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4. 2. 3. 13:12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다. 시간을 맞춰 같이 갈 사람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다 알바 나갈 시간 기다리는 막내와 본 영화는 변호인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출연진 명단이 스크린을 타고 올라가는데, 자리에서 쉽사리 일어날 수 없었다. 1980년대 초 군사정권이 저지른 야만은 지나간 일이기만 한 건가. 과거의 상황으로 되돌리려는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당시와 다른 추악함이 지배하는 바깥세상으로 바로 나가기 꺼려졌다. 요즘 어떤 마음가짐과 행동이 필요할지 등 떠밀려 나가는 관객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대학을 제때 졸업하지 못한 한 후배는 영화 끝날 때까지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는데, 그는 떠오르는 기억의 고통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후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교 선배가 생각났다. 그 가냘픈 몸이 군홧발 뭇매를 맞고 초주검이 되었을 때, 마음 넓은 삼촌을 자처하는 이가 안타까운 듯 나타나 달래며 회유하려 했다는 이야기. 듣지 않자 더욱 가혹한 매질이 가해지고 다시 모든 걸 다 이해한다며 나타난 선배란 자의 회유. 다시 반복되는 피비린내 나는 고문과 회유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그 선배는 변호인을 보았을까?


벌써 10년은 되었겠다. 박종철이 누군지 모른다는 아이의 얼굴을 기막혀 바라본 적이. 박종철도 모르는 아이에게 기막혀한 건 아니었다. 뭐 그리 먹고살기 바빴는지, 이한열과 박종철을 낳았던 우리 과거사를 자식에게 이야기할 틈도 없었던 내 자신에게 어처구니없어 했던 거다. 1990년대 초반 거리에서 집회와 시위가 사라진 상황이 불현 듯 떠올랐고, 그 언저리부터 사람들은 백화점 세일 상품을 먼저 사려고 구두끈을 바싹 맸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 마치고 학원과 과외로 맴도는 아이들은 딴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


고문을 받다 죽은 박종철 이야기를 듣고, “에이, 설마하던 아이들은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다. 아르바이트에서 사회정의를 조금씩 이해해가는 젊은이 가운데 하나인 막내는 영화를 보며 울지 않았고, 이제 설마하지 않는다. 친구들도 대개 자신과 비슷하게 생각할 거라 덧붙였다. 취직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거품경제 시대의 부모와 달리 스펙을 쌓고 또 쌓아도, 토익 점수를 올리고 또 올려도 졸업이 두려운 요즘 젊은이들은 다른 의미의 고문을 감내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학에 가까운 입시와 취업경쟁, 그리고 두렵기만 한 결혼과 자식 키우기. 그들은 변호인에서 무슨 생각을 끌어낼까.


1980년대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간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의 GNP 숫자를 높이는데 투신하며 백발이 늘어가고 있을 때, 핵발전소가 우후죽순처럼 돋았고 이어 핵폐기장 투쟁의 찢긴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고층아파트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꿀 때 낙동강에 버려진 자본의 페놀이 한강에 포르말린으로 버려졌다. 천혜의 리아스식 해안선은 자 대고 그을 수 있는 해변으로 바뀌며 거듭 매립되고, 갯가의 어패류가 사라지는 만큼보다 많은 고기와 낙농제품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피부에 닿는 기상이변이 속출하더니 어느새 일상이 되었는데, 억겁의 세월 굽이쳐 흐르던 4대강은 호수로 변했다. 온갖 부정과 비리를 끌어안는 핵발전소는 후쿠시마를 비웃으며 확산될 따름이다. 그 상황에 경제의 거품이 꺼져간다.


