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9. 4. 23. 22:28

 

1970년대 후반 어느 여름의 강화도 전등사 입구. 민박집에 여장을 풀기 전에 젊은이 서너 명은 표본용으로 백 마리, 산 채로 딱 20마리의 참개구리만 잡으려 했다. 포획망을 들고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며 살금살금 논둑을 걸어도 통 보이지 않던 참개구리들은 여기에서 풍덩, 저기에서 풍덩, 논둑에서 논으로 뛰어 들어가니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 겨우 찾아내 숨죽여 다가가도 눈치가 여간 빠른 게 아니라서 포획망이 닿을 거리에서 움직이기 무섭게 풍덩! 빼곡한 모 뒤로 사라지고 말았다.

 

민박집 주위가 온통 논이었던 당시, 천지사방에 참개구리가 뛰는데 어수룩한 도시내기들에게 잡히는 건 풀숲의 작은 녀석이고 목표를 채우려면 한참 남았다. 막차 떠나기 전에 끝내려고 일찌감치 나섰는데, 별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우리는 깜깜해지길 기다려야 했다.

 

칠흑 같은 밤. 무명 주머니를 옆구리에 찬 젊은이들이 배터리를 새로 넣은 랜턴을 밝히고 보아두었던 논둑을 향했다. 번식기가 지난 여름밤의 논은 조용하기만 한데, 밤새 시원해진 논둑에 몸을 식히러 나온 참개구리들은 환하게 다가오는 랜턴 빛에 놀라 방향감각을 잃은 것인지 움츠리지만 엉거주춤, 달아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아닌가. 대낮에 허우적거리던 젊은이들은 장갑 낀 손으로 연실 무명 주머니에 담고 또 담았다.

 

그렇게 30분여 분. 민박집으로 돌아와 확인하니 목표량을 훨씬 초과했다. 여분의 참개구리를 놓아주려 하니 민박집 아주머니가 닭장에 넣겠다며 달란다. 우리는 닭백숙 아침을 철석같이 약속받고 선뜻 내주었는데, 웬걸. 숙박비도 깎아주지 않은 아주머니는 개구리는 어차피 많다며 시치미를 떼었는데, 지금 전등사 입구는 주차장과 식당으로 뒤덮였다. 참개구리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다.

 

개구리 튀는 방향과 여자의 마음은 하느님도 모른다고? 어디 남자의 마음인들 알까. 맹이들이 경주시킬 정도로 집 근처에서 쉽게 잡을 수 있는 개구리가 참개구리였다. 몸통을 감싸잡고 스타트 라인에서 동시에 풀어주면 어디 참개구리가 앞에 거 놓은 금으로 튈 것인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는 녀석에게 우리는 당장 응징을 했다. 가는 작대기로 정수리를 한방! 먹였던 거다. 혀를 주욱 빼고 널브러지는 녀석들. 이어 몸통은 닭장에, 뒷다리는 쫄깃하게 구워졌다. 누가 봐도 참으로 불공정한 게임이었다.

 

배어나오는 물을 비뚤배뚤 논둑으로 받은 4월 중순의 천수답은 짝을 찾으려는 참개구리 수컷의 오랜 경연장이었다. 무대에 한꺼번에 오른 수컷들은 저마다 양쪽 턱의 울음주머니를 힘껏 부풀리며 꾸르르르, 꾸르르르, 목청을 높인다. 근처에 다른 개구리가 다가오면 잽싸게 등으로 오르려하지만 대개 수컷이다. 자기 등에 오르려는 수컷을 뒷발로 내찬 녀석은 더 크게 꾸르르르, 꾸르르르. 우렁찬 울음소리로 끌려 암컷이 다가오자마자 급히 등으로 오른 수컷은 앞발의 두툼한 엄지로 암컷의 배를 단단히 움켜쥐며 누르고, 배가 조인 암컷이 천여 개의 알을 한 번에 낳으면 수컷은 얼른 알 위에 방정을 한다.

