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3. 12. 31. 13:30

 

요즘 돋보기가 없으면 의기소침해진다. 배포된 자료를 읽기 어렵고 주고받는 명함의 작은 이름을 식별하지 못해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거기까지다. 돋보기만 있다면 큰 불편함이 없다. 한두 마리였던 왼쪽 눈의 파리가 서너 마리 날지만 오른쪽 눈이 보완해주니 별 문제는 없다. 안경이 없었던 조상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별로 걱정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글자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 그나마 글이 필요 없는 삶이 더 많았으니 안경 따위를 알 필요도 없고, 알았어도 부재에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었겠지.


일본의 어떤 의사가 암 수술 받을 필요 없다는 소신을 펴 우리 언론에 주목을 받은 적 있다. 두어 달 전이다. 그는 암을 진짜와 가짜로 구별했다. 가짜 암은 수술이 필요 없고 진짜 암은 수술해도 소용없다고 했다. 극단적 주장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없으니 암 치료에 진력을 다해온 그 의사의 경험을 반박할 수 없다. 다만 암 진단이 나왔을 때, 수술을 거부할 자신이 있을지 아직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 진단기술이 무척 정교해진 요사이, 건강검진이 일반화하면서 암이 될 가능성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수술이 남발된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멀쩡한 몸에 칼을 댄 뒤부터 허약해진 이가 많다.


대학병원장으로 정년을 마친 어떤 의사는 평생 건강검진을 받지 않았다고 친구들 앞에서 실토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 “무서워서!”였다고. 물론 농담이었겠지만 의사도 무서워하는 암을 어떤 의사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나이 들어 사망하는 원인에서 뇌혈관과 심혈관 질환, 그리고 암이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데, 간병하는 식구 지치게 만드는 뇌혈관이나 유언 남길 틈도 없이 쓰러지는 심혈관 질환보다 남은 삶을 스스로 정리하며 마무리할 수 있게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암 수술을 피할 것이라고 단언한 그는 노환을 지연하게 하는 생활을 젊은이이게 주문했다.


갈수록 실버산업이 뜰 거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대형 마트에 노인 의료용품이 아동용품 못지않게 쌓였고 노인 요양시설이 교외에 전에 없이 늘었다. 치매 요양병원도 성황인 모양이다. 직장과 학교에 매달리는 가족에게 요양병원은 불가피한 면 없지 않지만, 요양병원이 있기에 노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 가족이나 이웃과 마음을 나누며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될 수 있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치매는 노화다. 노화는 질병일까. 나이 들어가는 현상을 질병이라고 규정하면 건강은 어떤 연령에서 멈추는 걸까.


80대 중반에 치매 증상을 보이는 어머니를 서울의 아파트에서 시골로 모신 귀농인이 있다. 똥꽃이라는 책에서 농사지으며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피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전희식, 그다. 감내하기 어려운 어려움이 한둘 아니었지만 90대 중반에 들어가는 어머니의 몸은 조금씩 왜소해질 뿐,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치매에 든 노인에게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은 아니겠지만, 4각 철근콘크리트에 갇혀 텔레비전의 요란한 화면과 소리에 세월을 맡기면서 몸과 정신의 건강을 해친 건 아닐까. 젊어서 익숙했던 땅으로 돌아가면서 치매 증상이 완화되는 전희식 모친은 자신의 삶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는지 모른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고령사회로 치닫는 우리사회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이렇게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얼마 안 가 젊은이 두 명이 노인 한 명을 부양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된 지 오래고, 추세가 계속된다면 500년 이후 대한민국의 인구는 사라질 것으로 1차함수를 그리는 이도 있다. 아이를 낳는 일은 현재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삶에 여유가 없으면 아이를 낳기 꺼려질 테고, 경제 뿐 아니라 정신적 여유가 있다면 더 낳는데 큰 고민이 없을 것인데, 요즘 우리네 사정은 그리 녹록치 않은 게 분명하다. 지원책을 쏟아내도 출산율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고령사회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걱정은 공허하다. 노인의 삶과 무관한 탓이다. 체력과 의지가 남은 노인의 일자리가 거의 없는 현상만이 아니다. 한참 일할 나이에 명예퇴직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청년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는 제공되지 않는다. 고령사회 운운하며 아이를 더 낳으라는 정부와 대기업 산하 연구소의 요구에 살가운 정책적 배려는 없다. 노인의 처지에서 고려하는 정책은 보이지 않고 그저 건강검진과 서푼 어치 연금이 고작이고 행정은 실버산업에 미룬다. 노인 부양의 부담을 들먹이며 아이 더 낳기를 종용하는 기업의 본심은 예측되는 기업의 노동력 부족을 걱정할 따름이다.


