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6. 4. 19. 09:24

마스크는 대안이 아니다

 

벚꽃이 만개한 주말, 모처럼 집에서 푹 쉬었다. 원고가 밀렸지만 전날까지 며칠 늦도록 술잔 기울이다 지쳤기 때문인데, 하필 그날 미세먼지가 극성이었다. 황사도 아닌 미세먼지가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봄철 중국과 몽골의 사막이 풀리면 날아오던 황사는 여전하지만 미세먼지의 위력에 존재가 삭으러들었다.


지난 주말의 미세먼지는 중국에서 날아오지 않았다. 물론 중국에서 날아온 먼지도 포함되었겠지만 대부분 국내 원인이었다. 우리나라에 나타나는 중국 발 미세먼지는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인도 황사와 미세먼지로 고통을 받고 있고 그 먼지가 우리나라와 일본을 차례로 스치며 고통을 전파하지만 요즘은 중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더 잦은 듯하다. 바람이 없거나 약한 날은 어김없이 미세먼지를 걱정해야 한다.


선천적으로 폐가 약한 처지에 건강을 위해 하루 만보를 걸으려 하지만 추위나 더위, 비바람이나 눈보라보다 미세먼지가 발목을 잡는다. 되도록 일기예보를 경청하더라도 하늘의 색이 어지간하면 걷는데, 입안이 버석거리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미세먼지 때문에 수도권에 사는 30대 이상 10명 중 한두 명은 제 수명을 누리지 못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짧으면 몇 개월, 길면 몇 년 단축된다던데, 나는 예외일 수 없는 신세가 되었나.


세계보건기구(WHO)에서 ‘1급 발암물질로 지정한 초미세먼지는 코와 기관지에서 걸러지지 않고 허파 속 깊이 파고들어 폐암을 비롯해 여러 호흡기 질환과 나아가 심혈관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데, 그 대책은 마스크뿐일까? 미세먼지 경보가 내리는 날이면 기상예보를 담당하는 방송국의 젊은 여성은 그저 마스크를 챙기라고 당부하고 만다.


미세먼지를 막아주는 마스크는 보온이나 위생용과 달리 여과 필터가 내장돼 운동할 때 호흡을 원활치 못하게 한다. 운동으로 호흡량이 늘어날 때 미세먼지 용 마스크와 피부 사이에 틈이 생기면 걸러주는 효율이 떨어지는데, 어쩌란 말인가. 미세먼지가 나쁜 날엔 걷지 말라는 겐가? 먼지 제거가 훌륭한 실내에서 러닝머신에 올라야 하나? 돈이 드는데?


정부가 마스크 사업자의 편의를 고려하는 건 아니겠지? 진정성 있는 대책을 여전히 외면하고 마스크만 되뇌니 엉뚱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정부가 공기청정기나 피트니스클럽의 이해에 긍정적인 것도 아니라 믿는다. 호흡기와 순환기 질환 뿐 아니라 미세먼지가 우울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학설도 있던데, 설마 의료기관의 수익을 살피는 건 아니겠지. 이러다 전담 영리병원의 등장을 기정사실화하는 건 아닐까?


환경단체는 미세먼지를 주로 내놓는 디젤 자동차의 저감장치 의무 부착과 압축천연가스 버스의 도입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요구한다. 하지만 정부는 경유택시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막대한 미세먼지의 원흉인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를 적극 검토하지만 우리는 증설할 따름이다. 우리나라에서 신통한 대책을 추진하지 않는데, 중국에 우려의 목소리를 낼 자격은 없다. 하지만 그 이외의 대책은 없을까?


숲과 습지가 많은 곳은 미세먼지가 상대적으로 적다. 날아드는 미세먼지의 양이 비슷하더라도 어느 정도 차단하고 씻어내기 때문이다. 미세먼지가 많았던 그 이튿날 도로 가장자리를 살수차가 물을 흥건히 뿌리면 먼지가 어느 정도 씻겨나간다. 가로수나 근린공원의 조경수 위로 물을 뿌리면 적지 않은 먼지가 씻길 것인데, 뿌연 시내에서 그런 차량을 본 적이 없다. 물이 없어서? 예산이 없어서?


도시의 하수는 막대하다. 그 하수는 전량 하수종말처리장으로 보내 정수처리한 뒤 바다 또는 강으로 내버린다. 그 하수를 프랑스 파리처럼 중간에서 처리해 도시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유럽보다 강수량이 1.5배 정도 많다. 빗물을 받아 도시의 먼지를 제거하는데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서울시 한 해 빗물 배제하는데 들어가는 예산은 활용하는 예산 40억 원의 100배가 넘는다고 빗물 전도사서울대학교 한무영 교수는 주장했다.


