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0. 8. 4. 08:02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 성난 까마귀들이 흰 빛을 시기하나니. / 청강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이방원이 초대한 잔치에 나서는 정몽주를 위해 그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시조는 백로를 일편담심의 깨끗한 선비에 비유했지만 새 왕조에 가담한 가신들은 달랐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쏘냐. / 겉 희고 속 검은 이 너뿐인가 하노라.” 백로를 표리부동한 지식인으로 몰았다.

 

백로는 분명히 희고 까마귀는 검다. 만고의 생물학적 진리다. 그렇다면 백로의 속은 검고 까마귀는 그렇지 않을까. 흰 깃에 대비되는 백로의 피부가 얼핏 검은 듯하고 까마귀는 희게 보일지 모르지만, 한 자리에 늘어놓지 않은 이상 어떤 피부가 더 검다고 분간하기 어렵다. 또 흰들 검은들,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사는 곳과 방식이 다른데, 사람 눈에 희면 좋고 검으면 나쁜 건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일부 지식인이라면 모를까, 백로든 까마귀든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백화현상으로 흰 까마귀가 있어도 무리와 잘 어울리고, 제주도에 서식하는 흑로는 온몸이 검지만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가 백의민족이라 그런가. 텃새인 까마귀보다 철새인 백로를 더 반기는 모양새다. 백로가 모여들어 새하얀 군집을 이룬 도래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지 않던가. 삼천포의 학섬과 여주 신접리의 도래지를 천연기념물 208호와 209호로 지정한 문화재청은 무안 용월리와 양양 포매리, 통영 도선리, 그리고 횡성 압록리의 도래지도 각각 천연기념물 211호, 229호, 231호, 248호로 지정했다. 한낮의 열기가 식어가는 7월의 저녁 무렵, 멀리서 바라보는 백로 도래지는 숲 한가운데 눈이 성큼 내려앉는 듯 신비롭기 짝이 없다.

 

백로 도래지는 사진작가들의 명당이다. 가는 다리를 몸 뒤로 주욱 빼고, 긴 부리를 앞세운 머리와 이어지는 목을 에스자로 구부린 채 커다란 날개를 천천히 펄럭이는 백로가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둥지에 내려앉는 모습은 우아하기 이를 데 없다. 어미와 아비가 다가오기 무섭게 달려들어 먹이를 달라고 보채는 새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백로의 자태는 또 어떤가. 한 폭의 동양화가 따로 없다. 그렇듯 전람회에 빠지지 않는 게 백로 사진이지만, 초심자는 조심해야 한다. 다른 새와 마찬가지로 백로 역시 사람에 곁을 주기 싫어한다.

 

도래하는 숲 가까이 다가가면 잿빛 왜가리와 해오라기도 사이좋게 둥지를 짓고 왁자지껄한 걸 볼 수 있는데, 가지고 온 카메라 렌즈의 배율이 떨어진다고 우산이나 우비 없이 슬며시 나무 아래로 접근하다 혼쭐날 수 있다. 천연기념물을 지키려는 주민의 불호령만이 아니다. 초점 맞추려 허둥대다 그만, 먹성 좋은 새끼들과 어미들이 쏟아내는 뜨듯한 배설물을 뒤집어쓸 가능성이 아주 높다. 새는 요산으로 배설하는 까닭에 산성이 강하다. 그래서 오랜 백로 도래지의 둥지 주변의 나무들은 바싹 말라죽은 가지가 앙상하다. 사람처럼 백로도 헐벗은 나무를 싫어하는지, 참다못해 주변의 건강한 숲으로 둥지를 옮기기도 한다.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모아 지은 백로의 집은 겉보기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이른 여름에 부화하는 2에서 4마리의 새끼들은 부쩍부쩍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여름이 깊어지면서 흰 깃이 완연해지는 새끼들은 어미 부리를 앙 물며 가까운 강이나 논에서 물어온 물고기나 개구리를 토해내라고 성환데, 요즘 백로들은 새끼들 키워내기 조금 나아졌을지 모른다. 농약 사용량이 줄어 물고기가 늘었다기보다 전에 없던 먹이가 실하기 까닭이다. 미군의 숟가락만큼 자라는 황소개구리 올챙이가 그것이다. 처음 섬뜩해 피했지만 긴 다리를 성큼성큼 호숫가를 걷다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배가 몹시 고팠는지, 한 녀석이 구부렸던 목을 냉큼 뻗어 낚아챘는데, 그것참! 토실토실한 게 영양만점이 아닌가. 덕분에 북미 원산의 황소개구리는 우리 생태계의 일원이 되었다.

