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8. 7. 7. 10:21
 

1960년대에서 1970년대, 내수면의 자원 확대를 위해 북미 원산의 블루길과 배스가 우리 하천과 저수지에 도입되었다. 그러자 우리 생태계는 돌이킬 수 없게 교란되었다. 이후 외래 동물을 유입하는 사례는 줄었지만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고, 블루길과 배스는 파랑볼우럭이나 큰입우럭으로 불릴 정도로 친숙해졌다. 어느새 토착화된 것이다. 블루길과 배스는 싫든 좋든 우리 생태계의 일원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짧은 시간 안에 블루길과 배스가 우리의 하천을 지배하게 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전문가는 이미 파괴된 생태계에서 빈자리를 쉽게 차지했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안정된 생태계였다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토종과 벌이는 경쟁에서 승리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주장이다. 블루길과 배스는 대개 댐이나 농사용 보의 건설로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호수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쏘가리나 가물치가 터 잡기 전이었다. 쏘가리가 선점한 강 중류와 가물치가 터줏대감인 방죽에 블루길이나 배스는 세력을 펴지 못한다.

 

다른 설명도 끼어든다. 수십만 년 이상 고립되어 조화를 이루던 생태계에 갑자기 새로운 생물이 들어와 기존 지위의 생물을 밀어낼 경우, 생태계의 균형이 새로워지기까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동안 황소개구리가 그랬다. 이제 황소개구리는 사람의 제거 노력과 관계없이 전처럼 퍼져나가지 않는다. 아니, 황소개구리를 잡아먹는 포식자가 나타난 이후 조금씩 줄어든다. 난데없던 황소개구리를 기피하던 너구리가 마음을 바꿔 포식하기 시작했고 백로와 왜가리가 황소개구리 올챙이를 푸짐하게 집어먹는다.

 

블루길과 배스도 이제 확산속도를 줄였다. 고립된 생태계에 굴러들어와 장악한 블루길과 배스의 어린 개체들을 쏘가리와 가물치가 잡아먹으며 뒤늦게 경쟁에 뛰어들었다기보다 생태계의 균형이 그렇게 정착했다고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앞으로 수달이 다 자란 블루길과 배스를 잡아먹을지 모른다. 그러면 최고 포식자의 지위를 차지한 수달이 생태계 균형을 새롭게 요구할 것이다. 희망사항일까. 우리가 수달을 보호해준다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행히 수달은 아직 멸종되지 않았으므로.

 

“토종 불청객 ‘끄리’ 설쳐 몸살 앓는 낙동강.” 얼마 전, 한 일간지의 기사 제목이다. 낙동강의 한 지류에서 끄리가 나타났다는 거다. 그것도 피라미 다음으로 많게. 피라미와 끄리는 원래 낙동강에 없었던 물고기다. 서해와 남해안으로 빠지는 하천에 분포하던 피라미가 전국에 퍼진 것은 하천교란이나 사람이 옮겼기 때문이다. 한강이나 금강 중상류의 물길이 도로공사로 파헤쳐져 잠깐이라도 이어졌을 때 일부 개체가 옮겨가 퍼졌거나 사람이 옮겨 낙동강에서 월등한 지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러면, 중하류에 사는 끄리는 어떻게 낙동강으로 갔을까. 하천교란보다 사람이 옮겼기 때문일 텐데, 문제는 끄리가 낙동강이 몸살을 앓아야 할 정도로 고유 생태계를 교란한다는 점이다.

 

끄리는 피라미, 갈겨니와 참갈겨니, 왜몰개, 그리고 눈불개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피라미아과의 일원이다. 갈겨니 종류를 제외하면 모두 낙동강에 살지 않았건만 지금은 왜몰개마저 낙동강에 흘러들어갔다. 송사리보다 조금 큰 왜몰개는 사람의 관심이 적고 사는 곳도 낙동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무시할만하다. 법정 보호종인 눈불개는 워낙 드물어 논외다. 결국 낙동강의 생태계를 교란한 녀석은 피라미와 끄리인데, 이미 정착된 피라미는 더는 논란거리가 못된다. 언론이 지적했듯, 자기보다 작은 물고기는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육식성 끄리가 요사이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중국을 포함하여 압록강에서 섬진강에 이르기까지, 큰 강에 분포하는 끄리는 20에서 30센티미터의 유선형 몸매를 가진 은백색 어류로 육식성 어류답게 다문 입술이 앙칼지며 눈매가 매섭다. 흐름이 빠른 여울을 좋아하지만 호수를 종횡으로 누비며 물고기를 먹어치워 루어 낚시꾼들이 반기는 어종이다. 강바닥을 호령하는 쏘가리와 달리 하천 표층을 빠르게 이동하는 끄리는 힘도 좋지만 가짜 물고기가 매달린 낚싯줄이 바위에 걸리지 않아 매력이다. 5월 물살이 빠른 금강과 한강의 주요 여울은 끄리 루어 낚시인으로 몰린다. 하지만 고기의 맛이 없어 양식업자가 선호하지 않는데 왜 낙동강까지 옮겨진 걸까. 손맛? 낙동강에도 손맛이 진한 물고기는 많다.

 

1992년 안동 동쪽의 낙동강 수계인 반변천을 틀어막은 임하댐에 양식을 목적으로 유입시키지 않았을 테지만, 동자개를 옮길 때 딸려왔을 것으로 학자들은 짐작하는데, 1996년 임하댐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끄리. 겨우 12년이 지났는데 낙동강을 지배할 줄이야. 한강에 많아야 5퍼센트 이하로 분포하던 끄리가 낙동강으로 진출하더니 15퍼센트 이상 늘어난 게 아닌가. 무려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하천도 있다고 하니 입이 벌어질 지경이다. 하지만 태극기를 꽂아야 할까. 우리의 토종, 끄리가 미국의 블루길과 배스를 밀어냈다니. 아니다. 비록 토종이라 해도 끄리는 낙동강에서 외래종이나 마찬가지다. 낙동강의 생태계는 한동안 요동칠 게 분명하다. 학자들은 낙동강의 생태계가 단순해질까 걱정이 많다.