 

아침나절 물이 고인 천수답은 검은 점들로 수북한 알 덩어리들을 보여주었고, 그 일부를 뜯어 낸 우리는 어항에서 부화해 올챙이를 거쳐 개구리로 변태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물론 멸치가루와 데친 시금치를 참을성 있게 주었던 모범생에 한했지만. 논에 수두룩해 논개구리라 불렀던 참개구리. 이젠 옛말이 되었다. 이제 논에서 참개구리는 보이지 않는다. 좁고 구불구불했던 천수답이 넓은 사각의 관개농업으로 바뀐 후 참개구리가 알을 낳을 봄이 돌아와도 물은 고이지 않고, 어쩌다 고인 물에는 농약이 흥건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콤바인이 꾹꾹 다져놓은 땅속으로 들어갈 수 없자 참개구리는 동면을 거부하는 논을 떠나고 말았다. 요즘 참개구리를 알현하려면 농기계가 못 들어가 습지로 방치된 산비탈을 물어물어 찾아가야 한다.

 

머리에서 등과 다리까지, 참개구리는 진한 흑갈색에서 밝은 녹색까지 크고 작은 점과 띠무늬를 가져, 예비군은 자신들이 입는 훈련복을 개구리복이라 했다. 참개구리의 눈이 머리 위로 튀어나와 복학생은 자기들이 볼 게시물을 동아리 방의 천장에 붙이고 너스레떨기도 했다. 머리끝에서 항문까지 등 한가운데 가는 선이 나 있고, 양 어깨에서 옆구리를 타고 허리까지 두툼한 선이 있는 참개구리는 얼핏 금개구리와 비슷하지만 물웅덩이를 떠나지 않으려는 금개구리와 달리 논에서 밭, 평야에서 산기슭까지 안 가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각종 뱀, 해오라기와 때까치, 족제비와 너구리와 같은 온갖 동물을 불러들였고 덕분에 우리 땅은 금수강산일 수 있었다.

 

다 자라면 등이 7에서 8센티미터에 이르는 참개구리는 두툼한 뒷다리를 활짝 펼치며 제 몸의 수십 배를 한 번에 튀지만 그건 위기를 만났을 때고, 저보다 작은 생물이 고물고물 움직이는 걸 보면 슬그머니 다가와 긴 혀로 냉큼 잡아먹는다. 대개 논과 밭에 피해를 주는 수많은 곤충과 애벌레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참개구리를 이롭다 했지만 참개구리야 어디 사람 좋으라고 그랬던가. 세상살이의 한 틀을 그렇게 점했던 게지. 까까중 열매를 따서 낚싯바늘에 끼우고 참개구리 눈앞에서 살살 흔들면 영락없이 덥석 물곤 했던 시절, 하늘은 언제나 파랬고 물은 맑았으며 여름밤은 재재거리는 아이들로 어른들도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요즘은 도시나 시골이나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요즘 중고등학교 생물시간에 해부실험이 사라졌다고 한다. 야생동물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동정심의 발로라기보다 해부실험의 단골 재료였던 참개구리를 도저히 공급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고육책이었지만 그렇다고 참개구리가 한숨 돌리게 된 아니다. 청소년들의 생물시간이야 모형으로 충분할 테니 살생을 전제로 하는 해부실험을 없앤 건 다행인데, 생물을 전공하는 대학생에게 실습 기회가 드물어진 건 아쉬울 수 있겠다. 사실 해부실험으로 희생되는 참개구리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 참개구리도 그때가 그리울지 모르는데, 최근 농약은 물론, 오리와 우렁이 농법도 거부하고 전통 유기농업을 고집한 농군은 자신의 논에 참개구리가 나타났다고 하느님께 고마워한다. 참개구리가 얼마나 반가웠으면 그런 감사기도를 드렸을까. 참개구리가 돌아오는 세상, 아무래도 고마운 일이 많은 세상일 게다. (물푸레골에서, 2009년 6월호)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6. 7. 16. 12:33
 

