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5. 10. 19. 23:27

 

1970년대 초, 지금은 고층빌딩의 전시장이 된 인천에 엘리베이터가 필요할 정도로 높은 건물이 없었다. 고교생에게 숙제를 내주지 않아 멋졌던 물리 선생님은 웬일로 여름방학 숙제 하나를 요청했다. “서울에 가서 엘리베이터 타기!” 방학 후 선생님은 숙제검사를 하지 않았고 어떤 학생은 그 부담 없는 숙제마저 외면했는데, 그 학생은 40여년 지나 여름방학을 앞둔 대학생에게 방학숙제 하나를 제안했다. 추가 학점이 없으니 검사도 없을 터.


깜깜 적벽경험하기!


깜깜 절벽이라고? 경험이 없으면 느낌도 없겠지. 1970년대 중반, 지금은 와글와글한 등산로가 되었지만, 당시 계룡산은 한산했다. 게다가 때는 장마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계룡산을 한밤중에 이동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뭐 지금도 한밤중에 그것도 비 내릴 때 오르는 이 드물겠지만, 그때 왜 하필 비가 쏟아지던 밤에 산길을 재촉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일정에 쫓겼겠지만 손에 꼬마전구가 밝히는 전등 하나 씩 들고 산길을 누비던 대학생들은 비가 잠시 그치자 텐트를 치려 허둥대기 시작했는데, 누군가 느닷없이 전구를 끄자 제안했다.


깜깜 절벽! 바로 그것이었다. 눈앞에서 심연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밑도 끝도 없이 검은 세상, 그 자체였다. 허우적거려도 아무 것도 잡히지 않을 거처럼 깜깜한 공간. 그야말로 절벽이었다. 한발 어긋나 나락으로 떨어져도 완벽히 무방할 듯한 삼차원 세계. 갑자기 우주에 홀로 떨어진 듯, 젊은이들은 일순 조용해졌다. , 사람들은 이래서 절대자에 의지하게 되나보다. 그런 마음이 드니 발에 밟히는 풀숲의 부스럭 소리도 죄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목소리도 작게, 옆에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며 귀엣말로 소곤거리던 일행 앞에 점. . .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한 줄기 빛이 눈앞을 스치자 어디선가 같은 빛이 줄을 잇는다. 비 그친 밤하늘을 점줄처럼 밝히는 반딧불이였다. 반딧불이는 깜깜 절벽의 심연에 빠진 젊은이들을 깨웠고 이내 밤하늘은 밝은 목소리들로 채워졌지만, 5분 남짓 경험한 경험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뇌리에 남겼다.


어떤 시인은 4월을 잔인하다 했다지만 뭇 생명이 움트는 우리나라의 4월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시인이 살던 지역에 신록으로 아롱지는 산록이 없었나보다. 깜깜 절벽을 경험했던 젊은이는 2000년대 초, 잔설과 신록, 피어나는 왕벚과 져가는 산유화가 어우러진 산록을 바라보며 강원도 한 골짝이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좋을 때, 뒷좌석에서 아까부터 시시덕거리다 치근대던 신록 둘이 몸을 서로 비비며 잔다. 아까운 시간이거늘. “예들아 저 산을 봐. 얼마나 예쁘니!” 묵묵부답이다. 바람 들어오니 차창을 어서 닫아달란다.


나이 들어갈수록 신록을 아름답게 느끼는가 보다. 이후 자연의 산록은 여름으로 접어들었고 이내 짙푸르러졌다. 방학을 맞은 녀석들을 태우고 다시 접어든 강원도 그 산골짝. 친구들과 물장구칠 생각에 조잘대던 신록 둘은 주위가 어두워지자 지루해 몸을 비비 꼰다. 문득 차창 밖에 빛이 전혀 없다는 걸 느꼈다. 안전한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세우고 차창을 모두 연 뒤 시동을 껐다. “예들아, 무엇이 보이니?” 기대했던 게 바보지! 애 엄마와 달리 가벼운 경탄조차 없던 녀석들은 귀를 활짝 열었다. 곤충채집 숙제가 있었나? “여치가 운다!” 맞다. 장마가 막 시작되었으니 매미가 울 때는 아직 아니지. 기특하군! 여치 울음소리를 다 알고.


휘황찬란한 조명에 익숙한 탓일까? 깜깜 절벽에서 가족이 곁이 있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을 느끼길 기대했지만 난망이었다.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둠이 그냥 싫었는데, 차창 밖의 신록에 무덤덤하던 차창 안 신록 둘은 여치 울음소리에 반응을 보였다. 계절의 변화에 예민하기 때문일 리 없다. 가지고 간 매미 통에 흔해빠진 매미 대신 여치 채울 궁리를 했을 테지.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동했겠지. 하긴 나도 어릴 적에 그랬겠다. 계절 변화에 민감한 건 사실 얼마 전부터다. 나이 들어가면서.


