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4. 5. 12. 18:58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상인가. 이맘때 자연의 색이 점점 더 좋아진다. 신록이다. 부드럽게 펼친 초록은 자신 있어 보인다. 험난한 내일을 당차게 기약한다. “간첩은 녹음기를 노린다!”1980년대 6,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던 사환학생이 대학원생에게 간첩이 왜 카세트를 노리는지 물었는데, 산록과 도시 가로수를 찬란하게 빛내는 5월의 신록은 머지않아 짙은 녹색으로 단단해질 것이다.


지난 달 서울 서초구 어느 골목, 날씨 온화했던 밤이었다. 음악회 감상을 마치고 편의점 앞에 둘러앉아 맥주잔을 기울이는데 교복 입은 청소년들이 일행 곁을 왁자지껄 삼삼오오 지나갔다. 조금은 피곤하지만 밝은 얼굴들은 한결같이 건강해보였다. 야간학습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리라. 우리도 그런 시절을 거쳤다. 내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을 품고 하루하루 공부하고 뛰어놀던 시절이었는데, 야간 자육학습에 지치는 요즘도 마찬가지겠지. 기성세대들은 그들에게 이 땅의 내일을 짊어졌다고 말한다.


한겨울에도 간장독과 청년은 밖에 내놓아도 얼지 않는다고 했다. 책상에 몸을 붙잡아매려 해도 시간이 생기면 몸을 따라 움직이는 그들은 에너지가 항상 넘친다. 피가 뜨겁다. 불의를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들은 현장에 나가 의기를 불태운다. 그랬다. 광주에서, 부산에서, 인천에서, 그리고 서울과 북간도에서 젊음을 불태웠다. 그들은 사회의 소금이었다. 그들이 현장에서 뜨겁게 겅중거리기에 사회는 썩지 않았다. 얼어붙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힘의 원천이 거기에 있고, 이 땅의 민주화 역시 젊은이의 격정에 힘입었다.


사회의 소금인 젊은이들이 어느새 길들어졌다. 현장에서 겅중거리고 싶어도 모의고사가 발목을 잡는다. 학원이 휴식을 방해하고 입시가 희망하는 진로를 가로막는다. 길들어지지 않는 자들에게 허락이 되지 않는 대학에 들어가야 대기업에 취직해 혹사당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 길들어지라고 선생님이 다그치고 부모가 눈총을 준다. 언론은 학교 밖에서 일감 도모하는 청년들을 손가락질하니, 현장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의지는 원천봉쇄되었다. 오로지 입시에 대비하는 공부에 관심이 있든 없든, 뜨거운 이성과 정의는 저당 잡혀 그만 길들어지고 말았다.


이미 우리 사회에 규모가 작은 29차례의 세월호 참상, 시랜드 화재,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가 있었고 운이 좋아 300차례 피했을 것이다. 이른바 하인리히 법칙이다. 4년 전 제주도 수학여행을 다녀온 막내는 자신이나 후배를 신입생으로 환영하는 행사를 허접한 시설에서 해마다 해왔다. 유치원부터 지금까지. 큰애와 작은애도, 이웃집의 아이들도 그래왔다. 시민들은 안전한가? 지하상가에 큰불이 나면 펼쳐놓은 좌판을 요리조리 피하는 시민들은 매뉴얼대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극장과 백화점, 병원과 지하철 환승역은 만발의 준비와 훈련을 마쳤을까? 어려서부터 길든 이들이 부대끼며 사는 도시에서 세월호는 멀지 않다.


출세와 취직, 졸업과 입학을 위해 좋은 게 좋은 것이므로 묵묵히 폭탄을 돌리는 일상에 길들어버린 우리는 청년들의 피마저 식혔다. 시험에 나오지 않으면 관심 갖지 말도록 눈을 부라리는 선생님의 호령에 길든 이 땅의 청소년들은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앉아 다음 지시를 기다린다. 호기심에 고개를 돌리거나 궁금해 묻는다면 정 맞는다. 정 맞으면 구만리 같은 인생을 망치게 된다는 설교에 찌들었다. 좋은 직장을 위한 대학입시, 좋은 대학을 위한 중고등 과정의 수업, 그런 수업을 일찌감치 대비하는 초등학교와 유치원, 심지에 뱃속의 아이를 위한 학습까지.


누가 어떤 목적으로 길들인 걸까. 스스로 길들어졌을 리 없다. 누군가 그리 이끌었다. 욕심을 놓지 않으려는 기득권이다. 기득권이 재단한 인재가 돼 달라며 매뉴얼을 만들어 압박했다. 좋은 회사 취직하는 매뉴얼, 그런 회사에 잘 들어가는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매뉴얼들이지만 번지르르한 매뉴얼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 좋은 회사에 취직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행복하다는 통계는 없다. 좋은 대학의 학생들에게 창의력과 정의감이 더욱 뚜렷하다는 통계도 없다. 다만 길들어질수록 기득권에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잘 알 뿐이다. 도대체 좋다는 게 무언가?


기득권의 소모품처럼 길들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기 두렵다. 요긴할 때 가동하지 않을 매뉴얼을 믿고 그저 가만히 있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변화는 생기지 않는다. 사고는 반복되고 하인리히 법칙은 계속된다. 말 뿐인 교훈은 재발방지를 약속하지 못한다. 두드려야 문은 열린다. 젊었던 예수는 길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두드리라고 했다. 예스맨은 두드리지 못한다. 두드리려면 현장에 나와야 한다. 두드리라는 건, 정의롭지 못한 자에게 주먹을 휘두르라는 다그침이 아니다.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라는 당부다.


혁신의 역사는 누군가 일어나 행동할 때 열렸다. 함석헌 선생은 청년을 향해 대들라고 했다. 다짜고짜 멱살 잡고 흔들라는 선동일 리 없다. 불합리하거나 정의롭지 못할 때 당당히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위한 행동에 나서달라는 의미다. 두드리라는 격려였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요즘 젊은이들은 함석헌을 거의 모른다. 길들어졌기 때문이리라. 신록의 계절은 길지 않다. 그래서 더욱 서글퍼진다. (지금여기, 2014.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