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10. 11. 12:17

 

미국 발 경제위기로 세계가 움츠릴 때, 북경 올림픽의 열기를 몰아 경제 호황을 기대했던 중국도 된서리를 맞았다. 최신 공법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경기장을 건축하는데 헐값으로 동원되었던 농촌 출신 노동자와 도시의 크고 작은 공장에 취업했던 낮은 임금의 농민들이 보따리를 싸고 풀이 죽어 시골로 돌아가는 모습을 외신은 보여주었다. 이른바 ‘농민공’들이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그들은 시골에는 일자리가 없다고 푸념했지만 거기에는 땅이 있다. 일자리를 잃은 도시의 빈민과 달리 고향으로 돌아간 농민공들은 굶주림을 피할 수 있다.

 

전라도 땅의 식당에 들어가서 백반 1인분을 주문해보라. 식탁에 크고 작은 반찬그릇을 넘치도록 올려놓는 인심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반찬. 아무리 아까워도 다음 손님에게 도로 내놓지 않는다고 하니, 그렇게 장사하고도 남는 게 있을까 싶은데, 남는단다. 오래토록 같은 식으로 식당을 운영해왔다는 건 남는다는 걸 뜻한다. 모르긴 해도 식장 주인은 직접 농사를 짓거나 아주 가까운 이에게 농작물을 값싸게 받아올 게 틀림없다. 시장에서 재료를 구했다면 그리 많은 반찬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은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을 맛있게 먹는 이를 반길 줄 안다. 고마워하는 손님에게 뭐라도 더 내놓고 싶지, 돈을 더 받으려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생명의 농산물이 생산되는 터전, 땅이 게 있기 때문이다.

 

땅에서 땀 흘리며 농작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의 마음은 언제나 그렇지만,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일자리를 더 원하는 사람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돈벌이를 위해 농촌을 떠나거나 월급 많이 받는 일자리를 농촌에 만들어내려고 한다. 농토에 비해 인구가 턱없이 적은 지방들이 그렇다. 예를 들어, 경상북도 영양군은 2만 인구를 채우지 못한다. 이미 초고령화된 농촌은 활력이 없는데 노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이러다 이웃 지방과 통합될까봐 고위 공직자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주민등록을 옮겨오는 이에게 두둑한 정착자금을 지원하는 영양군은 남부럽지 않은 관광지를 개발해 들어오는 주민과 세금을 늘리고 싶은데 여의치 않다. 사방이 나지막한 농촌 마을은 물 깊고 산 높은 지역을 도저히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이다.

 

실효성 없는 관광객 유치와 두둑한 정착비로 인구 2만을 간신히 채워가며 고위 공직자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보다 농사짓고 싶어 영양군을 스스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능동적으로 받아주는 건 어떨까. 회색도시에서 지쳐 귀농을 희망하는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인구 유지 뿐 아니라 그들이 낳은 아이들로 지역은 아연 활기를 띌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정책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기만 한다.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개발이 성공한다면 정착민이 과연 늘어날까. 먼저 경험한 지역의 예를 살펴보라. 개발 여파로 가격이 오르면 땅은 외지인의 투기에 휩쓸릴 테고, 남아 있던 농민들마저 뿌리 뽑힌 땅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게 아닌가. 한데 인구가 줄어 통폐합을 걱정하는 지방은 영양군만이 아니고, 그 타개책도 영양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농사의 경험이 있든 없든, 도시인의 대부분은 농촌의 자녀다. 추석이나 설이 되면 막히는 도로를 뚫고 시골로 향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현실에 얽힌 몸은 비록 도시에 있어도 언젠가 농사짓기를 다짐하는 이른바 ‘귀농’ 희망자는 요사이 점점 늘어간다. 전국귀농운동본부와 실상사에서 상설로 여는 귀농학교가 그렇듯, 농업 관련 운동단체들의 귀농학교 열기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잘 알려진 귀농학교만이 아니다. 전국의 대도시마다 앞 다투며 문을 여는 귀농학교들은 언제나 수강생으로 붐빈다. 매사에 경쟁적인 도시에서 부대끼며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또한 지구의 생태공간을 자정능력 이상 파괴한 산업주의가 필연적으로 불러온 에너지와 환경위기를 윤리적으로 극복하려면 농사 이외에 대안이 없다는 걸 깨닫는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농사지을 땅이다.

