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3. 7. 25. 22:03


더글러스 러미스라는 사상가는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물었다. 경제가 어느 이상 성장하지 않으면 기업은 풍부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니 규모를 줄여야 하고, 여파로 실업이 속출하니 개인은 빚에 쪼들리게 되므로 경제는 성장해야 한다고 주류 경제학자와 경제 담당 기자들은 이야기한다. 경제가 충분히 성장하면 그 사회는 풍요로울 게 분명한데, 더글러스 러미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경계성장이 없어도 풍요로울 수 있다는 건데, 무슨 뜻일까.


구입할 물건이 풍부하면 정신이 풍요로워지는 사람이 많겠지만 아닌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이야기하는 풍요는 경계 전문가가 흔히 이야기하는 풍요와 성격이 다를 듯한데, 요즘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과거, 버는 돈도 구입할 물건도 훨씬 적었으므로 조상들이 우리보다 불행했을까. 경험에 미루어 경제성장이 안되면 기업과 개인이 어려움을 겪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 조상들은 달랐다. 해마다 일정 비율로 경제가 성장하지 않았을 텐데, 불행하지 않았다. 더글러스 러미스 주장은 과거의 경험에 제한된 주장일까.


경제 이론에 문외한이지만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자니, 경제성장 강박은 이자와 무관하지 않겠다 싶다. 월급으로 받든, 장사를 해서 벌든, 우리는 대부분 은행에서 발행하는 돈을 빌려서 쓴다. 돈은 교환수단이다. 물물교환으로 텔레비전 사려는 농부는 쌀가마니 몇 개를 짊어지고 백화점을 찾아야할 테지만 돈이 있다면 그럴 필요 없다. 돈의 표면에 기록된 숫자를 텔레비전 가격만큼 모아 전달하면 된다. 요즘은 굳이 돈을 갖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은행이 인정해주는 신용카드로 계산하면 그만이다. 무척 편리해졌지만 우리는 빌린 돈을 반드시 갚아야 하는데, 은행은 이자를 요구한다.


종이나 신용카드로 거래하는 돈은 얼마나 풀려야 적당한가. 돈으로 교환할 물건의 양보다 많으면 인플레이션,적으면 디플레이션이 생긴다고  교과서는 주장한다. 돈이 넘치면 가치가 그만큼 떨어지고, 시장에 물건이 넘쳐도 돈이 부족하면 쫄쫄 굶는 이가 늘어난다. 따라서 교환할 물건의 가치만큼 돈이 돌아야 사회도 경제도 안정되는데, 은행은 이자를 발행하지 않았다. 이자만큼의 돈은 없으니 이자는 의자 뺏기 놀이와 다르지 않다. 이자만큼 돈을 은행에서 더 발생하려면 물건을 더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성장이 없으면 의자를 빼앗기는 이는 늘어날 것이다.


사람이든 생태계든 희생이 뒷받침될 때 이자를 요구하는 경제는 잘 성장한다. 식민지에서 자원을 정당한 대가 없이 가져오고 노예를 부릴 때 경제성장은 순조로웠다. 돈을 더 발행하고 물건을 더 만들어내도 충분히 소화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헐값으로 가져올 자원이 거의 남지 않았다. 노예 노동에 억지로든 흔쾌하든 응할 사람을 점점 찾기 어렵다. 강남의 화려한 건물이 유지되는 건, 강북의 일용직 노동자가 착취와 다름없는 노동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인데,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까.


한 국가의 경제가 세계에 연동되면서 이자를 낼 정도로 돈이 때때로 순조롭지 않다. 중국을 보자. 세계 불황이 닥치자 싼 임금으로 혹사당하던 농민공들이 일자리가 사라진 도시를 떠나 땅이 있는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중국에서 물건을 받아야하는 나라들이 이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현재의 어려움은 다음세대로 이어진다. 자원은 보충되는 게 아니지 않는가. 경제성장을 위해 흥청망청 소비했던 석유는 지구온난화를 유발하더니 고갈을 눈앞에 두었다고 한다. 다른 자원들도 사정이 비슷한데,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불황은 깊어지지만 은행은 여전히 이자를 요구한다.


