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20. 6. 11. 21:06

 

올 모내기에 물은 부족하지 않을 거 같다. 봄 가뭄이 지나더니 여름이 본격화되기 전인데 비가 제법 내린다. 봄비가 많으면 풍년이라고 했던가? 습기가 충분하면 들판만 아니라 산록도 머지않아 짙푸를 텐데, 1980년대 6월 대학가 주변 도로에 살벌한 현수막이 걸렸다. “간첩은 녹음기를 노린다!”

 

선생님, 간첩이 왜 카세트를 노려요?” 4층 생물학과 사무실에서 보이는 대학가와 교문 주변의 아스팔트는 어제 나뒹굴던 최루탄 파편과 함께 메케함과 하얀 자국을 흩뿌려놓았다. 교문 밖 건물의 그늘에 노곤한 전투경찰이 하얀 헬멧을 기울이고 잠들었는데, 야간고교 다니는 사환학생이 다시 물었다. “북한에 그런 거 없나요?”

 

순진한 사환학생은 당시 유행한 카세트 녹음기를 생각했겠지만, 현수막은 나무가 울창하지 않은 대학을 향해 간첩 운운하며 녹음기(綠陰期)를 경고했을까? 그 내막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6월은 5월의 부드럽던 초록을 짙게 만든다. 비로소 왕성한 광합성이 시작되는 걸 텐데, 관측 이후 벚꽃을 가장 빠르게 펴낸 올해는 그 정도가 좀 유난스러운 게 아닌가 싶다.

 

대구 주변이 주산지였던 사과는 포천으로 오른 지 오래다. 한 세대 뒤 사과는 중부 이남 지방의 제사상에 올라갈 자격을 잃는 게 아닐까? 제사라는 관혼상제가 사라질지 모르지만, 있더라도 열대과일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아닐까? 온난화로 병충해가 잦아 예전 과수를 포기해도 열대나 아열대 과일로 과수원을 대체할 수 있으니 문제없다는 소리가 일각에서 나온다.

 

그림: 기후변화로 과일 주요 재배지역이 북상하는 모습. (출처: 인터넷)

 

수경재배에 의존하는 딸기는 열매 늘어뜨린 거대한 비닐하우스 안의 커다란 화분을 기계로 올리고 내린다. 그러느라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까? 뿌리에 흙 한 톨 없는 스펀지에 스민 물은 필요한 영양분을 적시에 적량 공급받을 텐데, 대부분 석유를 가공했다. 그런 딸기는 영양분과 맛이 풍부하다고? 에이! 그냥 석유 덩어리겠지.

 

우리 비닐하우스의 열대과일은 수경재배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땅에 오래전부터 어우러지던 미생물과 작은 생물들이 과일 성장을 돕지 못하기에 반드시 적시 적량의 영양분을 외부에서 공급해야 한다. 그뿐인가? 수경재배하는 딸기보다 훨씬 고르게 더워야 하므로 상당한 에너지를 요구한다. 지구온난화에 분명히 역행하지만, 인체에 안전하다고? 사람은 생태계의 산물이다.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무시하는 과일이 인체에 안전할 수 있다는 건가?

 

숱한 미생물과 곤충들, 그리고 지렁이, 해충이라 저주하는 두더지를 제거한 토양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적지 않은 석유와 전기를 동원하지 않으면 소기의 소출과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농업은 해마다 심각해지는 기후위기를 부추기는데, 올여름은 5월부터 짙푸르다. 카세트 녹음기를 스마트폰과 유에스비가 대체한 요즘, 아무리 둘러보아도 간첩은 보이지 않지만, 빨라지는 녹음기가 점점 두려워진다. (갯벌과물떼새, 2020년 6월호)

자기살 깍아먹기,밑돌 빼서 위에 얹기, 울며 겨자먹기,알고죽는 해소병,
우리가 좀더 학식과 양심을 가져야 할듯,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20. 3. 31. 23:20

 

4월은 영어로 April. 알파벳 R이 있다. R이 있는 달에 굴을 먹어야 한다고 대선배는 귀띔했는데, 단골 주점은 3월이 지나면 굴을 내놓지 않는다. 인천에서 흔히 덕적도 석화라고 말하는 생굴은 4월이면 제맛을 잃는 탓이다.


