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8. 10. 3. 16:54


생산인구는 무엇인가? 전문가는 14세부터 64세까지라고 정의하던데, 아이를 생산하는 인구의 폭을 의미하는 걸까? 하긴 정상이라면 14세 이하나 65세 이상의 연령의 여성이 아기를 낳지 않겠는데, 요즘은 예외가 적지 않다. 성장호르몬이 섞인 육류와 플라스틱 용기에서 비롯되는 환경호르몬이 어린이의 성조속증을 부추기는 현실만이 아니다. 가공음식에 섞인 각종 첨가물과 더불어 일상의 피로와 스트레스는 폐경을 앞당기고 이른 나이의 치매 현상을 전에 없이 높였다.


생산인구가 줄어 걱정이란다. 작년 우리나라의 가구 당 출산율이 사상 유래 없는 1.052명으로 줄었다는데, 올해는 작년보다 심각하게 출발한다는 게 아닌가. 세계 초유로 1.0명 이하로 곤두박질쳤다니 초비상을 넘어 국가의 존립이 걱정일 지경이라는 장탄식이 들린다. 정당 대표 연설에 나선 한 정치인은 국회에서 소득주도성장이 아니라 출산주도성장을 역설했다가 여성계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그 정치인은 여성계가 자신을 왜 질책 받았는지 궁금해 하고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건 생산인구가 줄었기 때문이 아니다. 신생아 수가 아무리 줄고 노인이 늘어나도 5천만이 넘는 남한에 생산인구는 충분하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기를 주저하기 때문일 텐데, 출산주도성정 정책을 펼치면 개선될까? 결혼 적령기에 접어드는 두 아들에게 물으니 코웃음이다. 이성친구가 있어도 결혼을 엄두에 두지 못하는 건 태어날 아이에 대한 걱정이 아니란다. 결혼 이후 자신들의 삶을 먼저 걱정한다. 번듯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다행인가? 아이들은 연봉 높은 기업을 노크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추구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끌 자신이 없다.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생산인구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아이가 아니라 물건을 생산할 인구, 다시 말해 노동 가능한 인구를 뜻하는가? 고등학생보다 어린 소년을 착취하는 사회를 우리는 비난하는데, 65세 이상의 노인은 지금 우리 농촌에서 주류 노동인구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우리 농촌에서 청년회와 노인회의 나이차는 그리 크지 않다. 미국 아미쉬 사회는 10세만 넘으면 일을 한다. 남자는 밭에서 여자는 집에서 집안일을 돕지만 그들의 부모가 비난 대상은 아니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65세 이상의 노인은커녕 50세만 넘어도 노동에서 소외되기 일쑤다. 우리 사회의 생산인구는 누가 왜 줄이는가?


제 스스로 잘 성장한 아이들은 시방 알바인생이다. 대학 졸업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려 애를 쓰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원고료와 강의료로 연명하는 부모에게 대학생 이후 용돈을 받지 않아 고맙기 짝이 없는데, 저축할 여유가 전혀 없다. 알바로 벌어들이는 돈은 모조리 소비하며 순환 경제에 나름 헌신하지만 보잘 것 없을 것이다. 자신을 채용한 자영업자가 알바 수당을 올려준다면? 그래도 모두 소비할 게 틀림없는데, 다정다감한 자영업자가 흔쾌히 올려주고 싶어도 감당이 어렵다. 젠트리피캐이션을 염려하는 처지가 아니던가. 조물주보다 높은 건물주도 할 말이 없지 않겠지.


물건 이야기의 저자 애니 레너드는 4.99달러에 파는 라디오에 경탄한다. 작고 예쁜 라디오가 어쩜 이렇게 저렴할 수 있는가? 곰곰이 생각하다 라디오의 생산과 판매, 그리고 폐기까지 진행되는 과정을 파헤치더니 소스라치게 놀란다. 세계 곳곳의 자원이 낭비돼 무책임하게 폐기되며 오염물질을 내놓지 않던가. 한발 더 나아간 애니 레너드는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착취되는지 살피는데 그치지 않았다. 가전제품 매장에 전시된 라디오는 과연 생산품일까? 구입하자마자 폐기물 신세가 되는 실상에 전율한다.