은퇴 이후에 인생을 2모작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찾자는 제안이 고맙지만, 퇴직금이나 모아둔 자금이 두둑하지 않은 이에게 공허하게 들린다. 그렇다고 정부와 기업에 퇴직 이후의 삶을 의뢰할 수 없다. 인생은 은퇴 이후 2모작보다 첫걸음부터 자신의 일로 시작해야 바람직하다. 돈과 이목 때문에 원치 않은 일에 발목 잡히지 않았다면 2모작이 필요 없다. 나이 들어가면서 몸과 정신이 예전 같지 않다는데 의기소침하지 않는다면 정년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자신의 길이라면 은퇴한 직장인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농부나 어부, 작가와 상인에게 정년은 없지 않은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는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젊었을 때로 한정되지 않는다. 나이 들면서 깊어지는 경륜은 실패를 줄이고 싶은 젊은이에게 인생의 지침이 된다. 나이 든다는 걸 인생의 마감으러 낙담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길을 가는 노인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가끔 뇌에 스쳤던 생각과 마주 앉은 이의 이름을 듣자마자 민망하게 잊곤 하지만, 계단 두 칸 씩 뛰어 오르지 못하고, 내려올 때의 어려움 때문에 젊은이와 높은 산에 오르는 걸 마다하지만, 자신의 신념과 주관, 삶의 확신을 유지한다면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아름답다.


인생의 2모작은 특별하지 않다. 젊었을 때 꿈이 용두사미처럼 줄었더라도, 새치가 백발이 되고 검버섯이 만개해도 인생은 얼마든지 계속된다. 다만 더 많은 인생을 살아갈 젊은이의 삶을 희생시키는 일은 자제하길 선배와 친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면서, 초로의 갑오년 새해를 맞는다. (작은책, 20141월호)

 
 
 

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11. 8. 15. 16:00

 

얼마 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암 검진 대상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전단이 편지로 왔다. “아직도 안 받으셨나요?” 묻는 전단은 검진 비용의 90퍼센트를 공단에서 담당하니 서구 식생활에 익숙한 고객은 조기 진단으로 건강을 잃지 말라는 고마운 친절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친절을 이미 여러 차례 받은 처지에서 마음이 흔쾌하지 않는 건 왜일까. 가부장적이거나 상업적 친절이라는 냄새를 느낀다고 반응하면 좀 지나친 걸까.

국내 굴지의 종합병원에서 원장으로 은퇴한 어떤 의사가 사석에서 자신은 건강검진을 여태 한 번도 받지 않았다고 친구에게 고백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까닭을 묻자, “무서워서!”라고 답했다며 그 은퇴 의사의 친구인 선배는 실소했는데, 그 선배는 해마다 사원 개인에게 마치 크나큰 권리라도 선물하는 양, 건강진단 다녀올 것을 해마다 회사는 권고한다고 덧붙였다. 나이들은 만큼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거야 당연한데,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무게 잡는 의사들의 과잉 전문성이 불편하다며 모를 권리가 존중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토로했지만 회사는 알고 싶었을 게다. 미리 정리할 사원이 누구일지를.

충성스런 고객에게 특별한 배려처럼, 구형 손전화를 스마트폰으로 바꿔주겠다는 호들갑스런 전화를 극성스레 받는다. 멀쩡한 전화기를 바꾸라니! 통화와 문자를 주고받는데 아무 지장이 없고 배터리 성능도 좋은데 왜 바꾸라는 겐가. 할부금 시한보다 훨씬 빨리 새로운 기능을 더한 제품을 내놓는 세태에서 재고품을 처리하려는 속셈은 아닐까. 헐값의 프린터를 내준 뒤 고가의 잉크나 토너를 파느라 여념 없는 업체의 상혼과 비슷한 건 아닐까. 아무튼, 옛 번호를 고집하는 손전화는 아직 내손을 떠나지 않았다.

최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탈퇴하는 이가 늘어난다는 소식이 들린다. 프라이버시 유출에 진저리를 친 경험이 쌓이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언론은 귀띔했다. 진저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그치지 않는다. 호기심을 과시하는 누리꾼들이 공개하지 않은 개인 정보를 신상털기라며 인터넷에 흘리자 관음증과 더불어 조회가 폭발하지 않던가. 이런 와중에 손 안의 인터넷인 스마트폰은 사람들의 모를 권리를 송두리째 빼앗아갈 소지가 다분하다. 사전 허락 없이 사용자의 행적을 감시하던 손전화기 제조회사가 고발되었고, 벌금이 부과된 게 엊그제다.