바닷물이 차가워지면 덕적도의 작은 배는 고래 등처럼 둥글게 솟아오른 섬 가장자리의 양지바른 바위에 옷 든든하게 입은 아낙 한둘을 내려놓는다. 쪼그려 앉아 곱은 손으로 작은 글을 껍질을 따는데, 인천사람들이 석화라 말하는 잔굴이다. 해지기 전까지 열심히 손을 바삐 놀려도 한 주전자 채우기 어렵지만, 가격은 실하다. 절반을 깔아놓은 한 접시에 2만 원을 받으니 단골 주점에 주머니가 궁한 젊은이는 거의 없다. 떠들썩하지 않으니 편하다.


수업 개시 전에 귀찮은 회의 마치고 모처럼 둘러앉은 학회 임원들에게 단골 주점의 이맘때 명물, 덕적도 석화 한 접시를 대접했다. 숟가락으로 수북하게 떠서 앞접시에 내려놓은 뒤 양념간장을 솔솔 뿌려서 먹으면 맛이 그만이다. 모두 만족하고 헤어졌는데 다음날 동석했던 이가 전화를 했다. 지신은 괜찮았는데 몇 분이 속 불편해했다는 게 아닌가. 막걸리가 몇 순배 돌았고 안주도 여럿 나왔지만, 굴 이외에 모두 익힌 해산물이었다. 굴이 문제였나? 아닌 게 아니라 2월 말인데, 석화가 전 같지 않게 통통했다. 알을 준비하기 턱없이 빠른 계절이건만.


올봄 경칩은 35일이었다. 3월은 영어로 March. 알파벳 R이 분명히 있지만, 단골 주점은 석화 내놓기 꺼릴 듯한데 개구리는 이미 알을 낳았다. 대부분 북방산개구리다. 지리산 남녘은 한 달 전에 낳았다는데, march는 행진이라는 뜻인가?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배웠다. 동면하던 개구리가 알을 낳고 활동을 시작하니 그렇게 이해할 만한데, 북방산개구리는 벌써 알을 낳았다. 올봄이라면 강원도 도롱뇽과 두꺼비도 알을 낳았을지 모른다.


지난 12월부터 2월까지, 전국 평균 기온이 섭씨 3.1도였다고 기상청이 발표했다. 기상 관측 이래 1973년 이후 가장 높아. 평년보다 2.5도 정도 따뜻했다고 덧붙였다. 연수구 구도심에서 송도신도시를 잇는 교각 아래 6대의 제설차는 겨우내 한 차례도 움직이지 못했다. 기상청은 이례적으로 따뜻한 남풍이 1월에 자주 유입돼 전국에 고온 현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했지만, 기상이변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사진: 2019년 호주 6개월을 불태운 산불의 한 모습. 10억 마리 이상의 "자연의 이웃"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출처는 인터넷)



얼어붙은 물이 녹기 시작할 때, 북방산개구리 수컷들이 리드미컬한 목청을 높이면 얼핏 비슷해도 작고 날씬한 한국산개구리가 슬그머니 경연장에 다가온다. 논에 흔한 참개구리는 4월 중순 물 고인 논에 모여 기를 쓰고 울지만, 그보다 먼저 논을 기웃거리는 청개구리는 작은 몸에 어찌나 우렁찬지 귀가 따가울 지경인데, 도시 학생들이 그 모습을 보려면 관광버스로 2시간은 나가야 한다. 운 좋으면 방죽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두꺼비들을 만날 수 있지만, 웬만한 부모는 어릴 적 동네의 어귀에서 늘 보았다. 두꺼비는 이른 봄마다 자신이 태어난 방죽을 찾는데, 물 고인 논과 방죽이 더불어 드물어지면서 두꺼비는 그만 보호 대상이 되었다.