예산이 없다고? 수명이 줄어드는 시민의 건강보다 중요한 행정이 있나? 장비는 물론 개발해 충원하면 된다. 설마 장비 구입할 예산이 없다는 건 아니겠지. 진정성으로 당장 시행할 대책이 있고 적극적 검토를 거쳐 시행할 대책도 있을 텐데, 여전히 마스크 타령뿐이다. 깨끗한 도시에서 걷고 싶은 시민의 목은 벌써부터 서걱거리는데. (지금여기, 2016.4.18.)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2. 7. 21. 08:13

    놀이터까지 주차장으로 바꾸다니

 

19층 고층 아파트가 네모꼴로 배치된 아파트 단지에서 주차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첫 입주 당시 확보한 넓은 주차 면이 날이 갈수록 비좁아졌고, 저녁 이후 집 가까이 차 두는 일은 포기하게 되었다. 어두워지면 이웃의 자동차 앞에 평행주차를 하거나 빈 공간을 찾아 단지를 이리저리 돌아야 하는데, 이른 아침에 차를 빼려면 귀찮은 일을 감수해야 한다. 차 앞에 평행주차한 자동차 여러 대를 밀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비나 눈이라도 내리면 옷이 푹 젖거나 넘어질 수 있다.


어느 주말이었나. 편한 옷으로 쉬는데, 경비원이 올라왔다. 아파트 왼 편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를 주차장으로 바꾸는 안에 찬성 서명을 해달라는 거였다. 서명 용지를 들고 올라온 나이 든 경비원에게 뭐라 할 수 없는 일. 그도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서명에 응한 가구는 대부분 찬성에 표시를 했지만 그들과 같은 란에 표시할 수 없었다. 선행학습에 바빠 그런지 거의 한산하기는 해도, 어린이 놀이터마저 빼앗는 어른의 횡포에 동참하기 싫었다. 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 나이가 지났지만 놀이터는 옳다고 보았다.


말이 어린이 놀이터지, 그 놀이터에 어린이만 모이는 건 아니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사이에 잠시 들리거나 어쩌다 학원에 빠진 아이들이 놀기도 하지만, 주로 유치원을 파했거나 유아원에 들어가지 않은 꼬마들이 엄마나 할머니, 어떨 때는 할아버지와 같이 와서 시소나 그네를 탄다. 깨끗한 모래가 푹신하게 깔려 안전하다. 그늘이 있는 의자에 앉으면 아이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며 수다 떠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두워지면 입시를 외면한 듯 보이는 청소년들이 소곤거리거나 큰 소리로 일감 벌이지만, 그들에게 그만한 공간도 제공하지 못하면 어디 동네라 할 수 있겠나.


2년 전 추석을 하루 앞두고 수도권을 몰아친 태풍 곤파스는 태풍에 대비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아파트 주민들을 괴롭혔다. 단지마다 수십 가구의 베란다 새시가 깨졌고 무수히 많은 나무들이 뿌리를 드러내고 누웠다. 연수구가 특히 심했는데, 그건 매립한 소금 땅에 나무들의 뿌리가 깊지 않은 탓일지 모른다. 그날 어린이 놀이터에 넓은 그늘을 드리워주던 미루나무가 널브러졌다. 몇 달 전, 제주도 곶자왈에 가야 운 좋은 자에게 제 자태를 보여주는 삼광조가 앉은 나무였다. 한동안 방치하더니 그만 잘라내고 말았다. 숲을 떠나지 않는 아열대의 아름다운 새는 다시는 찾지 않을 게 틀림없어지고 말았다.


아름다운 새와 다음 세대의 아기와 엄마들, 그리고 노인과 청소년들이 이따금 찾아와 쉬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야말로 아파트에 태부족하다. 주차 공간이 모자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차를 세우지 못했다는 이 없었다. 어린이 놀이터를 없앤 자리에 고작 20여 대의 승용차가 더 주차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정도로 주차난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주차장을 아무리 넓혀도 자동차 수가 늘어난다면 소용없는 일인데, 굳이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야 했을까. 비록 구청에서 비용을 지원했다지만, 제 아이와 이웃의 아이들, 그리고 이웃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놀며 쉬던 녹지를 꼭 시커먼 아스팔트로 뒤덮어야 했을까.


아이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아이들을 선행학습에 몰아넣지 않아야 한다는 거, 웬만한 부모들은 동의한다. 국회에서 선행학습 통제하는 법을 제정하려고 벼를 정도로 그 부작용은 심각하다. 많은 학자들은 말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상상력을 키울 틈도 없이 학습에 매달리게 하지 않으려면 밖으로 나가 뛰어놀게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놀이터마저 없는 동네에서, 학원가지 않을 아이들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 컴퓨터게임이어야 하나.


