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1. 7. 16. 15:45

 

늑대는 사람이 보는 데서 도망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 그렇다고 다짜고짜 덤벼든다는 건 아니다. 사람 눈에 띄었다 싶으면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어슬렁거리다, 눈길에서 벗어났다 싶을 때 냅다 달아난다는 거다. 하지만 속담에 아무리 동물의 습성이 담겼더라도 그렇지, 개처럼 냄새를 놓치지 않는 늑대가 사람을 좋아할 리 없는데, 마주칠 때 어슬렁거린다는 겐가. 여간해서 산록을 벗어나지 않는 늑대는 참을 수 없이 배고프면 위험을 무릅쓰고 송아지와 돼지가 있는 농가를 어슬렁거릴 테고, 그 모습을 보고 쇠스랑을 챙기려는 산골의 농부는 마음이 초조했겠지. 그래서 그런 속담이 나오지 않았을까.

 

5월 초순이 지났을 때일 게다. 가지의 새순이 제법 펼쳐지고 파릇파릇한 들판의 새싹이 자라 올랐을 때, 고기 달라고 보채는 너덧 마리의 새끼들에게 젖만 먹일 수 없는 늑대는 먹잇감을 찾아 나서야 했다. 자연의 모든 동물들이 그렇듯, 늑대도 먹일 게 충분할 때 새끼를 낳았다. 막 태어난 송아지와 어린 돼지가 외양간에 있다는 걸 진작 알고 있는 늑대는 아까부터 숨죽여 기다렸다. 들판에 종달새 울면 농부는 쟁기 들고 나갈 터. 천방지축 뛰는 송아지는 파릇파릇한 풀을 뜯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할 계절이 아닌가. 며칠 동안 멧돼지와 노루 사냥에 실패한 늑대는 토끼만으로 새끼들을 배불릴 수 없으니 맘을 모질게 먹었다. 느닷없이 달려들어, 아직 코뚜레를 채우지 않은 송아지가 혼비백산 외양간을 뛰쳐나가면 물고 가려고.

 

사람만 없으면 산골이든 들판이든 늑대는 거칠 게 거의 없었다. 호랑이와 표범은 산기슭을 벗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혼자 사냥하니, 가족이 똘똘 뭉치는 늑대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늑대는 아시아와 유럽의 농촌 지역을 비롯해 양과 염소를 방목하는 몽골과 중앙아시아의 초원을 들고 날 수 있었다. 그뿐인가. 봄이면 순록 무리가 막 태어난 새끼를 데리고 새로 돋은 이끼를 찾아 이동하는 툰드라는 낙원이었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던 시절에 같은 종류였던 개가 어느새 방해하기 시작했다. 사냥감에 다가가기만 해도 야속하게 짖어대는 게 아닌가.

 

수렵채취 시절, 사람보다 먼저 세상에 나와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 일대를 누볐던 늑대는 사냥감을 놓고 사람과 경쟁했을 터. 그러던 중 어떤 이는 눈도 뜨지 않은 늑대 새끼들을 발견했고, 동글동글하고 포동포동한 녀석들을 은거지에서 고기를 먹이며 재미삼아 키웠을지 모른다. 그러자 사회성이 높은 늑대가 충성스러워지더니 사냥감을 몰아주는 게 아닌가. 그렇게 12,000년 전에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늑대는 그 무렵 농사를 시작한 사람에게 철저히 길들여져 오늘날 400여 품종의 개로 다채로워졌지만, 자존심을 잃지 않은 늑대는 자연에 남아 거칠 게 없이 포효했다. 사람이 총을 손에 쥐기 전까지.