 

귀농학교를 마치자마자 귀농하고 싶어도 막상 어디에서 시작해야할지 막연해하는 이에게 일정 기간 농사지을 땅과 집과 농기구, 그리고 영농기술을 익힐 기회를 제공하는 지방이 있다면, 많은 귀농 희망자들이 모여들 게 틀림없다. 한두 해 농사로 자신감이 생기면 그들은 어디에 정착하겠는가. 이웃이 살갑고 농사짓기 친숙한 그 지방에 뿌리내리며 가족을 꾸릴 게 아닌가. 아이 울음소리가 멈춘 지방은 활기를 되찾을 거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직장을 더 다녀야한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6개월이나 1년, 또는 그 이상 마음 편하게 농사지을 공간을 제공한다면? 그들도 나중에 그 지방으로 정착할 게 틀림없다. 귀농을 희망하는 젊은이들은 자녀의 입시교육이나 말초적 편의를 좇는 도시를 더는 동경하지 않는다. 가족과 시골에 뿌리내리려 한다. 그들이 시골 마을에 늘어난다면 농촌의 땅값은 안정될 테고, 떠나려는 농민의 수도 줄어들지 않을까.

 

“일만 하면 소, 공부만 하면 도깨비”라는 금언을 머리에 새기며 전인교육을 실천하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는 농업계 고등학교다. ‘더불어 살아가는 평민’을 키워내려는 그 재단에서 얼마 전 ‘환경농업전공부’를 신설했다. 일종의 전문학교 과정인데, 입소문을 어떻게 들었는지 많은 지원자가 전국에서 모여든다고 한다. 농촌에서 땅을 살리는 전문 농민을 키워내려는 소박한 교육인데,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절박한 마음을 가진 이가 많다는 거다. 모여드는 남녀노소 학생의 경륜은 다양하다.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지원한 경우도 있지만 도시에서 번듯한 직장을 다녔거나 환경농업전공부로 진학하기 위해 직장에 휴직을 신청한 이가 대부분이다. 가톨릭 신부와 수녀, 불교 승려와 개신교 목사, 심지어 외국인도 지원을 하고, 졸업 후 그들은 어떻게 하든 귀농하려 한다.

 

