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1. 3. 2. 23:48

음식, 도시의 운명을 가르다, 캐롤린 스틸 지음, 이애리 옮김, 예지, 2010.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생활협동조합에도 돼지고기의 공급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유기적으로 사육하는 만큼 질병에 강하고 장기 계약으로 공급되므로 시장 상황에 영향을 덜 받지만 이번 구제역 사태 앞에 예외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단지 발생농장과 가깝다는 이유로 유기농이든 공장식이든 안전반경 이내 축사의 돼지들을 모조리 살처분한 결과가 생활협동조합에 나타난 것이리라.

 

생산자와 소비자로 구별되는 생활협동조합의 조합원은 농촌과 도시에 공존하지만 매장은 대부분 도시에 있다. 땅과 내일의 생명을 살리는 생활협동조합이라고 해도 생산자가 소비자를 찾아가지 소비자가 생산자를 방문하지 않는다. 왕이 아니라 땅을 살리며 농사짓느라 힘겨운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이웃이라고 말하는 도시의 조합원들이지만 그들 역시 편리함을 쫓는 소비자인지라 도시로 가져온 농작물이 아니라면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고기든 채소든 생산자 조합원은 도시로 내다 파는 걸 전제로 농사를 지을 수밖에.

 

도시는 태생적으로 생산과 거의 무관하다. 도시의 빈터에서 농사를 짓는 이,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경작지에서 텃밭을 일구는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재배하는 농산물은 도시에서 소비되는 음식의 양에 비해 보잘것없다. 도시에 30층 규모의 농사용 빌딩을 곳곳에 지어 채소를 재배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기농이든 아니든, 도시는 그저 농촌에서 농산물을 가져와야 먹고 살 수 있다. 아니 농산물을 도시로 가져가기 위해 농촌은 사생결단 노력한다. 그래서 밭 한 뙈기 보이지 않는 도시는 언제나 농촌보다 배부르다. 생활협동조합도 예외가 아닌데, 구제역은 돼지고기 공급의 한계를 잠시 보여주었다.

 

도시에 대한 이야기하는 책은 참 많다. 도시의 역사와 문화, 인문과 지리, 법과 경제, 그밖에도 다양한 주제로 도시를 바라보며 해석하는 책만큼 연구자도 많을 것이다. 음식에 관한 책도 제법 많다. 넘치는 가공식품에 의한 폐해가 드러나고 수입농산물의 문제가 표면화되면서 그 방면을 주목하는 책들이 책방의 서가를 넓게 차지한다. 한데 정작 도시에서 막대하게 소비하거나 버리는 음식을 주제로 하여 도시와 연관해 조명하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주거, 전기, 가스, 석유, 통신, 상하수도, 교육, 의료, 치안들보다 음식은 도시에서 관심의 대상에서 멀기 때문일까. 버젓한 식당이 도시에 많지만 음식의 흐름은 감지되지 않는다.

 

건축디자인을 전공한 캐롤린 스틸은 문득 음식이 도시의 운명을 좌우하는 열쇠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스쳤고, 무려 7년 동안 조사와 연구에 들어갔다. 런던을 주요 무대로 음식과 도시의 관계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음식, 도시의 운명을 가르다를 썼다. 런던만큼 큰 도시가 배고프지 않으려면 하루 평균 3천만 명이 충분히 먹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 반입, 판매, 요리된 뒤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그는 땅과 바다에서 도시로, 다시 시장과 슈퍼마켓을 거쳐 주방과 식탁으로, 이후 쓰레기장을 지나 다시 땅과 바다로 돌아가는 음식의 긴 여정을 따라간다. 도시의 중요한 축인 음식에 관한 논쟁의 뿌리를 탐구한다. 음식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강력하게 형성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건물, 공원, 아스팔트와 그 위를 누비는 자동차가 현란한 도시는 사실 음식이 없으면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도시에서 음식에 들어가는 농산물은 통 보이지 않는다. 캐롤린 스틸은 농산물이 재배되는 땅, 그 농산물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도시, 조리된 음식이나 조리 이전의 농작물을 판매하는 시장과 슈퍼마켓, 음식이 놓이는 식탁, 그리고 음식 쓰레기까지 차례로 천착한다. 마지막으로 음식이 도시의 식탐을 지속가능하게 견딜 수 있는지 걱정하고 그 대안을 생각해본다. 도시에서 음식을 요리하지만 어쩌면 음식이 도시를 요리하는 건지 사실 모르는데, 음식을 주제로 도시를 건축디자이너는 어떻게 탐구했을까.

 

런던에서 소비되는 음식을 위해 런던의 100배 이상 넓은 농토가 필요한데, 대략 영국의 모든 농지를 합친 넓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런던 이외 도시의 영국 시민들은 어떤 농작물을 어디에서 어떻게 가져와 먹는 걸까. 끝없이 펼쳐지는 콩과 옥수수 밭, 우주에서 보이는 비닐하우스는 결국 걸신들린 도시를 위한 땅인데 도시가 확장되면 될수록 더 많은 땅을 동원해야 하겠지. 한데 지금 화학농약에 찌든 그 땅은 숱한 생물이 어우러진 숲이었고 강이었으며 산이었다. 드넓은 생물공간이 농지로 사라지자 도시는 구제역과 광우병에 몸살을 앓았고, 이제 도시의 식습관에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

 

19세기만 해도 식량을 어디에서 어떻게 공급할 것인가에 따라 도시의 위치와 규모가 결정되었는데 일사분란하면서도 막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물류 체계가 뒷받침되면서 도시는 규모를 거듭 늘려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빵과 사과가 기계로 신속하게 생산할 수 있게 획일화되었고 도시로 향하는 물류에 적합하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처리되었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닭과 젖소가 쏟아내는 계란과 우유는 상품명과 관계없이 거의 균질한데, 대량으로 취급되는 과정에서 예전에 없던 병균에 오염되자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가까운 시골에서 우유 배달되던 시기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멸종된 바나나 품종에 이어 가축도 위기에 처한 건 순전히 도시의 거대한 먹성 때문이다.