 

사정이 이런데, 한강과 낙동강을 이을 경부운하와 팔도강산의 수계를 뒤섞을 한반도 대운하가 생기면 어떻게 될까. 환경공학이 전공인 한 학자는 지질연대로 볼 때 대부분 같은 어종이므로 “걱정 말라!” 장담하고, 식물생태학 전공의 한 학자는 신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고 호언한다. 그럴까. 그건 권력자의 입맛에 맞춘 비전공자의 아첨이다. 양심 저버린 학자의 근거 없는 교만이다. 지질연대 이후 발생한 한반도 수계의 생물다양성을 토목 관점으로 재단할 수 있다는 건가. 생태계에 공학적 예측가능성이 가능하다는 건가. 200만년 이상 고립돼 고유종으로 분화한 담수 어류의 멸종 행렬이 걱정인 어류학자의 얼굴은 어둡다. 명맥을 유지하는 한강의 어름치, 꾸구리, 돌상어, 배가사리……, 낙동강의 흰수마자, 여울마자, 얼룩새코미꾸리……. 그들의 내일은 사람의 내일을 반영할 텐데.

 

낙동강에 갓 진출해 천방지축 설치는 끄리. 새로운 균형이 형성되면 조용해지겠지만 그때까지 진화의 역사를 교란하는 주범으로 혼나게 생겼다. 하지만 그게 어디 끄리의 책임인가. 앞으로 무분별한 어종 도입을 자제해야겠지만, 논의가 중단된 경부운하와 한반도대운하의 무모한 계획은 명확하게 취소되어야 한다. 끄리가 시방 그 위험성을 증언한다. (물푸레골에서, 2008년 9월호)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8. 6. 13. 13:24
 

촛불의 힘! 과연 장하다. 세종로에서 종로1가와 남대문까지 꽉 찼다. 2002년 한일월드컵 붉은악마보다 많아 보인다. 그런데 경찰은 8만이라고 주장한다. 붉은악마였다면 200만이 넘었다고 과장했을지 모른다. 사진의 촛불을 일일이 센 한 네티즌은 촛불을 들지 않은 시민까지 70만 가까이 모인 것으로 추산했다.


아무래도 좋다. 세종로의 높은 건물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끝없이 이어진 촛불은 국민의 뜻을 외면하는 정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 덕분인가. 쇠고기와 달리 미국 눈치 볼 필요가 없는 ‘한반도 대운하’는 취소될 가능성이 엿보인다고 언론은 일제히 보도했다. 자신을 ‘민주화운동 1세대’로 생각하는 대통령이 “국민이 운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며 “국민이 싫어할 경우, 대운하에 대해 결단을 내리겠다.”고 자신의 형에게 알렸다는 것이다. 이는 “여론수렴 후 실행”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던 종래와 다른 모습이었다. 촛불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대통령의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자 정부와 여당은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정책과제의 후순위로 미루겠다고 천명했다는데, 사업이 늦춰지다 결국 취소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공식 철회된 것은 분명히 아니지 않은가. 압도적 시민들이 여전히 반대해도 ‘물길 잇기’가 아니라 ‘4대 강 치수사업’이라며 본질을 흐릴 때가 엊그제였다. 민심 수습 차원의 꼼수일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정부는 신뢰를 잃었다. 광우병 발생 위험이 높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는 촛불 행렬 속에서 점점 커지는 한반도 대운하 반대 목소리가 아직 철회를 공식화하기에 충분하지 못한 모양이다. 귀가 열려야 듣는다. 확실한 분수령을 넘을 때까지 촛불은 계속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지지율을 20퍼센트 아래로 떨어뜨린 시민만이 촛불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환경부 산하 국립수산과학원 남부내수면연구소에서 인공증식에 성공해 경상남도 함안군 경호강으로 방류된 꼬치동자개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2003년 환경부에서 멸종위기 1급으로 지정했고 문화재청이 2005년에 천연기념물 455호로 지정해 보존하는 꼬치동자개는 그만큼 드물어졌다. 바람 앞에 촛불처럼 언제 멸종할지 모르지만 광화문에 경부운하를 반대하는 촛불이 모이는 한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성 성숙촉진 호르몬 주사를 받아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연이 아닌 연구소에 알을 낳아야 했던 꼬치동자개의 눈물겨운 희생 덕분에 2천 여 마리가 태어났다. 그 중 천 마리는 2007년 10월에 방류되었는데, 지속적인 모니터링 결과 경호강 전체에서 3개체에 불과했던 꼬치동자개가 평방미터마다 5개체 가깝게 늘었다고 보도자료를 돌리는 연구진은 싱글벙글한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낯선 경호강에 겨우 정착한 꼬치동자개는 연구진의 기대에 내내 부응할 수 있을까. 예전처럼 안정적으로 터 잡을 수 있을까.


투명한 하천의 중상류, 크고 작은 바위 아래를 터 잡는 꼬치동자개는 원래 빈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625전쟁 전, 대구 도심의 하천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더라도 다른 물고기에 비해 꽤 드문 종류였다. 경호강의 꼬치동자개는 그 점이 불안할지 모른다. 다른 종류가 사라진 덕분에 경호강을 넓게 차지했지만, 그런 호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통 알 수 없다. 양친이 단순한 만큼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한데 어우러져야 할 생물이 떠난 마당이 아닌가. 생물종 다양성이 부족하면 환경변화에 대한 생태계의 완충능력은 그만큼 떨어진다.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과 폭우는 전에 없이 치명적일 수 있다.


낙동강을 떠난 적이 없는 꼬치동자개는 한국 특산종이다. 사람의 도로 개발로 분수계(分水界)가 무너져 생태조건과 먹이가 비슷한 동자개와 눈동자개가 낙동강으로 흘러들어왔지만 덩치가 큰 그들은 여간해서 상류로 올라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사촌인 눈동자개와 동자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꼬치동자개는 밤에 활동한다. 그래서 생태학자는 꼬치동자개의 습성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실토한다. 천적이 잠든 밤, 바위 밖으로 슬그머니 나와 긴 입수염으로 감지한 물속 곤충들을 잡아먹으며 10센티미터 남짓 자라는데, 낙동강에 살아남기 위해 꼬치동자개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터전의 안정이다. 그를 위해 경호강에서 여러 지류로 퍼져야 할 텐데, 한반도 대운하의 하나인 경부운하는 그 기회를 낙동강 본류에서 차단할 게 틀림없다.


