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1. 12. 21. 17:30

 

지탱 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이 환경단체에서 나온 적 있다. 정부가 홍보한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한 우려의 표현이었다. 1987우리 공동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유엔이 펴낸 보고서에서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으로 정의했지만 지속적으로 개발하자고 의도적으로 오해할 수 있기에 환경단체가 슬며시 비틀었던 거다. 그러나 우리는 후손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녹색성장도 외친다.

 

2011년이 마무리되면서, 또는 내년의 총선과 대선을 의식하면서, 경제 전문가들은 이명박 정권이 내세운 이른바 ‘747 공약을 비판하고 나섰다. 경제 성장률은 3.7퍼센트, 1인 당 국민소득은 23500달러, 경제 규모는 세계 14위로 반 토막 되었다는 거다. 한데 우리 기억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예전과 비교하면, 그 정도도 사실 감지덕지하다. 오로지 당선을 위해 실천이 불가능한 약속을 내세웠으면서 웬걸! 취임 전에 비해 소비자물가를 22.6퍼센트나 상승하게 만든 실정을 탓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새로 출범하는 정권이 내세우는 슬로건은 다양했다. 어떤 정의롭지 못한 정권은 정의 사회 구현을 내세웠는데, 토목과 건축 분야에서 잔뼈를 굳힌 현 정권의 수장은 녹색성장을 외쳤다. 그러자 정부는 합리화에 나섰고 녹색성장은 환경과 경제의 상생을 구체화하는 개념으로 상생의 방향에 따라 두 가지 의미라고 홍보하고 나섰다. “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는 경제성장그리고 환경을 새로운 동력으로 하는 경제성장이라는 거다. 한데 4년이 지난 지금, 녹색성장은 그 이상을 향해 가는가. 다양성을 도모하는 녹색의 개념이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는 성장과 어울릴 수 있다고 현 정부는 아직도 믿고 있을까.

 

노르웨이 총리였던 부른틀란트 여사가 발의한 지속 가능한 개발개념은 개발과 성장을 주도하는 정부와 기업인을 환경 논의에 끌어들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이미 지나치게 개발해 돌이킬 수 없게 땅과 하늘과 바다가 오염되었을 뿐 아니라 후손에게 남길 자원도 거의 써버린 상황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권력과 돈이 있는 각국 정부와 기업인을 끌어들여야 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개발을 전제로 하는 발전은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 형용모순 어법을 동원했던 유엔이나, ‘녹색성장이라는 모순어법을 내세운 우리 정부나 환경 측면의 진정은 애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흐지부지되는 건 필연이다.

 

요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마다 저탄소 녹색통장 갖기 운동을 벌리기 시작했다. “가정 전기, 수도의 절약한 사용량을 CO2 감축량으로 환산, 온실가스를 줄인 양만큼 포인트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범시민 온실가스 감축 실천 운동이라고 열심히 홍보하지만, 기존 통장을 없애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 추가하는 통장은 소비 없이 유효할 수 없다. 통장에 이어 녹색으로 치장한 신용카드까지 추가로 발급된다면, 에너지와 자원의 소비 역시 추가될 수밖에 없다. 기존 소비에 이산화탄소를 약간 절감한 소비가 얹어지므로 지구온난화 방지에 대한 기여는 기대하기 어렵다.

 

친환경이나 재생 가능한제품의 사용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소비를 억제한 뒤 친환경과 재생 가능한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환경에 도움이 되는 구석은 거의 없다. 다만 그런 제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는 면죄부라도 구한 듯 그 순간 흡족해질 수 있겠다. 배기가스를 절감한 자동차를 보급한다 해도 자동차 수가 늘어난다면 대기오염은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 어떻게 얼마나 재활용되는지 살피지 않으면서 깡통 음료수를 더욱 즐기고, 플라스틱 제품의 사용과 포장지를 늘린다면 환경이 나아질 리 없다.

