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3. 9. 12. 12:07

66일 현충일이면 수원의 한 과수원에서 끝물 딸기 실컷 먹었던 70년대 말,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치면 일단의 젊은이들은 서울 노원구의 불암산을 향했다. 하산할 때 근처 과수원에 들려 가지에 매달린 마지막 배를 실컷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 딸기는 겨울이 들어서기 전부터 식탁에 오른다. 5월 딸기는 자취를 감췄는가. 하늘이 구만리로 넓어진 늦가을에 출하되던 배도 거의 보기 어렵다. 계절을 잃은 배는 추석 전에 선보인다.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이라는 소박한 환경단체가 있다. 추석이 다가오는 9, 새삼 과수원으로 농사를 시작한 초보농부가 생각난다.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설립된 그 환경단체에 회원이 된 그의 경험담을 들어보자.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다 장기 휴가를 내고 인도를 여행하던 그는 며칠 자원봉사하려는 요량으로 테레사 수녀의 선교회를 들렸다. 하지만 그는 선교회에서 6개월 동안 중증 환자를 돌보게 되었고, 귀국하자마자 귀농을 결심했다. 태어나 도시를 떠나 생활하지 않은 그는 연고가 없는 지역의 과수원을 덥석 구입했다. 삽자루 쥐고 땅을 판 적 한 번 없지만 텔레비전에 비치는 과수원이 낭만적으로 보였기에 망설이지 않았는데, 오산이었다. 그래도 땅을 죽이는 화학농업은 피하기로 했다.


그가 구입한 과수원은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존해 하마다 3천 상자의 배를 생산해왔지만 유기농으로 바꾸자 소출은 10분의1에 미치지 못했다. 초보 농부이므로 만족하고 중간상인에 넘기려 하니, 이런! 백화점에서 파는 유기농 배 가격보다 터무니없이 낮은 게 아닌가. 자존심이 상한 그는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 노크했다. 중간상인에게 파느니 자연에 대한 존경심 회복을 위해 행동하는 회원에게 자신의 수확물을 싸게 제공하려 한 것이다. 화학농업으로 재배한 배보다 높지 않은 가격으로 추석 전에 공급할 테니 선불로 예약을 부탁했다.


중간상인 이외에 어디에 배를 팔아야 할지 막막했던 그의 글이 풀꽃세상을 위함 모임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가자 여러 회원이 응했다. 한데 약속한 추석이 다가와 시장에 커다란 배가 쌓이고 있건만 그는 배를 공급할 수 없었다. 이윽고 게시판에 해명이 올라왔다. 자신이 생산하는 배는 11월 중순 이후에 제대로 익는다는 걸 늦게 알았다면서 추석 전에 공급할 수 없게 되었으니 원한다면 환불하겠다는 거였다.


시중에 나온 커다란 배는 지베렐린이라는 식물성장호르몬을 처리한 것인데 자신은 그럴 수 없었노라고 했다. 지베렐린을 바르면 화학비료와 제초제와 살충제를 뿌리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는데, 그의 글 아래 댓글이 쏟아졌다. 주문한 한 상자의 배를 당장 취소하겠다고, 대신 처가에, 친정에 보낼 테니 두 상자로 바꿔달라고, 제사야 시중의 배 몇 개로 지낼 수 있지만 믿을 수 있는 농부는 자주 만날 수 없다며 상자 수를 늘려달라는 주문이 쇄도하기에 이른 것이다. 회원들의 뜨거운 반응에 가슴이 벅찼던 초보 농군은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 즉각 가입했고, 해마다 유기농 배를 흔쾌히 내놓았다.


지베렐린을 처리한 과일이 사람에게 해롭다는 보고는 없다. 하지만 호르몬의 신호에 충실하기 위해 나무와 농부는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리는 과일을 제철보다 빨리 커다랗게 열려야 하므로 광합성이 벅차고, 영양분을 과하게 빨아올리는 뿌리는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런 나무는 병충해에 약하다. 그러니 화학비료와 살충제가 필수일 뿐 아니라 자주 뿌려야 하고, 제초제로 수시로 살포해야 한다. 화학비료를 탐하는 잡초는 성가시기 이를 데 없지 않은가. 이래저래 들어가는 비용을 감수하고도 수익을 보장받으려면 넓은 과수원에 나무를 빼곡히 심어야하는데 이웃의 과수원도 사정이 비슷해 서로 경쟁해야 한다. 농부와 더불어 땅과 나무도 농약에 취하지만 도무지 쉴 틈이 없다.