시방 전국의 4년제 정규대학에서 ‘농업’이라는 글자는 사라졌다. 적지 않았던 농과대학들이 은근슬쩍 이름을 아리송하게 바꾸더니 농업 관련 학과들도 개명 대열에 동참해 대학교육에서 농업은 퇴출된 지 오래다. 졸업 후에 흔쾌히 농업에 투신하는 학생의 수가 드물어지자 농업인을 키우는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생긴 현상은 아닐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 대학 그 학과 교수의 강의 내용이 엇비슷한 걸 보면.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겠지만, 대학의 그런 식자들이 먼저 ‘농업’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열등의식을 가졌던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아직 드물게 농업계 고등학교가 일부 도시에 남아 있고, 정부가 1994년에 설립하고 농업협동조합에서 1962년에 설립한 한국농수산대학과 농협대학, 그 밖에 경기도에서 1996년에 설립한 여주농업경영전문학교도 있지만, 땅에 뿌리내리는 농민을 양성하는 교육과 거리가 먼 게 사실이다. 농업계 고등학교는 인문계에 지원하기 민망한 학과 성적을 가진 중학생이 마지못해 입학하는 경우가 다반사고, 교육당국에 정식으로 인가된 대학은 설립 목적부터 농촌과 차별화를 선언한다. 농업을 투자의 대상, 이익 창출의 분야로 인식하고, 농업 경영인의 양성을 주요 목표로 내세우는 것이다. 식량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 사회에서 무척 안타까운 건,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와 환경농업전공부를 제외하면 땅에 뿌리내리는 농업과 농민의 가치를 깊게 인식하는 교육기관이 드물다는 사실이다. 식량자급이나 식량주권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인구와 식량문제, 지구온난화와 환경위기 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세상일을 돌이키다보면 어쩔 수 없이 농업으로 귀결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철학교수를 하다 나이 50에 초보 농사꾼이 된 윤구병의 예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굳이 돌보지 않아 황폐된 농촌으로 들어가 10년 동안 옥토로 가꾸었는데, 땅주인의 요구로 넘겨주어야 했다. 현재 가까운 곳에서 다시 농사를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하던데, 의지만 있는 귀농 희망자는 아직도 도시에서 망설이고 있다.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귀농인들을 포함해 이 땅의 농민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좁은 국토에 무섭게 늘어난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만큼 충분한 식량은 이 땅에서 자급할 수 없다. 쌀이 요즘 남아돈다고 식량이 넘치는 걸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는 식량의 4분의3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에너지와 환경위기 시대에 세계 식량의 사정이 언제 어두워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초국적기업에 식량주권을 위탁한 우리는 미국과 같은 농산물 수출국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환경위기 시대의 식량주권을 위해 내 땅에서 자급자족의 기반을 확보해야 하건만 겨우 존재하는 농토마저 신도시나 공업단지로 최우선으로 개발되는 실정이다. 멕시코와 필리핀에서 일어난 폭동은 부족한 식량이 원인이었다. 농토를 잃고 식량 위기를 자초한 국가들이 늘어나는 이때, 내일이 걱정이다. 늦기 전에 농토를 늘려야 한다. 개발된 신도시와 공업단지를 가까운 내일 농토로 환원하기 어렵다니 산림을 훼손한 골프장이라도 서둘러 농지로 바꿀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른다. 다가올 식량 위기를 조금이라도 능동적으로 극복하려면 남아 있는 농사꾼의 삶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고 땅에 뿌리내리려는 귀농 희망자들을 반갑게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덕분에 속편하게 먹고사는 도시의 소비자들은 그이들의 노고에 무한히 고맙고 미안해해야 옳다. (사이언스올, 2009년 10월)

 
 
 

서평·추억

디딤돌 2007. 2. 20. 13:32
 


야마오 산세이 지음, 최성현 옮김(2006), 『어제를 향해 걷다』, 조화로운삶.

장 피에르 카르티에, 러셀 카르티에 지음, 길잡이 늑대 옮김(2006),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조화로운삶.

피에르 라비, 니콜라 윌로 지음, 배영란 옮김(2007), 『미래를 심는 사람』, 조화로운삶.




따뜻한 설 명절이 지났다. 기상관측 이래 가장 따뜻했다고, 덕분에 식구들과 나들이하는 시민들이 많았다고, 기자들은 신이 난 듯 전한다. 진작 따뜻해지지 않은 게 못내 섭섭하다는 투다. 해마다 더워지는 지구온난화 추세 속에 무감각해졌는지, 올해는 유난히 더울 것이라는 경고가 신년 벽두의 화두였건만 따뜻한 설을 자축하는 분위기가 완연하다.

 

지구온난화는 단순히 종료나무로 해변이 한가로운 아열대기후를 맞는 게 아니다. 익숙해온 환경과 문화는 물론, 농업에 큰 혼란이 발생할 게 분명하다. 자연이 흡수할 능력 이상 배출하는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감당하기 어려운 기상이변을 거푸 경험하는 우리는 전에 없던 질병에 시달린다. 농약이나 화학물질로 오염된 농작물이 주요 원인으로 확신하는 아토피만이 아니다. 공장식 밀집 사육과 과밀한 양식이 빚는 항생제 내성은 간단한 질병에도 속절없이 감염되는 현상을 예고한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발생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럴 때 농약과 항생제 없이 이동할 수 없는 수입농산물은 대안일 수 없건만, 비교우위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세계화 신기루는 내일을 걱정스럽게 한다.