지금 이 시간 덕수궁 대한문 앞의 좁은 길은 영정을 품에 안은 이들을 에워싼 경찰들로 빼곡하다. 그뿐 아니라 얼렁뚱땅 만든 보행자도로 위의 꽃밭을 일단의 경찰이 후텁지근한 여름에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다. 해외토픽에 등장할 장면이다. 여유와 자신이 있는 국가라면 민원인을 그렇게 거리로 내몰고 고통까지 안기지 않을 텐데, 안타까운 노릇이다. 하긴 작금에 벌어지는 기묘한 상황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원인을 제공한 기업은 왜 이제껏 아무 움직임도 연출하지 않는 것일까.


대한문 앞에 나와야 할 정도로 심각한 사태를 노동자에게 전가한 기업은 그 동안 적지 않은 이윤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더욱 분노하지만, 입 다문 자본주도 핑계가 없는 건 아닐 것이다. 경제가 범세계적으로 위축되는 상황은 개선될 조짐이 없는데 은행은 끊임없이 이자를 요구하므로, 갚으려면 노동자와 맺은 약속을 저버릴 수밖에 없다고 핑계대고 싶을지 모른다. 하는 수 없이 많은 자본주들이 해외의 조세피난처에 재산을 숨겼을 거라고 얼버무리고 싶을 수 있다. 자신들의 커다란 의자는 결코 빼앗길 수 없으므로.


생각해보자. 산유국에서 쉬쉬하지만, 생산하는 석유는 늘어나기만 하는 소비량에 미치지 못한지 벌써 여러 해 지났고, 그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은 없다고 관련 전문가들은 단정적으로 주장한다. 지구온난화의 주범 중의 하나로 지목되는 자동차산업은 이자 요구하는 경재체제에서 전도양양할까. 다른 산업은 어떨까. 노동자 해고는 어쩔 수 없다는 의미로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합의를 전제로 양보와 타협 없는 해고는 지탄받아야 하고 노동자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야 마땅하지만, 노동자도 현 경제체제의 한계를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의미다. 범세계 핵발전소 노동자처럼 재생 가능한 전기산업과 같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래 되었지만, 영국의 루카스 항공 노동자들은 해고되자 시민들이 원하는 기술을 마음껏 발휘한 적 있다. 대한문에서 분노를 삭이는 노동자들이 부품만으로 차 한 대를 뚝딱 만들었다. 그들은 다른 물건도 만들 숙련된 기술을 가졌을 텐데, 자동차 이외에, 석유위기와 지구온난화를 대비한 물건을 창안해 만들 수 없을까. 우리나라의 재생 가능한 에너지 산업에 선봉이 될 수 있을 텐데. 새로운 일을 착수하려면 자본이 걱정일 테니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협동조합을 모색할 수 있다. 이자에 희생되지 않은 시절처럼, 경제성장이 없어도 불행하지 않던 조상의 삶으로 돌아가면 고통은 희망으로 바뀔 수 있다. (작은책, 20138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11. 20. 11:05

 

올해는 경인(庚寅)년 호랑이띠의 해다. 해마다 그렇듯 다사다난했던 기축년을 보내고 대망의 2010년이 시작된 거다. 미국에서 비롯된 경제한파가 본격적으로 걷히고 이제 경제성장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호랑이 해. 아직 고용이 불안하지만 성장이 진행되면서 소비도 진작될 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우리나라의 올해 성장치를 4.4퍼센트라 예상했다. 한국개발연구원과 민간경제연구소도 비슷한 전망을 내놓으며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를 견인할 것으로 기대한다. 공연히 우쭐해지는 순간이다.

