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20. 1. 1. 00:29

 

20191210일 고 김용균 1주기 추모제가 태안화력발전소 현장에서 진행되었다. 그날 추모제의 주제는 일하다 죽지 않게! 다치지 않게!”였다고 한다. 기가 막히는 말이다. 죽으려고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일하다 다치고 싶지 않다.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위험을 최소화하는 장치가 완벽해야 하고 그런 일에 종사하는 이에 충분한 보상이 뒤따라야 옳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1주년이 지난 현재 제2 3의 김용균이 나올 가능성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시속 90km 속도로 자동차가 달리는 차도에서 낙화물을 수거하는 일꾼은 겁이 난다. 쉴 새 없이 달려오는 자동차들을 용케 피하며 수거하는 낙화물이 무겁다면 뛰기 어렵다. 발이라도 삐끗하면 넘어질 수 있다. 실제 20152명이 수거하다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가이드 차량이 차선을 막아 보호하더라도 위험할 텐데, 비용을 줄이려는 위탁관리회사는 안전지침을 어길 뿐 아니라 임금까지 줄인다고 언론은 보도한다. 대부분 비정규직일 그런 일이라도 거부할 수 없는 일꾼, 그리고 그의 가족은 하루하루가 불안할 것이다.


몇 차례 도전 끝에 취업에 성공한 청년 김용균은 기뻐했다고 어머니는 전했다. 비정규직이이라 급여가 만족스럽지 못해도 시간이 지나면 늘어날 거라 여겼을지 모른다. 위험이 수반된 작업을 맡더라도 머지않아 익숙해질 거라 믿었고,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안전한 일자리를 얻을 거로 기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커먼 석탄가루를 싣고 어두컴컴한 공간을 맹렬하게 이동하는 컨베이어벨트는 악마의 뱃속이었다. 악마는 일 시작한지 100일도 지나지 않은 젊은이의 생명을 시커먼 아가리로 삼키고 말았는데, 사고 1년이 지났어도 발전소의 작업현장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위험한 일은 여전히 외부, 비정규직의 몫이다.


제도 개선으로 위험한 일은 정규직이 맡아야 한다면 화력발전소의 석탄 컨베이어 벨트 설비는 크게 변할 게 틀림없다. 승진을 원한다면 반드시 1년 이상 컨베이어벨트를 관리해야 한다면 그 시설은 안전하게 재설계되어 청결하게 운영될 것이다. 비정규직 직원에게 일을 맡길 때 반드시 정규직보다 급여를 높게 책정하도록 제도를 개선한다면 일자리에서 모멸감은 사라질지 모른다.


고등학교의 등록금과 급식비가 사라지면 의무교육과 마찬가지인 셈인데, 고교를 졸업한 나이의 모든 젊은이에게 대학 진학 여부와 관계없이 50만원을 조건 없이 10년 동안 지불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친구들과 밥 먹고 술 마시거나 옷과 장신구 구입하느라 금세 써버릴까? 그렇게 생각하는 정치인이 있나보다. 많은 어른들이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젊은 시절을 찬찬히 반추해보라. 한두 달이라면 모를까, 10년 내내 술 마시며 50만원 탕진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그림: 기본소득을 준비하거니 부분적으로 시행하는 지역과 국가.


대학생이라면 코앞까지 다가온 과제물 정리를 미루고 아르바이트로 전전긍긍하지 않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거나 답사여행을 계획하며 인터뷰 준비에 시간을 쓰겠지. 자신의 공부를 스스로 찾아가며 건실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런 학생을 지도하는 교수는 얼마나 즐거울까? 대학보다 일찌감치 취업전선을 도전하려는 젊은이는 자신의 관심사와 역량에 맞는 일자리를 찾을 텐데, 50만원이 주머니에 있다면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터무니없이 혹사당하거나 모멸감을 무릅써야하는 일은 단호하게 거부할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일을 강요하는 회사라면 오래 머물 이유가 없다. 악랄한 기업주는 설 자리를 잃겠지.


