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2. 15. 12:17

《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돌베개, 2003.

 

텔레비전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한 현상일 테지만, 언제는 ‘초식남이라더니 요즘은 ‘짐승남’이 아이콘이란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지만 이성이나 연애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잘 생긴 남자가 초식남이라면 반항적 기질과 음험한 인상으로 이성에게 폭력적으로 다가가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고야 마는 근육질의 남성을 짐승남이라 말한다고 흔히 말한다. 그렇다면 짐승남은 늑대와 같은 사내를 말하는 건가.

 

보름달이 뜨면 아리따운 각시로 변신했던 구미호가 동북아시아에서 본색을 드러내는데, 유럽에는 쉽게 분노하며 폭력적으로 바뀌는 ‘늑대인간’이 출현하는 모양이다.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의 포스터는 둥근달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늑대를 그려놓고 관람객의 시선을 자극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늑대는 잔혹한 동물로 묘사된다. 늑대인간은 짐승남처럼 자신의 먹잇감에 음흉하게 달려드는 인격체다. 숨었다 느닷없이 공격하는 사자나 호랑이와 달리 지칠 때까지 쫓아가 토끼나 순록의 목덜미 깊숙이 송곳니로 반드시 물어뜯는 늑대가 그렇듯이.

 

대개의 전설이나 민화가 유럽의 ‘아기돼지 삼형제’처럼 늑대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은데, 우리도 그리 좋을 리 없다. 울부짖는 소리 뿐 아니라 소문이 흉흉하지 않던가. 어미가 떠주는 밥을 꿀떡 넘기며 툇마루를 기던 아기가 잠깐 부엌에 드는 사이 늑대에 물려갔다느니 달거리 뒤처리를 위해 야심한 밤에 슬그머니 밖으로 나온 처녀의 목덜미를 물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산간마을에서 끊이지 않았다. 실제 그런 사고를 목격한 사람을 만난 적은 없지만 소문만으로 늑대는 경원해야 할 대상의 동물임에 틀림없게 된다.

 

팔리 모왓. 나이가 지긋한 지금은 상처받은 자연과 그 자연 속에서 사는 이의 근심을 독자에게 감성적 언어로 알려주려 펜을 드는 그는 캐나다의 패기 있는 생태학자였다. 젊은 시절 팔리 모왓은 늑대를 연구하기 위해 툰드라 지역을 답사한 적 있다. 늑대의 생태계를 밝혀내려는 순수한 동기가 아니었다. 관광객들은 순록과 그들의 장엄한 이동을 보고 싶어 하는데, 아니 사냥하려고 환장을 하는데, 늑대라는 놈들이 순록을 잡아먹어 그 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늑대를 제거해야 할 텐데, 무턱대고 잡아 없앨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당국이 파견한 애송이였던 거다.

 

음흉하고 잔혹한 늑대의 공격을 대비하는 장비, 총은 물론 덫에 수류탄까지 산더미처럼 챙겨들고 찾아간 북극권의 도시. 거기엔 기묘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늑대가 해마다 수백의 정착민들을 잡아먹지만 거참 기괴하게 임신한 에스키모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둥, 미국부대를 따라 여성들이 들어오자 늑대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는 둥, 늑대 한 마리가 순록 수천마리를 단지 피에 굶주려 죽여 댄다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실제 이상스러운 건 산더미 같은 순록의 뼈들이 마을에서 떨어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이었다.

 

드디어 발견한 늑대 굴. 그 주변에서 가족과 뒤엉켜 노는 녀석들. 총알을 장전한 상태에서 잔뜩 긴장했지만 늑대는 태연했다. 남의 집 손님 바라보듯 팔리 모왓의 텐트 앞도 유유자적 지나치며 슬쩍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팔리 모왓은 늑대에게 자신의 영역을 선언하기로 했다. 배뇨감이 심해질 때까지 차를 잔뜩 마신 뒤 늑대들이 영역을 표시하듯 텐트 주변에 조금씩 소변을 본 것이다. 그러자 사냥을 다녀온 뒤 텐트를 스쳐 천천히 자신의 굴로 들어가려던 늑대들이 잠시 멈칫했다. 이어 지긋하고 사려 깊게 텐트를 주시하더니 결단력 있는 태도로 돌아서며 선뜻 제 영역을 양보하는 게 아닌가.