 

늑대가 음험하다고? 그래서 엉큼한 남성을 늑대라 한다고? 겉으로 부드럽고 솔질한 체하지만 속이 엉큼하고 흉악한 이를 늑대 같다!”고 여성들을 조심스러워하는데, 늑대가 그런 뜻을 알아챈다면 얼마나 어이없어 할까. 사냥감 가까이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눈치 채지 못할 때 와락 덤벼드는 거야 육식동물들이 마찬가진데, 여성들은 왜 늑대에게 음험하다는 혐의를 씌우는 겐가. 밥 앉힌 가마솥에 물이 넘치자 서둘러 부엌으로 간 사이 툇마루에 내려놓은 젖먹이를 소리도 없이 물고 가는 일이 산골마을에서 벌어지면서 아낙네 사이에서 퍼진 낭설일지 모르는데, “늑대는 늑대끼리 논다는 속담도 있다. 늑대가 떼로 움직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음험한 사람은 그들끼리 논다는 뜻이다.

 

흔히 늑대보다 크고 들판에서 떼로 움직이면 이리, 산에서 느닷없이 맞닥뜨리면 승냥이라 말한다. 가족과 더불어 사냥하는 늑대가 느닷없이 다가와 송아지를 물어가는 모습에 놀란 머슴이 늑대보다 큰 이리 떼였다고 둘러대거나, 나무하고 산을 내려오다 늑대와 맞닥뜨린 사내가 지게를 내팽개치며 줄행랑치고 승냥이 만났다는 핑계를 댔겠지만, 모두 늑대라고 보면 된다. 사실 그때 늑대가 사람보다 더 놀랐을지 모르는데, 요사이 우리 산록에서 늑대는 통 보이지 않는다. 1960년대 경상북도 청송 일원에서 여러 마리 생포해 창경원에 전시했던 늑대가 1996년 모두 죽은 뒤 아예 사라졌다는데, 반성하려는 건가. 송아리 몇 마리 잃었다고 끝까지 쫓아가서 총을 마구 쏘아댈 땐 언제고, 이젠 복원하겠다고 나선다.

 

20041, 서울대공원의 늑대 한 마리가 청계산으로 탈출했다. 복원하려고 광릉내의 수목원으로 옮기던 중 나무우리를 뜯고 호기 있게 탈출한 늑대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해 탈진한 모습으로 36시간 만에 잡혔는데, 중국 내몽고에서 들여와 7년 동안 울타리 안에서 자란 수컷이었다. 이후 복원되었다는 수목원의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는데, 작년 6,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 희소식이 들렸다. 2008년 러시아 볼가강 근처에서 7마리를 도입한 지 2년 만에 새끼 6마리를 얻었다는 거다. 동물원 측은 자연과 비슷하게 꾸민 4000제곱킬로미터의 사육장에서 키우다, 개체수가 늘어나면 자연에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는데, 울타리 안에서 늘어난 늑대 후예들은 그 약속을 반길 것 같지 않다. 던져주는 먹이에 이미 길들어져 사냥도 할 줄 모르지만, 자연에 잡을만한 사냥감이 없지 않은가. 하는 수없이 멋모르는 어린 등산객을 다치게 한다면? 장차 일어날 소동을 어떻게 감당할 텐가.

 

20세기 초 미국의 산림감시원이던 젊은 알도 레오폴드는 새끼들과 뛰어노는 늑대 무리를 우연히 발견하곤 늘 그래왔듯 총알이 다 떨어지도록 쏘아 죽였다. 이윽고 의기양양 다가갔더니, 이런! 맹렬했던 초록빛 불꽃이 서서히 꺼지는 게 아닌가. 그 일을 계기로 늑대와 산이 갖는 관계를 절절하게 깨달은 그는 늑대가 줄어야 사슴 사냥꾼의 천국이 온다는 믿음을 버리고 대지의 윤리를 제창하는 자연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에 지정된 미국 옐로스톤에서 관광객 운집을 위해 사슴 잡아먹는 늑대를 모조리 없앤 적 있다. 그러자 놀랍게 늘어난 사슴들이 풀을 거침없이 먹이치우더니 속절없이 죽어가는 게 아닌가. 지금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다른 곳의 늑대를 데려와 사슴의 수를 조절하고 있다고 한다.

