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12. 1. 21:02

 

모든 생명은 물이 그 흐름을 매개한다. 몸에 받아들인 영양분을 필요한 장기와 세포로 이동시키는 피도 물이고 생명이 잉태하는 공간을 안락하게 채우는 것도 물이다. 물에 알을 낳는 무척추동물이나 물고기만이 아니라 곤충이나 새들의 알도 그 안에 영양분을 포함하는 물이 채워져 있기에 생명체가 부화할 수 있다. 사람과 같은 포유류도 마찬가지다. 자궁 안에 양수가 있으므로 생명을 안전하게 잉태할 수 있다. 식물의 씨앗도 물이 없으면 움틀 수 없다. 무릇 물에서 태어난 생명은 물을 통해 영양분을 얻으며 성장해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거다. 물이 몸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생명체들의 운명이 필시 그럴 것이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미국 우주항공국은 달 표면에 탐사위성을 충돌시켜 물이 존재하는 사실을 알아냈다. 달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는 거라고 성급하게 분석한 이도 있었다. 사막에 사는 생물은 드물다. 물이 드물기 때문이다. 인천시 앞바다의 150여 섬 중 100여개 섬에 사람이 살지 않는 주된 이유는 마실 물을 찾을 수 없거나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이 충분하고 그 물에 영양분이 풍족하다면 생명체는 충만하게 된다. 육지의 늪이 그렇고 바닷가의 갯벌이 그렇다. 사람이 심은 농작물 일색으로 보이는 논밭과 과수원도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아니, 아니었다.

 

수리답과 농기계가 보편화된 지금에 와서 달라졌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전적으로 매달려야 했던 천수답 시절, 우리네의 논둑은 등고선을 그려놓은 듯, 하나 같이 삐뚤빼뚤했다. 산과 언덕, 그리고 크고 작은 저수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놓기 위한 농부들의 손길이 그리 만들었다. 그런 논의 한 구석에는 어김없이 물웅덩이가 있고, 그 물웅덩이는 온갖 생물로 어우러졌다. 붕어와 납자루 떼가 유영하는 물웅덩이에는 개구리가 첨벙이고 거머리가 꿈틀거렸으며 잠자리 유충과 물방개가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가끔 물을 비울 때마다 깊은 바닥에 몸을 숨기던 가물치 한두 마리와 미꾸라지를 한 주전자 잡게 해주던 물웅덩이는 그 땅에서 논농사를 지은 이래 계속된 농경사회의 오랜 생태계였다.

 

농경지에도 수많은 생물이 어우러져 있다. 습기가 게 있기 때문이다. 모내기를 위해 써레질할 때 바글거리는 올챙이는 농부에게 귀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모기 유충인 장구벌레를 잡아먹는 올챙이들이 개구리가 되어 온갖 해충들을 먹어치운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다가오는 뱀을 반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뱀이 있으므로 쥐가 늘어나지 않기에 그저 농촌에서 함께 사는 존재로 받아들였다. 이른 봄 논둑과 밭둑에서 동면하는 곤충을 없애려 불을 놓을 때, 우리 농부들은 벌레의 씨는 남겨달라고 노래했다고 인류학자는 채록한 자료를 설명한다. 벌레가 어느 정도 남아야 개구리와 뱀과 새들이 찾아와 농토를 지켜준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리라. 농부는 해충 몫의 농작물을 어느 정도 배려한 걸지 모른다.

 

유럽의 옛 맹주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황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버찌를 먹어치우는데 진노하고 참새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하지만 참새가 줄어들자 들끓는 해충으로 버찌는커녕 벚나무 잎사귀까지 뜯겨나가는 게 아닌가. 그제야 프리드리히 국왕이 참새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는데, 그 비슷한 이야기는 많다. 말라리아모기를 퇴치하려 움막에 디디티를 뿌리자 디디티에 견딘 바퀴가 도마뱀의 먹이가 되었는데, 디디티에 오염된 바퀴를 먹고 둔해진 도마뱀을 고양이가 잡아먹자 예기치 않은 재앙이 발생했다는 거다. 고양이가 죽자 쥐가 들끓어 페스트가 만연하기 시작했으며 이번엔 도마뱀이 없는 움막에 급격히 늘어난 나방 유충이 서까래를 갉아먹어 지붕이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는 보르네오의 이야기. 그 이야기는 이미 고전이 되었다. 밭에 살충제를 뿌리자 벌레들이 비실거렸고, 그 벌레를 쪼아먹은 닭이 비틀거리자 내다 팔기 어렵다 생각한 농부가 닭을 삶아먹고 쓰러졌다는 이야기는 결코 꾸며낸 게 아니다.