 

온실가스 증가로 우리나라의 여름이 더욱 길어지는 만큼 겨울이 짧아져 그런지, 요즘 백로들이 겨울에도 남아 있는 모습을 더러 보게 된다. 먹이를 찾을 수 있는 호수와 강이 늘기 때문일 텐데, 반갑다 해야 할까. 하지만 백로는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 강들이 시방 심한 몸살을 앓지 않는가. 10미터가 넘는 콘크리트로 가로막는 16군데 공사장마다 흙탕이 들어올 뿐 아니라 물고기가 알을 낳는 모래와 자갈을 사람들이 연실 논밭으로 퍼올리기 때문인데 거기에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고사하는 조경수는 굳이 잘라내야 하나? 경기도의 한 건설업체가 천 여 마리의 백로가 찾기 시작한 잣나무와 느티나무 숲을 잘라내 부화되던 알을 비롯해 어미에게 먹이를 받던 새끼, 먹이를 주던 어미 150여 마리를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백로에게 내주는 성한 나무 한 그루와 땅 한 평이 그리 아까운 겐가.

 

주민의 노력으로 백로를 돌아오게 만든 마을도 있다. 3천 여 마리가 도래해 1973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던 횡성 압곡리가 그곳이다. 유기농업으로 농약을 자제하고 벼를 심지 않은 논에 물을 댄 뒤 미꾸라지와 같은 먹이를 대거 풀었더니 2005년 이래 자취를 감췄던 백로가 다시 찾았다는 게 아닌가. 지난 해 800여 마리에서 올 천 여 마리를 기대한다고 소식통은 전하는데, 울산시는 4천 여 마리의 백로가 장관을 이루는 태화강 변의 대숲에서 생태학교를 열었다고 한다. 보를 헐어내자 물고기가 늘어난 만큼 찾는 수가 늘어난 백로의 종류와 그 습성을 알려주고 생물다양성의 가치를 학생 스스로 깨닫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해오라기 종류를 제외하고 여름이면 우리나라를 찾는 백로 무리는 덩치가 작은 쇠백로를 비롯해, 중백로, 중대백로, 황로, 왜가리가 있고 제주도 일부 해안 절벽을 흑로가, 옹진의 무인도에 노랑부리백로가 찾아와 번식을 한다. 국제자연보호연맹과 국제조류보호회의에서 적색자료에 넣어 보호하는 노랑부리백로는 천연기념물 361호로, 노랑부리백로가 번식하는 신도는 천연기념물 360호로 지정돼 그나마 다행인데 인근 장봉도와 강화도 갯벌의 사정이 전 같지 않다. 나머지 겉 흰 백로들은 천연기념물 지정과 관계없는 도래지에서 속 검은 사람 눈치 보며 셋방을 사는데, 그들의 속이 새까맣게 타는 건 아닐까. (사이언스타임즈, 2010.8.4)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9. 12. 25. 17:47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하긴, 날씨가 선선한 산골에 주로 서식하는 까마귀의 터전은 산기슭까지 파고든 배 과수원과 거리가 가까울 수밖에 없는데, 까마귀가 실제로 배를 가끔 파먹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까마귀 날자마자 떨어진 배는 까마귀가 파먹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까마귀가 부리로 몇 차례 건드린다고 맥없이 떨어지는 배라면 이미 익을 만큼 익은 상태일 텐데, 그땐 파란 하늘이 드높은 늦가을일 게 틀림없다. 게으른 농부가 당도 높은 배를 그토록 방치했다면 방앗간 그냥 지나치는 참새가 없듯, 지나가는 까마귀도 건드려야 예의에 벗어나지 않을 터. 웬만한 과수원에 탐스런 배는 이미 남아 있지 않다. 부지런한 농부는 벌써 따냈다.

 

가을로 접어들기 전에 매달린 배는 맛이 떫다. 그때 양지바른 산록에는 잘 익은 열매가 흔전만전하고 동면을 앞둔 개구리와 뱀은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다. 맛난 먹이가 지천인데 무슨 이유로 떫은 배를 집적거릴 텐가. 사방팔방에 제초제와 살충제를 뿌려 과수원 주변에서 배 이외의 먹을거리를 몰아내기 전까지, 까마귀는 굳이 배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익지 않은 배는 아무리 툭툭 건드려도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데, 사람의 편견에 사로잡힌 까마귀가 공연히 욕을 먹을 따름이다. 까마귀가 불길하다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웬만한 사람들은 까마귀를 싫어하긴 하는데, 혹시 할리우드 스릴러 추리영화의 대명사 알프레드 히치코크 때문인가.

 

1963년 히치코크 감독에 의해 악역을 담당했지만 그건 까마귀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미국에 까치가 산다면 감독은 극성스런 까치를 출연시켰을지 모른다. 사촌 사이라서 생김새와 습성이 비슷한 까치들이 인가 근처의 나뭇가지에 앉아 “까악- 까악-” 울어대면 친근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유독 까마귀에 대해 편견을 감추지 않는다. 겨울철 등성이를 휘감던 산불이 꺼진 후 숯만 남은 숲에서 시커먼 까마귀가 나타난 건 우연이고, “과- 과- 과-” 우는 건 목청을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다. 인간의 목청은 뭐 그리 좋은가. 다른 새 둥지의 어린 새를 잡아먹는 거야 식성의 차이가 아닌가. 먹을 게 지친인데 굳이 부화 도중의 달걀을 깨먹는 인간의 행위는 좀 나은가.