마시지 않더라도 뚜껑을 따자마자 폐기물이 되는 각종 술과 숙취해소음료 뿐이 아니다. 큰맘 먹고 구입한 최신 전자제품과 고급 자동차도 시간이 지나면 애물단지가 된다. 다양한 자원과 부품과 땀이 들어가 세상에 화려하게 등장했어도 결국 폐기된다. 그 과정에서 숱한 폐기물과 돌이키기 어려운 오염물질을 내놓았다. 작던 크던, 단순하던 복잡하던, 가격이 높던 낮던, 물건들은 생산된 것이 아니다. 변형되었다. 진정한 생산과 다르다. 생산은 한 톨의 씨앗에서 수십 배의 알곡과 열매를 맺는 농사에 있다. 생명의 잉태와 출산에 있다. 그래서 현인은 농부와 여성의 역할을 같다고 경외했다.


농부와 여성의 생산에 폐기물이란 없다. 그렇다. 삼라만상의 생산에 폐기물이란 없어야 옳다. 그런데 라디오를 생산했다고?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생산한다고? 터무니없는 언사로 생태계는 훼손되고 말았다. 지구는 온난화되고 마이크로플라스틱은 바다를 초미세먼지는 대기를 끔찍하게 오염시켰다. 자본의 탐욕이 클수록, 노동자가 착취가 가혹할수록 생태계는 더러워지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자리와 젊은이의 행복이 위축된다. 자본은 늘어나지만 희한하게 경제의 순환은 정체돼 노동 가능한 인구를 압박한다. 그런데 주권자를 대의하겠다는 자는 소득주도보다 출산주도성장을 주창하는가? ‘소득보다 성장에 문제를 제기해야 명징하지 않나? 그가 이야기하는 성장의 주체는 도대체 누구인가?


자본이 추구하는 경제성장은 곧 자본가의 파이를 키울 성장을 의미할 텐데, 경제성장은 무한정 계속될 수 없다.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자원은 벌써 바닥을 드러냈다. 수많은 지하자원은 물론이고 화석연료와 같은 에너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특히 석유는 머지않아 종말을 고할 텐데, 경제성장이 지속될 것인가? 순환 경제의 바탕이 되는 노동자의 수입, 그 수입에 이바지하는 소득이 늘어난다면 정체된 시민경제가 잠시 활발해지겠지만 자원과 에너지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지속될 수 없다. 자제하지 않으면 지구온난화에 이은 기상이변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일본보다 7년 빠른 17년 만에 올해 우리나라가 고령사회로 진입했다고 아우성치던 언론은 중국의 진입 속도가 우리보다 빠르다는 걸 굳이 외면했는데, 많은 전문가들은 현재 74억을 넘는 세계 인구는 100억까지 늘어나다 서서히 정체되다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문제는 경제성장을 위한 세계적인 생산이고 소비다. 1983729일 인구 4천만이 넘었다며, 제발 산아제한에 동참해달라던 우리나라의 인구는 현재 세계의 0.71%, 5천만을 헤아린다. 음식 쓰레기를 포함해 식량의 80%를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 내일도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어떤 조상도 꿈을 꾸지 못할 만큼 호강하고 있다. 불합리한 분배로 위화감이 커져 그렇지, 자연의 균형을 흩트리는 내연기관과 가전제품을 보유하며 보이지 않는 친지와 영상통화를 즐기지 않던가. 이런 호강은 결코 지속될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생산과 소비가 필연적으로 빚은 초미세먼지와 마이크로플라스틱은 후손의 건강과 행복은 물론이고 생명마저 지켜주지 못한다. 늦기 전에 생존을 최우선으로 염려하는 대안적 삶을 모색해야 한다. 생산인구 감소를 핑계로 가임여성들 들들 볶을 때가 절대 아니다.


