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6. 7. 2. 23:42
 

천수만 간월호에 겨울이면 가창오리 떼가 찾아와 군무를 한다. 누구의 지휘를 받는지 모르지만 수십만 마리가 일사분란하게 어우러지며 현란하게 오르내리는데 신기하게도 한 마리도 충돌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평원을 질주하는 누우 떼, 밀밭을 초토화시키는 메뚜기 떼들도 마찬가지다. 마라톤에 나선 한 무리의 시민들도 부딪히지 않지만 부딪혀도 큰 상처를 입지 않는다. 타고난 한계 내에서 움직이는 까닭이다. 한데 자동차나 선박의 충돌은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개발한 자연에 없는 속도는 화를 부른다.

 

한 농민은 뜻밖의 경험에 놀란다. 멧돼지가 주문이 약속된 유기농 복숭아만 따먹은 것이다. 목줄 끊어져라 사납게 짖어댄 백구가 아니었다면 한 해 농사를 망칠 뻔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겨우 설득해 유기농으로 전환한 이웃의 복숭아까지 지분거린 것이다. 한데 멧돼지는 밀가루에 바구미가 붙지 않는 것처럼 농약 묻은 관행 복숭아는 건드리지 않았다. 농약이 묻은 과일은 자연 감각을 잃은 사람만이 따거나 사 먹을 따름이다. 성장호르몬에 왁스까지 때깔 좋게 바른 것을. 2004년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던 남아시아의 관광객은 쓰나미를 예감하지 못했지만 원주민은 알았다. 왜 그럴까.

 

재래 화장실에 수입밀가루를 뿌리면 구더기가 발생하지 않는다는데, 사람은 그런 밀가루로 음식을 해먹는다. 향료, 색소, 감미료에 기계에 들어붙지 않도록 숱한 첨가물을 넣고서. 그런 빵을 파리와 곰팡이는 기피하지만 청소년들은 즐긴다. 아기 때부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초등학생의 절반이 아토피와 천식을 앓는다. 주변을 에워싼 방수제, 접착제, 발색제가 뒤덮인 아파트와 교실도 말초적 자극에 충실한 음식과 음료수도 자연스럽지 않다. 인간도 자연에 적응되었는데, 자연의 질서를 교란하는 개발이 부메랑으로 다가오자 더는 견디지 못한다. 불치병과 난치병의 목록은 점점 늘어만 간다.

 

전기로 인한 전장과 자장은 신체의 리듬과 균형을 깨어 질병을 유발한다. 송전탑 인근에 많이 발생하는 백혈병과 뇌종양이 그렇다. 누군가 전기를 ‘잠 도둑’이라 했다. 시계에 따라 책상에서 앉았다 일어나는 신체는 고달프다. 시계는 배고플 때 밥 먹고, 졸릴 때 잘 수 없게 만든다. 작업장 사고는 피로와 스트레스가 큰 원인이고 교통사고는 신체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쇳덩어리와 부딪히기 때문이다. 자연에 없는 교통수단에는 고도의 시설과 규칙을 동반한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당한다. 최첨단 전쟁과 무역도 마찬가지다.

 

자연에서 대략 100만 년 전 세상에 진화된 인간은 1만 년 전 경작을 시작하기 전까지 자연과 합일했다. 요사이 제어할 수 없는 화석연료와 파멸적 핵에너지로 자연을 마음대로 재단하면서 제왕으로 군림하지만, 그리 된지 500년도 되지 않는다. 99퍼센트의 세월동안 자연에 동화한 것인데, 자연을 착취하면서 편견과 계층을 낳고 낭비를 일삼던 인간은 이제 자연을 거의 잃었다. 이반 일리치의 지적처럼, 자동차 없이 이동할 수 없고, 병원 없이 치유되지 않으며 학교 없이 교육할 수 없다. 이제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타락하고 말았다. 탕자처럼.

 

자연을 잃고 기계에 삶을 의탁하면서 나약해진 인간은 에너지의 고갈을 눈앞에 두고 있다. 기계 속도에 맞춘 신체는 피로와 스트레스에 지치고, 불치병과 난치병, 미세먼지와 아토피에 시달리건만 인간의 신체를 지배하는 자본과 이윤은 더 빠른 속도를 요구하며 남은 자연을 남김없이 파괴할 것을 명한다. 과정보다 목표, 더욱 빠른 속도를 지향한다. 필요하면 가장 짧고 안전한 지점을 찾아 터널을 내야 하건만 20분 빨리 가려는 고속전철은 천성산을 종축으로 뚫겠다고 한다. 그래서 산에 물이 마르면 도롱뇽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자연 파괴로 기상이변이 속출하면 기계의 속도에 의탁하며 스트레스 받는 사람도 온존할 수 없다.

 

감나무가 북한에 없듯, 사람은 히말라야나 사막에서 생존하지 못한다. 자연에 사는 모든 생물체는 자신에 맞는 환경을 가진다. 그렇게 적응되었다. 자연에서 진화된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연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해지고 건강하다. 인간도 간혹 인위적으로 재단한 자연의 자리에 미적 감각을 도입한 건축물을 세워 구경꾼을 몰려들게 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에 비할 바는 못 된다. 템스 강가의 ‘런던 아이’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잠시 눈요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피라미드나 타지마할의 경관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알프스에 케이블카를 깔아 노약자도 쉽게 등반하지만 그 때문에 산에 대한 경외감은 사라졌다. 히말라야까지 케이블카를 놓는다면 알프스처럼 망가질 것이다.

 

어깨띠를 매고 긴 집게를 든 일단의 인간은 등산로에 모여 자연을 보호하자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외친다. 버린 쓰레기를 줍는 것보다 버리지 않는 게 옳지만, 인간이 감히 자연을 보호할 수 있나. 자연이 인간을 보호하지 않던가. 결국 인간을 위해, 건강해야 할 다음 세대를 위해, 도롱뇽이 살 수 있는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단층대와 파쇄대가 지나가는 천성산에 긴 터널을 함부로 뚫지 말라고 주장하는 환경단체에 대해, 어떤 이는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지 무조건 보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조화라. 내 주장에 따라주는 것이 합의라고 고집하는 노회한 정치인의 거북한 논변을 듣는 것 같다. 이미 파괴될 만큼 파괴된 자연인데, 도대체 어떻게 조화를 이루겠다는 것일까.

 

이윤을 노리는 자연파괴는 조화와 다르다. 멧돼지가 사는 곳에 과수원을 만드는 것도 물이 풍부한 작은 산을 종축으로 뚫는 터널도 철새가 깃드는 곳을 매립하는 것처럼, 조화와 거리가 멀다. 전에 없던 기상이변과 질병이 난무하는 현재, 자연을 뚫고 메우고 파내며 도륙하는 인간은 각성해야 한다. 인공을 모두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나약해진 인생일지라도, 후손의 건강한 생명을 위해 오늘과 같은 삶을 반성하고 자연 앞에 제발 좀 겸손해야 한다. 존경심 없이 자연에 대한 평화는 물론 인간 사이의 평화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최근의 걷잡을 수 없는 아토피는 그 마지막 경고다. (환경미디어, 2006년 8월호)

아토피는 선전 포고 일 뿐. 지구라는 생명체가 인간의 탐욕으로 그 질서를 교란 당하면, 돌아 버리겠지.
돌아버린 눔이 무슨 짓인 들 못할까.
질서란 비정하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의 우둔이 , 그 카오스가
댓가를 치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