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9. 9. 25. 14:20

 

아무리 시끄러운 소음도 규칙적이라면 잠이 스르르 오는 모양이다. 거기에 바람까지 솔솔 불어온다면 더욱 그렇겠지. 기찻길 옆 오두막집의 아기가 잘도 잔다는 걸 보니. 매미가 맴맴 울어 젖히는 시골, 원두막에 누우면 어른도 잠에 빠질 게 틀림없는데, 지금은 가을이다. 요즘 기찻길 옆에 오두막집은 없다. 레일을 길게 이어붙여 예전처럼 시끄럽지도 않다. 아기를 재우는 이맘때 자연의 규칙적인 소리는 아무래도 파도가 아닐까.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라고 한인현 작사 이흥렬 작곡의 동요 <섬집 아기>는 노래한다.

 

가을은 굴이 제격인 계절이다. 영국 속담에 알파벳 ‘R’자가 있는 달, 굴을 먹어야 한다고 했단다. 생각해보자. 알을 낳는 5월부터 독성을 띄는 까닭에 굴을 외면해야 했던 사람들은 9월에 들어야 굴을 맛볼 수 있지 않던가. 여름 내내 굴을 굶어야 했던 이들이 식당마다 들려 굴 내놓으라고 성활 텐데, 어촌계의 독촉을 받는 섬집 아낙은 얼마나 마음이 급했을까. 아기가 잠을 곤히 자고 있어도 갈매기 울음소리에 맘이 불안한 엄마는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모랫길을 달려 아기에게 간다고 4분의3박자의 동요는 서정적으로 노래한다. 바닷바람이 본격적으로 추워지면 굴 따기 어렵다. 뭐니뭐니해도, 수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지기 전인 늦가을의 굴 맛이 최고다.

 

1995년 10월이 생각난다. 뜨거웠던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결국 승리로 끝난 날이었다. 바위에 다닥다닥 붙은 굴을 놔두고 마지막 시위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던 시민들 앞에 긴급 전송된 정부의 핵폐기장 포기선언! 1년 가까운 반대운동으로 몸과 마음이 지치고 돈까지 바닥난 덕적도 주민과 반대운동 활동가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고, 격렬할 것으로 예상한 오후의 행진은 승리의 춤과 노래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덕적도에서 급히 가져온 굴, 바닷가 바위에서 캔 자디잔 ‘석화’로 우리는 밤이 새도록, 코가 삐뚤어지도록 승리를 만끽해야 했다.

 

바닷물이 썰어 나가면 드러나는 해안의 바위에 동전 크기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굴이 석화다. 석화는 따지 않고 캔다고 한다. 물이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 바위에 웅크리고 앉아 능숙한 솜씨로 캐고 또 캐도 크기가 워낙에 작으니 모을 수 있는 양이 많지 않은 석화는 맛이 얼마나 기막힌지 연안부두에 내놓기 무섭게 팔려나가는데, 덕적도에서 바로 먹는 석화의 감칠맛은 연안부두와 비교를 거부한다. 그릇에 밥을 반만 담고 나머지는 바로 그 석화로 채운 다음 석석 비벼먹는 맛!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위해 덕적도를 찾지 않았다면 감히 맛볼 수 없었을 그 석화. 1995년 10월, 실컷 먹었다. 잊을 수 없이 감사하게도,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가득 힘겹게 캔 석화를 보낸 거였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노출되는 만큼 성장이 더딘 서해안의 석화는 살이 찰지고 바다에 잠긴 채 자라는 남해안의 양식굴은 커도 조금 물렁한데, 그대로 스테이크로 구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굴도 있다. 그 굴을 입장료만 내면 음료수와 술을 제외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미국의 식당에서 보았다. 배가 출출한 상태에서 접시를 들고 줄을 서자마자 눈에 띄는 그놈의 굴! 소 혓바닥처럼 보이는 그 굴을 호기심으로 하나 집어 들었더니 순간 접시가 꽉 차던데, 아쉽게도 다른 음식들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맛까지 푸석푸석한 그놈 때문에 용량이 한정된 배가 맛깔스러운 음식들을 한사코 거부했던 거다. 뜨내기손님을 골탕 먹이려는 식당 주인의 술책에 걸려든 게 틀림없었다.

 

흔히 ‘바다의 우유’라 하는 굴은 여성에게 하얀 피부를, 남성에게 강한 정력을 선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액에 많은 아연을 다량 함유하는 굴은 몸에서 멜라닌을 분해한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어부의 딸은 피부가 거무튀튀해도 굴 따는 집 처자의 피부는 눈꽃처럼 희다는 말이 있다나 어떻다나. 아무튼, 여간해서 날것을 먹지 않는 서양 남성들은 굴 몇 개 얼음 위에 올려놓은 가격 높은 메뉴를 호기 있게 주문해서 연인과 먹는다는데, 그들은 굴을 최음성 식품으로 여긴다고 한다. 칼로리가 적어도 몸에 필요한 각종 무기물과 영양소를 두루 함유하니 균형 잡히는 다이어트에 좋은 건 불문가지. 게다가 산성으로 치우친 몸을 알칼리로 바꿔줄 뿐 아니라 당뇨환자의 혈당을 낮추고 고혈압까지 예방한다니 세파에 찌든 중장년의 영양식으로 훌륭할 수밖에 없겠다. 글리코겐이 많아 숙취에 그만이라는데, 아닌 게 아니라 주당들은 굴전을 즐겨 찾고 굴해장국으로 속을 달랜다.

 

다른 조개 종류와 달리 도무지 규칙성이라고 보이지 않는 굴은 밀물과 썰물이 부지런히 교차하는 바다의 바위나 돌에 울퉁불퉁한 껍질을 단단히 붙이는데, 붙은 쪽보다 작고 볼록한 껍질을 들어내면 달콤함을 숨긴 몸이 흐물흐물하게 나타난다. 그 몸으로 수억 개의 알은 낳는다니 알이 전부 굴로 성장한다면 양식업자들은 금방 부자가 될 테지. 바다에서 수정된 알은 동물성 플랑크톤이 되어 3주 가까이 떠다니다 부착하는데, 우리 양식업자들은 보통 주렁주렁 이어놓은 굴 껍질을 미리 넣어둔다. 어린 굴이 어미의 껍질에 달라붙는 셈인데, 나무나 밧줄에 조개껍질을 붙여 바다에 담그는 양식도 외국에서 성행한단다. 양식 굴이 자연산보다 맛이 덜하다고? 그렇게 민감한 미각을 자랑하는 이에게 접시를 바꾼 뒤 다시 물어보라. 머리를 극적일 수밖에 없을 걸! 플랑크톤을 걸러먹는 굴의 맛은 바다가 얼마나 깨끗한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2007년 12월 7일 한밤중. 홍콩 선적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의 옆구리를 들이받은 삼성물산의 바지선 ‘삼성1호’는 하루만에 12500킬로리터의 원유를 태안 해안에 토하게 만들어 주민의 가슴과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거대한 선박으로 쉴 새 없이 석유를 운반해야 유지되는 산업문명의 치명적 허점을 여실히 증명한 셈인데, 이후 백만을 뛰어넘은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기름제거 작업으로 겉보기 깨끗해진 바다에서 굴은 여전히 양식되지만 그만 명성을 잃었다. 기름 냄새가 난다며 외면하기 때문이라지만, 태안의 굴은 오늘도 묵묵히 인간이 오염시킨 바다를 정화시키고 있다. (전원생활, 2009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