물결에 굴절된 빛이 갈색 자갈에 연하게 반사되는 듯, 연한 갈색 반점 4개가 담황색 몸통의 등지느러미 앞과 뒤, 꼬리지느러미 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꼬치동자개는 몸이 짧고 납작하다. 위아래로 납작한 등지느러미 앞부분과 옆으로 납작한 몸통에 비늘이 없어 손으로 잡으면 잘 미끄러진다. 가슴과 등지느러미에 강한 가시가 있는데, 그 부분을 무심코 잡다간 낭패를 당한다. 찔리면 여간 아픈 게 아닌 것이다. 덩치 큰 천적이 덥석 물었다 혼비백산하기에 충분할 정도다. 하지만 그 방어술은 운하 앞에 아무 소용이 없다.


변태 전의 물속 곤충은 바위나 돌에 곱게 앉은 이끼를 갉아먹는다. 쏟아지는 빗물을 타고 산기슭의 공사 현장에서 하천에 휩쓸린 흙탕은 이끼를 덮쳐 산소동화작용을 방해할 뿐 아니라 뿌리를 들뜨게 하고, 먹이를 잃은 물속 곤충은 터전에서 사라진다. 꼬치동자개는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다. 경부운하는 꼬치동자개의 귀향을 가로막을 테지만, 찾아가도 소용없을 것이다. 굽이치던 강물을 직선으로 펴면서 바닥의 모래와 자갈을 퍼낼 뿐 아니라 운하 양 옆의 거대한 옹벽으로 지천의 흐름을 가로막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름 한철 강수량이 집중되는 산악지형에서 물높이보다 훨씬 높은 콘크리트 옹벽을 깊게 박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을 피할 수 없으므로.


거친 개발로 생태계가 이미 교란된 낙동강은 농장과 공단의 오폐수로 몸살을 앓는다. 상류는 아직 견딜만하므로 꼬치동자개는 가녀린 몸을 운둔할 텐데, 국지성 호우와 태풍이 제방을 뜯자 터전은 더욱 좁아졌다. 복원을 빌미로 쌓는 콘크리트 제방이 하천의 자정능력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경부운하라니. 한강과 낙동강의 생태계를 본격적으로 섞을 경부운하는 하천과 주변 생태계를 크게 위협할 것이며 유전적 다양성이 결여된 경호강의 꼬치동자개는 내일을 낙관하기 어려울 것이다.


꼬치동자개의 복원을 지원하고 그 성공을 반긴 환경부의 수장은 어처구니없게 한반도 대운하를 은근히 부추긴다. 촛불 집회 이후 여당 안에 뚜렷하게 감지되는 한반도 대운하 반대 기류는 얼마나, 또는 언제까지 유효할까. 꼬치동자개의 희망, 촛불에 달렸다. (물푸레골에서, 2008년 7월호)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08. 5. 27.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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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생태조사를 위해 구룡사로 갈 적에 느낀 것. 완행버스에 몸을 싣고 바라본 치악산 기슭의 작은 마을들이 좁은 길과 가느다랗게 연결된 모습은 우리 몸의 세포조직 같았다. 세포조직이 실핏줄을 따라 더 큰 조직으로 이어지고, 조직이 모여 장기를 만들며, 장기가 체계적으로 모여 몸을 구성하듯, 동네나 마을은 세포조직, 면이나 읍은 더 큰 조직, 군이나 시는 장기, 대한민국은 몸이 되겠구나 싶었다.

 

대여섯 개의 지붕이 이마를 맞댄 동네는 이삼십 여 집들이 오밀조밀 모인 마을과 연결되었고, 조금 넓어진 마을길은 버스길과 이어졌다. 버스길을 따라 치악산 기슭의 크고 작은 마을들이 이어지며 장이 서고 동네와 마을 사람들은 농산물과 소식을 주고받았다. 가파른 고갯길을 이리저리 감돌던 버스는 치악산 주민들을 원주에 내려주고 도시에서 온 관광객을 구룡사로 실어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크고 작은 길은 작고 큰 강과 나란히 이어져 있다.

 

산은 강을 막지 않지만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 볕을 내려보내는 태양을 지구가 돌고, 공전과 자전을 하는 지구 표면에 비가 내리는 한, 강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빗물을 흐르게 한다. 유사 이래 한 차례도 거스르지 않는다. 덕분에 생태계는 다양해지고, 다양한 생태계에 다채로운 생물종이 억겁의 세월 동안 어우러졌다. 강은 물이 흐르는 물리적 장소로 머물지 않는다. 강을 따라 다양한 생태계가 연결되며 사람의 문화도 역사도 흐르며 이어진다. 덕분에 사람도 강에 기대어 살 수 있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1890년대 중반, 국세가 기울어가던 조선을 4차례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제물포에서 배를 내려 한양까지 조랑말을 타거나 작은 배로 노량진으로 가야했다. 노량진에서 강원도 영월까지 더 작은 배를 이용하며 거슬러 올랐고, 백인 여성을 구경하러 구름처럼 모이는 여인네들이 건네주는 달걀과 푸성귀를 먹으며 조선의 백성을 따뜻한 시선으로 만났다. 비숍 여사는 멈추지 않는 한강이 있기에 한반도를 가로질러 원산으로, 원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기며 조선 민중의 삶과 문화를 풍부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한강의 물고기도 적잖게 맛보지 않았을까. 수많은 보와 댐, 강변의 도로가 한강의 흐름을 차단하는 지금, 당시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을 것이다.

 

지구 표면에 가장 늦게 나타난 인류는 대략 만 년 전 경작을 시작했다. 지금은 사막으로 바뀐 ‘비옥한 초승달 지역’, 다시 말해 나일강에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기름진 땅에서 농사가 비롯된 것이다. 이는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지중해문명을 끌어냈다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일찍이 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작은 수렵채취 시절 몰랐던 편견을 인류 최초로 열었다. 필요한 농작물이라며 심고, 농작물을 심어야 할 자리에 뿌리 내린 식물을 잡초라며 뽑아 버렸다. 심은 작물을 갉아먹는 곤충을 해롭다며 쫓아냈고, 해충을 잡아먹는 동물을 이롭다고 반겼다. 농작물을 추수하면 먹을거리가 잠시 넘친다. 그로 인해 수렵채취 시절 자연스레 조절되었던 인구는 정착지에서 점차 증가했다. 증가한 인구는 예전처럼 통제할 수 없다. 이때부터 인류 사회에 계층이 발생했다. 편견은 점차 혹독한 차별로 이어졌을 것이다.