 

캐나다 툰드라 지대에서 순록을 해치는 늑대를 효과적으로 줄이기 위해 사전 조사를 떠난 어떤 생태학자는 늑대는 순록이 워낙 빠른 까닭에 쉽사리 사냥하지 못한다는 걸 파악했다. 늙고 병들고 다쳤거나 보호해줄 어미를 잃은 개체를 솎아낼 따름인 늑대는 오히려 순록의 안정된 서식을 돕는 거였다. 정작 순록을 공연히 해치는 자는 그저 거실을 장식할 머리뼈와 뿔을 위해 총을 쏘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한 생태학자는 제 새끼들을 먹이려고 늑대들은 주로 들쥐를 사냥하는 걸 관찰했다는데, 우리나라 산록에 들쥐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은 세계적으로 툰드라 이외 지역에서 늑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총만 위협한 게 아니다. 사람들의 집요한 개발로 서식처를 송두리째 빼앗긴 늑대에게 툰드라의 마지막 터전마저 위축되기만 한다.

 

늑대는 보름달이 뜬 날 울부짖던가. 늑대가 듣자니 또한 터무니없을 것이다. 보름달이 뜨면 경찰서와 병원바다 늘어나는 폭력과 환자로 골치 아프다는 전문가의 주장은 늑대와 관계가 없는 일이건만, 보름달이 뜰 때마다 음험해지는 이는 늑대를 모함한다. 예나 지금이나 왕성하게 자라는 제 새끼들을 산록에서 기르는 자연의 늑대는 배가 몹시 고플 때가 아니라면 인적 있는 곳에 얼씬거리길 본능적으로 혐오한다. 자존심을 잃지 않은 늑대는 사람이 던져주는 풍성하지만 차가운 고기에 길들여지느니 사냥감이 줄어드는 자연에서 포호하고 싶을 게 틀림없다. 늑대가 숲을 뒤흔들며 포효했을 때, 언제나 산은 푸르렀고 사람의 마음은 맑았다. (굴렁쇠, 한국타이어 발행 환경여행 전문지, 87호, 2011년 여름호)

 
 
 

서평·추억

디딤돌 2010. 2. 15. 12:17

《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돌베개, 2003.

 

텔레비전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한 현상일 테지만, 언제는 ‘초식남이라더니 요즘은 ‘짐승남’이 아이콘이란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지만 이성이나 연애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잘 생긴 남자가 초식남이라면 반항적 기질과 음험한 인상으로 이성에게 폭력적으로 다가가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고야 마는 근육질의 남성을 짐승남이라 말한다고 흔히 말한다. 그렇다면 짐승남은 늑대와 같은 사내를 말하는 건가.

 

보름달이 뜨면 아리따운 각시로 변신했던 구미호가 동북아시아에서 본색을 드러내는데, 유럽에는 쉽게 분노하며 폭력적으로 바뀌는 ‘늑대인간’이 출현하는 모양이다.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의 포스터는 둥근달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늑대를 그려놓고 관람객의 시선을 자극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늑대는 잔혹한 동물로 묘사된다. 늑대인간은 짐승남처럼 자신의 먹잇감에 음흉하게 달려드는 인격체다. 숨었다 느닷없이 공격하는 사자나 호랑이와 달리 지칠 때까지 쫓아가 토끼나 순록의 목덜미 깊숙이 송곳니로 반드시 물어뜯는 늑대가 그렇듯이.

 

대개의 전설이나 민화가 유럽의 ‘아기돼지 삼형제’처럼 늑대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은데, 우리도 그리 좋을 리 없다. 울부짖는 소리 뿐 아니라 소문이 흉흉하지 않던가. 어미가 떠주는 밥을 꿀떡 넘기며 툇마루를 기던 아기가 잠깐 부엌에 드는 사이 늑대에 물려갔다느니 달거리 뒤처리를 위해 야심한 밤에 슬그머니 밖으로 나온 처녀의 목덜미를 물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산간마을에서 끊이지 않았다. 실제 그런 사고를 목격한 사람을 만난 적은 없지만 소문만으로 늑대는 경원해야 할 대상의 동물임에 틀림없게 된다.