알을 바가지 크기의 덩어리로 낳는 북방산개구리와 참개구리, 그리고 조랑박 크기로 낳는 한국산개구리는 겁이 많다. 천적을 보자마자 물속으로 뛰어드는데, 이른 여름 포도송이처럼 낳는 무당개구리는 서두르지 않는다. 피부독을 믿는지 모르는데, 염주처럼 수초 사이로 알을 길게 늘어놓은 두꺼비는 도무지 겁이 없다. 피부 독에 혼비백산한 뱀과 족제비도 외면할 걸 잘 알기 때문일까? 보란 듯 떼로 몰려다니는 방죽은 올챙이들도 천적의 인기척에 수초 아래 숨어드는 다른 올챙이들과 달리 아랑곳하지 않지만, 5월 중순 자동차 바퀴를 조심해야 한다. 엄지손톱 크기의 어린 성체들은 야심한 시간, 호수 주변의 아스팔트에서 처참해질 가능성이 크다.


가끔 텔레비전 광고에 등장하는 우리나라의 개구리들은 대개 미국 개구리 소리를 낸다. 생태 의식 없는 광고회사가 손쉽게 미국 자료를 사들이는 모양인데, 경칩을 맞은 얼마 전 인터넷에 마스크로 입을 가린 개구리가 등장했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한국에 없는 개구리를 경칩 모델로 데뷔시켰는데, 그렇듯, 올봄은 개구리보다 코로나19가 깨웠다. 이후 우리는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아니 사회적 거리 두기를 자청하며 봄을 구속했다. 개강을 2주 연기했다지만, 젊은이들은 그때 봄을 만끽할 수 있을까?


화강암 모래가 맑은 물과 장단을 맞추며 흐르는 중상류 하천에 모래무지가 한했는데, 요즘 4대강에서 자취를 감췄다. 낙동강 상류 내성천의 감돌아 흐르는 모래 속에 황급히 몸을 감추던 흰수마자는 이 시간 어디로 그 가녀린 몸을 숨겼을까? 대형 보를 철거해 모래톱이 되살아나면 회룡포에 다시 선보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회의적인 생태학자가 늘어난다. 독성 녹조가 끈적이는 무산소 수괴를 견딜 고유 담수어류는 드물 테니까. 대형 보가 모래와 강물을 가로막자 찐득한 펄 범벅이 된 4대강에 수많은 동식물이 사라졌다. 망가진 생태계에 화가 스민다.


흐트러진 생태계를 파고드는 외래종은 국립공원의 미국자리공과 도시 하천의 돼지풀만이 아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생물다양성이 유지되는 생태계가 주위에 보전되었다면 변화된 RNA 바이러스라고 해도 일순 창궐할 수 없다. 그물코처럼 조화로운 먹이사슬에서 조절되면서 다양성을 유지할 텐데, 시방 우리와 세계의 인류사회는 코로나19 창궐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생태계를 붕괴한 기후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부메랑이다.


지난해 기상이변은 유별났다, 6개월 이어진 호주 산불은 10억 마리 이상의 야생동물이 절명할 정도로 생태계를 불사르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화마를 잠재운 빗물은 상처받은 생태계를 어루만지겠지만 퍼부은 폭우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2003년보다 더 더웠던 유럽의 불볕더위가 인도를 휩쓸며 경작지를 태웠고 러시아와 알래스카의 동토를 불살랐다. 영겁의 세월 쌓여 매장된 메탄이 30도 가까운 더위에 녹아 타오른 동토의 불길은 한반도 면적을 넘었다는데, 올여름은 잠자코 지나갈까? 거대한 산불과 폭염을 부른 여름철 기상이변은 겨울철에 폭한을 부르는데, 북미 나이아가라 폭포가 얼어붙더니 난데없이 태국과 인도 심지어 이집트까지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균형을 잃은 생태계는 기상이상을 불러들인다. 주홍날개꽃매미는 전에도 중국에서 날아왔지만 안정된 생태계에서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해의 더위와 가뭄은 그런 곤충들의 폭발적 증가를 걱정하게 만든다. 조경업무로 공직을 마친 선배는 겨울답지 않은 겨울이 지나면 해충이 늘어났다는 경험을 돌이킨다. 동면 중인 알과 애벌레가 얼어 죽지 않는 탓이라는데, 그건 과수원과 농토라고 예외가 아니다. 지구 평균 기온이 1도 상승하면 밀은 6.0%, 쌀은 3.2%. 옥수수는 7.4%, 콩은 3.1% 생산량이 감소한다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연구팀이 분석했는데, 해충 때문이라고 한다. 살충제와 제초제의 사용량이 늘어나고 토양 생태계가 더욱 황폐해지는 걸까?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1922<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노래했다. 수백만 1차대전 희생자들이 파묻힌 대지에서 생명이 깃들지 못하는 봄을 한탄했다고 문학평론가는 해석한다. 눈 한 번 내리지 않은 따뜻한 겨울에 개구리가 알을 낳았다. 혼란스러운 생태계에 태어난 생명이 앞으로 온전할지, 올해 4월은 잔인하지 않으려는지, 걱정이 커진다. (작은책, 20204월호)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6. 1. 26. 12:05