 

환경은 소비전력을 줄인 에어컨이나 전열기를 사용한다고 개선되지 않는다. 겨울에 집안에서 내복과 스웨터를 걸치고 승용차보다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개선된다. 재활용보다 다시 쓰거나 고쳐서 쓰는 일이 낫다. 아예 소비를 꾹 참는 게 훨씬 낫다. 친환경 제품의 구입은 가장 나중에 선택할 일일 따름이다. (요즘세상, 2011.12.25)

+ 유기농 채식 <mb가 오염해 먹은>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0. 9. 29. 09:12

 

한때 정의롭지 않게 권력을 틀어쥔 이가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대다수 시민의 의식과 행동을 성가시게한 적 있다. 정의롭지 못한 이가 이끄는 권부는 결국 물러날 때까지 정의롭지 않았고, 그 권력에 해바라기처럼 아부했던 인사들도 정의롭지 않았으며 그 여파는 4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이어진다. 공자는 ‘정명’을 말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바를 수 없고, 말이 바르지 않으면 일이 바를 수 없다는 공자의 지적은 4반만년이 지난 지금도 진리다.

 

기초지방자치부터 대통령까지, 그럴싸한 구호를 붙인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이 정부”라고 하다 후반기 “혁신사회”를 주창하자 정부 조직은 일사분란하게 “혁신사회 실현”을 부르짖었고 펼치려는 사업마다 혁신사회를 위한다고 정당화했다. 현 정권은 어떤가. 출범하지마자 “저탄소 녹색성장”을 추구한다더니 임기가 절반을 넘어간 순간 “공정사회”를 주창한다. 언뜻 가슴을 설레게 하는 구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저탄소로 무슨 성장이 어떻게 추구했는지 대다수 시민들은 아직 납득하지 못한다. 계획은 구체적이지 않았고, 물론 실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치명적인 폐기물을 자손 대대로 떠넘기는 핵발전이나 온실가스를 어느 산업보다 펑펑 내뿜는 화력발전을 말한 것이라면, 공자의 지적에 반한다. 4대강 사업을 녹색성장의 사례로 주장한다면 정권이 힘을 다하자마자 삼척동자, 남녀노소, 동서고금, 대대손손에게 지탄받을 헛구호가 될 것이다. 녹색은 중앙의 선택과 집중이 아닌 지역의 자치와 분산을 요청하는데 거기에 성장이라니. 요컨대 철학과 고민이 결여된 구호는 언어유희와 도단일 뿐이었는데, 이제 느닷없이 ‘공정사회’가 대두된다. 과연 정명인가.

 

껍질 안에 또 다른 껍질을 켜켜이 감춘 양파처럼, 현 정권 수뇌가 추천한 행정부 수장 후보의 불공정했던 행실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그러자 공정사회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단다. 그런가. 과거를 묻지 않는 사회가 공정하게 움직였던 사례가 세계만방의 역사에서 한 차례라도 있었다던가. 당장의 불공정도 지나자마자 과거가 되는데, 과거를 묻지 않는 공정사회가 내일의 공정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다고 도대체 누구에게 검증을 받았나. 굴종을 요구하는 구호는 전혀 공정할 수 없다. 그 따위 공정사회론은 정명일 수 없다.

 

정부가 은근슬쩍 내밀었다 언론에 노출된 내년 예산은 어떤가. 분배를 그 근간으로 하는 복지예산을 줄인 대신, 4대강 사업 예산을 증액했다. 건설자본의 성장 이외의 공정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우리나라에 와서 4대강 사업의 현장을 확인한 해외 수자원 전문가마다 한 목소리로 강바닥을 파고 거대한 제방으로 흐름을 차단하는 토목공사를 복원이라 칭하는 현 정부의 주장에 반대한다. 정명이 아니라는 거다. 벌써 두 세대 전에 그로인한 무시무시한 폐해를 경험하고 이제 굽이치며 범람하던 원래의 모습으로 환원하려 애쓴다고 했다. 후손을 생각한 공정사업이었다. 우리의 강물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흐르는가. 조상의 강은 후손의 강과 다르게 흘러야 하는가. 후손의 처지에서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구호는 공정사회와 거리가 멀다.