 

팔리 모왓. 나이가 지긋한 지금은 상처받은 자연과 그 자연 속에서 사는 이의 근심을 독자에게 감성적 언어로 알려주려 펜을 드는 그는 캐나다의 패기 있는 생태학자였다. 젊은 시절 팔리 모왓은 늑대를 연구하기 위해 툰드라 지역을 답사한 적 있다. 늑대의 생태계를 밝혀내려는 순수한 동기가 아니었다. 관광객들은 순록과 그들의 장엄한 이동을 보고 싶어 하는데, 아니 사냥하려고 환장을 하는데, 늑대라는 놈들이 순록을 잡아먹어 그 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늑대를 제거해야 할 텐데, 무턱대고 잡아 없앨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당국이 파견한 애송이였던 거다.

 

음흉하고 잔혹한 늑대의 공격을 대비하는 장비, 총은 물론 덫에 수류탄까지 산더미처럼 챙겨들고 찾아간 북극권의 도시. 거기엔 기묘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늑대가 해마다 수백의 정착민들을 잡아먹지만 거참 기괴하게 임신한 에스키모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둥, 미국부대를 따라 여성들이 들어오자 늑대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는 둥, 늑대 한 마리가 순록 수천마리를 단지 피에 굶주려 죽여 댄다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실제 이상스러운 건 산더미 같은 순록의 뼈들이 마을에서 떨어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이었다.

 

드디어 발견한 늑대 굴. 그 주변에서 가족과 뒤엉켜 노는 녀석들. 총알을 장전한 상태에서 잔뜩 긴장했지만 늑대는 태연했다. 남의 집 손님 바라보듯 팔리 모왓의 텐트 앞도 유유자적 지나치며 슬쩍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팔리 모왓은 늑대에게 자신의 영역을 선언하기로 했다. 배뇨감이 심해질 때까지 차를 잔뜩 마신 뒤 늑대들이 영역을 표시하듯 텐트 주변에 조금씩 소변을 본 것이다. 그러자 사냥을 다녀온 뒤 텐트를 스쳐 천천히 자신의 굴로 들어가려던 늑대들이 잠시 멈칫했다. 이어 지긋하고 사려 깊게 텐트를 주시하더니 결단력 있는 태도로 돌아서며 선뜻 제 영역을 양보하는 게 아닌가.

 

자라나는 늑대는 어미에게 사냥술을 배워야 한다. 아무리 어린 늑대라 해도 송곳니가 날카로운데 제 어미를 상대로 사냥술을 열심히 배우는 건지, 몸을 부딪치며 노는 건지, 집요하게 덤벼드는 새끼들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데, 한 수컷이 그들의 응석과 살벌한 장난을 받아주면서 성가셔하는 어미를 구해내는 게 아닌가. 팔리 모왓은 그 늑대에게 이름을 붙인다. 친절한 ‘앨버트 아저씨’라고. 번호를 붙여 설명해야 할 자연 연구자가 그만 연구 대상에게 감성을 느낀 것이다. 적의를 느끼지 않은 늑대가 처음 만난 인간에 보여준 신뢰가 그 발판이었다.

 

늑대는 순록을 잡아먹던가. 그 의구심은 곧 풀렸다. 아무리 빠른 늑대도 순록을 따라 잡지 못했다. 수십만에서 수백만 마리 이상으로 이동하는 순록을 따라가는 늑대는 가끔 무리를 헤집고 들어가지만 그때 뿐. 늑대가 다가오는 걸 보고 무심해하던 순록들은 가까이 와야 얼른 달아날 따름이었다. 순록 떼 주변을 서성이는 늑대들은 다만 솎아내고 있었던 셈이었다. 디시 말해, 늙거나 병들거나 다친 개체, 어미를 잃은 어린 개체들을 솎아내며 순록 집단의 건강을 유지하도록 기여하는 것이었다. 어쩌다 잡는 순록은 늑대의 주식일 수 없었다. 늑대는 들쥐를 주로 잡아먹었고, 그걸 본 팔리 모왓도 늑대를 잡아 털을 벗기고 내장을 발라낸 다음 프라이팬에 튀겨 먹어 보았는데, 늑대는 산채로 꿀떡 삼키는 게 아닌가. 눈을 딱 감고 흉내내보기도 했다.