 

일본에서 우동 한 그릇의 국산화를 조사하니 35퍼센트에 미치지 못한다던데, 차례상에 올라오는 음식,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분명한 건, 아파트로 뒤덮인 이 동네는 아니다. 불과 한 세대 전 과거, 내 부모가 내 나이였을 때, 이 동네는 바다를 바라보는 고즈넉한 농경지였다. 당시 설 차례상엔 마을에서 갈무리한 농산물로 조리한 음식이 올라왔을 텐데, 도로를 메우며 저마다 고향을 찾는 요즘, 상에 올라오는 음식은 언제부턴가 고향을 잃었다. 저 음식을 드시는 조상님, 탈나는 건 아닐까.

 

교회를 마다하는 목사이자 초부 농군이 있다. 내가 생산한 농작물을 내 아이가 먹는데 땅에 독약을 뿌릴 수 없는 법. 도회지의 목회자 생활을 접고 귀농한 그이는 소출이 부족한 유기적 농사가 힘에 부치지만 떳떳하다. 땅이 살아야 그 땅에서 자라는 농작물도 건강하고, 그 농작물을 먹는 아이들도 건강하지 않겠나. 가끔 찾아오는 도시인은 그에게 큰 빚을 진 느낌이다. 남들처럼 약 뿌리면 간단하건만 굵은 땀방울 굳이 흘리며 힘겹게 생산한 농산물인데, 가만 앉아 받아먹지 않던가. 그 농산물은 땅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설 차례상에 오를만하다. 아파트를 전전하며 고향과 이웃을 잃은 도시의 아이들과 나눌 가치가 충만하다.

 

농사짓는 전직 고위 관료가 있다. 버림받은 환자를 돌보는 테레사 수녀와 잠시나마 함께 행동했던 그이는 다니던 관공서를 걷어차고 배 밭을 인수한다. 드라마 속의 과수원 생활이 낭만적으로 보였기 때문인데, 관행 농업에 익숙한 배나무였지만 화학비료와 농약을 뿌릴 수 없었다. 건강한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면서 보살핌 없는 질병이 만연하지 않던가. 선배 농민마저 외면하던 똥오줌을 기꺼이 투입하던 초보농군은 그만 거름을 뒤집어썼다. 외발수레 바퀴가 돌부리에 부딪혔기 때문인데, 넘어지면서 든 첫 생각은, ‘아까운 똥!’이었단다. 맨손으로 옷과 땅바닥에 엉겨붙은 거름을 긁어모으며 생산한 배는 어떤 과수원의 무슨 상표의 배보다 훨씬 건강할 것이다.

 

목회자와 공직자.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는 이로 여간해서 직종을 바꾸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이가 새로 선택한 농부라는 직업은 전에 비해 비천해진 것일까. 천규석 선생은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게 ‘진보’다』며 일갈했건만 아직 세상은 농부를 천하게 바라본다. 배우지 못한 사람도 지을 수 있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책과 제도로 배워야 배움이라고 속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평생 농부로 살며 나이를 먹은 이는 무지하다고 단정해도 무방할까. 귀농인의 말을 들으면 그렇지 않아 보인다. 땅에서 얻는 깨달음은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지혜를 준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땅에 삶의 기반을 둔 농부는 철학자나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거다.


 

 