 

늘어난 인구를 효율적으로 통솔하는데 중앙 집중적 권력이 효과적이었다. 농사짓는 자들을 부리며 권력을 휘두르는 자는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확장되는 경작지에 물을 공급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권력자는 농사꾼을 동원해 경작지 일원의 강을 관개하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려 했지만 인구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늘었고 물이 모자라면서 땅마저 메말라갔다. 인류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토인비는 말했다.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고. 비옥했던 초승달 지역의 현주소다.

 

농사를 위해 강가에 정착한 인류는 강을 오염시켰다. 농사로 부분적으로 오염시키다 이제 산업으로 광범위하게 오염시킨다. 농사짓던 시절, 잠시 오염되었던 강은 사람이 비키면 이내 회복되었지만 산업이 오염시킨 강은 여간해서 회복되지 않는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농사짓던 시절에는 강을 크게 훼손하지 않았건만 시멘트로 칠갑을 한 도시에서 산업이 거듭 확장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자연에 편견을 도입, 강을 이리저리 교란하던 사람은 댐으로 물의 흐름을 정체시키더니 그것도 모자랐는지 이제 운하로 강 자체를 없애려 한다. 강을 교란하며 금력과 권력을 쥔 세력이 강이 가진 생명의 흐름을 아예 차단하려 드는 것이다. 강에 생명이 흐르지 않으면 생태계의 산물인 인류도 삶을 영위할 수 없다. 한반도가 시방 그 위기에 처했다.

 

한강과 낙동강을 잇겠다는 ‘경부운하’가 그 으뜸 원흉이다. 아직 실체가 분명하지 않지만, 거기에 ‘충청운하’와 ‘호남운하’를 비롯하여 3100킬로미터에 달하는 17개 운하로 북한까지 연결시키겠다고 기염을 토하는 이른바 ‘한반도 대운하’가 버금 원흉이다. 운하로 강을 잃더라도 당대의 여유가 있는 계층은 당장 위험에 빠지지 않을지 모른다. 상수원을 상류 지역으로 옮기거나 생수를 수입해 마시고, 곡식과 채소와 고기를 수입해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곧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반만년 역사 이상을 누려온 우리는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한강과 낙동강을 비롯한 수많은 강이 온갖 생명을 건강하게 품고 흘렀기에 건강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강과 낙동강을 나중에 잇자는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자, 정부는 ‘4대강 정비’에 나서겠다고 즉각 선언했다. 실체가 없는 ‘한반도 대운하’든,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경부운하’든, 시민들의 반대가 거세고 정부가 내세운 당위성이 부당하다는 게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꼼수를 부린 것이다. 정비를 핑계로 운하를 위한 준설부터 4대 강에서 강행하겠다는 의지인데, 흐르는 강에 대한 준설은 더는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었을 경우에 고려하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걸 정녕 모르는 것일까. 준설은 강의 생명을 돌이킬 수 없게 오염시킨다. 게다가 4대 강은 현재 한반도에 사는 시민 대부분의 대안 없는 상수원과 농공업용수일 뿐 아니라 한반도 생태계의 기반이다. 4대 강은 준설이 필요할 정도로 오염되었다는 과학적 자료가 확보돼 있다던가.

 

비록 느닷없지만, 세금 한 푼 안 들어가는 100퍼센트 민자사업이라던 운하에서 4대강 정비로 사업 내용이 바뀐 만큼, 관련 비용은 민간이 떠맡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다. 강은 공공재다. 세금 지원 없는 준설로 이윤을 챙길 재주를 가진 기업은 없다는 뜻이다. 중앙정부가 준설 비용을 맡거나 지방자치단체가 그 몫을 나눠야 할 텐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지금까지 4대 강의 수질 개선을 위해 퍼부은 예산은 중앙정부가 책임졌다. 막대한 비용을 들인 덕분에 수질이 악화되는 속도를 늦출 수 있었는데, 준설은 그 노고와 비용을 무용지물이 아니라 허튼 짓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방자치단체는 빗발칠 민원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정화를 앞세우면 반대 목소리가 수그러들고 선박을 동원한 관광을 앞세우면 여론이 찬성으로 바뀔 것으로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시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섣부른 투기에 몸이 달았다면 노를까,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이라면 정부의 서툰 꼼수에 냉큼 속지 않을 것이다. 이미 누 차례 계속되는 이명박 정부의 꼼수에 진저리를 치는 마당이 아닌가. 꼼수는 결국 실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국토해양부의 의뢰로 운하의 타당성을 연구하던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국토의 대재앙을 막기 위한 양심선언에 나섰다. “국토해양부의 담당 부서로부터 대운하에 대한 반대논리에 대한 정답을 요구받고 있다.”면서 “수많은 전문가가 10년을 연구했다는 실체는 하나도 없었고,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반대논리를 뒤집을 대안이 없었다.”고 고백한 40대 중반의 그 연구원은 실업자가 될 각오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글을 올린 것이다. “자식 앞에 부끄러운 아빠가 될 수 없었다.”는 그는 양심의 명령에 따르기로 결심한 거다.

 

정부가 내세운 관광효과에 대한 장밋빛 그림을 액면 그대로 믿는 순진한 시민들의 투기를 용케 유도한다면 모르겠지만, 운하든 준설이든, 경제성은 물론이고 환경 개선은 가당치 않다. 그럴싸한 그림에 속아 투기 막차를 탄 순진한 시민들의 파산 덕분에 기득권이 독차지할 운하의 경제성을 잠시 확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동안 정부가 강조한 물류비 절감이나 온난화 개선 효과는 물론이고, 예상되는 생태계와 문화재 파괴, 홍수와 가뭄 피해, 상수원 오염,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합리적인 대책이나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한반도의 운하의 필연적 운명이다.