 

이맘 때 잇따를 신년회마다 “발전”을 외칠 것이다. 꼭 신년회가 아니더라도, 회식이나 뒤풀이 장소에서 언제나 듣는 “무엇 무엇의 발전을 위하여!” 이어 박수가 여기저기 술자리마다 터져나올 테지. 선거철이 다가오는 만큼 “위하여”니 “위하야”니 하며 우스개를 나누는 풍경도 없지 않겠지. 그래서 누군가는 “위해서”라 한다는데, 그랬더니 동쪽에 사는 이가 서운해했다나, 어떻다나. 아무튼, 새로운 10년이 열리는 올해, ‘발전’은 가장 뚜렷한 화두일 게 틀림없다.

 

한데 ‘발전’이라는 말. 사극의 대사로도 어색하지 않지만 사실 그리 오래된 말이 아니다. 1949년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의회 연두연설에서 꺼낸 게 시초라고 한다. 사진 현상에 주로 사용하던 디벨롭(develop)이란 용어를 개발 또는 발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저개발국가와 선진국이라는 개념을 의도적으로 퍼뜨렸다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게 미국적인 삶을 모델로 여기고 따를 것을 대외에 천명한 셈이었다고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 같은 이는 해석한다. 많은 이들이 별 생각 없이 ‘선진국’이란 말을 부르짖는다. 하지만 미국적 삶에 고개를 흔드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는 점을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경제에 문외한이지만, 발전이나 경제성장은 소비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상식 정도는 안다. 소비를 하려면 고용이 있어야 하고, 임금을 지불하려면 만들어낸 물건이 팔려야 한다. 세계의 수많은 공장과 기업에서 만들어내는 유무형의 상품들. 살아가는 데 진정 필요한 것들인가. 어떤 황제보다 호화스럽게 먹어대는 음식들. 아무리 배불러도 반나절만 지나면 다시 배가 고파지는 건 라면 곱빼기도 마찬가지인데 우린 지나치게 많이 먹고 많은 쓰레기를 후손에게 넘긴다. 그런 음식을 준비하느라 얼마나 많은 낭비가 조장되었던가. 결국 지구온난화를 부르지 않았던가. 음식만이 아니다. 의식주가 다 마찬가지다.

 

어떤 경제학자는 아무리 천박한 기준으로 평가해도 행복은 소득 순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소득 1만 달러가 될 때까지 행복은 비례하지만 소득이 더 증가한다고 행복 지수도 덩달아 높아지는 건 아니라는 거다. 장작에서 연탄으로 밥해먹다 석유곤로를 들여와 마음이 놓였지만 가스레인지가 나온 후 몸이 달았을 것이다. 가스레인지를 구입하고 뿌듯했을 때가 1970년대 중반이었다. 하지만 전자레인지가 시중에 나왔고 그것마저 구입하게 되었다. 대략 소득 1만 달러가 된 즈음이었을 게다. 사는데 필요하다 싶은 물건은 1만 달러 소득 정도면 충분하다는 의미일 테지.

 

1만 달러 소득에 이어 4만 달러로 늘어나는 동안 행복은 대체로 정체된다고 한다. 멀쩡한 물건을 더 근사하게 광고하는 것으로 바꾸며 지내지만 그에 부응할 돈을 버느라 삶은 지치고 지겨워진다는 건데 소득이 4만 달러를 넘어가면 행복은 오히려 줄어든다고 한다. 그때부터 소비는 질시에서 비롯된다는 게 아닌가. 아침에 끼고 나갈 장갑을 미리 데워놓는 기계를 옆집에 구입해 자랑한다면 질투가 나고, 즉시 더 좋은 제품을 들여놓아야 분이 삭지 않는다면? 행복과 거리가 멀 것이다. 언제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고 광고했는데 얼마 전에는 “댁에는 있쑤?”로 바꿨고 이젠 “엄마 우리집은?”하며 약을 올린다. 없어도 그만인 물건을 그렇게 파는 시대가 되었다.