어떤 사회가 합의로 정한 범위의 모든 이에게 무조건 제공하는 일정액을 기본소득이라고 한다. 겨우 밥을 먹거나 작은 용돈에 불과하기보다 의식주는 물론이고 사회 일원의 교양까지 배려하는 액수라면 좋을 것인데, 일정액은 얼마가 적당한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단순하게 그 일정액을 50만원이라고 가정해보자. 다달이 50만원이 입금된다면 결국 나태해질까? 그러므로 기본소득을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질문을 다시 던졌다고 한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당연히 자신의 일을 계속 할 것이라고 대답한 그는 잔업은 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기본소득을 복지 차원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복지보다 사회정의를 지향한다. 기본소득이 추가되면 돈벌이를 위한 잔업은 사양할 것이다. 잔업을 강요하는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은 잔업이 필요한 일거리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잔업이라면 많은 보수를 받는 비정규직이 대행할 수 있겠고, 생산비가 다소 늘어나겠지만 품질은 향상되겠지. 사회정의가 실현된 사회로 거듭날 텐데, 저녁이 있는 소비자는 어떤 기업의 제품을 선호할까?


사회정의가 살아 있는 사회에서 소비자는 생태정의에 눈을 뜰 게 틀림없다. 직원을 착취하는 기업은 물론이고 후손의 생명을 위협하는 핵발전도 거부할 것이다. 유럽의 많은 국가는 핵발전을 포기하고 태양광과 풍력발전에 투자를 늘린다. 자동차와 화력발전소의 내연기관은 지구온난화를 촉발할 뿐 아니라 미세먼지를 내뿜는다. 향후 20년 이내에 내연기관을 가진 자동차 생산과 판매를 금지하는 국가가 늘어나는 추세다. 그 나라들은 화력발전소의 가동을 멈추려는 사회적 합의에 나선다.


후손이 누려야 할 행복을 빼앗으며 오늘 자신의 즐거움을 챙기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 건강한 생태계가 삶에서 가까울수록 행복은 커지고 지속된다. 새소리가 들리는 숲이 가까운 마을이라면 범죄 발생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속도로를 위해 산을 파헤치는 정책을 마다한다. 설악산을 빨리 편안하게 오르려고 케이블카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200마리 남짓한 산양의 보전을 위해 등산로를 줄이자는 제안을 환영하지 않을까? 사회정의는 그렇듯 생태정의로 확산될 텐데, 강퍅한 삶을 예방하는 기본소득이 그 길을 안내하리라 생각한다.


자유로의 낙화물 수거원에게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해당 지자체 청사 앞에서 집회하기보다 부당한 일을 당장 때려치울 게 틀림없다. 낙화물을 방치할 수 없는 지자체는 대책을 세워야한다. 안전을 보장하면서 보수를 획기적으로 높이겠지. 태안화력발전소를 비롯해 전국의 화력발전소는 설비를 안전하게 바꿀 것이다. 낙엽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미화원도 보수가 넉넉한 자신의 일에 만족할 것이다. 돈벌이 시간을 줄인 만큼 취미생활을 즐기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


재원이 모자란다면 기본소득 대상의 폭을 조정하면 된다. 자신이 평생 즐겁게 일할 방향을 찾으려는 청소년부터 제공하면 어떨까? 재산 물려준 뒤 용돈이 부족해 전전긍긍하는 노인부터 제공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농촌에서 땅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농사짓는 농부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한다면 건강한 먹을거리의 생산과 보급이 지금보다 늘어나지 않을까? 그런 농산물을 받는 도시의 소비자는 농민을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얼마 전 독일 메르켈 총리는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찾아 다시금 깊게 사죄했다. 일본과 다른 점인데,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써놓은 아우슈비츠 정문 안쪽에 강제로 수용된 사람들의 공포는 끔찍했을 텐데, 비정규직을 외면하지 못하는 우리 청년들의 노동은 과거 강제수용소와 크게 다를까? 김용균의 어머니는 1년이 지나도록 거리를 떠나지 못한다.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인데. 기본소득은 진정 노동을 자유롭게 만들지 않을까? (작은책, 20201월호)

국가가 열심히 돈을 벌어야 겠네요...

오늘도 기쁜 날!
좋은 내용 잘 보았습니다.
새로운 한해 잘 시작 하시길…

이곳도 들러 주시길....생명의 양식도…
http://blog.daum.net/henry2589/344009
감사합니다.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7. 2. 17. 00:44


그럭저럭 올겨울도 무탈하게 지나가려나 보다. 겨울이 오기 전, 북극해 얼음이 완전하지 않을 거라는 예보가 있었기에 지레 겁을 먹었다. 냉기를 가두는 제트기류가 약하면 북극해가 단단하지 않게 되고, 북극권의 냉기가 아래 내려가 우리나라와 같은 위도의 국가들에 혹한이 몰릴 거로 기상 전문가들이 예상하지 않았던가. 실제 3년 전 경험이 그랬다. 꼭 다행이라 여길 건 아니지만, 올겨울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기상이변은 계절이 따로 없는데, 앞으로는 어떨지?