세계인이 미국적 삶을 추구하려면 지구가 6개 필요하다는데 우리는 지구를 생산할 수 없다. 처리 못할 쓰레기로 더럽혀진 지구에서 성장이나 생산을 되뇔 수 없다. 물건을 생산해 소비할 인구가 모자란다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노인의 지혜와 경륜으로 다음세대의 행복과 건강을 고민해야 한다. 65세 이상은 생산인구가 아니라고? 망측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작은책, 201810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10. 17. 18:55

 

하루가 지나갈수록 가을이 완연해진다. 사람들은 유난히 아름답다는 올해의 단풍을 맞으려 산과 들을 찾아 집을 나서지만, 기상이변으로 예년 같지 않은 여름 내내 탄소동화작용을 하며 노폐물이 쌓인 나뭇잎들은 초록을 잃고 가을색을 머물며 잠시 더 매달려 있을 뿐이다. 머지않아 땅에 쓸쓸이 떨어지면 내년 봄 대지에서 싹을 틔울 씨앗과 열매를 위해 기꺼이 거름이 될 것이다.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성장이 멈춘 나무는 벌써 내년 봄에 펼칠 잎눈을 달아놓았다.

 

언제든 먹을거리가 지천인 사람과 사람 주변에서 먹이를 구하는 애완동물도 덩달아 예외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먹을 게 풍성할 때 새끼들을 낳는다. 초식동물이 어미젖을 뗄 때 연한 풀잎이 널렸고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의 새끼들이 막 태어날 때 젖을 뗄 것이다. 그때가 대략 봄이지만 모름지기 생명이 깃든 자연의 삼라만상은 내일의 생명을 위해 가을에 갈무리한다. 우리가 가을에 거두는 온갖 곡식도 내년을 위해 잘 보관한다. 햅쌀로 밥을 지어먹는 농부는 막 태어난 아기가 건강하게 자랄 것이라 믿으며 뿌듯해했을 것이다.

 

결실의 계절이라 그런가. 정부는 인구 문제를 가을에 들고 나왔다. 지난달 30일 부천에서 5000만 번째 아기가 태어났다고, 우리나라가 이제 인구 5천만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떠들썩하게 발표한 지 한 달도 안 돼, 이제 우리의 인구가 줄어든다고, 이러다가 2100년이면 반토막, 2500년이면 우리 민족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 북한의 한민족과 해외 동포의 수를 뺀 결례가 있다는 걸 지적하면서 나아가 한 지역의 인구 변화가 그 따위 일차함수로 늘고 주는 게 아니라는 걸 덧붙이고 싶다.

 

모름지기 자연에서 변화하는 생물종의 개체수는 환경 여건과 밀접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여건이 허락되면 낳지 말라고 해도 낳을 테고, 더 낳으려 하지 않는 건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모르지 않는 정부가 덮어놓고 아이를 더 낳으라며 여성들을 자극하는 행위는 무책임할 뿐 아니라 부도덕하다. 낳은 아이를 남 못지않게 키우려는 부모의 심정을 거의 충족시킬 수 없는 정책을 아직도 수정하지 못하는 처지를 망각하고 있을 뿐 아니다. 지위와 계층을 막론하고 일단 태어난 아이가 건강한 사회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하려는데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역행하지 않던가.

 

교육 여건이나 일자리만이 아니다. 식량자급률은 비참할 지경으로 떨어졌어도 기름진 농토는 정부 주도의 개발로 점점 사라져 해외 의존은 더욱 심화되는데, 지구온난화에 이은 기상이변은 세계 식량의 수급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석유는 정점을 지나 에너지 위기를 예고하지만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소비는 국제사회의 갈등을 부추긴다. 내일의 환경이 안정적이지 않은데 어떻게 아이를 더 낳으라는 건가. 조상이 물려준 금수강산은 맥없이 파괴되고 물과 대기와 땅은 형편없이 오염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뿌리가 파괴된 공동체에서 마음 나눌 이웃 만나기 어렵다.