 

2008년 6월, 전자상가가 밀집된 일본 동경의 아키하바라에서 평범한 직장인이 지나가는 시민들을 다짜고짜 찔러 죽인 이른바 ‘묻지마 살인극’이 백주에 자행되었다. 한데 더 끔찍했던 건 사람들이 그 광경을 무심코 바라보거나 신음하는 이웃을 외면하며 지나쳤으며, 어떤 자는 신기하다는 듯 핸드폰으로 사진을 냅다 찍었다는 사실이었다. 발전! 경제성장! 강박 속에서 속도와 경쟁에 치어지내는 자의 몸에 체온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당시 나왔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을 아직 간직하는 우리는 아니 그럴 거로 확신할 수 있을까. 존댓말이 우리 이상 복잡한 일본은 겉보기 무척 친절하다. 그들의 가슴도 전에는 따뜻했을 것이다.

 

호랑이는 발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빨이 더 날카로워지면 남과 겨루고 싶어질 텐데, 그런다고 먹이가 늘어나는 건 아니다. 삼라만상이 다 그렇듯, 경합보다 양보와 타협을 택할 것이다. 빌 게이츠는 기부의 기쁨을 알고부터 일에서 손을 뗐다. 빌 게이츠 같은 부자만이 아니다. 가난해도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이 베풀 줄 안다. 발전이라는 거. 이웃을 그들의 시선으로 배려할 수 있을 때 깃드는 게 아닐까. (야곱의우물, 2010년 1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7. 11. 15. 12:46

 

     지난 11월 13일, MBC ‘PD수첩’은 색다른 방송을 보여주었다. 전라남도 나주시의 한 천주교 기도원에 있는 피눈물 흘리는 성모상이 22년 동안 많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허위사실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아니 가톨릭도? 어처구니없었다. 교주 역할을 자임하며 치부하는 신자가 가톨릭에도 있다니.

 

“종교를 빙자한 사기행각”으로 규탄한 네티즌들과 더불어 그 성모상을 100일 동안 지켜본 한 신부가 기적의 가능성을 전면 부정해 다행이었는데, 가톨릭 이외의 종교였다면 어떤 반응이 이어졌을까. 우리는 길거리에 흩어진 부흥회 전단을 보곤 한다. 기독교를 내세우는 어떤 목사나 부흥사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내용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려니 하고, 기독교계는 물론, 어떤 네티즌도 전단의 사실 여부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번 방송엔 달랐다. 가톨릭에 대한 세간의 신뢰를 엿보이게 했다.

 

종교(宗敎)는 가르침의 으뜸이자 근본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에서 큰 가르침을 받는다. 이천년 전, 청년 예수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울림이 큰 가르침을 주었고, 그 가르침은 종교가 되었다. 예수만이 아니다. 붓다나 마호메트도 종교로 이끈 가르침을 주었다. 우리는 종교에서 가르침을 구한다. 가르침이 없거나 함량미달일 경우 우리는 종교라 말하지 않는다. 황당무계한 교리를 들고 나오는 경우 우리는 ‘사이비’라는 단어를 그들이 주장하는 종교의 이름 앞에 붙인다. 인간복제를 찬양하는 라엘리언무브먼트도 그런 사이비 종교 중의 하나일 것이다.

 

황우석 전 교수는 사실상 사이비 종교의 교주였다. 과학기술의 근본 한계가 분명한데도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해주겠다고 황우석 전 교수가 외칠 때, 많은 시민들은 할렐루야를 복창했다. 사기극이 들어났을 때, 98대2라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준 98퍼센트의 시민들은 속속 드러나는 증거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아직 그 사이비 종교는 불씨를 남기고 있다. 아직도 가끔 부흥회를 연다. 구호는 애국이다. 태극기를 온몸에 휘감고 황우석의 재림을 갈구하며 여성의 몸과 후손의 생명 착취를 정당화하려 든다.

 

배아복제 연구의 부당성을 제기하는 시민운동에 어렵사리 나설 적에 가톨릭은 활동가에게 적지 않은 힘이 돼 주었다. 교리 이외에도 과학적 논리를 정연하게 제시하여 지친 활동가를 격려했다. 하지만 한계도 보여주었다. 황우석 사태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야 할 가톨릭 신자, 배아복제 연구의 다른 한 축을 담당했던 당시 마리아생명공학연구소의 박세필 박사에게 관대했던 것이다. 사람의 배아줄기세포를 쥐 수정란과 섞은 행위를 자신의 연구 성과로 내세우는 박세필 박사는 가톨릭 신자임을 새삼 강조했건만, 가톨릭은 무응답으로 대응한 것이다.