“내일을 향해 걸을 수 있는 것처럼 어제를 향해서 걸을 수 있다. 우주 식민지를 향해 걷는 것도 가능하지만 석기 문화를 향해서 걸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간이 한 방향만으로 흐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시대의 큰 착각이자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와세다대학교를 입학했지만 졸업하지 않은 동경 출신의 시인 야마오 산세이는 일본 열도 아래쪽의 작은 섬에 뿌리내리면서 철학자가 된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여사는 오래된 과거에서 내일의 대안을 찾아보자고 제안하는데, 야마오 산세이는 어제를 향해 걷자고 권한다. 7천2백 살 된 성스러운 노인, 조몬 삼나무의 품이 펼쳐진 ‘본래 고향’에 가서 희망을 느끼는 야마오 산세이, 차에 치어죽는 두꺼비를 보고 “물질문명에 의해 계속해서 폄하돼 온 인간의 소박하고 깨끗한 마음”을 읽어낸다. 변소 치우기를 즐겨하는 그이는 『어제를 향해 걷다』를 썼다. 물질문명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연과 가장 가까운 농경사회의 꿈을 전파하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수익성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처럼 흙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단지, 생산을 위해서만 일을 하지 않습니다. 흙에서 일한다는 것은 삶의 기술을 가꾸는 것이고, 우리 자신이 밭과 자연, 그리고 계절에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농부 피에르 라비는 신성으로 돌아가자고 권한다. 신성은 무엇인가. 결국 ‘자연스러움’의 다른 말이 아닐까. 온 존재에서 신성을 느끼고 신성에서 본질을 파악하며 신성으로 감동받는 가방끈 짧은 농부는 프랑스의 지성인이 귀를 기울이는 철학자가 되었다. 인간과 대지를 연결하는 그의 삶과 사상을 들은 전기작가는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를 썼고, 땅을 벗어난 문명을 단호히 거부하는 영향력 있는 방송인은 피에르 라비와 대담을 나눈 뒤 『미래를 심는 사람』을 펴냈다. 사람들은 피에르 라비를 시인으로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땅에서 깨달은 철학은 시어와 같은 울림이 되어 독자의 가슴에 젖어들기 때문이리라.

 

 

 


유기농업은 유기질 비료를 뿌리기만 하면 다 되는 건가. 그렇다면 유기농업은 쉬운 일이 다. 유기질 비료를 구입해 뿌리면 될 게 아닌가. 야마오 산세이는 인간과 수많은 생명체의 유기적 관계를 회복할 수 있어야 유기농업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땅도 살리지만 그 땅에 기대 사는 숱한 생물들을 살리고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뜻일 게다. 그렇다면 부유 계층의 웰빙을 유혹하는 수입 유기농산물은 어떤가. “살림을 받고, 살리고, 다시 살림을 받는 생태적 조화 속에서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사실의 확인 위에” 유기농업이 있다고 야마오 산세이는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수입 유기농산물은 이 땅에서는 유기농산물이 될 수 없다. 우리 땅과 생태계를 살리는데 조금도 기여하지 않았다.

 

요즘 유기농산물은 그저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사먹는 하나의 식료품이 되었다고 우려하는 피에르 라비는 자연에 대한 고민도, 인간에 대한 걱정도 전혀 없는 농사를 유기농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이윤을 노리는 틈새시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 기업가들이 아프리카나 동유럽에서 현지 농민들을 고용해 유기농산물을 재배해 수출할 따름이라고 지적한다. 석유를 재료로 만든 농약과 화학비료가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농산물 이동을 위해 석유를 소비했다면 진정한 유기농산물로 보기 어렵다는 엄격한 견해와 맥이 닿는 해석이다. 어떤 이는 생산지에서 1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농산물은 아무리 유기적으로 생산했다 해도 유기농산물로 인정하지 않는다. 손수레로 이동하지 않은 농작물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1칼로리의 영양분을 얻기 위해 12에서 15칼로리에 이르는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농업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고 보는 피에르 라비의 견해는 매우 타당하다. 얼마 전 일본은 빌딩 지하에서 벼를 키우는 모습을 언론에 공개했다. 마치 부가가치를 위해 농경지를 남김없이 개발하더라도 식량생산에 지장이 없을 것처럼.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우리의 한 기업인도 비슷한 발언을 남겼다. 농경지에 공장을 세워 공산품을 만들고, 그 공산품을 수출해 번 돈으로 식량을 수입하는 게 이익이라는 주장이었다. 식량을 무기 삼을 것을 염려하는 반응에 대해, 그는 공장 재배를 언급했다. 마치 피자를 익히듯,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파종과 수확을 일원화하면 더 많은 식량을 적기에 적량 공급할 수 있다는 가당치않은 주장을 펼친 것인데, 가능성 여부는 둘째 치고, 생물을 공장에서 생산하겠다는 기업인의 발상이 언론에 진지하게 언급되는 현실이 우리의 내일을 걱정하게 한다.