재난영화를 즐기지 않지만 영화 투모로우는 텔레비전으로 개봉 한참 뒤에 보았다. 혹독한 추위가 한바탕 지나자 빙하로 둘러싸인 건물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안타까운 내용도 있었다. 추위를 막을 연료가 바닥난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던 과학자들이 의연한 장면이었는데, 영화 속의 그들은 견디지 못하고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살려줄 구명선에 연료가 충분하지 않았던 거다.


선의의 희생자가 반드시 필요한 재난영화에서 판도라해운대도 예외가 아닐 텐데, 친구를 섭외하지 못해 여태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스포일러 덕분에 내용은 짐작한다. 두 영화에서 대규모 탈출 장면이 나오는지 알지 못하는데, 2004년 남아시아 지진에 이은 쓰나미, 그리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서 보듯, 거대한 파고가 평지로 몰려오면 아무리 빠른 자동차도 안전지대로 달아나기 어려울 것이다. 먼저 달아나려는 차량들로 엉키면 살아남을 희망은 사라진다.


핵발전소가 폭발한다면 반경 30킬로미터 이내의 사람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나라에서 탈핵운동의 최전선에서 애를 쓰는 김익중 선생이 제시하는 정답은 달아나라!”는 것이지만, 현실은 달아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방법도 장소도 없다는 것이다. 핵발전소가 폭발하면 개인 자동차는 운행이 제한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전 공간으로 한동안 대피해야할 텐데, 우리 핵발전소 주변에 그런 시설은 없다. 개인이든 공공이든 핵발전소 폭발에 대비하는 구명선이 아예 없다는 거다. 구명선은 인천에 필요 없을까?


영화 판도라의 무대인 부산 고리에서 400킬로미터 이상 떨어졌고 한빛으로 이름을 바꾼 영광핵발전소에서 200킬로미터 정도 떨어졌으니 인천시민이라 해서 안심해도 좋은 건 아니다. 두 곳의 핵발전소에서 사소하지 않은 사고가 빈발하거나 사고 위험으로 연결될 수 있는 부정부패와 직무유기가 만연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폭발사고가 발생한지 6년이 넘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지역에서 퍼진 핵물질은 이미 태평양을 폭넓게 오염시켰고 우리 동해와 황해도 예외가 아니지 않은가.


미국 전문가는 서해안에서 잡히는 참치를 주의하라고 자국민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먹이사슬이 거듭될수록 방사능은 기하급수로 누적되기 때문이라고 했다.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는 8000킬로미터 떨어진 일본에 낙진을 떨어뜨렸다. 인천도 안심할 처지가 아닌데 중국 동해안, 다시 말해 우리 서해안을 바라보는 곳에 핵발전소가 밀집돼 있다. 아직 설비가 젊지만 머지않아 낡을 것인데, 중국에 핵발전소를 감시하는 시민단체는 없다. 감시가 느슨하면 사고는 가까워진다. 문제는 확산이 어려운 황해는 독극물이 될 거라는 점이다.


불확실성을 키우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미국에서 개인 구명선 열기가 뜨겁다는 보도가 나왔다. 전쟁으로 핵무기가 폭발해도 가족과 이웃이 안전해질 때까지 피신할 공간이 만들어지고 성황리에 판매된다는 건데, 그런 구명선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부자들은 만일의 사고 이후에 살아남겠지만, 살갑게 지내던 친지들이 보이지 않는 만큼 그리 행복할 거 같지 않다. 황폐된 생태계 앞에서 황망할 텐데, 먹고살 길도 막막하겠지.


핵발전소나 핵무기 폭발처럼 당장 눈에 띄는 무지막지한 사고만이 아니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에게 빠져나갈 기회조차 없듯, 미세먼지나 기후변화와 같은 사고는 피할 겨를을 앗아간다. 초미세먼지를 다량 배출하는 화력발전소가 밀집된 인천이 특히 그렇다. 발전소에서 배출하는 온배수는 앞바다의 수온을 상승시킨다. 세계 평균 기온 상승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우리나라에서 인천은 그 정도가 더할 것이다. 태풍과 높은 파고에 대비해야 할 텐데, 인천시가 구명선을 준비한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거대한 인큐베이터와 같은 공공 구명선이라 해도 한계가 있다. 핵무기든 핵발전소든 폭발 뒤 남은 현장의 참혹함이 위로를 줄 리 없다. 폭발 이후에도 오염 위험성이 말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화력발전소가 주도할 지구온난화와 미세먼지도 마찬가지다. 며칠 목숨을 더 연장하는 것이 행복을 보장할 리 없다면 근원적 구명선을 준비해야 한다. 기술과 관리의 강화로 핵발전소의 폭발 위험을 없애기보다 핵발전소를 없애는 것이 중요하듯, 지구온난화와 미세먼지를 사라지게 할 대안행동을 근원에서 모색하고 실천해야 한다.