 

채소가격이 현기증나게 오른다. 추석이 지나면 나아지려니 믿었던 시민들은 김치가 없는 겨울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한 포기에 만오천원이 넘게 된 이유를 많은 이는 4대강 사업에 그 원인을 돌린다. 채소를 재배하던 강 주변 농토에 6미터 넘게 강바닥에서 퍼올린 오염된 모래와 자갈을 쌓아올리지 않았나. 유래가 없는 기상이변이라고? 기상이변도 변수였겠지만, 기상이변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나. 불공정한 온실가스 배출이 아닌가. 이번 홍수 역시 강 본류가 아니라 지류에서 발생했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수해보상 역시 공정사회와 거리가 멀다.

 

말이 오염되면 어떤 논리도 기준을 잡지 못한다. 오늘의 오류가 내일 정당해질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 누구도 감히 공정을 논할 수 없다. 소통을 외면하면서 강조하는 소통은 굴종을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공정사회’ 구호에서 과거 독재정권의 구호가 생각난다. “정의사회 구현!” (인천신문, 2010.10.5)

 
 
 

서평·추억

디딤돌 2009. 7. 19. 00:53

 

《문명에 반대한다》, 존 저잔 엮음, 정승현 외 옮김, 와이즈북, 2009년.

 

 

중학생 때였던가. 수많은 욕망 중 가장 낮은 수준이 식욕이고 다음이 성욕이라면 돈 욕심이 성욕보다 차원이 높은데, 가장 고귀한 욕망은 명예욕이라고 어느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인 적 있다. 아마 점심시간 전에 도시락을 먹어 냄새를 풍기자 우리를 나무라면서 꺼낸 말일 텐데, 그 선생님, 반찬 냄새에 어지간히 배가 고팠을지 모른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자산이라는 개념을 선보였다. 교양 수준이 높아 존경을 받는 이의 자산이라던데, 우리의 딸깍발이 선비처럼 당장 돈이 없어 굶어죽게 생겼어도 고개 빳빳하게 세우는 지식인이 거기에 속하려나. 예외가 없지 않겠지만 아무리 고귀한 성품의 소유자라도 배가 몹시 고프면 하지 않던 짓에 고개 돌리려 할지 모른다. 그렇다. 식욕은 저급하다기보다 가장 기본적인 욕망일 것이다. 식욕이 없으면 개인의 생명은 지속되지 못한다. 성욕? 그거 없으면 종이 중단되겠지. 명예욕? 생존의 경계에 서 있다면 없어도 그만인 거겠지.

 

무인도에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지 물었더니 긴 생머리가 예쁜 한 여학생은 헤어드라이어를 꼽았다. 찰랑찰랑한 머리를 말리려면 필요하다는 건데, 누가 그 무인도에 가서 전기를 가설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할까. 노트북컴퓨터는 있어야겠다. 원고 한편은커녕 한 줄을 작성하려 해도 컴퓨터 앞에 앉아야 하니, 나도 전기 가설된 무인도를 찾아야겠다. 워드프로세서 없을 땐 원고지로 가능했는데, 왜 이렇게 길들여졌을까.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대부분의 주변 지식인들이 죄 그 모양이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민주주의의 반대를 경제성장이라고 했다. 어떤 독재보다 더 심한 독재가 경제성장일 지 모른다. 당대든 과거든, 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경제성장을 양보할 생각을 가진 이는 드물다. 국회의원에서 구의원, 구청장에서 대통령, 하다못해 학급반장 선거에 이르기까지, 지지를 호소하는 후보는 한결같이 발전을 목 놓아 외친다. 바로 경제성장이고, 경제성장은 바로 문명이라는 잣대로 잰다. 문명을 반대하는 자는 현실사회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일 것이다. 한데, 요즘 세상에 그런 인간이 있긴 있는 걸까.