 

우리의 영원한 길조 까치가 요즘 총으로 퇴치해야 할 유해조수가 되었다. 과수원의 사과와 배를 쪼아 상품가치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란다. 전에도 과수원이 있었고 그때도 까치가 많았건만 왜 요즘에만 문제가 되는 걸까. 이웃과 수확한 과일을 나누던 시절에는 관대했지만 중간상인에 넘겨 목돈을 받는 시대로 바뀌면서 까치에 유독 민감해진 걸까. 그럴지 모른다. 봄에 가지치기를 제대로 하면 햇살과 비바람을 맞으며 과일을 키우던 나무는 벌써 사라졌다. 예전에는 인건비와 제초제와 살충제와 화학비료에 들어가는 비용이 없었지만 수확이 많아도 병충해에 약한 나무를 획일적으로 심는 요즘은 돈 들이며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이익은커녕 농협 이자도 갚지 못할 수 있다. 그러니 까치에 배려할 과일은 있을 수 없다.

 

한데, 소백산 자락에서 유기농법, 아니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과를 재배하는 한 농부의 경험담은 달랐다. 나무 아래 무성한 풀을 그대로 두자 벌레가 늘 많았는데, 평소 벌레를 잡아먹는 까치는 여간해서 사과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제초제와 살충제로 잡초와 곤충을 깨끗하게 제거한 과수원 주변의 까치는 먹을 게 없으니 과일을 건드릴 수밖에 없고, 익지 않은 과일을 까치들이 지분거리면서 껍질에 상처가 난 과일들을 농부는 화가 잔뜩 난 상태에서 버릴 수밖에 없지만 자신은 달랐다는 거다. 맛있고 실한 벌레를 잡아먹다 가끔 익지 않은 과일 몇 알을 건드린 까치는 맛이 떫어 진저리치게 될 테니 아예 외면하게 된다는 게 아닌가. 덤벼드는 까치가 싫어 망으로 과수원을 뒤덮어도 소용없다고 한다. 어느 구석의 그물코를 끊고 들어왔다 그 자리로 휙 나가버리는 통에 당해날 재간이 없다는 게 아닌가. 뚫린 곳을 겨우 찾아 메워도 금방 다른 곳을 뚫는다고 한다.

 

일본 아오모리 현의 한 과수원 농부는 10년 동안 참고 노력한 끝에 이른바 ‘기적의 사과’를 생산하게 되었다고 한 방송의 특집은 전한다. 살충제와 제초제를 뿌리지 않아 과수원에 풀이 무성해도 일체의 화학비료를 주지 않았는데 10년이 지나자 당도가 높고 잘 썩지 않는 사과를 해마다 실하게 맺게 되었다는 거다. 생존력을 믿고 무던히 기다리자 줄기가 두꺼워진 나무는 땅속 깊이 뿌리내리면서 지적의 사과를 생산하게 되었다는 건데,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농약과 화학비료를 뿌린 이웃 과수원은 사정이 달랐다. 흙은 단단했고 줄기와 뿌리도 약했다.

 

제초제와 살충제로 풀과 미생물을 죽으면 흙은 단단하게 뭉쳐져 뿌리가 깊게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땅 위에 살포하는 화학비료는 뿌리를 더욱 얕게 만든다. 그런 과수원에 내리는 빗물은 화학비료 묻은 표토를 휩쓸고 내려가니 뿌리는 물을 충분히 빨아들이지 못한다. 하는 수 없이 농부는 그때그때 물을 주지 않으면 안 될 테지만 기적의 사과를 생산하는 과수원은 다를 게 틀림없다. 풀로 뒤덮인 부드러운 흙에는 미생물이 땅속 깊이 충만해 있을 테고 풀숲에서 땅속으로 빗물이 잘 스며드는 까닭에 나무는 수분을 충분히 흡수하게 될 것이다. 홍수 피해는 당연히 최소화될 것이고.

 

농촌이나 사람이나 논두렁 밭두렁의 생태계가 다채로울 때 건강했다. 물과 영양분의 순환이 원활하기 때문이다. 땅이 습하고 부드러우면 뿌리가 깊게 내린다. 그 흙에 미생물과 지렁이가 늘어나면 땅강아지와 두더지가 나타나 뿌리를 조금 건드리겠지만 뿌리는 오히려 더 건강할 수 있다. 땅강아지와 두더지가 흙을 헤집어야 땅속에 공기와 물이 들어가 다양한 미생물이 풍성해지며 뿌리가 튼실해질 게 아닌가. 생산량도 절로 늘어날 게 틀림없다. 화학농업으로 황폐된 농토에서 유기농업을 고집한 한 농부는 개구리가 나타나자 “개구리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하늘에 고마워했다. 영양분이 넘치는 깨끗한 물이 모이며 살아난 땅은 드디어 안전한 농산물을 선물로 내놓기 시작한 터였다. 하지만 요즘 논두렁 밭두렁에 두더지는커녕 개구리와 땅강아지 한 마리 없다. 땅이 사막화된 거다. 높은 가지의 감을 까치밥이라 남겼던 조상의 지혜를 눈앞의 욕심과 바꿔버린 결과다. (사이언스올, 2009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