 

누구를 위해 운하를 추진하려지, 그 속셈을 드러내지 않는 정부를 한반도에서 자식 키우는 시민과 과학자는 이해할 수 없는데, 운하를 반대하는 언론사에 광고 게재하지 않는 정부다운 반응이 이어져 나왔다. “아직 확정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정부에 이어, 양심선언을 한 과학자에게 “파면시키지 않을 테니 월요일에 보자!”며 회유를 예고하던 그 연구소 상급자는 찾아간 기자에게 “사실무근”임을 강조하며 연구원 개인의 주장일 뿐이라고 의미를 축소하려 들 것이다. 연구원의 생사여탈권을 쥔 그들은 양심선언을 지지하는 동료 연구원의 잇따른 양심선언을 억압할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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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왕래를 어렵게 한다. 강은 자연스레 국가나 지방의 경계가 되었고, 민족의 언어와 지역의 사투리가 강을 경계로 두드러졌다. 지역의 환경, 다시 말해 생태계와 문화에 따라 충분한 세월을 거치며 형성된 자연과 사람의 개성이 다양하게 발현된 것이다. 한데, 강은 장벽이 아니다. 강은 오랜 역사를 딛고 형성된 개성의 소통을 결코 가로막지 않는다. 강을 따라서 지역의 개성이 자연스레 흘러나간다.

 

섬진강은 기교를 중시하는 서편제와 힘을 강조하는 동편제의 개성을 두루 배려하지만 대립하게 만들지 않는다. 소심하기 짝이 없던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정적의 고향을 핍박하던 시절을 제외하고, 섬진강을 사이로 경상도와 전라도는 활발하게 소통해왔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특산물이 오고가는 화개장터는 두 지역 문화의 가교다. 화개장터와 섬진강에서 그칠 리 없다. 간직하는 숱한 전설과 애환을 시와 노래와 이야기로 전하는 전국 각지의 강은 흐름이 멈추면 사라지고 마는 생명과 문화의 터전이다.

 

아무리 편협한 시각으로 보아도 강은 물길에서 그칠 수 없다. 좌우와 바닥까지 콘크리트로 처리해 단장한 청계천과 같은 배수로는 더욱 아니다. 요즘의 청계천은 복원과 거리가 멀다. 돈 들여 치장한 조경 배수시설로 보아야 옳다. 강은 생명이다. 대지에 영양을 제공하는 혈관이다. 대지를 굽이쳐 흐르는 강은 상류에서 하류, 왼쪽과 오른쪽, 바닥에서 땅속, 그리고 세월을 이어준다. 굽이치며 만들어낸 모래와 자갈밭, 폭포와 깊은 소, 바위 사이에서 휘몰아치는 여울과 수면이 넓은 잔잔한 강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깃든 다양한 생물들이 오랜 세월 어우러졌다. 그 덕분에 플랑크톤에서 사람까지 생명을 이어올 수 있었다.

 

강의 폭은 넓다. 하지만 평상시 물이 흐르는 폭은 좁다. 물이 흐르는 지점에서 강둑까지 넓게 이어지는 추이대(推移帶)에는 다양한 생태계가 이어진다. 강변의 습지에서 초원으로, 초원에서 강둑 너머 키 작은 숲으로 이어지며 강변은 자연스럽게 주변 산록의 키 큰 숲과 연결된다. 자갈에 붙은 이끼를 먹는 수서곤충은 자가사리와 피라미, 개구리와 도롱뇽, 도마뱀이나 새의 먹이가 되고, 습지에서 먹이를 찾던 새가 낳은 알은 추이대를 지나다니던 누룩뱀이 즐겨 먹는다. 뱀은 족제비나 오소리의 먹이가 되고, 오소리 새끼는 말똥가리가 낚아챌 것이다. 이렇듯 습지에 사는 동식물은 추이대를 사이로 깊은 산의 동식물 생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물이 흐르는 강이 있으므로 좌우의 생태계는 언제나 건강하다.

 

산록을 적신 빗물은 바위틈과 낙엽 사이를 고였다 흐르며 옆새우와 도롱뇽의 서식처를 제공하고, 커다란 바위를 휘도는 물은 계곡에서 만나 소로 모여든다. 거기는 버들치와 열목어의 터전이다. 좁은 계곡의 갯버들에 앉아 버들치를 노리는 물총새와 물까마귀는 모래와 자갈이 깔려 탁 트인 중류에 모습을 쉬 드러내지 않고, 쉬리와 모래무지, 쏘가리와 대농갱이는 강 중류를 서성이는 수달을 밤에, 해오라기를 낮에 조심해야 한다. 강의 중류와 부드럽게 이어지는 하류에도 다양한 생물이 어우러진다. 얼음이 풀리기 무섭게 강어귀에 서성이는 왜가리와 백로는 무리지어 다가오는 붕어와 잉어를 끈질기게 기다리며 순식간에 한 마리 씩 낚아챈다. 바다로 이어지는 하구는 겨울에 오리 떼, 봄과 가을로 도요새가 물떼새와 함께 모여들어 게나 갯지렁이를 연실 집어삼키는 곳이다. 봄이면 뱀장어 암컷, 여름이면 은어 떼, 가을이면 연어 떼를 만날 수 있다. 산꼭대기에서 멀지 않은 샘에서 기원하는 강은 그렇게 수많은 생물을 거느리며 바다로 바다로 이어진다.

 

강물은 주변의 습지와 항상 연결돼 있다. 강으로 들어온 물이 모두 바다로 나가는 건 아니다. 일부는 증발하지만 많은 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어간다. 강물의 높이는 인근 마을 우물의 물 높이에 영향을 주고 논에 물이 배어나오게 한다. 극심한 가뭄으로 강물이 바싹 마르면 우물도 마르고 논도 타들어간다. 물고기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비가 내려 강물이 다시 흐르면 강바닥 축축한 곳에 숨죽이던 물고기가 나타나 강이 땅속과 연결되었다는 걸 잘 증명한다. 만일 강바닥에 비닐을 깔아 방수 처리한다면? 강의 생태계는 그만큼 손상될 것이다. 강 옆에 콘크리트 제방을 깊게 파묻는다면? 지하수위가 내려가 주변은 사막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평소 먼지가 풀풀 날리는 한강 둔치를 보라. 하안블록으로 강변을 마감하면서 방수처리를 했다. 강물의 이동이 차단되면 그 지역에 생물종이 사라지고, 생물종이 사라지면 강의 자정능력은 무너진다.

