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6. 7. 1. 22:55
 

한마디로 터무니없다. 굴뚝새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일국의 지엔피에 영향을 미치겠는가. 산기슭 구석에 숨어사는 작디작은 굴뚝새는 인간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하찮은 존재일 따름이다. 한 마리는커녕 세상의 굴뚝새가 모조리 멸종된들, 막대한 개발로 축적된 우리의 지엔피는 굳건할 것이다.


북경에서 꿀을 빨던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으로 미국에 폭풍이 휘몰아친다면 역시 터무니없을까. 2008년 올림픽을 대비, 개발 소용돌이에 빠져있는 북경에 나비가 어디 한 두 마리인가. 북경의 나비 날갯짓으로 미국에 폭풍이 인다면, 연일 불어대는 폭풍으로 미국은 남아나지 않을 텐데, 보라, 겉보기 멀쩡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신과학이라 일컫는 카오스 이론은 거짓일까. 나비와 폭풍은 설명을 위한 화두라 치더라도, 자연에서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영국의 과학출판상을 받은 『제3의 침팬지』에서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굴뚝새와 지엔피의 관계”로 말머리를 흥미롭게 던졌는데, 인간의 천박한 판단으로 특정 동식물이 제거된 후, 뜻하지 않게 발생하는 일련의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자국의 개발모델에 따라 선진국에서 후진국을 줄세우고, 지엔피의 높낮이가 ‘선진국’의 지표가 된 이래, 선진국은 변방국가의 선망이었다. 우리 역시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물려받은 자연을 미국식으로 개발, 또 개발했고, 그 결과 도시 근교나 인가에서 쉽게 발견되던 굴뚝새는 종적을 감췄다. 둥지 트는데 필요한 이끼가 대기와 수질오염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먹이가 되는 거미나 곤충도 드물어졌지만, 그나마 농약과 환경호르몬에 절어버렸다. 굴뚝 먼지를 뒤집어 쓴 듯, 머리부터 꽁지까지 짙은 적갈색에 갈색 가는 무늬가 산재한 굴뚝새는 자신의 자태를 거의 드러내지 못한다. 굴뚝새가 사라지는데 애도를 표하지 않는 사람, 그의 안위는 아무렇지 않을까.


돈을 위해 양식용 황소개구리, 떡붕어, 배쓰, 블루길과 같은 외래종을 경쟁적으로 들여놓자 전국의 호수와 저수지는 자정력을 잃었다. 생태계의 순환에 동참하며 호수의 자정력을 도모하던 수서곤충은 물론, 토착 어류와 개구리 심지어 뱀까지 외래종이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자정력이 무너져 호수가 썩자 호수를 상수원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소독약의 양을 늘려야 했고, 소독약이 늘자 수돗물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수돗물은 허드렛물로, 먹는 물은 생수공장에서 받아 해결한다. 생수 공장이 연실 들어서면서 계곡이 마르자 동물들이 숲에서 사라지고, 동물이 씨앗을 공급하지 못하자 숲은 황폐해지고 만다. 숲이 황폐해지면 사람의 삶은 어찌 될까. 굴뚝새와 소원해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카오스 이론은 말한다.


논리의 비약일까. 살충제를 뿌리자 벌레가 비실거리고, 비실거리는 벌레를 먹은 닭이 비실거리자 상품가치를 잃은 닭을 잡아먹은 주인 즉, 맨 처음 살충제를 뿌린 농부가 쓰러졌다는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말라리아를 줄이려 디디티를 움막에 뿌리자 보르네오 섬은 뜻하지 않은 사태를 만났다. 모기는 사라졌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디디티를 쏘이고도 살아남은 바퀴가 도마뱀의 먹이가 되었는데 바퀴를 먹어 움직임이 느려진 도마뱀을 포식한 고양이들이 죽어나가는 게 아닌가.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 떼가 들끓고 주민들은 말라리아보다 무서운 페스트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그 뿐이 아니었다. 디디티를 이긴 나방 유충이 도마뱀이 사라진 움막에서 서까래를 갉아먹자 지붕이 풀썩 주저앉았다는 일련의 이야기는 이미 고전이다.


20세기 초 호주는 효율을 위해 끝 간 데 없는 농장에 오직 사탕수수만 심었다. 그러자 걷잡을 수 없게 풍뎅이가 늘어나 잎을 갉아 먹는 게 아닌가. 당국은 부랴부랴 하와이에서 풍뎅이를 잡아먹는 축구공 반 만한 수수두꺼비를 잔뜩 들여왔는데, 이런 그 두꺼비가 악몽일 줄이야. 피부에 강력한 독을 가진 수수두꺼비는 천적이 없을 뿐더러 먹성도 좋아 호주 북동부를 뒤덮으며 퍼져나가는데, 평원에 적응하면서 다리가 길어져 이동속도가 70년 전에 비해 5배나 빨라진 것이다. 떼로 이동하면 마치 땅이 움직이는 것 같은 두꺼비를 먹던 거대한 악어마저 죽어 너부러지는 사태를 만난 호주 당국은 비상에 돌입한 모양이다. 맥주를 미끼로 생포작전에 돌입하다 지쳤는지, 자칫 재앙이 될 수 있는 묘책을 강구하겠단다. 생태계의 수평이동을 걱정해 바이러스 살포 계획을 포기한 연구자는 한 번에 수만 개의 알을 낳는 암컷을 없애려 올챙이를 모두 수컷으로 바꾸는 유전자 연구를 획기적인 양 발표한 것이다. 만일 그 유전자가 조작된 채로 수평이동한다면? 똑똑한 척 혼자 다하는 사람은 이제 제 무덤마저 파려는 건가.


편견을 바탕으로 하는 경작으로 자연에 상처를 준지 이제 만년,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를 과소비하는 산업혁명으로 자연을 도륙한지 고작 500년, 자연을 파괴하는 핵을 사용한지 겨우 50년 만에 사람은 굴뚝새마저 볼 수 없는 환경재앙에 직면했다. 이기적 목적으로 재단해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고 있어도 대략 100만 년 전 자연에 등장한 사람은 99퍼센트의 세월을 자연과 합일하며 지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은 닥칠 재앙을 엉뚱하게 해결하려 든다. 생태계 질서를 교란하는 유전자 조작을 연구하더니 이젠 핵으로 오염될 지구를 떠나잔다. “외계에 식민지를 찾을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인류의 생존이 달려 있다는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한 강연장에서 지구온난화와 핵전쟁과 유전자 조작이 발생시킬 환경재앙으로 멸종되지 않으려면 달이나 화성에 정착촌을 세우고, 생존을 위해 우주로 퍼져나가자고 제안한다. 굴뚝새 돌아오는 환경을 만들자는 생각은 할 줄 모른다.


깊은 산이나 인가 주변을 가리지 않고 키 작은 나무와 덤불과 계곡의 바위 사이를 바삐 날아다니며 찌찌쪼로 쪼로로로 우는 굴뚝새는 둥지를 트는 초여름에는 숲속을 떠나지 않지만 겨울에 인가를 기웃거린다. 짧은 꽁지를 세우고 허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먹이를 찾으러. 얼마 전, 잔설이 남은 청량산을 오르니 굴뚝새 한 마리 황급히 몸을 숨긴다.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진객이 눈이 내려 등산객이 줄자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다. 반갑기 그지없다. 그런 굴뚝새를 보고 지엔피를 운운하기 미안하다. 카오스 이론도 좋지만 지엔피 운운하기에 앞서, 굴뚝새의 건강을 통해 사람의 생명을 살펴야 하지 않을까. (물푸레골에서, 2006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