 

그런 부류의 대표적인 인간이 《문명에 반대한다》를 엮은 존 저잔이다. 우리가 맥없이 추종하는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에서 태어나 자본주의 바이러스를 마구 퍼뜨리는 대학 중의 하나에서 석사까지 마친 그는 자생적 아나키스트일 게 분명하다. 《문명에 반대한다》에 모은 글이나 그 책에 선보이는 그의 글을 읽자니 틀림없다. 문명의 작두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오던 군상이 시퍼런 칼날에 맥없이 스러지는 형국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문명의 본질적 문제를 다양하게 논증하는 글을 백방에서 모은 걸 보면. 그런데 그 책이 잘 팔렸는지 보완 증보했다. 당대에서 수 백 년 전 사람의 글, 감옥에 간 적 있거나 현재 감옥에 있는 사람의 글, 그리고 앞으로 감옥에 갈 가능성이 높은 사람 55명의 글이 엮였다. 아쉬운 건 아시아에서 글을 찾지 않았다는 건데, 유럽과 미주에도 비주류나 비주류를 동경하는 이가 적지 않은 모양이다.

 

문명 이전의 인간은 고달팠을까? 인간이 진화된 세월을 어느 기준으로 따질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건 인간은 진화한 이후 90퍼센트 이상의 세월 동안 문명과 관계없었다는 거고, 그때 가장 풍요로웠다는 사실이다. 그걸 논증하며 《문명에 반대한다》는 책장을 연다. 어디선가 한번 이상 들어본 장 자크 루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글이 소개되고 요즘 잘 나가는 인류학자의 이름도 보인다. 그래, 그렇게 문명이 탄생하니 좋더냐? 묻는 대목에서 온갖 반어법이 쏟아지는데, 농업과 서구문명에 대한 신화를 뒤집고 국가의 개념을 비웃는다. 문명의 본질이란 결국 추락하는 비행기이고 근대성이란 홀로코스트라는 비판이다. 지배, 거짓말, 파괴, 질병의 도미노가 곧 문명의 병리학이므로 정신이 똑바로 새겨진 이는 인간과 지구 생태의 공종을 위해 반문명 선언에 동참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사기 위해 지구를 버렸는가?”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됨에 따라 우리는 과거에는 몰랐던 방식으로 미래를 훔치고 있는가?” 《문명에 반대한다》는 그렇다고 말한다. “플라스틱을 사기 위해 평등주의를 팔아치웠다”는데, 그 평등의 개념에는 당대의 사람만이 포함된 게 아니다. 후손의 삶은 물론이고 생태계도 문화도 역사도 포함된다. 그 모든 개성들이 망라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가. “미래의 원시!” 그걸 추구해야 한다는 건데, 그 선언에 동참할 인간이 몇이나 될지.

 

형용모순의 범주에 속하는 ‘녹색성장’을 외치는 이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건 아니다. 석유회사 주식을 가진 미국의 유명 정치인은 맥도널드 ‘빅맥’을 좋아한다는 걸 밝히는 지적수준을 자랑하건만,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 아리송하게 결론을 내면서 지구온난화에 대한 문제를 세계 도처에서 강연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준 자들의 지적수준은 또 뭘까. 아내와 집에서 일을 하므로 미국 평균 전기료의 20배를 사용한다는 그는 강연료가 천문학 단위인데, 가끔 우리나라에도 온다. 친환경 개발을 하겠다는 새만금에도 납실 예정이란다. 녹색성장을 외치며 아부하는 어떤 자가 초청할 모양이다.

 

문명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지식인이 지구온난화 대책이란 걸 세운다. 우주에 커튼을 치자면서. 식량이 부족하다고? 30층 높이의 농장용 건물을 짓잔다. 그런 자들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친환경이란다. 문명이란 걸 드높이며 환경문제, 지구온난화 문제, 생태계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과연 녹색성장이 가능하기나 한 말인가. 헷갈린다면 《문명에 반대한다》에서 힘을 구할 수 있다. 문명이라는 작두날에 위태롭게 남을 후손을 생각한다면, 결국 거부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다각도로 논증으로 이해하고, 행동에 앞선 힘을 비로소 얻을 수 있으리라. 다만 내 발이 현실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면, 굼뜨게나마 내 자리에서 문명을 거부할 거리라도 고민할 수 있다. (우리와다음, 2009년 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