 

강은 시간과 연결돼 있다. 봄에 올라온 실뱀장어 암컷은 중상류로 올라 몇 년을 지내다 길이와 대가리가 커질 만큼 커진 가을에 강어귀로 내려간다. 기다리던 수컷과 만나 알을 낳으러 먼 바다에 가야 한다. 낙엽이 아름다운 가을에 무리지어 올라오는 연어는 제 몸보다 낮은 강바닥에 알을 낳고 쓰러져 죽지만 부화한 어린 연어는 이듬해 봄이면 일제히 바다로 나간다. 삼사년이 지나면 알을 낳으러 어미의 체취가 어린 모천을 다시 찾을 것이다. 이른 봄마다 계곡 바위틈에 붙었던 수백 개의 알에서 올챙이로 깨어난 계곡산개구리는 흐름이 느린 곳에서 낙엽과 물이끼를 뜯으며 성장하다 이른 여름에 작은 개구리로 변태, 비가 내리는 날이면 기를 쓰고 산으로 오른다. 산에서 홀로서기를 하다 가을이 깊어지면 동면을 위해 계곡의 바위나 돌 아래로 몸을 숨길 것이다. 알 낳을 내년의 이른 봄을 기다리며. 강이 풀리면 임이 탄 배를 기다리고 여름에 미역을 감으며 가을에 천렵 즐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마을의 문화와 역사를 연결하는 강은 그렇게 생태계의 사계절을 이어준다.

 

서해안과 남해안으로 빠져나가는 우리 강들은 해수면이 낮았던 빙하기에 옛 황하강의 지류로 이어졌다. 압록강에서 대동강, 예성강, 임진강, 한강, 금강, 영산강 들은 옛 황하강의 한 지류로 지금의 황해에서 만나고 다른 옛 황하강의 지류인 섬진강과 낙동강은 황해 아래 지역에서 만났다. 옛 황하강와 옛 양자강의 큰 지류는 대만 근처에서 거대하게 만나 바다로 흘러들었다. 동해는 옛 아무르강 유역의 빙하가 녹아 흘려든 거대한 호수였다. 그래서 좁은 한반도에 흐르는 강은 저마다 독특한 생태계를 가진다.

 

한반도에는 흔히 기름종개라고 말하는 담수어류 종류가 다양하게 분포한다. 얼핏 미꾸라지처럼 보이지만 미꾸라지보다 깨끗하고 찬물에 산다. 한강은 참종개를 품고 섬진강에는 왕종개가 서식한다. 눈으로 쉽게 구별되지 않는 두 종은 자연에서 서로 만나지 못한다. 동진강에는 점줄종개가 살고 섬진강에는 줄종개가 분포하는데, 두 종류는 1960년대부터 동진강에서 만나게 되었다. 동진강으로 흘려 발전하는 섬진강의 물이 섬진강댐의 용수터널을 지나면서 잡종이 발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남한강 상류와 금강 상류는 한 동안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에만 사는 금강모치는 두 지역에 고립돼 서로 만나지 못하지만 유전자는 거의 같다. 뿌리가 같은 것이다. 남획과 생태계 파괴로 지금은 남한에서 절종된 종어도 그랬다. 국립수산과학원이 중국에서 도입해 복원을 연구하는 종어도 금강과 한강에 제한 분포했다.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한 한강은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를 거쳐 김포시 월곳면을 지나 황해로 나간다. 497킬로미터다. 513킬로미터의 낙동강도 흐른다. 강원도 태백의 황지에서 굽이굽이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를 스치며 부산 을숙도를 지나 바다로 흘러든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를 거쳐 동해로 빠지는 59킬로미터의 오십천도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다.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분기하는 해발 920미터의 삼수령이 그곳으로, 삼수령의 빗방울은 떨어지는 기슭에 따라 만나는 물고기를 달리하며 서해와 남해와 동해로 멀어졌다.

 

동해안으로 향하는 하천에 피라미와 버들치는 없었지만 지금은 많다. 백두대간을 헤집는 도로공사로 상류 지역의 물 흐름이 섞이면서 한강과 낙동강에 살던 피라미와 버들치가 옮겨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로 인해 버들개가 동해안의 하천에서 점차 드물어진다. 한반도 운하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그로 인한 생태계 교란과 충격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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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배가 산을 오르내리는 현대의 운하는 강의 모든 것을 차단한다. 유럽의 중세, 긴 창이 미치지 않을 폭으로 파놓았던 운하는 작은 배를 밧줄로 묶어 운하 양 옆의 말이 끌었다고 한다. 그 시절 운하는 기껏해야 창끝을 피하는 정도였겠지만 거대한 철근콘크리트로 강의 흐름을 반듯하게 재단하는 현대의 운하는 강의 연결을 장벽처럼 차단한다. 홍수로 쏟아져 들어오는 물이 둑을 넘지 않아야 하는 까닭에 좌우의 연결을, 화물선의 이동을 확보하기 위해 댐과 보로 물길을 계단처럼 나누면서 상류와 하류의 연결을, 모래와 자갈을 긁고 암반까지 들어내면서 바닥과 땅속의 연결을, 생태계가 파괴되어 더욱 오염된 강물에 화물과 사람을 실은 배만 오르내리면서 계절의 연결을 차단한다. 강을 중심으로 유구하게 이어진 우리네 마을의 문화와 역사도 차단되고 말 것이다.

 