 

북미 대륙에 흩어져 순록과 공생하던 늑대들은 왜 사라진 것일까. 순록이 줄어서? 아니었다. 순전히 순록을 사냥하고 싶은 인간의 소행이었다. 순록을 없앤다는 편견을 앞세우면서. 마을에서 가까울수록 순록의 뼈가 많았던 게 그 증거였다. 쿠바에 있는 헤밍웨이 집은 시방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그 집의 서재와 거실에는 순록을 비롯한 온갖 사슴의 머리가 장식돼 있다. 사냥을 유난히 좋아했다는 헤밍웨이가 팔리 모왓이 찾았던 북극권으로 여행을 다녀왔는지 알 수 없는데, 확실한 것은 늑대는 순록의 머리를 그렇게 온전하게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순록 사냥을 위해 북극권을 찾은 이들은 인간에게 감히 덤비지 않는 늑대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인 미국의 옐로스톤에는 현재 늑대와 사슴이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한 때 국립공원 당국은 관광객을 놀라게 할 뿐 아니라 관광자원인 사슴을 없애는 늑대를 제거하기 위해 전문엽사를 고용한 적 있었다. 그래서 늑대가 일거에 사라지자 과연 사슴이 늘어났는데, 이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주변 식물들을 몽땅 먹어치우더니 급기야 한꺼번에 굶주려 죽어가는 게 아닌가. 뒤늦은 반성으로 다른 지역에서 늑대를 들여왔고 한참 뒤 평형을 되찾았다는데, 그런 교훈은 일반적이지 않다.

 

‘생태윤리’를 전파한 미국의 자연주의학자 알도 레오폴드가 젊은 신림보호관이었을 때, 그저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서 제 새끼들과 사냥 놀이하던 늑대 무리에게 소진될 때까지 총알을 퍼부은 적 있다. 이윽고 늑대의 사체로 다가간 그는 득의의 표정으로 늑대를 바라보았는데 순간 자신의 한 짓을 크게 후회하게 된다. 자연의 숨결이 깃든 파란 눈이 꺼져가는 게 아닌가. 충격을 받은 그는 자신에게 자연에 총질을 할 자격이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닫고 평생 자연주의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5년 전 즈음인가. 서울대공원에서 광릉수목원으로 복원을 위한 씨받이용으로 옮겨지던 늑대 수컷 한 마리가 나무우리를 뜯고 청계산으로 달아난 적 있다. 사육사가 던져주는 먹이만 먹으며 길들여진 늑대였건만 뉴스를 본 시민들은 불안에 떨며 청계산에 얼씬도 하지 않았고, 모처럼 파란 하늘 아래 자유를 만끽했던 늑대는 수백 마리의 개들과 엽사의 포위망이 좁혀지는 가운데 수면제 들어간 먹이를 외면하다 결국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마취총에 굴복하고 말았다.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이라면 늑대를 충분히 복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복원된 늑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지리산의 반달곰처럼 자연에 풀어줄 것인가. 유전적 다양성이 무척 한정돼 자연 방생되어도 집단이 유지되기 어렵을 거로 판단한다지만 늑대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는 시민들의 공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사람의 체취가 지배하는 우리나라에서 늑대 복원은 방생이 아니라 종 보전 차원에서 그쳐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복원에 앞서 우리들은 늑대에 대한 편견부터 고쳐야 하지 않을까. 팔리 모왓은 늑대는 늑대가 아니라고 우리에게 귀띔하는데. (사이언스타임즈, 2010년 2월 ?일)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5. 5. 2. 02:17
 