야만의 군홧발 고문을 잊어가는 우리는 개발, 발전, GNP, 선진국이라는 기호에 넋을 빼앗겼고, 성공을 장담하는 경쟁과 속도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게 되었다. 모두 내달리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 세계로 내던져지면서 스스로 자신을 고문하게 되었다. 속도와 목표가 숭상되는 세상에서 개성은 말살되고 새로 등장한 권력이 제시하는 기준으로 사회는 획일적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서로 비교하고 분류하며 소외시킨다. 개성이 말살된 획일적 사회는 불안에 떠는 군상을 양산했다. 체념하고 길들여진 채 살아가야 하는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데 동의한다면, 개성을 가진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지배자의 기준에 충실하면서 실패한 군상을 양산하는 현장은 도처에 넘친다. 밀양과 청도의 초고압 송전탑이 그렇다. 물론 송전탑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권력을 동원하며 권력의 탐욕을 확장하는 현장은 핵발전소와 핵폐기장, 4대강과 경인운하로 이어진다. 온갖 가증스런 거짓말과 뻔뻔한 폭력이 자행되는 현장인데, 사기업도 마찬가지다.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 삼성반도체와 현대자동차, 콜트악기와 기륭전자, 그 명단은 길기만 한데, 더욱 길어질 것이다. 공기업도 비슷하다. 철도공사에서 머물지 않을 것인데, 마냥 당할 수만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경제에 거품이 꺼진 사회에서 고용 불안은 완화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후변화와 석유위기가 심화되는데 기업의 불안도 해소될 기미는 없다. 조세피난처에 비자금을 숨기는 자본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당장 아이 학원비 낼 방법을 찾지 못하는 실직 노동자는 오죽할까. 초고층빌딩은 호기 있게 올라가지만 완공 뒤 은행이자는 제대로 지불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식량의 4분의3을 수입해야 하는 우리는 수출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건만 음식 쓰레기는 해마다 20조 원 어치나 된단다.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에 거품과 부정의가 횡행하는데, 어떻게 내일의 안정과 정의를 스스로 확보할 수 있을까.


위기가 다가오건만 불안을 잠재울 수단은 생산되지 않는다. 남의 불안을 지렛대삼아 자신의 권력과 탐욕을 공고하게 하려는 사람은 오히려 늘어난다. 그들이 제도를 지배하는 부정의한 오늘,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우리는 어떡해든 사회 상황과 제도를 바꾸려 노력해야 한다. 제도를 만드는 자들이 모인 의회로 어떡해든 들어가야 한다. 들어갈 수 있도록 내공을 쌓아야 한다. 내공은 유권자들을 감동하게 할 정책을 구상하고 앞에서 행동할 때 구축할 수 있다. 그러자면 쉴 새 없이 공부하며 행동해야 한다. 불안과 부정의가 교차할수록 더욱 치열하게.


제도를 만드는 의회에 불안을 먹이 삼아 부정의를 공고히 하려는 자가 굳건해 보이지만, 허점이 있다. 그들도 불안하고 부정의한 리그에서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당파와 계파에 스스로 얽매인다. 계파의 수장의 눈치를 보고 수장이 원하는 제도에 목숨을 걸려는 시늉을 하고, 때때로 계파의 이권을 계산해 나누거나 타협한다. 그러느라 정비하려는 제도를 속속 깊이 들어다 볼 여유가 없다. 그런 의회자리에 들어가 제도를 소신껏 살펴보며 논의의 물꼬를 바꿀 수 있다. 유권자의 지지가 바탕이 된다면 당파와 계파 안배에 정신 팔려 논의를 작파한 선량들의 허점을 짚고, 일삼던 전횡을 저지할 수 있다. 비록 소수라도 부단히 노력하면 제도를 개선할 수 있다. 불안을 정의롭게 잠재우는 방향으로.


어쩌면 요즘이야말로 영화로 본 변호인의 출현에 목마른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법정에서 정의를 바로 세우려 노력하는 변호인만이 아니다. 기후변화와 석유위기 시대를 극복하는 소박한 삶을 전파하는 행동도 1980년대 변호인보다 힘겨울 테지만 포기할 수 없다. 거품이 꺼진 경제 상황을 한 국가의 독립을 실질적으로 견인하는 농업을 제자리로 돌이키는 일 또한 쉽지 않지만 시급하다. 획일적으로 길들여진 학습으로 줄 세우기 세계관을 주입하는 교육도 다양성이 존중되는 개성 있는 교육으로 돌이켜야 한다. 녹색전환연구소가 그 방법을 찾는 힘겨운 행동에 흔쾌히 나서자. (녹색전환연구소 웹진, 2014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