강으로 거슬러 산란하는 바다 생물만이 출입이 봉쇄되는 건 아니다. 개구리는 봄에 계곡과 그 주변 논에 알을 낳고 가을에 강바닥으로 동면에 들어가야 한다. 강변의 자갈과 모래밭이 사라지면 남생이와 자라는 산란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먹이를 찾을 수 없는 철새는 내려앉지 않을 것이다. 시방, 댐에 막혀 강을 거슬러오를 수 없는 연어와 뱀장어는 물론이지만 산간 깊숙한 1급수 계곡에서 옆새우를 잡아먹고 돌이끼를 뜯는 버들치는 안녕할까. 운하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걱정 말라고 호언한다. 경부운하의 경우, 한강과 낙동강 본류의 일부만 손댈 뿐, 나머지는 그대로 둘 것이므로 생태계가 보존될 거로 주장한다. 하지만 그럴까. 본류와 차단된 지류, 지류를 잃은 본류의 생태계는 보존될 수 없는 게 상식이다. 경부운하는 본류와 지류의 연결을 차단하지 않으면 유지가 불가능한데 전문학자라면서 어찌 그런 주장을 펼칠 수 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를 무시하고 콘크리트로 두 강줄기를 나중에라도 반드시 이어놓겠다며 벼르는 경부운하를 보자. 경부운하는 703개의 지천이 적시는 3만4천여 평방킬로미터 면적의 한강 유역과, 785개 지천이 적시는 2만3천 평방킬로미터 면적의 낙동강 유역을 질식시킬 것이다. 부산의 낙동강 하구언에서 김포의 한강 용강보까지 540킬로미터 대부분의 구간은 철근콘크리트로 좌우가 막힐 것이다. 19개의 갑문과 같은 수의 보 또는 댐, 그리고 아직 몇 개일지 길이가 어느 정도일지 불분명한 터널로 인해 굽이치던 한강과 낙동강의 물줄기는 멈춰 정체되며 다음 높이로 천천히 계단처럼 19차례나 미끄러져 내려갈 것이다. 모래와 자갈 속에 알을 낳던 수많은 생명들은 질식사하거나 정든 터전을 떠나고, 주변 농경지는 스며드는 물이 부족해 버림받을 것이다. 한강과 낙동강의 오랜 문화를 지키던 사람도 떠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추진하려는 사람의 주장을 근거로, 컨테이너를 3층을 쌓을 5천 톤 바지선이 다닐 경우에 수심 9미터, 2천5백 톤 바지선일 경우에 6미터의 수심을 유지해야 한다. 갈수기에 그 정도의 깊이를 유지하는 구간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강바닥을 적어도 배가 교차할 수 있을 만큼 넓게 파야할 텐데, 2천5백 톤 선박이라면 폭이 100에서 200미터, 5천 톤 선박이라면 200에서 300미터에 달한다. 강바닥의 자갈과 모래만 들어내면 되는 일이 아니다. 암반을 걷어내야 가능한 구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강 본류에 살던 생물은 일단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지만 나중에 돌아와도 소용이 없다. 바닥의 환경이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알 낳을 곳도 찾을 먹이도 사라졌을 것이므로.

 

강바닥을 준설하면 흙탕이 인다. 유리알처럼 깨끗한 계곡도 마찬가지다. 넓적한 돌 하나를 뒤집어도 이는 흙탕은 맑은 물이 흘러들어야 이내 깨끗이 씻겨 내려간다. 호수를 준설해 발생하는 흙탕은 좀처럼 씻기지 않는다.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문제는 호수는 단순한 흙탕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류에서 흘러든 축산폐수와 생활하수, 주변 농공단지에서 버린 폐수가 내려앉아 두꺼운 더께를 이루는 오니인 것이다. 오니를 휘저으면 간신히 안정되었던 생태계는 일대 혼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호수의 준설은 신중해야 한다. 악취가 진동을 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면 지역 주민의 동의를 거쳐 준설해야 하겠지만 되도록 호수의 물을 비우고 실시하는 게 좋다. 만일 수심을 유지하려고 오니가 쌓인 강바닥을 준설한다면 어떻게 될까. 준설로 악취가 발생하지만, 떠오른 오니는 하류로 내려가 다시 쌓일 것이다. 민원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물에서 살아갈 생명은 없다. 따라서 흐르는 강의 준설은 어지간하지 않으면 실행하지 않는다. 유입 오염원을 제거해 자연에 맡기는 방식을 택한다. 강에 사는 생물들에게 의뢰하는 거다.

 

한강과 낙동강의 본류가 오염되면 지류에 머무는 생물도 위협받기는 마찬가지다. 폭풍우나 국지성 호우로 떠내려간 물고기는 흐름이 약해지면서 상류로 거슬러오를 텐데, 그때 다른 계곡의 개체와 만나 유전자를 교환하게 된다. 그런 과정으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해야 환경변화에 대한 충격을 줄일 수 있는데, 강 본류를 준설해 썩은 물이 뒤섞인다면 상류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고, 그런 만큼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깊은 계곡에 사는 열목어나 버들치의 유전자는 단조로워져 환경변화의 충격을 이길 유전적 여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열목어와 버들치에서 그칠 리 없다. 한강과 낙동강의 중상류에 사는 숱한 생명들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경부운하를 비롯한 한반도 운하의 미래다. 강 일부만 손댄다 해도 그 영향은 강 전체로 파급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퍼센트 가까이 산지이고 비가 여름 한철에 집중된다. 다시 말해, 여름 한철의 빗물은 한순간에 하류로 흘러내려간다는 거다. 1년 중 비가 가장 많이 내린 날의 강수량을 가장 적게 내린 날의 강수량으로 나눈 ‘하상계수’를 비교해 보자. 한강은 393, 낙동강이 372로 매우 높다. 그만큼 홍수가 많다는 뜻인데, 이는 독일 라인강의 14와 큰 차이를 보인다. 강수량이 우리의 3분의2에 불과한 독일은 1년 내내 내리는 비의 양이 비슷할 뿐 아니라 강 유역이 편평해 운하가 위치하기에 적당하다. 유역면적당 홍수량이 우리의 20분의1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운하로 사용하는 강의 범람이 드물다. 그런 까닭에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운하들은 대부분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없다. 우리와 조건이 비슷한 일본을 어떤가. 일본에는 물류를 담당하는 운하가 없다. 대부분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드물게 비행기를 동원하지만 수출입 항구로 물류를 이동하기 위해 우리나라 이상으로 꽉 막히는 도로와 철도를 이용할 따름이다.

 

운하가 범람하면 둑이 무너질 수 있다. 둑이 무너지면 운하의 수면 아래에 놓인 농경지와 마을은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홍수를 대비해 미리 물을 뺄 수 없는 운하는 범람을 아주 조심해야 한다. 흙으로 만든 둑은 넘치면 무너진다. 운하의 둑 아래 있는 마을에 감당할 수 없는 침수가 발생할 것이다. 물이 넘쳐도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면 둑을 콘크리트로 만들어야 한다. 추진 측이 제시하는 최소 2500톤 선박이 다닐 수 있도록 수심을 유지한 상태에서 홍수를 대비하려면 운하 옆에 상당히 높은 콘크리트 제방을 장벽처럼 세우거나 운하 바닥을 깊게 파야 한다. 상류의 수심을 유지하기 위해 하류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 상황에서 홍수까지 대비하려면 더욱 높은 제방을 쌓거나 운하 바닥을 충분히 파내야 하는데, 그럴 경우 한반도 강의 생태계는 절딴난다.