서울 시내에서 한 마리의 늑대가 파란 창공을 날았다. 그것도 아주 잠깐. 길든 짐승이므로 마음을 놓았던 사이, 허술한 나무우리를 뜯고 호기 있게 탈출했는데 이내 길을 잃었고, 추위와 허기에 지쳐 압박해 들어오는 마취총에 굴복했지만 그래도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뇌리에 남길 수 있었다. 서울대공원에서 광릉수목원으로 복원을 위한 씨받이로 옮겨지던 그 늑대는 동물원에서 지낼 후손들에게 파란 하늘과 우거진 숲의 기억을 전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탈출한 수컷과 달리 기자 카메라에 순응했던 암컷도 광릉수목원으로 함께 가던 중이었다. 덤벼둘던 짝의 꼬리를 물어뜯던 암컷은 제 우리를 뜯어내지 않았다. 왜 따라 나서지 않았을까. 관계가 소원했나. 사육사가 무표정하게 던져주는 차가운 먹이에 길들여진 처지에 나가봐야 별 수 없다는 걸 짐작한 것일까. 늑대 탈출 소식에 하얗게 질린 일부 주민들과 왁자지껄한 300여 몰이꾼과 짖어대는 개들을 용케 피하면서 수면제 들어간 쇠고기 30덩이를 외면하며 의연하게 돌아온 제 짝을 암컷은 어쩌면 대견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광복 이전에도 도처를 놀라게 했던 우리 늑대는 멸종되었을까. 1960년대 중반 경북 청송과 영주에서 포획 또는 생포되어 창경원에 전시되다 1996년 마지막 한 마리마저 죽은 후 결국 사라진 것인가. 일제의 조직적 포획으로 치명적으로 줄어든 우리 땅의 늑대는 인구 증가와 그로 인한 생태계 교란으로 이전부터 사실상 위축되고 있었다. 농경지로 하천부지와 구릉지가 잠식되고 난방과 취사용으로 산림이 황폐화되면서 서식지를 잃은 늑대는 먹이도 부족했다. 녹용과 고기를 노린 인간의 사냥으로 호랑이나 표범과 나눌 사슴이 희귀해진 탓이었다. 60년대 말 충북 수안보와 경북 문경에서 생포된 기록 이후 90년대 초 한 언론사의 추적으로 경남 함양에서 생존 가능성을 희망하기도 했지만, 기대하기 어둡다.


‘마지막 늑대’니 ‘늑대의 유혹’이니 하며 늑대를 음험한 남자로 희화한 영화가 죽을 쑤던 대박을 치던 계속 만들어지는 현상은 늑대에 대한 우리의 낭만적 시각을 반영한다. 장독대 뒤에 숨어 생리 뒤처리하러 나오는 처녀를 소리 없이 물어가던 시절은 이미 까마득하다. 디즈니 만화로 막내 아기돼지의 활약상이 어려서부터 주입된 세대는 성장한 이후 늑대가 온다는 소년의 외침에도 시큰둥하다. 정직한 사람이 제도적으로 손해보는 세상에서 거짓말은 일상이 아닌가. 늑대에 대한 낭만적 현상을 반영하였을까. 서울대공원 종 보전팀은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늑대의 복원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고 언론은 전한다.


비록 북미 산이지만 지난 4월 건강한 팀버늑대 새끼를 5마리를 인공수정으로 낳은 서울대공원 측은 토종 늑대 인공수정을 장담하는데, 한 텔레비전 방송은 유목민들이 성가셔하는 몽골 늑대를 도입할 것처럼 전한다. 혈통이 거의 같기 때문이라는데, 그렇다면 인공수정으로 늘어날 늑대들은 어디에 풀어주어야 하나. 영화사는 아닐 테고, 백두대간일까. 고속도로와 스키장과 석회광산으로 수십 토막난 백두대간에 사슴은커녕 토끼도 드문데, 송아지도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식성은 어떤 먹이로 허기를 채우려 들까. 벌통 건드렸다는 민원으로 지리산에 풀었던 반달곰들도 다시 잡아들이는 판인데, 야성 회복한 늑대는 과연 편할까.