     주차장이 모자란다는 민원을 주차장 없애는 대응으로 풀어낸 유럽의 도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숲과 자전거가 대안이었다는데, 우리는 등 뒤에 자동차가 없다면 마음이 편하다. 사람은 녹지에서 여유를 찾는다. 비로소 웃으며 이웃을 마주할 수 있다. 아이들과 이웃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존 주차장을 녹지로 바꾸지 못할망정 알량한 놀이터마저 없애다니. 어른의 횡포에 고개를 차마 못 들겠다. (요즘세상, 2012.7.22)

너무동감합니다
서울은 도시가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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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딤돌 2009. 9. 19. 16:30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들은 한결같이 넓은 공원을 자랑한다. 도심 한가운데 몇 시간을 걸어야 끝이 나오는 숲을 조성하는가 하면 동네 어귀에도 푸른 녹지를 펼친다. 낡은 건물을 헐어낸 자리에 더 크고 화려한 건물을 올리기보다 나무를 심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새로운 주택단지를 만들 때에도 녹지부터 확보한 뒤에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낮은 건물을 배치한다. 그 결과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주말을 보내는 주민이 전에 없이 늘었다고 한다. 주변에 녹색의 자연이 충만해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들은 머물러 있으려 한다는 것이다. 도시생태학자들은 나무로 울창한 녹지가 도시 면적의 30퍼센트보다 낮으면 시민들은 자연을 찾아 멀리 나가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도시의 녹지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쏟아진 뒤 낮은 곳으로 거세게 흐르는 빗물을 완충한다. 그를 위해 넓은 호수를 녹지 안에 만들어 물고기를 풀어놓자 도시는 새들이 날아드는 생태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런 녹지는 찾아오는 시민에게 자연스런 휴식공간을, 학생들에게 교육장소를 제공한다. 어려서부터 호수를 품고 있는 녹지에서 뛰어놓았던 시민들은 도시 속에서 고향을 느끼니 상급학교 진학이나 취직을 위해 잠시 떠나더라도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귀소본능을 가진 동물에게 아주 자연스런 현상일 테지. 유서 깊은 도시일수록 도시의 완성을 녹지에서 찾는다. 역사 유물도 자랑스럽지만 그건 조상이 물려준 거다. 오늘은 물론,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 후손도 자신의 삶에 뿌리가 내리는 도시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도시의 진면목을 녹지에서 찾아야한다고 그들은 믿기 때문이리라.

 

유럽 도시도 강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도심 공원의 호수와 이어지는 강은 주변에 주말농장을 펼쳐놓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로 ‘작은 정원’으로 해석할 수 있는 독일의 ‘클라인가르텐’은 지방정부에서 중산층 시민에게 텃밭이나 정원으로 장기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임대해주는 땅을 말한다. 주말을 맞은 가족이 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는 휴식 공간이거나 농작물을 재배하는 텃밭이 되는 클라인가르텐은 평상시에는 도시의 열기를 식히는 녹지가 되고 유사시에는 시민들의 소중한 식량 공급기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100평방미터 면적에서 재배하는 채소는 가족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짬짜미 제공할 뿐 아니라 수확의 기쁨과 더불어 가족의 유대를 돈독하게 한다.

 

이름은 다르지만 독일의 클라인가르텐과 같은 시민의 텃밭은 유럽 대부분 국가의 도시마다 있고 미국과 일본의 도시들에도 흔하다. 지방정부가 시민에게 분양하는 점도 거의 같다. 종교단체나 환경단체에서 근교의 자투리농지를 부정기적으로 임대해 운영하는 텃밭이 우리나라에도 더러 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고, 지방정부에서 제공하는 텃밭은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도심의 상가는 물론이고 주거 공간인 아파트단지도 빌딩이다. 삭막한 도시에 종일 생활하는 시민들은 주말이면 녹지를 찾아 멀리 떠나고 싶다. 어떤 이는 자동차로 서너 시간 이상 달려야 도달하는 시골에 밭을 마련해 주말이면 집을 비운다. 자연과 고향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깊기 때문일 텐데, 아이들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잠시라도 도시를 떠나지 못한 아이들은 고향의 정취라는 걸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단일 품종의 농작물을 획일적으로 심는 기업형 농장이라면 고향의 정서와 무관할 것이다. 집이나 마을에서 가족과 이웃이 작은 밭을 함께 일궈 어느 정도 자급을 꾀할 수 있다면 모를까, 끊임없는 노동만이 강요된다면 비록 시골에 살아도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녹지를 찾아 떠나고 싶을 것 같다. 미국 자본이 지배하는 중남미의 바나나나 파인애플과 같은 대규모 플랜트 농업단지들이 그럴 테고, 들판 가득 담배와 사탕수수를 심었던 쿠바가 한때 그랬을 거다. 미국 자본이 물러간 뒤에도 쿠바는 한동안 담배와 사탕수수를 외국에 팔아 벌어들이는 외화로 대부분의 농작물을 수입했다. 그때 도시나 농촌이나, 시민들의 삶은 땅에 뿌리내릴 수 없었다.