당장 반응을 보이든 아니든, 이이들에게 경험은 어렴풋 남을 것이다. 나중에 제 아이들에게 계절의 변화를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면서 소리로 계절을 여는 곤충을 생각해본다. 개구리와 새들이 봄을 열지만 여름은 아무래도 곤충이 연다. 맹꽁이가 장마철을 일러준 뒤 침묵하지만 곤충들이 이른 가을까지 바통을 잇는다. 매미만이 아니다. 여치 바통을 이은 매미는 귀뚜라미에게 넘긴다. 매미가 짧은 열대야에 잠을 설치게 한다지만, 한밤중까지 아스팔트를 찢는 타이어 마찰음보다 더할까? 매미도 사실 줄어들고 귀뚜라미는 이 도시에서 조용해졌다. 여치는 어떨까?


사람들. 참 복잡하게 산다. 규칙은 얼마나 복잡하고 비밀번호는 얼마나 많은가. 알고 지키는 규칙 거의 없는 사람은 비밀번호의 덫에 걸려 입출금이 귀찮고 다정했던 친구를 한동안 잊고 지낸다. 에어컨과 보일러가 있는 한, 여름이 춥고 겨울이 더운 사람은 감기를 노상 달고 살며 시도 때도 없이 입에 약을 한 움큼 털어 넣는다. 바나나가 지천이지만 언제 멸종될지 모른다고 한다. 복잡할수록 적적해지는 사람은 이따금 자연을 찾아야 위로를 받는데, 계절은 이미 어지럽다.


지구온난화에 이은 기상이변으로 혼란스러워도 계절은 순서는 어기지 않는다. 지구가 1년에 한 차례 태양을 공전하고 하루에 한 차례 자전하는 한, 봄은 어김없이 잔설을 녹이고 여름이 일러도 그늘에 가면 틀림없이 시원하다. 계절은 자연에 다양한 생태계를 만들었고 다양한 생태계는 다채로운 생물을 낳았다. 그런 생태계에 가장 나중에 동참한 인간은 자연을 함부로 개발하며 생태계를 단순화했다. 우는소리가 예쁘다며 귀뚜라미에 특허를 씌운 인간은 머지않아 매미의 유전자를 조작할지 모른다. 시끄러우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도록.


딸기는 늦은 봄이 제격이고 수박은 여름이다. 계절은 삼라만상의 생물에게 개성을 주었다. 여치도 매미고 귀뚜라미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개성이 최대로 존중될 때 사람도 생태계도 두루 건강하다. 여치와 매미와 귀뚜라미가 아직 계절을 알리는 소리를 멈추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아직 분명 그렇다. (야곱의우물, 2015년 11월호)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5. 10. 3. 10:51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소리는 아직 노래가 아니오.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콩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토하는 울음,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소.” 나희덕 시인의 살가운 언어를 가사에 담은 가수 안치환은 화려한 도시의 구석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귀뚜라미’의 조용한 외침을 노래한다.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 하늘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고, 계단을 타고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소리,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오.” 아직 뜨거운 늦여름, 매미 소리가 화려한 회색도시의 삭막한 시멘트 공간 한 구석에서 귀뚜라미의 ‘우우~ 우우~ 귀뚜루루루~ 귀뚜루루루~’ ‘타전 소리’는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누구의 가슴 위로 실려갈 수 있을까.” 나희덕 시인은 묻고, 집회 현장에서 더 알려진 안치환은 단순하면서 쓸쓸한 음률로 가을을 맞으려 한다.


열띤 논쟁으로 기진맥진한 대기업 연수원 회의실, 기계가 쏟아내는 찬바람을 피하려 시스템 창호를 활짝 열면 창밖 키 큰 조경수는 죽을힘을 다해 울어제치는 매미소리를 경쟁적으로 토해낸다. 회의실의 긴장은 풀어지지만 귀는 이내 성가셔지고 자료를 들여다보기 불편하게 회의실은 온통 시끄러워진다. 눈치챈 실무자는 얼른 창호를 닫고 에어컨을 차게 가동시켜야 한다. 사생결딴 울어대던 매미가 맥 빠질 무렵이면 어느덧 가을이다. 철지난 바닷가처럼, 관객이 물러간 관중석처럼, 사방에서 흩어지이던 “축하한다!” 소리가 사라진 졸업식장처럼, 가을이 쓸쓸하게 다가올 때 귀뚜라미는 운다. 남은 일이 기다리는 연구실을 향해 밤이 길어진 도시를 천천히 움직일 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귀뚜라미는 지금부터 가을이라고 조용하지만 다부지게 선언한다.


마지막 지하철을 빠져나와 지친 발을 끌고 천천히 집을 향할 때, 아파트 현관 앞, 콘크리트 벽체 옆 엉성한 잔디 속 어느 구석은 귀뚜라미가 숨어 우는 곳이다. 작년도 재작년도 올해도 가을이면 그 자리를 고수한다. 귀뚜라미도 제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나. 독촉되는 원고가 풀리지 않아 텔레비전 소리 새들어오는 책상머리에서 공연히 머리 쥐어뜯을 때 밖으로 나가 어둠이 내려앉은 놀이터를 서성이면, 근처 나무벤치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이웃들 정담 사이로 살금살금 귀뚜라미가 운다. 가을이라는 거다. 바쁘기만 했지 뭐 이렇다 하게 해 놓은 일 없는 내게, 뭔가 채근하는 것 같다.