1970년대 말, 일본을 빠져나온 비철금속 관련 공장들을 대거 맞이한 온산공단에 석유화학단지를 추가 조성하려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이다. 이따금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음이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하는 공사장의 인근은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옹기종기 앉은 농촌이었고, 삐뚤빼뚤한 논둑을 따라 천수답을 걸으면 인기척에 놀라 풍덩 풍덩 웅덩이로 뛰어드는 참개구리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뛰어드는 개구리들을 다 받아주는 천수답의 물웅덩이는 오랜 생태계였다. 웬만해서 웅덩이를 떠나지 않는 금개구리를 채집하려 온산까지 찾아간 우리는 개구리밥으로 뒤덮인 물웅덩이에 대가리를 삐죽 내미는 금개구리를 쉽사리 발견할 수 있었고, 주머니그물을 길게 뻗어 그 자리를 훑어야 했다. 하지만 웬걸. 물 밖의 움직임에 매우 예민한 금개구리는 그물이 미치기 전에 웅덩이 속으로 달아났고, 한번 달아나면 뙤약볕 아래 아무리 기다려도 쉬 올라오지 않았다. 물 밖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물고기는 잠수부의 카메라를 피하지 않더라는 경험담을 기억해낸 우리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기다란 주머니그물은 아무래도 민첩하게 다루기 어렵다. 대나무를 잘라 길이를 줄이고 바지를 넓적다리까지 걷어붙인 우리는 조심조심, 그리고 슬금슬금 물웅덩이로 들어가선 꼼짝도 않고 기다렸다. 금개구리가 우리를 정물로 인식할 때까지. 금개구리가 대가리를 내밀 때 물 밑에 숨겼던 주머니그물을 잽싸게 들어올리는 작전을 구사한 것인데, 과연 효과가 그만이었다. 통계처리가 가능할 정도로 채집하곤 흡족한 표정으로 웅덩이를 빠져나왔는데, 이런, 걷은 바지가 걸린 넓적다리에서 발등까지, 거머리들이 시커멓게 들어붙어 있는 게 아닌가. 웅덩이의 거머리 가족에게 한동안 일용한 양식을 제공한 꼴이었다. 끔찍했던 기억 속의 거머리, 지금 그 자리에서 안녕할까.


1980년대 중반에 발생한 온산병을 당시 신문들은 괴질이라 칭했다. 카드뮴 중독이 몰고온 1950년대 일본의 이따이이따이병과 유사한 병증이 가동 후 10년도 안 돼 발생해 온산공단은 공해공단으로 우리에게 각인돼 있지만 당시 울산시 온산읍 일원은 해산물이 풍부한 어촌이자 조용한 농촌마을이었다. 구리, 아연, 알루미늄, 납과 같은 비철금속의 자급을 높이기 위한다는 명분을 당시 정권은 내세웠지만 기실 일본에서 쫓겨나는 대표적 오염공장을 마구잡이로 유치한 것인데, 정작 온산공단은 만 명이 넘는 주민들을 내쫓아버렸다. 팔다리와 허리가 쑤시는 증세는 전신마비로 이어지고, 환경단체의 고발을 눈여긴 언론의 집중조명은 법원을 움직였다. 많은 희생자를 낳은 뒤에 법원은 주민의 손을 우리나라 최초의 들어주었지만 주민들은 대를 이어온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오염물질로 버림받은 온산의 주민들은 2킬로미터 떨어진 산간마을로 집단 이주했지만 인간보다 먼저 정착한 거머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매몰되었을 것이다. 온산 일원의 오랜 천수답이 공단부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주머니그물이 나타나기 전까지 거머리만 조심하면 그만이었던 금개구리는 먼 훗날 화석으로 남으면 다행이겠는데, 골격이 없는 거머리들은 흔적을 남길 가능성조차 없다. 서식지를 공단에 빼앗긴 온산 주변만이 아니다. 화학농법이 자연에 순응하던 전통농업을 폐기처분한 이후 거머리는 논배미에서 자취를 감췄다.