누가 마시려고 떠놓은 물에 똥 쌌어?”


정확한 문장은 아니지만, 위 내용이 담긴 어떤 시의 제목은 <양변기>라고 한다. 양변기에 끊임없이 고이는 맑은 물은 부엌 수도꼭지의 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맑은 물을 마시지 못해 위태로운 생명을 겨우 이어가는 지역의 사람들이 양변기에 대소변을 보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화를 낼까? 그냥 부러워할까?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칭송하는 양변기는 콜레라 같은 수인성 전염병을 몰아내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럽 이야기일 뿐이다. 화장실의 대소변을 모아 밭 가장자리에서 한참을 곰삭힌 후 비료로 사용한 우리네 삶에 수인성 전염병은 거의 없었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은 지 200년도 못돼 땅이 황폐한 미국과 달리 무슨 이유로 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은 4000년이 넘게 풍작일까? 그 이유를 찾아 1800년대 말 아시아 3개국을 방문한 미국의 한 관료는 인분이 답이라는 걸 알아내고 4000년의 농부라는 책을 펴냈다.


양변기는 사람이 수천 년 이상 사용한 양질의 비료를 스위치 누르는 순간 사라지게 한다. 대신 들판에는 석유를 가공한 화학비료가 풍성하게 깔린다. 화학비료 뿐 아니라 독성을 거듭 강화해온 제초제와 살충제도 뿌린다. 그래야 종자회사에서 구입한 씨앗은 기대한 만큼의 소출을 보장해준다. 제초제와 살충제도 석유를 가공해 만들었다. 강이나 호수의 물을 정수장으로 보낸 뒤 마실 수 있게 정화처리하려면 적지 않은 전기가 필요하다. 그 물을 아파트 꼭대기 층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정전이 하루를 넘기면 주민들은 아파트를 탈출해야 한다.


집에 처음 양변기를 설치했을 때, 앉기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1980년대다. 그 무렵 부엌에 석유곤로가 사라지고 드디어 가스레인지가 들어왔다. 걸핏하면 그을음이 생기는 석유곤로의 심지를 조절하는 수고를 피할 수 있어 기뻤는데, 이후 한 세대 이상 가스레인지를 불편 없이 사용하는데 전기레인지가 대세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2005년 전후에 석유는 퍼올리는 양이 소비량보다 줄기 시작했다고, 고갈의 징후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가스는 얼마나 남았을까? 모르긴 해도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는 요리는 가스레인지 또는 전기레인지로 하는 것으로 이해하리라.


인천 앞바다에 갯벌이 드넓었다는 사실은 이미 희미해졌다. 너른 갯벌을 메워 조성한 남동공단, 연수구와 송도신도시에 묻혀 사라져간다. 송도신도시 초고층 아파트에 사는 초등학생은 갯벌을 기억할 리 없다. 매립지 가장자리의 거대한 제방 아래 바닷물이 늘 출렁이며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오르내리는 장면으로 인천 앞바다를 기억하겠지. 그런 아이, 아니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이는 양변기가 오랜 문화유산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리 생각하며 한바탕 웃는다면, 하릴없는 중년의 고루한 농담일까?