 

아이를 더 낳아야 애국이라고? 얼마 전까지 인파가 몰리는 광장마다 숫자가 늘어나는 ‘인구시계’를 세워놓고 아이를 그만 낳으라고 다그치던 시절을 생각해보라. 피임 기구를 무료로 나누어주는데 그치지 않고 정관 수술을 하면 예비군 훈련도 즉각 면제해주었다. 1983년 남쪽의 인구가 4천만이 되었을 때 정부는 아이를 셋 이상 낳은 자를 징벌해야 할 철면피로 취급했다. 의료보험은 물론이고 학자금 혜택도 제외하며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며 성화하더니 이제 더 낳으라고? 4천만일 때 많다던 인구가 5천만이 되자 왜 부족하게 된 건지, 납득할 만한 변명이 없다. 그 사이 농토나 식량이 늘었나. 아니면 환경이라도 나아졌는가.

 

‘고령화사회’에서 ‘저출산’이 문제라고? 산업체에서 일한 인력이 장차 부족해질 거라고? 그 말은 어느 정도 맞을 텐데, 에너지 과소비와 자동화를 추구하는 산업화가 지금보다 얼마나 확대되어야 하는지 여부는 여기에서 따지지 않기로 하고, 정부는 지금 일자리를 찾지 못해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보내는 젊은이를 위해 어떤 정책을 구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부만이 아니다. 일할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 엄살을 펴는 기업은 어떤 배려를 준비하고 있는가. 고상한 척하며 저출산과 고령화사회의 대책을 요구하는 논객들은 더 태어날 후손에게 어떤 내일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들이 나이 들었을 때 맞을 환경은 염두에 둔 것일까.

 

평균 수명이 연장되면서 늘어나는 노인을 적은 수의 젊은이가 부양하느라 가족을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될 거라고? 노인은 가족이 아닌가. 내가 태어났을 때 진자리 마른자리 보살폈던 노인을 부양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아깝다는 겐가. 병원비가 많이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자. 노인의 몸이 젊은이와 다른 건 당연하다. 늙어간다는 건 치료 대상인 질병이 늘어난다는 게 아니다. 노화는 현상이다. 건강은 나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노화는 본인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사회가 서로 이해하고 벼려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노화를 굳이 질병이라 부르짖는 이유가 수상하다.

 

가족과 사회를 위해 젊음을 다 바친 노인은 당연히 부양되어야 인간세상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아니 그런가. 야생의 동물세계처럼 방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우리나라가 어느새 ‘고령화사회’가 되었다고 하는데, 인구의 7퍼센트 이상이 65세일 때를 고령화사회라 하므로 노인의 기준이 65세인 모양인데 산업체 인력을 미리 걱정하는 기업은 왜 65세보다 한참 빠를 때 해고하지 못해 안달을 하는가. 그리고 정부는 그런 기업을 제재하지 않는가. 고달팠던 산업화의 터널을 어렵싸리 빠져나온 65세 이후의 노인이 과연 자식에게 부양받아야 할 퇴물일까. 대부분의 노인은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 일을 더 할 수 있다. 그들의 경륜은 사장되어야 할까.

 

보건복지가족부의 지원을 받는 한 민간단체는 저출산을 걱정하며 ‘123 캠페인’에 나섰다. “결혼 1년 내에 임신을 해서 2명의 30세 이전에 낳자!”는 다그침이었다. 그런 캠페인에 대항한 여성단체는 ‘1234 캠페인’을 내놓았다. “결혼 1년 내에 임신을 해서 2명의 30세 이전에 낳는 가정은 40세 이전에 파산한다.”면서. 지면 도태된다는 경쟁사회에서 남 못지않은 교육과 의식주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려면 하나의 아이도 벅찬 세상이지만 그건 나중 문제다. 서른 전에 두 명의 아이를 낳으려면 도대체 몇 살에 결혼을 하라는 겐가. 대학 졸업하지마자? 결혼하거나 임신한 여성에 배려할 줄 모르는 회사가 대부분인 곳이 우리나라이므로 직장에 들어가자마자? 여성들은 코웃음을 짓는다.