 

몸을 움직이지 않는 ‘책상 시인’을 타락한 것으로 규정하는 야마오 산세이는 자식들이 머리보다 몸을 움직이는 삶을 선택하기 바란다. 두뇌가 지배하는 문명에 거짓과 협잡이 횡행하고, 흙과 맺은 농부의 손과 말과 마음은 진실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야마오 산세이의 통찰처럼 농민은 대지가 말이 없듯 말이 없다. 한데 과학기술이 내세우는 기대는 장하기 그지없다. 농업 분야의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눈부시게 화려한 과학기술은 많은 위험성과 비윤리성을 내포한다. 극단적 품종개량으로 유전적 다양성을 없앤 축산은 35일 사육해 뚝배기에 쏙 들어가는 삼계탕용 병아리를 대량생산하는 기술을 보급했지만 그 닭들은 조류독감에 속수무책이다. 조류독감은 거액을 투자한 농민의 파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오염시킨 환경에 적응하면서 인간마저 감염시키지만 그 차원도 넘어선다. 생태계와 우리의 의식마저 단순하게 한다. 철새를 몰아내려 하지 않던가.

 

이제 동물이란 인간에게 “그저 갈비 살과 다리 살, 날개, 햄 제조용 고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꼬집는 피에르 라비는 화학비료, 살충제, 우량종자, 기계농과 같은 영농방식은 “죽은 물체에 대한 논리를 생명체에 적용하려는 것”으로, “과일과 채소는 여전히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생명은 없다”고 간파한다. 생명공학처럼 예측 가능한 생명을 요구하는 과학기술은 농업에서 땅을 제외시킨다. 이미 유리섬유에 파종해 화학비료 녹인 액체를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유리온실 속의 과학영농이 세계의 원예작물을 평정한 시대가 아니던가. 막대한 보조금을 무기로 지구촌의 식량을 획일화하는 과학영농은 다국적기업이 보급하는 단일품종을 파종하는데, 석유가 모자라거나 지구온난화와 같은 환경변화가 발생하면 우리는 어떤 내일을 맞아야 할까. 카길과 같은 곡물 다국적기업은 멕시코 민중에게 돌아가던 옥수수를 바이오 에너지 원료로 전용한다. 수익성 태문이다. 과학기술이 보장하겠다는 이윤을 위해 자신의 오랜 농업기반마저 포기하는 우리, 앞으로 불어닥칠 환경변화는 어떤 재앙을 우리 또는 후손에게 안겨줄지.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가장 끔찍한 재앙을 ‘서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피에르 라비와 핵무기와 핵발전소로 가득 채운 산업사회를 ‘죽음을 부르는 문명’으로 해석하는 야마오 산세이는 동시대 인물이다. 동양과 서양으로 떨어져 있어 서로 만난 적은 없어도 펼쳐내는 생각이 거의 비슷하다. 땅에 뿌리 내린 농부인 까닭에 문명의 독성을 직시하는 수준도 다르지 않다. 피에르 라비는 진보를 다시 정의하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대개 진보를 인간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켜 준다고 일컬어지는 과학 기술 분야의 성과물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지만 “진보의 혜택은 일부 소수에게만 주어질 뿐이고, 그 소수 때문에 인류의 75퍼센트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으며, 자연이 병들고 있”다고 직시한다.