 

사람의 편견에 그리 서운해 하는 것 같지 않은 까마귀는 사람에게 어떠한 피해도 안기지 않는다. 인가에서 음식쓰레기 다소 축내듯 산골 군부대에서 얼어버린 잔밥을 더러 깨먹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잔밥 기다리는 돼지들이 배를 곯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 조상은 까마귀를 반겼다. 정월 대보름에 약식을 먹는 이유를 아는가. 신라 소지왕이 경주 남산의 한 정자에 거동했을 때 갑자기 날아든 까마귀가 겉봉에 “뜯으면 한 사람이 뜯지 않으면 두 사람이 죽는다.”고 쓴 서찰을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고심 끝에 뜯으니 내전의 금갑을 쏘라는 내용인 즉, 그대로 하니 왕을 시해하려 숨었던 왕비와 신하를 잡을 수 있었다는 거다. 그때부터 정월 대보름을 까마귀를 기리는 제삿날로 정해 검은 밥, 다시 말해 약식을 먹게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누가 먹으로 활자를 덮은 듯, 방금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 까맣게 잊었다고 하는데, 어떤 이는 “까마귀 고기를 먹었다!”고 말한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듯 잊을 수도 있어도 오로지 까마귀를 들먹이지만, 생각해보라. 까치와 함께 까마귀는 7월 7일마다 하늘로 올라가 오작교를 만든다. 은하수 양편에 떨어져 지내던 견우와 직녀의 해후를 위해 반드시 시간을 지키지 않던가. 육교 중간에 주저앉아 우는 이에게 물으니, 어느 쪽으로 건너다 넘어졌는지 기억하지 못해 서럽다 했다던데, 까마귀는 그럴 리 없을 게 분명하다. 까마귀 고기가 몸에 좋다고? 그래서 한동안 산간벽지에서 총질하는 자가 적지 않았는데, 기억력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이라면 혹 모를까, 어림도 없다. 효성이 지극한 까마귀를 먹다니!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있다.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주는 까마귀의 습성을 지극한 효성에 비유한 사자성어다. 조류학자 이우신은 오해에서 비롯된 사자성어로 분석하기는 했다. 다 자란 새끼는 어미와 크기가 비슷하므로 새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걸로 착각했을 가능성을 언급한 거다. 사실 여부는 둘째로 치고, 까마귀도 행하는 효도를 하물며 인간이 내칠 수 없는 게 법도라는 걸 반포지효는 웅변한다 하겠다. 움직이는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임금이 된 신라의 어부 연오랑(燕烏郞)과 남편을 찾아 나중에 일본으로 간 세오녀(細烏女) 설화의 주인공들은 까마귀(烏)와 관계가 있다. 그래서 그런가. 일본은 까마귀를 불길한 상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겨울이 짧아지면서 2월이면 짝짓기에 들어가는 까마귀는 3월에 낳은 너덧 개의 알을 부화시켜 이른 여름이면 50센티미터 가까운 몸으로 키워내는데, 다 자란 새끼들은 한동안 부모와 남아 들쥐와 뱀, 다른 새의 새끼와 크고 작은 곤충, 곡식과 열매, 그리고 음식쓰레기와 과일들을 탐한다. 중앙아시아에서 극동아시아까지 두루 분포하지만 철저하게 세력권을 지키며 새끼들을 키우다 늦가을 이후 자신이 태어난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무리지어 움직이곤 한다. 그때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 폄하하지만, 둥지를 노리는 커다란 매도 이웃과 힘을 합쳐 몰아내는 까마귀를 너무 얕보는 건 아닐까. 태양 속에 사는 삼족오(三足烏)를 기리던 민족답게 이제 까마귀에 대한 편견을 걷어야 하지 않을까.

 

까마귀는 무척 영리하다고 한다. 단단한 부리로도 어찌할 수 없는 호두나 조개를 물고 높이 날아오른 다음, 바위나 아스팔트에 떨어뜨려 깨뜨린 뒤 속을 빼 먹는다는 게 아닌가.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 연구진은 이솝우화를 입증했다고 한 언론이 전했다. 부리가 닿지 않는 튜브에 물을 붓고 그 위에 벌레를 띄워놓자 주위의 돌을 집어넣었다는 거다. 비슷한 연구결과를 뉴질랜드 오클랜드대학에서 얻어내었다고 하니 이제 “까마귀 가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 따위의 시조는 시효를 잃을지 모르겠다. 그에 대응하는 시조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말라!”보다, 그저 백로든 까마귀든, 생긴 그대로 인정하고 그 생태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전원생활, 2010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