 

가정을 꾸려 아기를 낳아 잘 기르고 싶은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부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가. 저출산이 심각하다는 걸 십분 이해하지만 결혼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 땅의 여성들은 평균 거의 서른이 다 돼야 결혼을 생각한다고 언론은 통계수치를 내놓는다. 힘들게 공부해서 전문지식을 쌓은 여성더러 어서 결혼해 아이를 낳으라고 성화하면 누가 달가워할 것인가. 더구나 지원도 배려도 외면하면서. 드라마와 상품광고는 소비와 향락을 요란하게 부추기는데, 결혼해 애를 낳으라니. 아이를 다섯 낳으면 천만 원을 지원하는 지방자치단체도 있다지만 그런 말초적 처방은 효과가 지속적일 수 없다. 아무리 성화해도 지난해 세 자녀 이상의 가정은 5퍼센트 줄었다는 보도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아이 낳아 기르는 일이 직장을 다니는 여성만의 일도 아니다. 정부는 직장마다 탁아시설을 의무화하겠다고 얼마 전에 발표했지만 그건 아이를 막 낳은 여성이 태어났을 때에도 발표한 내용과 그리 다르지 않다. 또한 발표된 정책도 정치권과 여성계의 차가운 평가처럼 충분한 대책과 거리가 멀다. 예산이 부족하니 이해해달라고? 예산이 부족하다며 4대강을 막아 내일의 환경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데 펑펑 예산을 버리는 행태는 어느 세력의 내일을 보장하려는 노심처사인가. 가정을 지키는 여성, 그리고 직장을 다니는 남성을 위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고 여성단체는 지적하던데, 사실 그런 지원이 만족할만한 국가라 해서 인구가 늘어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부가 발표한 알량한 대책을 놓고, 그러면 그렇지,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기업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다면서 반발한 모양이다. 정부의 “검증되지 않은 선심성 규제로 새로 만들거나 강화해 기업의 인력운용을 제약하고 고용창출 능력마저 낮추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정부안이 현실화되면, 기업이 여성 고용을 회피할 것”으로 어깃장을 놓았다는 것이다. 결국 기업은 내 알바 아니니 정부가 세금으로 해결하라는 투였는데 세계 각국의 숱한 경험이 증명하고 있듯, 규제 없어도 기업이 앞장서서 비용을 들이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정부의 규제가 동인이었지만 정부는 시민들의 의식에 따라 움직였다. 그 때문에 망한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규제에 능동적으로 응한 기업이 대부분 살아남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인구가 줄어들어 한국의 중장기 성장률이 떨어질 것이라 예상했다지만 그럴까.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국가들이 그랬던가. OECD의 지적이 사실이라면 지금 우리가 겪는 일은 감내해야 할 일시적인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떤 기업의 연구소는 2100년이면 인구가 반으로 줄고 2500년이면 민족이 소멸된다는 일차함수를 연구결과라고 내놓은 모양인데, 그런 예측은 내일을 위해 아무런 영양가가 없다. 그보다 좁은 국토에서 후손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미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난 지금의 인구를 줄이는데 열과 성을 다하자고 제안해야 옳지 않았을까. 식량과 석유위기가 다가오는 지구온난화 시대를 대비해 내 땅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여건을 한시바삐 조성해야 책임 있는 선조의 자세가 아닌가.

 

전체 인구의 14퍼센트가 65세 이상일 때 ‘고령사회’, 20퍼센트 이상일 때를 ‘초고령사회’라고 학자들은 정의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농촌은 이미 초고령사회지만, 65세 이상의 노인들이 여전히 농사를 짓는 덕분에 아직 우리는 이 땅에서 먹고 살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또한 자신의 일에서 은퇴한 노인을 폐물 취급하면 곤란하다. 어쩌면 많은 노인들은 타의에 의해 일자리를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령화사회를 넘어 고령사회를 앞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책임 있는 정부라면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노인들이 자신이 하고자하는 일을 놓지 않을 여건을 정책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적은 수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사회도 함께 해결하려 노력할 어려운 일이 남는다. 하나 또는 둘 태어나는 우리 아이들이 이웃과 다정하게 어울릴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사회성을 깨우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불안한 국제정세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자. 식량과 에너지의 자급자족이 거의 불가능한 작은 국토에 뿌리를 내린 우리에게 작금의 저출산 현상은 어쩌면 내일을 위한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무책임한 저출산 타령은 전에 없이 삭막해진 우리 땅과 지구의 환경에서 내 자식의 삶을 위험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다. (인천in, 2010.10.20)