천수답을 없앤 관개농업은 거머리의 오랜 생태공간을 없애버렸다. 등고선처럼 삐뚤빼뚤한 논둑이 넓은 정방형으로 개과천선하자 몹시 무거운 농기계가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기계에 의존하는 일손 없는 농군은 농협빚 제대로 갚으려면 화학비료와 농약을 수시로 뿌리지 않을 수 없게 관행화되었다. 관행적으로 농약을 친지 한 세대 만에 금개구리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야생동식물보호법으로 금개구리를 멸종위기종으로 분류, 보호에 나섰다. 헌데, 금개구리에 출현에 호들갑 떠는 사람은 거머리에 대한 인식을 조금도 바꾸지 않는다. 국어사전은 “남에게 달라붙어서 괴롭게 구는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란다. 환경단체마저 관심 보이지 않는 거머리는 논배미를 쓸쓸히 떠나버린 것일까.


논배미에서 쫓겨난 거머리는 일부 한의원과 특정 연구실에서 각광받는다. 어혈이라 하여 멍든 부위에 고인 피를 제거하거나 혈액순환이 막힌 당뇨병 환자의 말단부위를 치료하는 한의원과 신약을 개발하는 연구실에서 사육하는 것인데, 각광받는다기보다 기실 앵벌이 신세와 다를 바 없다. 2000년 전부터 희랍의 성직자를 치료한 역사에 거머리는 관심이 없겠지만 신자유주의에 목맨 사람은 다르다. 거머리의 침샘에서 마취제와 혈액 응고 억제제와 항생제를 뽑아내더니 수만 마리의 거머리를 여전히 집단 사육한다. 그 속셈은 무엇일까. 심혈관질환, 류머티즘, 관절염, 폐기종, 건선에 효과를 기대한다지만, 결국 돈이 아닌가. 2005년 3천억 달러로 급증한 생물산업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국운을 걸겠다는 산업자원부는 그 대상으로 거머리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지만, 거머리 보전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상수원 보호를 위해 유기농업에 의존하는 지역을 방문했더니 논바닥에 거머리가 많다. 개구리도 늘었다고 한다. 개구리가 늘자 새도 늘고, 봄이 꽤 시끄러워졌단다. 봄이 와도 새가 울지 않는 침묵의 현장에서 농약을 배제하자 자연의 소리가 다시 들리게 된 것인데, 덕분에 농가 수입이 늘었을까. 농가소득은 모르겠지만, 농가보다 새로 등장한 펜션사업이 흥하는 모습이다. 자연의 소리를 자산으로 인터넷에 광고한 이후 손님이 늘었다고 한 펜션 사업자는 자랑한다. 교장 은퇴 후 시골로 들어와 텃밭도 일구는 그는 자연 속에서 느리게 사는 자신의 삶에 대체로 만족해한다.


자연에 순응하는 농사로 복귀하자 거머리가 논배미에 다시 나타났다. 잡초와 벌레를 먹는 오리가 제초제와 살충제를 대신하고 오리 똥이 비료가 되는 논엔 농약에 절은 논처럼 개구리도 거머리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머리는 오리농법을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이삭이 패기 전에 오리를 빼내 결국 도살해야 하는 농심은 그리 흔쾌하지 않을 텐데, 오리 덕분에 땅이 살아났다면 개구리 찾아오는 자연스런 방식으로 되돌아가면 어떨까. 거머리 때문에 싫을까. 거머리는 늘어날 새가 적당히 조절해줄 텐데, 나이 든 농부를 위한 민간요법을 생각해서라도 거머리가 꿈틀대는 논배미를 보고 싶다. (물푸레골에서, 2006년 9월호)

정말...거머리 못 본 지 오래네요.
거머리가 보고 싶어 콧등이 찡해질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요.
울 어머니 소싯적에 독사에 물리셨는데
종아리를 고무줄로 칭칭 동이고 거머리에 피빨려리셔서 겨우 사셨데요.
우리 형제자매 모두 거머리가 생명을 부여한 셈이죠.
아, 고마운 거머리...
지금도 어머니 종아리엔 고무줄 자욱 선명하고, 뱀은 끔찍히도 두려워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