같이 자리해준 친구 덕분에 나 다니엘 브레이크를 보았다. 과연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만한 작품이라는 걸 느끼게 한 켄 로치였다. 그는 영화라는 언어로 복지의 민영화 문제와 기본소득의 당위성을 절실하게 알렸다. 켄 로치 감독이 사는 영국이나 우리나, 아니 전 세계가 마찬가지겠지만,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어도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굶주려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불합리하다. 이런 사회에서 돈은 공기나 물과 같은 존재인데, 기본소득은 구명선이 된다. 그렇다면 환경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자식의 행복을 원하는 우리는 어떤 구명선을 준비해야할까? (인천in, 2017.2.16.)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6. 7. 19. 07:39


아직 상영되지 않은, 어쩌면 당분간 상영할 수 없을지 모를 영화의 시사회장을 얼마 전에 다녀온 적 있다. 대형 영화사와 배급망에 구애되지 않은 저예산 독립영화였고, 분단 상태에서 빚어질 수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애환을 극으로 풀어낸 내용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완성도를 높이는 편집을 진행하면서 그 영화에 작은 지원을 한 사람에게 시사회 기회가 주어졌다.


시사회를 마치고 들어선 식당에서 우연히 주연배우와 마주앉게 되었는데, 어떤 이가 물었다. 전업 배우인가를. 얼굴과 이름이 대중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젊은 배우였는데, 어느 정도의 수당을 받았는지를. 독립영화 배우의 수입으로 생활이 가능할지 궁금했는데, 전업 배우는 아니었다. 받은 돈 역시 얼마 되지 않았다. 용돈보다 조금 많을 정도에 그쳤지만 불만은 없다 했다. 다만 단역이든 주인공이든, 배우로 참여할 기회가 부족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일본 시민단체의 사정을 잘 아는 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흥미롭다. 우리나라에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고 일본도 극히 예외적일 텐데, 반나절 열심히 일하고 이른 오후 퇴근해 시민단체 활동을 하던 젊은 우편배달부가 사법고시에 도전해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우리도 어쩌면 가능할 텐데, 놀란 우체국 고위 관리의 특별 승진 제안에 손을 저은 이유가 독특했다. 소득은 이미 충분하고, 남는 시간에 시민단체 활동할 수 있는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는 주장이었다. 우리 사회도 가능할까?


우리보다 인구와 예산 규모가 훨씬 큰 중국에서 나오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가 얼마나 될까? 그 방면에 문외한이라 모르지만, 중국에서 만든 영화나 드라마를 의미 있게 본 경험이 없다. 영화배우나 감동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방면 전문가는 권위주의 사회에서 다채로운 상상력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문제의식이 당돌하거나 주제넘게 다른 의견을 표출하면 정 맞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창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페이스북에서 본 우스개를 하나 소개한다. 모 국제학교에서 교사가 쪽지시험을 냈다.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는 다른 나라에 대한 자기 생각을 쓰시오!” 그 문제를 놓고 아프리카 학생이 답을 적지 못했다. 교사가 그 이유를 물으니, “식량이 뭔지 몰라서라고 대답을 했다. 눈만 멀뚱거리는 유럽 학생에게 물으니 부족이 뭔지 몰라서라고 말했다. 고개를 갸웃하는 미국 학생은 다른 나라가 뭔지 몰라서였고 머리를 긁적이는 중국 학생은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나 뭐라나. 쪽지를 채우지 않는 한국 학생에게 자넨 뭘 모르나?” 교사가 물으니 이 문제 입학시험에 나옵니까?” 되물었다고 한다.


권위주의가 남은 중국에서 발칙한 창작은 아직 어려운 모양이다. 배가 몹시 고프거나 입시나 출세에 매달려야 하는 사회에서 자본과 권력의 요구에 자유로운 창작은 후순위로 밀릴 것이다. 중국은 영화감독과 배우의 양성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지만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은 생각보다 드물다. 우리는 중국보다 나을까? 알바에 시간을 빼앗기는 우리 문학, 음악, 미술 전공의 대학생들은 다채로운 작품을 지속적으로 준비할 수 있을까? 초중고 과정은 물론이고 대학과 대학원 과정에 등록금을 내지 않는 유럽보다 결코 몸과 마음이 자유롭지 않을 텐데.