미국의 자연주의 학자 알도 레오폴드가 산림감시원이었던 시절, 말을 놀라게 하고 순록을 잡아먹는 늑대만 보면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거센 강물이 굽이치는 강가, 어떤 높은 바위에 앉아 점심을 먹던 젊은 산림감시원은 새끼들과 뒤엉켜 장난하는 늑대들을 보았고, 흥분해 총을 쏘아댔다. 하지만 득의의 표정으로 죽어가는 늑대에게 다가간 순간,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맹렬했던 늑대 눈 속의 초록빛 불꽃이 서서히 꺼지는 게 아닌가. 그 자리에서 늑대와 산이 갖는 관계를 깊게 깨달은 알도 레오폴드는 늑대가 줄어야 사슴사냥꾼의 천국이 온다는 믿음을 버렸다.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인 옐로스톤에는 지금도 순록과 함께 늑대가 보인다. 순록을 보러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보이는 족족 늑대를 죽이자 순록이 순식간에 늘었지만 웬걸, 먹이가 고갈되자 이번엔 순록들이 대책 없이 죽어 자빠지는 게 아닌가. 허망했던 국립공원 당국은 다른 지역의 늑대를 황급히 들여왔고 다시 안정을 찾았다는 것이다. 『울지 않는 늑대』에서 팔리 모왓은 늑대는 건강한 순록을 잡아먹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잽싼 늑대도 순록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동 중인 순록을 따라가며 간혹 무리를 헤집지만 그건 건강하지 못한 개체를 가려내기 위한 의도일 뿐이라고, 그렇게 순록의 무리는 안정될 수 있다고 전한다. 순록이 사라지는 것은 총을 쥔 인간 때문이고, 늑대의 주식은 들쥐들이라며 인간의 부당한 오해를 지적한다.


감성을 주고받으면 사람들은 동물에게 이름을 붙인다. 집에 강아지를 들이자마자 이름을 다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제인 구달은 자신이 연구하는 침팬지들에게 이름을 붙여 선배 과학자들에게 객관성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는데, 팔리 모왓도 그 점을 걱정했다. 물론 이름붙은 늑대들은 그 사실을 몰랐고 관심도 없었겠지만 팔리 모왓은 진지했다. 순록 보전을 위한 늑대의 박멸계획 연구차 자신의 영역을 침입한 애송이 감시자를 이해한다는 듯 너그러운 늑대 가족에게 팔리 모왓은 경의를 표했고 내심 앨버트 아저씨라 불렀다.


버려진 암 사자를 키워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이야기를 담은 조지 애담슨의 『야생의 엘자』는 1966년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지만, 늑대 한 마리 살아갈 수 없는 생태계에서 개체 복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명심을 지나치게 앞세우는 한 생명공학자는 호랑이를 복제해 백두대간에 풀어주어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하지만, 요즘 호랑이들은 곶감 이야기를 모를 것이다. 곡마단도 외면할 늑대는 결국 동물원이 맡을 텐데, 늑대 인공수정은 왜 할까. 멸종 위기종의 가녀린 복원 차원일까. 복제된 호랑이처럼 돈벌이를 위한 동물원의 앵벌이일까.


잠시 파란 하늘을 우러렀을 늑대, 이 시간, 인공수정을 위한 씨받이로 고생 꽤나 심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늑대의 자유를 여러모로 빼앗은 인간은 야생과 공유해야 하늘이 계속 파랄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제 깨달을 것인가. 인공수정으로 대를 이어야 하는 시절로 접어든 인간들은 넓은 자연이 그리울 그 늑대의 이름을 과연 붙일 수 있을까. (물푸레골에서, 2005년 5월호)

야생 동물의 얘기는 언제나 눈물나게 한다.
TV에서 간혹 환경스페셜의 야생동물 이야기가 나온다면 기겁을 하고 다른 데로 채널을 돌리려 하지만, 결국은 다시 그 채널을 잡고 앉아 넋을 빼면서 꿀떡꿀떡 아픈 목에 침을 삼키고 핑 코를 푼다.
미안해, 얘들아...내가 사람이어서 정말 미안해...

늑대는 파란 하늘을 보지 못 했겠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광릉 수목원...이 동네는 벌써 언제부터 뿌연 하늘이 되었던지 기억에조차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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