차창 밖 신록을 아무리 가리켜도 시큰둥하니 엠피쓰리만 듣던 아이들은 가을을 어떻게 느낄까. 예전에, “귀뚜라미 귀뚤귀뚤 고요한 밤에, 귀뚜라미 귀뚤귀뚤 글을 읽는다. 가을이라 즐거운 밤 달이 밝아서, 귀뚜라미 귀뚤귀뚤 글을 읽는다.”하고 불렀던 동요 ‘가을밤’이 요즘도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를 지키고 있을까. “귀뚜라미 귀뚤귀뚤 서늘한 밤에, 귀뚜라미 귀뚤귀뚤 노래를 한다. 가을이라 즐거운 밤 달이 밝아서, 귀뚜라미 귀뚤귀뚤 노래를 한다.”고 즐거워했던 아이가 어느덧 어른이 되어 귀뚜라미 소리에서 가을을 타는데, 요즘 아이들에게 가을은 중간고사의 계절일 뿐이다. 단풍이 설악산을 내려오건 말건, 엄마 감독 하에 학습장 줄긋기 바쁘다.


“특허 제 10-2004-16180번!” “저희 귀뚜라미농장에서는 토종 왕귀뚜라미를 애완이나 학습용으로 판매합니다. 환경오염으로 주위에서 곤충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현실에서 울음소리가 조용하고 은은한 왕귀뚜라미는 공부에 지친 댁의 아이의 정서교육에 한몫을 할 것입니다.” 인터넷의 한 사이트는 아열대산보다 수명이 긴 토종 왕귀뚜라미의 사육과 인공 산란에 대한 특허를 필한 후, 광고에 열중한다. 애완용 ‘왕귀뚜라미’는 등록된 상표라면서, 상업적인 사용을 금한다고 못 박는 그 사이트는 사육방법도 친절하게 안내하는데, 발명 명칭이 ‘귀뚜라미’다. 야외에서 귀뚜라미를 채집해 학교나 집에서 사육하면 법에 저촉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어처구니없다. 인간보다 먼저 진화한 귀뚜라미와 그 생활습성에 특허를 걸고 돈을 벌어도 좋은 것일까.


흙속에서 동면한 알을 뚫고 새싹이 풍부한 5월에 세상에 나온 어린 귀뚜라미는 숫한 천적을 용케 피한 9월이 돼야 짝을 찾을 정도로 성숙한다. 여린 풀과 풀섶의 작은 벌레도 먹지만 사람이 버린 음식찌꺼기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 자란 수컷은 오른쪽 앞날개 안쪽과 왼쪽 앞날개 바깥쪽을 마치 바이올린 켜듯 비벼 꼬리 사이에 산란관을 늘어뜨린 암컷을 집요하게 유인한다. 한밤중 네 시간 여 울어대는 동안 4만 번이나 반복한다고 하니, 여간 끈질긴 세레나데가 아닐 수 없다. 한 가수는 10월의 마지막 밤을 지금도 기억한다고 노래하지만, 귀뚜라미에게 10월의 마지막 밤은 없다. 중순에 낳은 알에 제 생명을 넘긴다.


눈이 녹으며 오던 봄이 여성의 화사한 노출로 시작되는 요즘, 도시의 가을은 어떻게 시작될까. 인터넷은 시민들의 핸드폰이 가을을 알린다고 광고한다. 아침에 연실 시계 들여다보고 저녁에 술콰한 지하철 승객에게 귀뚜라미 컬러링이 가을 정취를 안내해준다는 것이다. 업자가 메뉴로 제공하는 컬러링은 ‘귀뚤 귀뚜리’하고 우는 왕귀뚜라미일까, ‘후이리리리’하고 우는 풀종다리일까. 어쩌면 ‘귀또 리리’하고 우는 보통 귀뚜라미일지 모른다. 귀뚜라미 종류가 세계적으로 3천종이라는데, 광고로 들리는 개구리처럼 설마 미국 귀뚜라미 소리는 아니겠지. 아직 다른 이의 핸드폰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어본 적 없지만, 귀청을 찢는 최신 유행가나 숨넘어가듯 “자기 전화받어!”하는 컬러링보다 훨씬 낮겠지.


가을을 더욱 쓸쓸하게 하는 귀뚜라미를 옛사람들은 영리하게 보았다. 모르는 게 없이 일마다 한 마디 거드는 사람에 비유하곤 했다. 가을철 긴긴 밤을 함께 지낼 연인이나 친구가 없어 어느 구석에서 고독을 씹을 때, 가까운 곳에서 사분사분 말벗 돼주는 귀뚜라미에게 조상은 우정의 감정을 느꼈나보다. 깊어가는 밤, 귀뚜라미라도 있어 고맙다. 막힌 원고를 혼자 해결해야 할 때는 물론, 회색도시에서 고독한 이웃들에게 거꾸로 타는 보일러나 특허가 아닌 우정이라는 지혜를 나누어주지 않을까. 귀뚜라미마저 줄어드는 요즘, 내일의 가을이 벌써부터 적적하다. (물푸레골에서, 2005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