 

담배와 사탕수수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굶주림을 심각하게 경험한 쿠바는 새로운 교훈을 얻었다. 식량은 제 지역에서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거였고, 그를 계기로 정부는 시민에게 텃밭을 적극 장려하는데 앞장섰다. 가족과 먹는 농산물을 스스로 재배하는 쿠바인의 텃밭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유기농업을 채택했고 요즘은 자급자족의 수준에 달할 정도라고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들녘, 2004)의 저자 요시다 타로는 증언한다. 하지만 작은 텃밭에서 제가 먹을 모든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더 생산한 농작물은 장터에 내놓고 필요한 걸 교환하는 시장이 필요하게 된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는 텃밭에서 생산한 농작물을 교환하는 장터가 곳곳에 열리고, 그 시장을 오고가는 시민들의 구릿빛 얼굴에서 여유를 느끼게 한다. 수출하는 담배와 사탕수수의 양은 크게 줄었어도 시민들의 몸과 마음은 전에 없이 건강하다.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농토를 구해 주말마다 막히는 길을 헤치며 다녀오는 시민에게 고향이 전해주는 따뜻한 정서가 함양될까. 수확을 맞을 때 가슴 벅찬 기쁨을 만끽하겠지만 일찌감치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제 부모와 다를 것이다. 주말마다 부모와 농사짓던 기억은 중학생 전후부터 사라질 테니 나들이 다녔던 추억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고향이 필요하다. 뿌리내릴 땅이 있어야 정서가 메마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도시의 아이들에게 고향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역시 땅이다. 도시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아파트를 전전해온 내일의 시민에게 고향에 대한 인식을 남겨주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텃밭을 마련해서 입시 준비와 관계없이 함께 땅을 일구는 게 좋을 것 같다. 제 땀방울로 씨를 뿌려 수확한 농작물을 조리해 먹는 기억은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친하게 지내는 이웃과 함께 그 텃밭을 일군다면 더욱 좋을 텐데, 아쉽게도 우리에게 그런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텃밭의 수나 면적도 충분하지 않지만 폐쇄된 도시에서 이웃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어렵다. 아직까지 생산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는 시민도 드문 게 현실이다. 유권자의 관심사에 민감한 지방정부가 텃밭 마련에 소극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시간이 없이 텃밭에서 농사지을 엄두를 낼 수 없는 시민이라도 마음에 고향을 품는 게 낫다. 그러자면 최소한 고향이라 여길 수 있는 지역에서 생산한 농작물을 가족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땅에 뿌리 내린 농부의 믿을 수 있는 농작물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산자의 사진과 인적 사항을 전시해놓는 식품매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을 전혀 모르는 소비자가 농작물을 구입하며 고향을 느끼기는 무언가 부족하다. 동네의 대형 식품매장에 쌓인 농산물과 가공식품은 대개 출처가 불분명하다. 당장 위험한 건 아니겠지만 누가 어떻게 생산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니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강력한 제도를 만든 국가가 행정력으로 안전을 보장한다지만, 농약이나 첨가물로 인한 문제들이 잊을만하면 터지는 현실은 소비자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지 못한다. 수입 농산물이나 가공식품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누가 어떻게 재배하고 가공했는지 알 수 있는 농산물과 가공식품이라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생산자와 막역하게 가깝다면 더욱 좋을 것인데 시골의 부모나 친지가 보내는 농산물을 받을 처지가 못 되는 대부분의 도시 소비자들은 생산자와 친밀해질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웃는 자에 침 뱉지 않는다고, 자주 만나 친해진 생산자에게 농산물을 구입하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 허물없이 지날 생산자를 소개해주는 단체나 사람이 없을까. 농번기를 만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가족과 찾아가 흔쾌히 도울 수 있을 만큼 가까운 농촌이라면 금상첨화일 텐데. 농작물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받을 때마다 고향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을 텐데. 생활협동조합이 그 대안을 기꺼이 안내한다. (사이언스올, 2009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