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8. 9. 1. 00:45


힘이 지배하는 세계를 흔히 ‘정글’이라고 한다. 1906년 미국의 소설가 업톤 싱클레어는 노동자를 혹독하게 지배하는 시카고 도살장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해 당시 미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권투시합이 벌어지는 링 안을 ‘사각의 정글’이라고 하니 정글은 약육강식의 전형을 상징하는 모양이다.

 

정글은 밀림이다. 온갖 동식물이 어우러지는 생태공간이다. 텔레비전 ‘동물의 왕국’을 보면 힘이 있는 자가 늘 승리한다. 힘겹게 잡은 먹이도 다가오는 힘센 녀석에게 맥없이 빼앗기는 걸 보여주지 않던가. 생태계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저돌적으로 지지했던 토머스 헉슬리와 허버트 스펜서의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논리가 적용되는 공간으로 믿었다.

 

정작 다윈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지지하지 않았고 다윈의 진화론에도 그런 언급이 없다. 하지만 헉슬리와 스펜서의 논리가 진화론의 요체처럼 알려졌고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언급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만개한 제국주의에 기름을 끼얹은 그 이론은 제국주의자의 약탈을 정당화하는데 요긴하기 때문일 텐데, 지금도 기득권을 가진 자가 편의적으로 그 이론을 앞세우는 까닭이라고 답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만년의 토머스 스펜서가 약육강식 이론을 다시 정당화했을 때, 러시아의 젊은 지리학자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반박했다. 자연에서 살펴보니 약육강식 이론은 틀렸다는 거였다. 자연을 일면적으로 보면 힘 있는 자가 지배하는 것 같아도 근본에서 깊숙이 들여다보면 아니라면서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론”을 제창했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주장이다.

 

크로포트킨은 시베리아의 자연을 살펴보았다. 바로 생태계요 밀림인 자연이다. 열대보다 생물종다양성은 낮지만 다양한 동식물이 어우러진 공간이라는 데 동일하다. 미생물이 없으면 풀도 나무도 자라지 않고 풀과 나무가 없으면 어떠한 동물도 삶을 기댈 수 없다. 미생물은 크고 작은 동식물이 온전해야 생태계의 기반을 유지할 수 있다. 크로포트킨은 자연에서 그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자연은 녹색이다. 녹색 공간에서 낯모르는 이를 만나면 도시 뒷골목과 같이 경계하지 않는다. 지리산 등산로에서 마주치는 이에게 선뜻 물병을 건네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건 녹색의 자연이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공원도 비슷하다. 뙤약볕에 줄 서 기다려야 하는 놀이공원에서 모르는 이는 경계 대상이지만 나무가 우거진 자연공원에서는 다르다. 마주치면 눈인사를 나누게 된다. 다시 만나면 친해진다.

 

독일의 많은 도시에는 잔디와 숲으로 꾸며진 넓은 자연공원이 도심에 조성돼 있다. 대개 집이나 직장에서 5분 정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나오면 찾을 수 있다. 그 공원에는 많은 이가 어우러진다. 자전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거나 뛰는 이, 벤치에 앉아 소곤대는 연인과 혼자 책 읽는 이, 잔디에 둘러앉아 토론을 벌이거나 떠들썩하게 노는 무리가 자연스럽다. 독일만이 아니다. 유럽 대부분의 도시가 그렇다. 도시의 완성은 녹지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도시의 30퍼센트 이상을 녹지로 조성하려 애쓴다.

 

공원의 나무와 풀만으로 모자란 지, 지붕과 옥상에도 풀을 심고, 주차장 바닥에 잔디블록을 깔아놓은 독일은 전철의 철로 사이에도 잔디를 심었다. 주거단지에 승용차 사용을 억제하는 대신 자전거를 장려한다. 주택 앞뜰에 나무를 심는 그들은 누구나 녹지에 나온다. 자전거, 인라인, 조깅, 산책, 놀이, 독서, 휴식, 일광욕이 자유롭다. 한데 녹지를 찾은 그들에서 계층의 차이는 전혀 느낄 수 없다. 평등하다.

 

생태계는 녹색이다. 생태계는 순환과 다양성이 요체다. 순환과 다양성은 배려와 개성으로 풀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녹색’은 평등하다. 양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은 녹색에서 가당치 않다. ‘녹색정책’은 분배를 추구한다. 태양과 바람에너지는 평등하다. 그래서 녹색이다. 녹색은 기득권이 추구하는 성장과 관계없는데 정부는 ‘녹색성장’하잔다. 형용모순이다. (요즘세상, 2008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