정말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사람을 기계로 취급하고 있는 세상이고
빈약한 철학과 실패한 정책에 의한 고용의 문제를
젊은 사람과 나이먹은 사람의 대립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드디어 3월입니다
봄이 더욱 더 가까워지는 것 같네요
유용한 글 잘 보고 갑니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씀에 공감하고 갑니다.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8. 8. 22:10

 

현재와 같은 추세로 아이를 적게 낳는다면 2350년 쯤 우리의 인구는 500만에 그칠 것으로 예측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인구가 줄면 군인의 수도 줄어들 테니 방위력이 감소한다며, 역사적으로 인구가 드문 국가가 주변국에 흡수된 사례가 많다는 걸 부각하는 주장도 눈의 띈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인구는 아직은 늘어나지만 젊은 부부의 평균 출산율이 터무니없이 낮아지면서 줄어들기 시작해 340년 지나면 국가의 존립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위축될 것으로 예측한 1차함수다.

 

인구 규모가 작은 국가를 주변국이 병합한 역사도 있고, 잘 공존한 역사도 많을 텐데, 앞으로 340년 뒤 주변국의 인구는 어떻게 될까. 그들의 출산율을 고려한다면 역시 크게 줄지 않을까. 여성의 마라톤 기록단축 속도가 남성보다 훨씬 빠르다는데, 그렇다면 얼마 못가 여성이 남성 기록을 앞설까. 그런 1차함수는 희망사항 축에도 못 낀다. 선수층이 두터워지고 기록이 한계에 다다를수록 경신은 어려워진다. 인구도 마찬가지다. 환경이 윤택하고 풍요로워지면 인구는 적정수준까지 자연스레 늘어난다. 물론 반대의 경우는 줄어들겠지. 역사를 들먹일 필요 없이, 사람을 포함한 지구촌 모든 동식물과 미생물이 그랬고, 앞으로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인구를 새삼 문제 삼는 건 저출산에 이은 ‘고령사회’가 가깝기 때문이란다. 가임여성 일인 당 아이를 1.13명 낳는 추세가 이어지면 2050년에 65세 인구가 전체의 38퍼센트에 달해 ‘생산인구’가 턱없이 부족해진다는 거다. 젊은이의 수입이 노인 부양에 다 들어가므로 14세부터 65세에 해당하는 생산인구를 늘려야하는데 그를 위해 이 땅의 가임여성은 아이를 부지런히 낳아야한다고 정부는 주장한다. 그를 반영하여 보건복지부에서 지원하는 모자보건학회는 123캠페인을 전개한다. 결혼 1년 만에 아이를 갖고 2명의 아이를 30세 이전에 낳자는 거다. 그러자면 적어도 만 27세 이전에 결혼해야 할 텐데, 서울시 평균 여성 초혼 연령은 29.3세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부터 여성은 자신의 꿈과 이상을 포기해야 하는 사회에서 결혼이 늦어지는 건 아주 자연스럽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부모를 믿고 열심히 학교에서 공부한 여성이라면 자신의 뜻을 십분 이해하고 적극 지원할 배우자를 만나 결혼해야 온당하고 육아에 대한 합의가 있은 뒤 아이를 낳아야 옳다. 그러자면 결혼과 아이가 늦는 건 당연하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회의 건전한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전제로 경쟁이 치열한 제도권 교육이 길게 이루어지는 우리나라에서 123캠페인은 지켜질 가능성은 애당초 없고 사실 바람직하지도 않다.

 

모자보건학회의 캠페인에 대항하는 여성계의 ‘1234’ 경구를 보자. “결혼 1년 이내에 아이를 갖고 2명의 아이를 30세 이전에 낳는 여성의 가정은 40세 이전에 파산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아닌가. 기저귀찰 때부터 경쟁이 시작되는 사회에서 자식을 해외 언어연수나 유학 보내지 않는 부모는 불안하다. 도태되지 않도록 아이에 들어가는 비용이 도대체 얼만데 어찌 둘을 낳을 수 있겠는가. 요즘의 세태를 방종한 정부는 시민들이 서로 감시하게 만든 ‘학파라치’ 말고 이렇다 할 사교육 대책을 마련하지 않더니 자급자족 농경사회도 아닌데 “아이는 제 먹을 걸 가지고 태어난다!”는 무책임을 남발하면서 저출산의 책임을 여성에게 덮어씌운다.