 

내일을 생각할 때 화석연료의 힘으로 지탱하는 과학 발전이 진보인지 사고인지 되묻는 피에르 라비는 비록 핵발전소에서 얻은 전기를 소비하지만 더는 기계에 휘둘리지 말자고 다짐한다. “자연 공간과 농지, 산림을 좀먹는 존재이며, 생태계의 순환 과정에는 참여하지도 않은 채 되는 대로 살아 있는 것들을 먹어 치우는” 도시문명에서 벗어나지고 호소한다. 땅을 벗어난 과학기술의 필연적 이면이다. 시골로 유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위해 왔다고 설파하는 야마오 산세이도 흙을 무시하지 않는 문명을 바란다. 산간벽지에 살면서도 핵발전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개탄하면서 “수소폭탄을 만들기보다 돼지를 키우고, 중화학공업보다 차나무를 심자!”고 탄식한다. 자연농업. 농업인 동시에 마음의 경영하는 바로 유기농업으로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39세에 귀농해 62세에 귀농한 섬에 귀의한 야마오 산세이와 알제리 사막에서 프랑스의 척박한 농촌으로 옮겨 2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유기농업에 매진하는 피에르 라비는 나이도 거의 같다. 철책을 치기보다 원숭이가 먹지 않는 과일을 선택하는 야마오 산세이나 인간에 의해 접목, 복제, 변형된 과수에서 좋은 열매를 거두려면 자연 한 복판에서 환경과 조화롭게 자라고 있다고 나무들이 느끼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피에르 라비가 한 자리에서 만나면 어떤 대담을 나눌까.

 

화학농법으로 혹사당해 자갈밭으로 버림받은 농촌에 의도적으로 정착해 대가족을 먹여 살릴 정도로 땅을 비옥하게 살려낸 식민지 출신의 농부는 착취의 흔적이 선명한 세계를 여행한 젊은 시절의 경험을 가진 영향력 있는 부유층 방송인과 대담을 나누지만 동의와 격려로 우정을 확인해도 의기투합에 이르지 못한다. 의미 있는 과학기술을 갈구하는 방송인과 달리 억압된 식민지 백성의 기억을 남기고 있는 농부는 지배받는 자의 자존심을 허용하지 않는 현대문명을 거부하는 까닭이다.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라고 우쭐하는 일본 사회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야마오 산세이는 “생명을 아는 자는 모두 약자, 강자는 모두 생명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과거에 알고 있던 것을 지금은 잊어버린다.”면서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힘없는 자들의 만남을 희망한다. 아이들을 흙 밖에서 키우는 것을 크게 우려하는 피에르 라비는 존경받기 위해 싸워 이겨야 하는 세상에서 경쟁보다 서로 보완이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자고 손을 내민다. 두 사람 모두 낙천주의자가 확실해 보인다. 낙천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남기지 않았을 터.

 

“대지에 뿌리를 둔 다양성의 문화가 지금이야말로 그 본래의 숨결로서 오직 한 가지 모양만 있을 뿐인 현대 과학문명에 근원적인 이의를 제기하고, 그들에게 그 사실을 자각시켜야 할 때다. 과학문명으로 생명을 지배할 것이 아니라, 생명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와있다.”고 이야기하는 야마오 산세이나 마이너스 성장을 촉구하면서 “경쟁력을 갖추라고 말하면서 문제점만을 양산하는 세계화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소비 욕구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과 절제의 미덕에 기반을 두고 세계화에 저항하는 것이지요. 한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필수적인 의식주 및 치료만 보장해 주면 된다고 보는 개념입니다.”라고 언급하는 피에르 라비는 내일을 향한 발걸음이 아니다. 어제의 대지에 씨를 심자는 호소다. 단순한 선언이 아니다. “영성한답시고 배꼽 들여다보거나 멋진 말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면서 실천을 부탁한다. 제철 제 고장의 유기농산물로 가족이나 마을이 자급자족해온 조상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땅에서 생명을 일구는 농부와 언어를 살아있게 일구는 시인은 통하는가 보다. 야마오 산세이와 피에르 라비의 책을 읽으면, 땅을 파괴하는 개발과 분별없는 과학기술이 농촌과 환경을 위협하는 현실에서, 고뇌하는 농부는 철학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친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농부는 야마오 산세이나 피에르 라비만이 아닐 것이다. 미국의 웬델 베리 역시 땅에 뿌리를 내린 훌륭한 시인이자 철학자인 농부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농촌 현실에서 땅에 뿌리박은 많은 농부들도 철학자나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책을 펴내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생산되는 칼로리의 열배 이상의 에너지를 투입하는 농업은 곡물사료를 양산하고, 축산업은 곡물사료 10킬로그램 이상을 가축에 먹여 고기 1킬로그램을 얻는다. 그런 곡물과 고기가 차례상에 올라간다. 배타적 이윤에 조바심 내는 과학기술이 개발해 살포한 농약과 화학비료는 물론 호르몬과 항생제까지 배어들어간 음식인데, 조상님께 죄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걱정 속에서도 희망이 보인다. 세계화와 한미FTA로 우리 농업이 황폐화되기 직전일지라도, 흙을 잃은 도시를 떠나 땅에 뿌리내리려는 귀농인파도 적지 않은 까닭이다. 물론 귀농만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도시에 남은 사람들도 어제를 향해 걸어야 한다. 우정으로 환대하고 서로 돕는 어제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

