 《강은 살아있다》로 신뢰를 잃는다. 강바닥을 배가 다닐 수 있게 긁어낸 후 대형 보로 흐름을 틀어막으면 썩은 채 늘어나는 물은 식수대란을 부를 것이다. 그뿐인가. 문화재를 파괴하는 4대강 사업은 역사를 지울 태세다.

 

성경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야 강과 바다가 함께 살아난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이다. 뭇 생명들이 자연에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창조주의 영광을 재현하는 거라 믿는 최병성은 자라와 꼬마물떼새가 알을 낳고 노랑부리저어새와 백조가 찾는 강을 보존해야하기에 《강은 살아있다》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펴냈다. 이론으로 무장된 전문가의 분노와 다르게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다시금 상식을 확인시켜주는 《강은 살아있다》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독자에게 행동의 정당성을 쉽게 인식시킨다.

 

4대강 사업의 현장에서 몸을 떨었던 신경림 시인은 행동하지 않으면 천벌을 피할 수 없다고 애통해했다. 4대강 사업은 시인의 영감마저 파괴할 텐데, 쉼없는 중장비가 4대강의 생명을 밤낮없이 뜯어내는 이때 우리는 더는 머뭇거릴 수 없다. 남한강가에 여강선원을 연 수경스님은 《강은 살아있다》 첫머리에서 최병성을 젊은 도반으로 소개했다. 지난 5월 25일 조계사 일주문 앞의 ‘서울선원 개원식’에서 눈물 젖어 기도하던 수경스님이 동구까지 배웅하는 마음으로 추천한 《강은 살아있다》는 오늘을 이을 내일의 생명을 생각한다. 그 최병성의 《강은 살아있다》, 이 땅에서 자식 키우며 살아갈 우리를 행동으로 이끌 거라는데 아무 의심도 할 수 없다. (우리와다음, 2010년 7-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