 

20대의 태반이 백수인 ‘이태백’에서 90퍼센트가 백수라는 ‘이구백’으로 악화된 마당에 기존 생산인구의 일자리는 안정되어 있다던가. ‘노동유연화’라는 미명으로 늘어난 비정규직의 일자리도 불안해진 세상에서 아이를 더 낳으라니. 경륜이 사장된 노동자들이 길거리에 방치되는 사태는 개선될 기미조차 없는데, 출산장려금 조금 쥐어주며 생산인구를 늘리라는 요구는 무책임을 넘어 사기행각에 가깝다. 그런 사탕발림으로 더 태어난 아이의 내일을 정부는 조금이라도 생각한 걸까. 짐짓 노인 부양을 핑계 삼지만, 65세 넘은 노인은 힘도 경륜도 거의 그대로인데,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지하철 경로우대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일을 놓아야 한다는 겐가.

 

기실 정부는 세금이 줄어드는 걸 걱정하는 건지 모른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아지면서 연기금들이 바닥날까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노인복지 예산도 줄겠지만 공무원 자리도 줄어들게 틀림없다. 어떤 지방은 통폐합이 두려워 주민등록 이전과 출산에 거액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던데, 결국 시민이나 후손의 행복보다 공무원의 자리보전을 더 생각한 행정이 아니던가. 더 있다. 생산인구를 강조하는 걸 보니, 생산인구를 싼 값으로 고용해야 이윤이 나오는 기업의 이해와 무관하지 않는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저출산 위기를 부각하며 아이 더 낳을 정책을 정부에 요구하는 곳은 대기업이고 그들에게 연구비를 받는 교수와 연구자들이다. 대개 ‘철밥통’이다.

 

아이를 더 낳으라는 분위기가 팽배한 이즈음의 우리 인구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를 넘어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던 시절보다 훨씬 많다. 그 사이 식량자급률은 형편없이 떨어져 쌀을 포함해도 식량의 4분의3을 수입해야 한다. 쌀을 포함하면 고작 5퍼센트만을 내 땅에서 자급할 뿐인데, 누구의 이익을 고려하려는 건지 농경지만 보이면 아파트를 짓고 신도시를 만든다. 우리보다 고령화가 일찍 시작된 유럽과 일본은 주택이 남아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양가부모가 넘겨주지 않던가. 이미 주택보급률이 100퍼센트를 넘은 우리는 아직도 공급부족이라던데, 주택통계는 누가 내나. 분명한 건 소비자는 아니라는 사실인데, 중요한 것은 세계 곡창지대의 여건이 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육상에서 흘러내린 오염물질을 정화할 뿐 아니라 지구상 어느 곳보다 활발한 탄소동화작용이 이루어지는 갯벌은 지구온난화를 예방하면서도 막대한 먹을거리를 내주는 천혜의 생태공간이다. 그런 갯벌을 매립하는데 앞장서 온 정부는 이제 4대강마저 질식사시키려 든다. 지구온난화는 해수면을 상승시켜 지구촌의 곡창지대를 못 쓰게 만들고, 사막이 늘어나는 만큼 농경지의 표토가 유실되며 에너지는 머지않아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세계 인구는 곧 70억 명을 돌파할 거라는데 농토를 파괴해온 정부는 아이를 더 낳아야 한다고 엄한 여성에게 닦달한다.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내일을 저당잡자는 겐가.

 

이런 상황에서 저출산은 오히려 기회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연착륙의 마지막 기회다. 아직 여유가 있을 때 노인들의 일자리를 보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청장년이 자신의 일자리를 스스로 찾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 땅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급할 수 있는 농토를 확보하기 위해 갯벌을 되살리고 골프장을 경작지로 활용하는 연구도 진행해야 하고, 남은 인구들은 건강한 내일을 위해 공동체와 땅을 살리는데 적극 참여해야 한다. (작은책, 2009년 11월호)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