 

우리는 현재 예수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을까. 청년 예수는 성전 앞에서 부당한 거래를 일삼는 모리배에 채찍을 휘둘렀는데, 우리는 그 채찍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요사이의 사이비 종교는 단연 경제다. 민주주의의 반대가 독재였을 시절, 우리는 싸워야 할 대상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때 가톨릭은 행동했다. 『겅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민주주의의 반대를 ‘경제성장’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성장에 모든 이론과 행동이 종속되어야 하는 요즘,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분명하지 않다. 적은 내 안에도 있다. 그럴 즈음, 생명공학은 윤리적 정당성마저 찬탈한다. 교활하게도 경제와 부가가치를 내세우는 것이다.

 

서울시 중견 사제에게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관련된 생명공학의 문제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황우석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나는 가톨릭 신자도 아닌 주제를 잠시 잊고 박세필 박사를 파문시켜야 한다고 감히 주장했다. 하지만, 남양주시의 연수원에 모인 신부님들은 자못 비장한 비신도의 진지한 제안을 점잖은 웃음으로 받아넘겼고, 나는 그만 개그맨이 되었다. 강의를 마치고 나무가 우거진 연수원을 참담한 기분으로 빠져나가는데 문이 반쯤 열린 신부님 숙소에 골프가방이 보인다. 골프와 배아줄기세포 연구 반대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신부님들은 아실까. 박세필 박사는 현재 제주대학교 교수다. 제2 제3의 황우석은 계속될 분위기다.

 

최근 출간된 『바야돌리드 논쟁』을 읽었다. 16세기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에서 벌어진 도미니크 수도회의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수사와 히네스 데 세풀베다 신학자 사이의 역사적인 논쟁을 소설 형식으로 각색한 책 『바야돌리드 논쟁』은 전해오는 기록을 근거로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썼고 이세욱이 번역해 샘터에서 얼마 전에 출간했다.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격적 권리를 놓고 노회한 신학자와 성마른 수사가 닷새 동안 치룬 격론, 지금은 그런 논쟁은 재현되지 못한다. 논쟁을 진행한 추기경이 인디오의 인격을 존중하기로 결론을 낸 것으로 소설은 그리는데, 저자는 추기경이 노예가 필요한 백인의 실리적 목적도 채워주었다는 걸 암시한다. 아프리카의 흑인의 인격을 무시했던 것이다. 지금의 가톨릭은 어떤가.

 

자칭 중산층이 밀집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훨씬 전에 문을 연 성당은 날이 갈수록 교세가 확장된다. 한적한 농촌이던 시절의 성당은 민중의 이해와 함께했고 소외되는 자의 희로애락을 끌어안았는데, 중산층 신자로 둘러싸인 요즘, 성당은 세상의 고통과 절연된 모습을 보여 가끔씩 맥이 빠진다. 가톨릭을 둘러싼 현실은 경제성장이라는 사이비 교리에 젖어 가난한 이와 여성과 후손의 생명이 착취되고 기후변화 앞에 생태계의 운명은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건만, 비신자는 느끼는 가톨릭의 목소리는 청년 예수와 거리가 있다. 마루 종(宗) 자를 쓰는 가르침, 가톨릭이라는 宗敎의 존재 이유에 충실하지 못하다.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종교는 경제성장에 종속될 리 없는데.

 

그래도 가톨릭이라는 종교에 아직 믿음을 가진다. 황우석 사태 때 일관되게 보여준 자세와 나주의 성모상에 반응한 모습에서 신뢰를 놓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작더라도 제 목소리를 잃지 않은 신부님과 신자들이 많기에 든든하다. 경제성장을 되뇌는 대통령 후보들을 목소리를 높이는 이때, 가톨릭의 존재 이유에 계속 기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 없다. (지금여기, 2007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