겨울철에 파는 딸기는 크다. 어찌나 큰지 한입에 쏙 들어가지 못한다. 반을 잘라보면 속이 텅 비었다. 딸기는 참외와 달리 속이 비는 농작물이 아니다. 역시 지베렐린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한 상자에 몇 개 담기지도 않는 배는 얼마나 큰가. 하나 깎으면 온 가족이 먹고 남는다. 두 개를 플라스틱 파이프로 이으면 이두박근을 키우는 바벨로 충분히 활용할 정도다. 배 뿐이랴. 사과와 복숭아도 전에 없이 크다. 봄철, 꽃집 앞에 진열돼 텃밭 가꾸는 도시인을 유혹하는 채소 종묘들도 크다. 한결같이 지베렐린 덕분이다. 성묘 다녀오다 꽃집에 들린 도시인은 아무래도 커다란 종묘에 눈이 가겠지만 지베렐린을 처리했다는 사실은 모를 텐데, 그런 종묘, 유기적으로 가꾸려는 텃밭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해마다 거액의 특허료를 해외에 지불해야하는 겨울철 딸기는 재배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비닐하우스에 빼곡히 심는데, 비닐하우스는 사막농법이다. 내리는 빗물을 활용할 수 없으니 지하수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뿐인가. 무덥고 환기가 원활하지 못하니 농작물은 물론이고 사람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토양이 척박해 적지 않은 비료를 뿌리는 까닭에 공기질도 나쁘지만 문제는 꿀벌이 접근할 수 없다는 거다. 벌이 없는 계절, 다시 말해 자연스럽지 않은 계절에 꽃이 피기 않던가. 겨울철 비닐하우스 딸기의 가루수정을 위해 특별한 꿀벌을 주문해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 꿀벌은 일회용이다. 물론 다년생 풀인 딸기도 비닐하우스에 들어오면 일회용일 따름인데, 유전적 다양성이 거의 없다보니 열매를 따야하는 시기가 무척 짧다. 그때 쭈그리고 진종일 일해야 하는 품삯 농사꾼은 건강 망치기 십상이다.


계절을 앞당기거나 무시하는 비닐하우스는 딸기와 더불어 참외, 토마토, 오이, 호박, 수박, 깻잎과 같은 채소류에 국한하지 않는다. 포도와 복숭아, 심지어 사과와 배와 같은 과일나무도 비닐하우스 안에 심는다. 그를 위해 나무는 더욱 작아지는데, 어린 나무라는 의미다. 열매를 가득 달아야 하는 어린 나무는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 사다리 필요 없이, 손으로 가루수정 하고 열매 따는 과수원을 위해 일찍 시들고 마는 생물이 되고 말았다. 비록 식물이지만 가혹하게 본성이 억압됐다. 그런 과일도 겉보기 탐스럽다. 베어물면 단맛이 혀를 말초적으로 자극하겠지만 영양분까지 충실할까. 사람의 탐욕은 동물을 넘어 식물의 수명과 다양성마저 위축시켰다. 자연스럽던 채소와 과일을 저버린 사람은 정녕 괜찮을까.


비닐하우스까지 거부하는 한 유기농업 농부는 시간이 많다. 귀농 희망자를 위한 강연을 마다하지 않는 그는 책도 여러 권 냈다. 비닐 없는 유기농업은 땅은 물론 농부 자신에게 겨울철 충분한 휴식을 보장한다. 비닐 없는 유기농으로 땅이 힘을 되찾으면 잡초도 많지 않다. 무더운 여름에 김매려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풀밭에 벌레가 많으면 까치와 까마귀는 설익은 과수원의 과일을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땅도 사람도 계절을 거스르지 않을 때 건강하다. 자연에서 태어난 생명이므로. (푸른두레생협, 2013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