 

영국은 현재 1년에 2천 개의 식품점이 문을 닫는다고 한다. 월마트 때문이다. 어디 월마트만의 탓이겠는가. 우리나라에 진출한 테스코도 한몫할 텐데, 우리도 그 예외일 수 없다. 아무튼 2050년이면 영국에서 동네 식품점은 구경도 할 수 없을 거라는데, 20년 전에 생소했던 초대형 슈퍼마켓이 동네의 달콤한 냄새와 시장의 왁자지껄한 소음을 없앴고 광장을 죽게 만들었다. 이제 도시가 슈퍼마켓을 허락하는 게 아니다. 슈퍼마켓이 도시를 휘두른다. 무궁무진한 식품을 판매하는 슈퍼마켓은 축구장 서너 개를 삼키고도 남지만 그 식품의 원료인 농산물의 종류는 단조롭다. 우리의 삶까지 단조롭게 길들고 만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주방은 식구와 손님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었다. 찌꺼기가 넘치고 피가 튀는 주방에서 음식이 어떻게 조리되는지 식탁에 앉은 이는 알아차리기 어려웠지만 즉석식품이 보편화된 지금, 주방 자체가 의미를 잃어간다. 주방이 거실과 맞닿았어도 요리를 하지 않는다면 먹는 이는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자신의 몸에 무엇이 들어가는지, 식습관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도 모른다. 친구를 초대할 일도 없고 식사예절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이유를 찾지 못한다. 만우절에 누군가 스파게티를 나무에서 딴다고 능청을 떨어도 사람들은 그렇겠지 하고 믿어버린다고 캐롤린 스팅은 냉소한다.

 

평화(平和)는 공평하게 밥을 나누는 행위라는데, 친구를 뜻하는 companion은 함께 빵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라틴어 어원을 가진다고 한다. 동서양이 개념이 비슷해 반가운데, 여기나 거기나 제사와 연회는 그 연장선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맞벌이하는 핵가족에서 식구나 친지가 식탁에 마주앉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식탁 앞에 앉아도 헤드폰을 낀 아이는 부모형제와 이야기하길 거리낄 따름이라고 캐롤린 스팅은 꼬집는다. 레스토랑은 사교보다 손님 개개인의 미각에 영합하다 이제 식탁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패스트푸드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기계화된 음식에 도시는 그만 돌이킬 수 없게 뚱뚱해지고 말았다.

 

도시 주변에 농촌이 잘 어우러졌을 때, 도시의 배설물은 농촌에서 요긴한 비료였지만 확장되면서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수세식변기가 보급되자 급기야 배설물은 거리로 흘러넘쳤다. 거대한 하수처리시설에 도시 곳곳을 훑는 하수관망이 연결되기 전까지 도시는 수인성전염병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하수처리시설에서 배출하는 슬러지는 어떻게 처리할까. 영국은 북해에 마구 버린 모양인데 삼면이 바다인 우린 공해상에 버리며 손을 털었다. 우리나라에서 버리는 한해 음식쓰레기가 13조 원 어치에 달한다던데, 가정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대부분 가공과정에서 쓰레기를 양산하는 식품업체가 크게 책임질 일이다. 건드리지 않은 빵을 단지 유통기간 지났다며 이튿날 한꺼번에 버리기도 하는데, 버린 음식만 찾아먹는 프리건도 도시에 공존한다. 도시와 농촌이 예전처럼 음식으로 순환되는 일은 요원하기만 한가.

 

음식, 도시의 운명을 가르다의 저자는 풍경을 먹자!”고 제안한다. 결국 음식이 땅과 순환되는 도시로 가꾸어가자는 건데, 지금과 같은 도시 규모로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이의 지적처럼 제철 제 고장 농산물을 직접 생산해 직접 요리해서 먹는 일이 최선인데, 그럴 땅을 도시 가까이에서 찾기 어렵다. 하지만 노력하기에 따라 생산 가능한 땅을 조금씩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텃밭이 그 예의 하나가 될 텐데, 캐롤린 스팅은 개발된 주택 바로 옆에서 농산물을 구할 수 있는 중국의 신도시를 예로 들었다. 하지만 중국의 그 도시는 사실 규모는 무시할 만큼 작다. 기존 도시는 어떻게 하나. 육식을 대폭 줄이자는 제안도 한다. 구제역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다 의미 있는 제안이긴 하지만 포만감에 젖은 도시가 먼저 반성하지 않는다면 공염불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제 도시의 건축보다 음식에 관심을 쏟는 캐롤린 스팅이 음식이라는 주제로 도시를 7년 동안 치밀하게 들여다본 음식, 도시의 운명을 가르다는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 뿐 아니라 교훈과 책임감을 전해준다. 국제 식량위기가 점쳐지는 요즘 자급률이 26퍼센트에 불과한 우리에게 무척 반갑고 고마운 책임에 틀림없다. (사이언스타임즈, 20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