건강 이상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전자피부가 나온다!”며 독자에게 가슴 벅찰 것을 요구하는 언론 보도가 얼마 전에 있었다. 잘 휘어질 뿐 아니라 견고한, 가로 2센티미터 세로 1센티미터에 두께가 37마이크로미터의 전자피부를 문신처럼 심장 가까이 붙이면 환자의 심박수나 체온은 물론 근육의 움직임과 뇌파의 변화까지 24시간 감지하며 주치의에 연결한다는 언론기사는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한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개발을 시작했다는 과학자의 소견을 소개했다. 다만 생체 신호를 전송할 수 있는 거리가 몇 센티미터에 불과해 원거리 전송이 필요한 의료기기 적용에 한계가 있으므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덧붙이면서.

전자피부의 가능성을 타진한 과학자의 순진한 의도는 기술개발 속도를 미루어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다. 스마트폰 기술과 범지구위성합법시스템(GPS)을 활용한다면 미약한 생체신호가 담당의사의 손전화 모니터에 전달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리라. 그뿐이 아니다. 이미 새 세기가 시작될 즈음, 세계 과학기술의 추이를 분석한 미래학자는 개인의 DNA를 기반으로 만든 칩을 피부에 이식할 경우, 시시각각 변하는 개인의 맞춤의학이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담당의사는 컴퓨터로 환자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진단해 적절한 약품을 그때그때 처방할 뿐 아니라 환자가 약을 제대로 먹는지, 먹지 않고 독한 술을 어디에서 누구와 얼마만큼 마시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해 보호자에게 일러바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전자피부에 개개인의 DNA칩을 넣어 환자, 아니 모든 국민의 피부에 태어나자마자 이식한다면 어떠한 장밋빛 미래가 약속될까. 집 잃은 개를 얼른 찾게 할 뿐 아니라 함부로 버린 개의 임자를 꼼짝없이 잡아내고, 물린 이가 예방주사 접종 여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전자칩은 개에 한정하는 게 아니다. 안전할 뿐 아니라 효율이 훨씬 빼어나고 비싼 DNA전자피부가 전하는 은밀한 정보를 병원은 물론이고 행정망의 중앙컴퓨터와 연결한다면 생활은 무시무시하게 편해질 게 틀림없다. 말썽 많은 주민등록증이나 인감증명이 지갑에서 사라지는 건 물론이고, 출입국 수속을 위해, 내 나라든 남의 나라든, 공항에서 길게 기다릴 이유도 당연히 없어질 것이다.

1990년대 말, 인감증명과 건강보험카드의 기능을 포함하는 전자주민등록증을 편의를 앞세우며 추진하려는 정부에 시민단체는 맞서야 했다. 지문과 주민등록번호로 시민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개인 정보들이 은행이나 보험회사, 그리고 기업에 흘러들어갈 경우 빚어질 감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치며 정부는 전자주민등록증 계획을 철회했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살아나려 한다. 전자주민등록증이 없어도 일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 시민과 달리 정부는 아쉬움이 큰 모양인데, 그 실체가 도대체 뭘까. 전국 곳곳에서 눈을 번뜩이는 폐쇄회로 카메라보다 효율적인 그 무엇은 감시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까.

넓은 아스팔트가 한산해진 야심한 밤,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횡단보도로 찾아갈 때 저기 경찰차가 보였다. 그래서 안심하고 횡단보도 도착 전에 길을 건넜더니, 경찰 순찰차는 요란한 소리를 남발하며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주민등록증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민중의 지팡이를 믿어 안심하고 건넜다는 핑계를 귀전에도 듣지 않으며 도로교통법 운운하던 경찰은 전과가 없으니 봐준다며, 더 바쁜 일이 있었는지 가던 길로 휑하니 사라져갔다. 주민등록번호만 입력하면, 남이 보든 말든, 순찰차의 작은 단말기로 모든 범죄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현실에서 더욱 가깝게 다가온 전자주민등록증이 걱정인데, 최첨단을 찬미하는 과학기술은 전자피부를 가볍게 넘어설 세상을 장밋빛으로 그린다.

전자피부의 쌍방향 정보는 주치의와 환자의 스마트폰 사이만 맴돌까. 그런 정보는 고객의 수가를 조절하고 싶은 보험회사에서 반색하고 이윽고 가입을 거부할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기업은 어떤 이의 입사를 원하지 않겠지만 그 정도는 약과에 불과할지 모른다. 전자신호의 감시와 통제는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다. 편의에 사로잡힌 개인은 중앙이 은밀히 수집해 분류할 뿐 아니라 가공하는 정보에 굴복할 뿐, 중앙의 의도를 좀처럼 파악하지 못한다. 철두철미한 감시사회에 내팽겨진 개인은 나이 들어 몸이 쇠약해지면 저절로 병원 고객으로 등록되면서 나아가 디지털 치매에 들어간다. 현관 자물쇠의 번호를 기억 못하는 차원이 아니다. 전자신호 체계에 소외된 이는 디지털 학대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작은책, 2011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