흔히 이스터 섬으로 말하는 라파 누이는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하다. 지금은 목장으로 사용한다는 태평양의 외로운 섬에 30톤에서 100톤에 달하는 거대한 석상 모아이가 600개 이상 조각돼 있어 세계의 불가사이로 거론되었지만 지금은 그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안다. 원래 야자수를 비롯해 다양한 나무의 숲이 울울창창했는데 두 종족 사이의 지나친 개발 경쟁과 모아이 만들어 세우기 경쟁이 섬 환경을 처참하게 만들었다는 걸 학자들의 연구로 밝힌 것이다. 비옥한 환경에서 인구가 늘고 씀씀이가 커지자 외부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섬은 한계를 드러냈건만, 경쟁하던 두 종족은 개발을 멈추지 않았고, 결과는 비참한 나락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라파 누이는 외부 지원이 끊어지면 즉각 나락에 떨어질지 모른다.


라파 누이의 슬픈 역사를 강의한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한 학생의 질문에 제 의견을 바로 전하지 못했다. “마지막 나무를 자른 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서글펐을까? 이 마지막 나무마저 자르면 더는 카누를 만들 수 없으니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겨웠을까? 답변을 다음 시간으로 미룬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풍경 기억상실이라는 화두를 꺼냈다고 자신의 책 문명의 종말에 썼다. 마지막 나무를 자르기 한참 전부터 이미 라파 누이는 처참했을 테고, 별 생각 없이 잘랐을 거라는 얘기. 다시 말해 예전의 울울창창했던 기억은 희미해지거나 선대의 기억이었다는 설명이었다.


곡선으로 이어진 리아스식 해안은 풍수해에 가장 안전할 게 틀림없다. 영겁의 세월 동안 모진 풍파를 받으며 형성되면서 가장 안정된 지형을 갖추었지만 사람의 토목건축은 거의 모조리 도륙했다. 파괴한 리아스식 해안 위에 핵발전소를 세운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자초했는데, 우리나라도 사정은 비슷하다. 리아스식 해안은 지리 교과서 이외에서 찾을 수 없다. 인천의 드넓었던 갯벌은 아파트와 공장에 짓밟혔다. 갯벌에 살던 조개들은 한참 뒤 화석으로 만날지 모른다. 사라진지 불과 30여 년이지만 인천으로 막 주민등록을 옮긴 시민, 매립 이후 태어난 신세대들은 인천 앞바다의 갯벌을 모른다. 그 풍경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갯벌만이 아니다. 이러다가 4대강의 본 모습을 계단식 호수로 기억하는 사람이 늘어날지 모른다. 자동차는 어느새 사회의 공기처럼 되었다. 없는 생활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게 되었지만 불과 100년 전에는 귀한 물건이었다. 전기, 석유, 가스, 통신, 도로 들도 마찬가지인데, 지금과 같은 편리한 세상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컴퓨터에 신기해하던 시절이 어제 같은데 인터넷과 이어지면서 컴퓨터는 손 안에 들어왔다. 100년 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이지만 100년 뒤에는 어떨지.


풍경 기억상실은 농작물의 씨앗으로 이어졌다. 이제 농민이 가을에 받아 봄에 뿌리는 씨앗은 자취를 감춰간다. 종자회사에서 파는 씨앗은 유전자가 조작된다. 조작된 유전자는 기업의 이익에 충성하는데, 기상이변은 그런 씨앗의 앞날을 불안하게 한다. 종자회사의 씨앗은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데, 지구온난화가 심화될수록 거칠어지는 기상이변은 예측 불가능한 가뭄과 홍수를 안긴다. 지구라는 라파 누이의 막무가내 개발에 길들어진 우리는 과거를 몽땅 잊었는데, 호락호락하지 않을 내일은 이미 코앞이다. (작은책, 2016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