 

상류에서 하류까지 19군데에서 흐름이 끊길 경부운하는 운하 양편의 콘크리트 제방에 의해 좌우의 생태계가 차단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콘크리트 제방으로 추이대에 장벽이 세워지면 강변에 남은 개구리와 뱀과 물고기는 새의 먹이가 되지 못한다. 접근하기 어렵지만 접근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직선으로 바뀐 운하 바닥에 자갈과 모래마저 퍼냈을 테니 먹이를 잃은 개구리도 뱀도 이미 사라졌을 것이므로.

 

운하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운하에 담기는 물이 늘어나므로 수질이 좋아질 거로 주장하는데, 전문가 연하는 처지를 망각하다니, 어처구니없다. 흐름이 멈추면 물은 썩는다. 물이 늘면 잠시 희석될 수 있으나 그렇다고 수질이 개선되는 건 아니다. 운하로 들어오는 오염물질을 차단한다고 오염이 즉시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스크루가 돌아 산소가 공급되므로 물이 정화된다는 추진측의 주장은 운하에 적용할 수 없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전례에도 없다. 운하는 새우 양식장이나 어항과 다르다. 스크루는 운하 바닥의 오니를 오히려 떠오르게 할 뿐이다.

 

운하를 오고가는 선박에서 나오는 오폐수는 물론이지만 선박 사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운하 추진세력은 파도가 없으므로 사고 확률이 매우 낮다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본받으려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운하에서 발생하는 사고는 그 기대를 저버리게 한다. 하루에 한 차례로 꼴로 사고가 발생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경부운하에서 선박이 시간당 33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일 거라고 추진 측은 호언한다. 국제적으로 사상 유래가 없는 속도다. 독일은 시간당 13킬로미터 이하로 선박이 움직이지만 선주는 8킬로미터를 넘으려 하지 않는다. 13킬로미터가 넘으면 선박이 발생시키는 물결로 둑이 무너질 수 있어 규제하고 있지만 8킬로미터가 경제속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독일의 경우, 운하에서 발생하는 이윤이 선박을 경영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다. 운하 경험이 전혀 없는 우리는 어떨까.

 

수심을 유지하기 위해 모래와 자갈을 암반까지 퍼내면 지하수맥은 오염되거나 차단되지 않을 수 없다. 운하 양옆을 높게 막는 콘크리트 장벽은 운하의 바닥보다 깊게 박히지 않으면 안 된다. 홍수 때 발생하는 수압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전에 비해 낮게 흐르는 운하의 수면 때문에 주변의 농경지는 갈수기마다 바싹 마르게 된다. 운하의 바닥을 파낸 만큼 지하수위가 내려가는 까닭이다. 농경지도 중요한 생태계다. 농작물 이외에 수많은 동식물이 공생한다. 논과 밭이 주변의 생태공간과 이어지므로 사람도 삶을 꾸려갈 수 있다. 운하의 물은 농경지에 사용할 수 없다. 오염돼 쓸 수 없지만 수심을 유지하기 위해 금지될 것이다. 지하수면이 낮아지면 주민들은 마실 물을 구하기 어렵게 되고 지하수와 연결되는 생태계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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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7일 경향신문은 대운하 건설업체들의 용역을 받아 2007년 말에 제작된 ‘설계보고서’를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한반도 대운하’로 수질 오염과 생태계 교란 같은 환경 악영향이 우려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운하 건설로 수량이 풍부해지고 바닥에 퇴적된 오염물질을 준설로 긁어내는 효과가 있어 수질이 좋아진다.”고 주장해왔던 추진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하지만 “수질, 지하수, 동식물, 철새, 선박사고 등 각 측면에서 환경에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힌 보고서는 운하 중단을 고려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부 눈치 살펴야 하는 사업자라 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1970년대 후반, 군사독재 정권이 날조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에 연루, 긴 세월 동안 프랑스에 망명해야 했던 논객 홍세화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고 말했다. 상징적 표현이다. 쎄느강이 나눈 프랑스의 좌우는 의회와 현실 사회에서 자주 만나지만 의기투합하지 않고, 한강이 가른 남북은 휴전선을 사이로 대치하지만 통일을 염원하는데, 두 강은 장벽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생태계와 삶을 연결할 뿐 아니라 문화와 역사의 오랜 가교의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그런 역할은 한반도에서 운하가 생기기 전까지에 한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새로운 공안 정국이 시작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을 탄압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는 가운데, 정보기관에서 한반도의 운하 개발을 반대하는 교수들의 성향을 수집하려고 나선다. 길들이려는 것일까. 공안 정국은 시민과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입으로만 반성하고 걸핏하면 소통을 강조하지만 현 정권은 시민의 의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시민을 그저 홍보대상으로 여기며, 논란을 부를 정책을 밀실에서 입안한 후 강요한다. 거기에 이른바 ‘폴리페서’라 칭하는 해바라기 지식인이 동원된다. 광우병 발생 가능성이 높은 미국산 쇠고기를 굴욕적으로 수입하기로 결정한 데에서 두드러지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예는 집권 초기부터 잇따르고 있지만 경부운하로 대표되는 한반도 대운하도 마찬가지다. 4대강 정비로 위장한 채 시민을 속이려 들 뿐이다. 

 

정치사상가인 더글러스 러미스는 최근, “민주주의의 반대는 경제성장”이라고 설파했다. 경제성장이라는 명분으로 독재가 자행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반대가 독재였던 시절, 민주화운동은 비교적 쉬웠다. 싸워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경제성장이라는 마패 앞에 생태계와 문화는 물론, 자식 키우는 시민의 행복과 내일의 지속가능성도 굴종시켜야 하는 분위기에서 한반도의 운하 강행 계획은 싹이 텄다. 내일을 담보로 하는 불순한 세력의 이윤동기가 자양분이 되었을 터다.

 

후손에게 건강한 생명을 전해주려고 조상은 우리를 낳았다. 개발업자의 한시적이며 배타적인 이익을 위해 후손을 몰아내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한반도의 운하 계획은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이라면 한반도의 운하를 막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후손의 처지에서 영원히 씻지 못할 범인이 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도 한반도의 강은 내일을 향해 흐른다. 생명을 이어지도록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았다는 뜻이다. 다만, 마음이 몹시 초조하다. (환경과 생명, 2008년 여름호)

먹이이야기도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