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7. 8. 6. 23:03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 이인식 외 8명, 고즈윈, 2005.



이른바 황우석 사태가 소용돌이치기 직전인 2005년, 어떤 유명 시인은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들어온 미덕들 - 겸손, 사랑, 천진성, 공정성, 소박함 같은 것들이 황우석이라는 사람에게 수렴되어 2005년 한국 땅에서 육화(肉化)되어 나타났다는 느낌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며 윤리 운운하는 사람들을 향해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는 인문학을 대표한다. 한데 그 인문학은 근본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윤리 운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않았다. 아니, 들으려하지 않았다. 황우석 전 교수의 발언과 겉모습에 스스로 빠져들었을 뿐이다. 한데 이상타. 꽤 많은 시인은 황우석 전 교수의 태도에서 불온한 기운을 직감하던데, 적지 않은 인문학자는 뚜렷한 근거 없이 자신만만해 하는 황우석 전 교수의 모습에 의아해하던데, 왜 그 시인은 장삼이사처럼 열광했을까.

 

치료에 대한 호언은 돌팔이의사일수록 심한 건 많은 사례가 증명한다. 한 생명의 치료를 위해 훨씬 더 많은 생명이 위태로워져야 한다면 우리는 그런 치료를 윤리적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았다면 황우석 전 교수가 장담한 줄기세포 치료가 가난한 자와 후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치료가 보편화된다면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얼마나 처참해질지 그 시인은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울리히 벡은 “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며,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라고 주장한다. 맞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나누어지는 이공계와 인문계는 일찌감치 의사소통을 단절한다. 연구비가 많아야 능력이 인정되는 대학 풍토에서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가 생태계와 사회에 미칠 영향을 근본적으로 살피기 어렵다. 그래서 허풍을 앞세운다. 인문학자도 마찬가지다. 과학의 허풍을 파악하지 못해 황우석 신드롬에 쉽게 빠져들었다. 참다못해 이 땅의 과학논객 9명이 인문학에 한마디씩 했다.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하고.

 

이제까지 인문학이 과학에 쓴소리를 던진 예는 더러 있었다. 이번엔 몹시 드문 일이다. 과학이 인문학에 싫은 말을 건넨 것이다.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는 인문학을 향해 과학과 의사소통하고 당부한다. 열역학 법칙을 모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문학자, 그런 인문학과 만나는 걸 시간낭비라 믿는 과학자들은 할 말이 있어도 꾹 참아온 게 실상인데, 이번 논객들은 달랐다. 본질을 헤아려야 할 인문학자들이 논란 중인 과학의 문제점을 헤아리기는커녕 덮어놓고 감격하기에 참을 수 없었던 거다.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의 저자들은 과학의 인문학적 가치를 높게 인식한다. 책머리에 지적하듯, “과학기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며,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는 논리의 뒤에 숨어서 가능한 한 가치판단을 회피하는 대개의 과학자와 다르다. 화학을 전공한 과학사학자,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철학자, 전자공학을 전공한 과학문화 평론가, 의사학(醫史學)을 전공한 의학자, 대중을 위한 과학교육을 주장하는 물리학자, 재료공학을 전공한 기술사회학자, 생물학을 전공한 환경운동가, 그리고 디지털을 전공한 사회학자와 물리학자는 과학과 소통하는 인문학을 주문한다. 사회적 성찰 없는 과학을 통제할 역할이 인문학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말을 들어보자. 논란이 끊이지 않는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를 놓고 한국 최고 인문학자들이 벌인 토론회는 수준 이하였다. “인문적 시각의 날카로운 비판이 감성에 호소하는 자연과학을 단번에 찔러 들어가” 균형 잡히길 기대했던 한 저자는 감격에 겨워 찬사를 바치는 인문학자의 모습에서 한계를 절감한다. 도구적 이성에 사로잡힌 자연과학을 성찰적 이성으로 인도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파괴해도 좋은가?”라는 명제를 놓고 머리 싸맬 연구가 얼마나 많은데 ‘인문학 위기’라니. ‘인문학 위기’에 자조하며 지원금을 바라는 자세에 실망한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조언해야 하는 학문이 인문학이거늘, 인문학이 현재 인간의 삶을 구속하는 과학을 모른다면 어찌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겠는가 되묻는다.

 

한 저자는 1996년 미국에서 벌어진 ‘과학전쟁’을 소개하며 그 의미를 짚는다. 인문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에 분통이 터진 수리물리학자가 인문학자는 과학을 모른다며 조롱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과학을 논하는 인문학자들을 옹호하는 엉터리 논문을 난삽한 논리로 써서 인문학 학술잡지에 기고했던 과학자가 다른 학술잡지에 자신의 논문은 엉터리였다며 폭로한 사례였다. 과학용어도 모르는 주제에 과학을 논한다며 인문학자를 조롱한 과학자와, 과학자의 비열한 속임수에 분노한 인문학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그는 인문사회와 이공계의 뿌리 깊은 반목과 몰이해를 분석하며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해본다.

 

‘두 문화’로 대표되는 과학과 인문학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두 문화가 만나면서 탄생한 ‘제3의 문화’를 한 저자는 제시한다. 인지과학이나 복잡성과학이다. 과학과 인문학이 만나야 해결할 수 있는 분야라는 거다. 지금은 종잡을 수 없이 복잡한 디지털 시대다. 디지털 시대에 지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선택과 혼합과 무한복제가 자유자재인 세계에서 지식을 분석하는 저자의 글은 새로운 환경에 부딪힌 인문학의 위기와 대안을 생각하게 한다.

 

생명복제 연구에 얽힌 숱한 논쟁에서 우리는 인문학적 성찰을 충분히 거쳤을까. 생명공학과 의료계는 물론 인문계와 종교계와 시민단체가 같은 수로 참여한 위원회에서 양보와 타협으로 어렵사리 합의안을 마련했는데, 그 위원회를 주도한 정부가 합의안을 부정하고 말았다. 그래도 저자는 생명과학과 생명윤리가 논의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달라질 것이므로. 세계관은 물론 윤리마저 지배하려는 과학, 그런 과학에 맞설 수 있는 인문학을 기대하는 저자의 글, 그리고 과학기술의 양면성과 그에 대한 인간사회의 대응을 고려하는 학제간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기대하는 저자의 글이 이어서 소개된다.

 

참된 지식인은 지배계층에 충성하는 엘리트는 아니어야 한다. ‘책머리에’의 저자 주장처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기 위해 실천의식을 되새기는 지식인, 곧 참된 지식인은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은 ‘새로운 인문주의자’일 것이다.(출판저널, 2007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