서울시립대학 학생은 알바에 시간을 빼앗길 이유가 거의 없다고 한다. 등록금이 사립대학의 4분의1에 불과하니 비로소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한다는 거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현장을 방문한 자료를 만들어 친구나 선후배나 토론을 하고 교수에게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게 아닌가. 등록금이 아예 없는 유럽의 학생들은 우리처럼 무의미한 알바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드물 거 같다.


취직에 대한 불안함은 어려서부터 입시에 매달리게 한다. 대학에 입학해도 취직을 위한 스펙쌓기에 몰두해야 하니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경험과 지식은 무시한다. 그런 상황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배양하기 어렵다. 그저 돈과 출세를 위해 길들여지는 방향으로 자신을 고문하며 행복을 저당한다. 길들어져야 낙오되지 않는 사회에서 자신의 일에 창의력을 발휘하며 자부심으로 일하는 이를 찾기 어렵다. 기준이 정해지고 서열이 매겨지는 사회에서 다채로운 일은 존중되지 않는다.


행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없지만,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돈 잘 벌던 의사나 회사 중역이 하던 일을 때려 치고돈 안 되는 창작에 몰두하는 사례가 언론에 이따금 소개된다. 교수나 교사로 은퇴하고 시골에서 농사짓는 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함박 웃는다. 그런 사례가 언론에 흥미롭게 소개되고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건, 부러워하는 이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 아닐까? 탈출하고픈 현재 상황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젊어서부터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지 못한 우리는 훗날의 막연한 행복을 위해 현실을 구속하거나 저당한다. 열심히 돈 벌어 나중에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리라 다짐하지만 불안을 부추기는 현실은 언제나 녹록하지 않다. 남보다 더 잘 되어라 키워야 하는 자식, 자신을 키우다 지쳐버린 늙은 부모에게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블랙홀처럼 투자해 키운 자식은 행복의 길을 스스로 찾지 못한다. 현재를 구속하거나 저당해왔기 때문이리라.


교육은 줄세우기가 아니다. 행복은 우두머리가 가부장적으로 정한 기준과 대체로 무관하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제하는 교육은 교육답지 못하다. 전공분야가 구체화되는 대학과 대학원도 상상력은 자유로워야 혁신적인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상위 1%에 들어가는 학습이 교육일 수 없다. 아니 상위란 있을 수 없다. 서로 돕지 않는 일이 어디 있다던가?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이는 다른 이의 일을 얕잡아보지 않을 게 분명하다. 교육은 학생의 행복에 대한 투자일 때 빛난다. 자신이 행복하게 투신할 일을 학생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교육이 나서야 한다. 진정한 투자가 그러하다. 알바에 시간을 빼앗기게 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젊은이가 스스로 자신의 일을 찾아 몰두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면, 기본소득을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젊은이에 주어지는 기본소득은 무엇인가? 사라진 등록금도 기본소득이다. 학생에게 월급을 주자고 제안하는 이도 있다. 물론 많은 돈은 아니다.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은 일은 학생마다 다양하다. 학생에게 돈과 시간을 투자하자. 상상이 자유롭도록. 창작은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때 다채롭다. 우리 삶은 덕분에 풍요로워진다. 나를 배려하는 이웃이 있을 때 진정 풍요롭고, 사회는 안정적이 된다.


어떤 목적으로 권력자가 정한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오늘도 불안해하는 우리 젊은이들을 자유롭게 만드는 어쩌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본소득이 아닐까? 내일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투자가 아닌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물론이고 금고에 비자금 넣어놓고 불안에 떠는 재벌도 줄세우기를 탈피하는 재단을 만들어 젊은이에게 기본소득을 투명하게 제공할 수 있다. 재기발랄한 창의력이 빛나는 젊은이가 어떤 기업을 창안했는지 재벌은 알리라. 숱한 경험이 증명하므로.


가본소득은 꿈이 아니다. 젊어서부터 빚으로 파이팅하는 사회는 낙오자를 속출하게 한다. 길들어진 자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젊은이에 대한 투자에 돈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 사회를 언제까지 꿈만 꾸어야 하나. 젊은이의 행복은 내일이 아니라 지금부터이거늘. (지금여기, 2016.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