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6. 11. 13. 17:55

    인천과 서울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건만 서울 사람들은 여간해서 인천에 가려하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이번에도 서울에서 회의를 하고, 자연스레 술자리로 이어진다. 긴 이야기 끝에 지하철 막차 시간이 지나면 심야 버스를 타야하는데, 그땐 책을 펼치지 않는 게 낫다. 실내등도 어둡지만 내려앉는 속눈썹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

 

인천의 진산인 계양산이 골프장으로 파괴되는 것을 막으려 한 활동가가 나무에 오른 지 벌써 3주일. 사두었던 책을 심야버스에서 펼쳤다. 5년 전, 용인 대지산의 상수리나무에 한 활동가가 17일 동안 머물렀을 때 아쉬워했던 책. 3년 전 번역되자마자 구입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한 여성이 계양산의 나무에 오른 마당이므로 펼친 것이다. 피곤한 몸은 이미 얼큰한데 잠이 싹 달아난다. 감동이 물밀듯 밀려온다. 눈매가 이내 그렁그렁해진다.

 

복도까지 꽉 찬 버스에 술콰한 군상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부천을 지나 인천 연수구로 이어지는데,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 나는 종점에 도착해도 책장을 덮지 못한다. 잠든 승객을 깨우는 기사의 채근에 좌석에서 일어나 집에 들어오니 기다리던 아내는 소파에 기대 잠들어 있다. 씻고, 잠자리에 들기 전 조금만 더 읽으려는데 책장은 계속 넘어간다. 인근 상가의 저녁 아르바이트로 지친 아내는 깊은 잠에 빠져들고 나는 아내 머리맡에서 조금만 더 읽기로 한다.

 

60미터가 넘는 삼나무에 오른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은 벌채회사의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맨발로 나무를 느낀다. 그리곤 숲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루나’로 이름붙인 삼나무를 절대 내려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벌채를 며칠이라도 막아보려 했던 마음은 강한 신념으로 차오른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루나를 잃을 수 없었던 것이다. 90일이 지나 세계 기록이 바뀌고, 루나에서 생일을 맡고, 세계가 주목하며 해를 넘겼지만 신념은 더욱 강해진다. 폭설이 난무하며 유난히 추운 두 번의 겨울을 맨발로 지낸 그이. 발가락 동상과 골절을 이겨내고 루나와 주변 숲을 738일 만에 구한 뒤, 떠나기 전 루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그가 루나를 지켰고, 루나가 그를 깨운 순간을 잊을 수 없기에.

 

아내 머리맡에서 눈시울을 훔치며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컴퓨터를 켠다. 책을 다시 주문해야 했다. 불현듯 계양산의 활동가에게 전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스친 까닭이다. 계양산을 지키는 그이는 이미 읽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관계없다. 대기업인 롯데의 인부들이 나무 위에 올라 집기를 내던지며 위협한 적도 있다던데, 책을 전해주며 당신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걸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곧 추위가 엄습할 텐데,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은 계양산의 ‘나무 위의 여자’에게 힘과 용기를 심어줄 게 분명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떠오를 수 있는 건 나를 지지하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제 친구와 비교할 때 삶이 힘겹고 약 오르지만, 몸과 마음이 지쳐 풀이 죽는 남편을 아내는 격려해준다. 그러고 보니, 곯아떨어진 아내는 우리 집의 《나무 위의 여자》다. 《나무 위의 여자》를 책장에 넣고, 아내와 《나무 위의 여자》들에 대한 무한한 고마움에 젖어 곤한 잠을 청한다. (작은것이아름답다, 2006년 12월호)

용기 있는 삶을 선택한 친구의 아내가 고맙습니다.
그런 용기가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