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12. 9. 27. 10:18

     1947년 수도국산 우물 터!

 

참 오랜만에 자유시장을 걸었다. 객기 부리던 대학생 때, 가끔 걸은 적 있었지만 거의 30년 만이다. 안주 한 점과 술 한 잔을 팔던 노점이 길 복판에 늘어섰을 시절, 배다리에서 화평동까지 중앙시장의 노상주점들을 완주하겠다며 선배와 흐느적거렸던 어느 눈 펑펑 내리던 겨울철 이후의 일인데, 그길, 원래 짧았나? 길다고 생각했는데.


전 전 시장 때부터인가. 동인천역 뒤를 개발해 활성화하겠다고 약속한 게. 이후 그 약속의 이행은 지지부진했고, 온갖 이권과 이해가 엇갈리면서 진행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 재개발이 어디 한 군데라도 순탄하던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시행착오를 거쳐 사업을 진행하지 않던가. 유독 동인천역 뒤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자유시장 일부의 상인을 철수시켜 건물을 철거했지만 험상궂게 항의하는 현수막이 어지럽게 걸린 모습이 웅변한다. 신도시 개발에 예산을 퍼붓다보니 소외되었다는 주민의 분노 목소리들이다.


북광장으로 이어지는 동인천역에서 화평동 사이의 상가는 지금 없다. 택시와 버스를 타는 아스팔트 광장으로 변했는데, 이용하는 시민은 그리 많지 않다. 외지인은 그 자리가 원래 그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괭이부리마을의 골목을 시작으로 인천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는 골목을 답사하려 모인 외지의 참가자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이전의 모습을 본 적 없기 때문일 텐데, 그건 30년 만에 찾은 이도 그럴 수 있겠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익숙해지며 옛 기억이 희미해질 것이므로. 현수막을 걸었던 주민도 어쩌면 비슷할지 모른다. 주변 하수에 찌든 현수막은 추레하기 이를 데 없다. 이른바 풍경기억상실현상이다.


아파트 건물로 겉보기 번듯하게 뒤덮인 수도국산은 유명한 달동네였다. 지금도 많은 집들이 과거 그대로 다닥다닥 붙어 있지만, 김중미가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쓸 때에는 더했다. 우리나라 달동네의 전형이었다. 부두에서 막일하던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던 곳. 그 허름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들의 애환,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이 희로애락이 이따금 격렬하게 때때로 부드럽게 흐르던 골목이었다. 그 자리에 달동네박물관이 섰다. 괭이부리마을 뿐 아니라 인천시민, 나아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젊은이에게 조상의 고단했던 일상을 생동감 있게 알려준다.


그런데 왜 수도국산인가. 그 사실은 박물관 입구에 간단히 소개해 놓았는데, 외지에서 온 이들은 다소 생소해 했다. 근방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보니 부두와 일본인 마을에 수도를 공급하려 수도국이 있었다는 걸 안내판을 알려준다. 그래서 만수산 또는 송림산이라는 제 이름을 놔두고 수도국산이 되었다는데 인천 사람 중에 인천 최초의 수도국이 게 있고, 거기에 달동네박물관이 있는지 아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거기에 달동네가 있었고 지금도 인정이 흐르는 골목이 살아있다는 걸 기억하는 이, 얼마나 될까.


문명의 붕괴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런 현상을 풍경기억상실이라 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의 풍경이 서서히 바뀌면 부지불식간에, 갑자기 바꿔도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서, 예전의 모습을 잊고 마는 현상이다. 흔히 이스터 섬이라 칭하는 라파누이의 울울창창했던 야자수가 하나 둘 사라지다 모조리 없어졌고, 황폐해지는 와중에 조상들과 그 얼마저 사라져 쇠락해가는 후손들은 자신의 문화와 역사, 심지어 언어마저 잃어갔다. 이제 정체성까지 상실해가는 현상을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주목했는데, 수도국산의 달동네도, 동인천역의 자유시장도 비슷한 운명에 놓였다. 자존심과 인파로 넘실대던 자유시장과 기대와 애환이 흐르던 수도국산 골목의 기억은 머지않아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질지 모른다.


쇠락해가는 자유시장을 지나 수도국산으로 올라가면서 해방 직후 축조한 우물터를 찾았다. 수돗물의 혜택에서 거리가 멀었던 달동네 주민에게 마실 물을 제공해주던 고마운 우물이었는데, 얼마 전 메워지고 말았다고 한다. 일본인이 물러나고 달동네에도 수도관이 깔리면서 효용을 잃은 우물은 오염되기 시작했는데, 한 어린이가 빠지는 일이 발생하자 메웠다고 한 주민이 상황을 설명했다. 십분 이해가 가는 일인데, 정작 안타까운 것은 당시 인천시와 관련 담당자의 허약한 문화의식이 아닐 수 없다. 단기 4280, 그러니까 1947, 해방 맞고 두해 지나 축조했다고 기록한 표지석이 분명한데도 근처 집의 벽면에 포함되도록 방치하고, 우물터를 매립해 없애도 몰랐다는 게 아닌가.


자유시장이 사라진다고 초대형 마트에서 승용차 트렁크 가득 물건을 구입하는 요즘 시민들이 불편해할 일은 없을 것이다. 수도국산의 달동네가 아파트단지로 사라진다고 별스럽게 슬퍼할 시민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기억, 저 아스라한 삶의 뿌리를 하나 더 잃는다. 자유시장에 남고자하는 이, 새롭게 둥지를 치고 싶은 이, 싫든 좋든 수도국산의 달동네에 삶을 기대는 이, 또 거기에 정착하고 싶은 이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헐어낸다면, 인천은 지역의 뿌리를 더 제거하는 꼴이 된다. 요즘 세간을 흉측하게 만드는 사이코패스와 같은 범죄는 자신의 삶이 지역에 뿌리 내리지 않은 지역에서 쉽게 발생한다.


일본의 요코하마는 인천과 개항 상황이 비슷하다. 요코하마 시 최초의 수도국을 기념한 것은 물론이고 흑색 함대를 끌고 온 페리 제독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도시 곳곳마다 시시콜콜 이야기한다. 요코하마애서 페리 제독이 차를 즐겨 마신 곳이 여기라는 식이다. 페리 제독이 일본 땅에서 처음 재채기한 곳은 어디일까. 페리 제독을 기념하기 위한 처사일리 없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 뿐 아니라 생활 속에 남겨 시민의 삶을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시 차원에서 배려하려는 것이리라.


     수도국산의 달동네가 박물관으로 보전돼 어린 학생들에게 지역의 옛 문화와 역사를 알리려는 인천시의 노력이 긍정적이라면 달동네의 버림받고 있는 우물터를 다시 단장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요코하마처럼 근대문화유산이 많은 인천에 할 일은 많다. 근대유산 뿐 아니라 골목길까지 널려 있다. 타인의 접근을 봉쇄하는 최첨단 초호화 건물보다, 경쟁적 속도와 목포가 숭상되는 회색도시보다, 역사와 인정이 흐르는 도시로 성숙할 수 있는 길을 시민과 함께 모색할 수 있다. 이제 갈무리하는 가을이 완연하다. (인천in, 2012.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