 

설날 연휴 텔레비전에서 <맨발의 기봉이>를 시청했다.  8살 지능을 가진 기봉이는 익명의 회색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공동체가 살아있는 농촌이기에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바로, 제 고장에서 제철의 유기농업으로 자급자족하던 어제의 삶이다. 야마오 산세이와 피에르 라비는 새삼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이다. (환경과생명, 2007년 봄호)

 
 
 

서평·추억

디딤돌 2005. 10. 11. 00:42
 

들꽃이야기, 박연 지음, 허스비 2005


50이 넘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철학교수와 50 이전에 농부가 되려고 단단한 직장을 그만둔 전도유망한 간부사원의 이야기를 듣고 참 부러웠다. 그리곤 불안하기도 했다. 젊은이가 없는 농촌에서 힘들다던데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안과 걱정은 사실 그들이 아닌 내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초로의 철학교수가 농사를 택한 까닭은 땅 이외의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철근시멘트콘크리트 공간에서 더는 삭막해질 수 없던 회사원은 자식 앞에서 당당하고 싶어서, 회색도시에서 숨 막혀 더는 살 수 없어 농촌을 택했을 것이다. 그이들은 아직 농촌을 떠나지 않고 있다. 떠나긴, 정겹게 뿌리내린 모습에 마냥 감사할 따름이다.


비결은 무엇일까. 『들꽃이야기』에서 저자가 즐겁게 귀띔한다. 가족과 이웃은 물론 사람과 생태계의 관계까지 따뜻하고 긍정적이라면, 재미와 보람을 이웃과 함께 추수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우리에게 희망으로 안내한다. 농촌을 희생시켜 누리는 도시의 온갖 편의는 겉보기 친절해도 대가를 차갑게 요구한다. 아직 농촌은 우정으로 만난다. 『들꽃이야기』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것도 재미있게. 그래서 고맙다.


도시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상, 농촌에서 무릉도원은 누구라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학교와 병원과 자동차를 비롯한 온갖 시설에서 자유롭지 못한 농촌에서 우정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살충제나 제초제를 피한다 해도, 돈이 있어야 땅도 갈고 씨앗도 뿌릴 수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사실 무릉도원은 없다.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들꽃이야기』 속의 중학교 교사인 가장과 들꽃을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귀여운 5살 박이 딸 단비는 먹고사는데 지장 없다. 그렇다면 『들꽃이야기』는 망설이는 도시인들에게 귀농을 긍정적으로 안내하는 책은 아니다. 농촌과 자연을 잊은 도시인들에게 땅을 사랑하는 법을 친절하게 안내하는 실용서적에 가깝다. 농촌과 자연은 우리에게 농작물이나 경치를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걸 『들꽃이야기』는 깨닫게 한다.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들꽃이야기』는 회색도시에 지처 살아가는 우리의 메말라진 정서를 치유한다. 잠시 아련한 기억 속에 남은 고향으로 데리고 간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할 때 비로소 인간은 겸손해지고, 겸손할 때 우정어린 마음으로 이웃과 자연을 바라보게 되는가보다. 그 사실을 깨닫게 해준 『들꽃이야기』는 땅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 (서문, 20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