 

자라나는 늑대는 어미에게 사냥술을 배워야 한다. 아무리 어린 늑대라 해도 송곳니가 날카로운데 제 어미를 상대로 사냥술을 열심히 배우는 건지, 몸을 부딪치며 노는 건지, 집요하게 덤벼드는 새끼들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데, 한 수컷이 그들의 응석과 살벌한 장난을 받아주면서 성가셔하는 어미를 구해내는 게 아닌가. 팔리 모왓은 그 늑대에게 이름을 붙인다. 친절한 ‘앨버트 아저씨’라고. 번호를 붙여 설명해야 할 자연 연구자가 그만 연구 대상에게 감성을 느낀 것이다. 적의를 느끼지 않은 늑대가 처음 만난 인간에 보여준 신뢰가 그 발판이었다.

 

늑대는 순록을 잡아먹던가. 그 의구심은 곧 풀렸다. 아무리 빠른 늑대도 순록을 따라 잡지 못했다. 수십만에서 수백만 마리 이상으로 이동하는 순록을 따라가는 늑대는 가끔 무리를 헤집고 들어가지만 그때 뿐. 늑대가 다가오는 걸 보고 무심해하던 순록들은 가까이 와야 얼른 달아날 따름이었다. 순록 떼 주변을 서성이는 늑대들은 다만 솎아내고 있었던 셈이었다. 디시 말해, 늙거나 병들거나 다친 개체, 어미를 잃은 어린 개체들을 솎아내며 순록 집단의 건강을 유지하도록 기여하는 것이었다. 어쩌다 잡는 순록은 늑대의 주식일 수 없었다. 늑대는 들쥐를 주로 잡아먹었고, 그걸 본 팔리 모왓도 늑대를 잡아 털을 벗기고 내장을 발라낸 다음 프라이팬에 튀겨 먹어 보았는데, 늑대는 산채로 꿀떡 삼키는 게 아닌가. 눈을 딱 감고 흉내내보기도 했다.

 

북미 대륙에 흩어져 순록과 공생하던 늑대들은 왜 사라진 것일까. 순록이 줄어서? 아니었다. 순전히 순록을 사냥하고 싶은 인간의 소행이었다. 순록을 없앤다는 편견을 앞세우면서. 마을에서 가까울수록 순록의 뼈가 많았던 게 그 증거였다. 쿠바에 있는 헤밍웨이 집은 시방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그 집의 서재와 거실에는 순록을 비롯한 온갖 사슴의 머리가 장식돼 있다. 사냥을 유난히 좋아했다는 헤밍웨이가 팔리 모왓이 찾았던 북극권으로 여행을 다녀왔는지 알 수 없는데, 확실한 것은 늑대는 순록의 머리를 그렇게 온전하게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순록 사냥을 위해 북극권을 찾은 이들은 인간에게 감히 덤비지 않는 늑대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인 미국의 옐로스톤에는 현재 늑대와 사슴이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한 때 국립공원 당국은 관광객을 놀라게 할 뿐 아니라 관광자원인 사슴을 없애는 늑대를 제거하기 위해 전문엽사를 고용한 적 있었다. 그래서 늑대가 일거에 사라지자 과연 사슴이 늘어났는데, 이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주변 식물들을 몽땅 먹어치우더니 급기야 한꺼번에 굶주려 죽어가는 게 아닌가. 뒤늦은 반성으로 다른 지역에서 늑대를 들여왔고 한참 뒤 평형을 되찾았다는데, 그런 교훈은 일반적이지 않다.

 

‘생태윤리’를 전파한 미국의 자연주의학자 알도 레오폴드가 젊은 신림보호관이었을 때, 그저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서 제 새끼들과 사냥 놀이하던 늑대 무리에게 소진될 때까지 총알을 퍼부은 적 있다. 이윽고 늑대의 사체로 다가간 그는 득의의 표정으로 늑대를 바라보았는데 순간 자신의 한 짓을 크게 후회하게 된다. 자연의 숨결이 깃든 파란 눈이 꺼져가는 게 아닌가. 충격을 받은 그는 자신에게 자연에 총질을 할 자격이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닫고 평생 자연주의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5년 전 즈음인가. 서울대공원에서 광릉수목원으로 복원을 위한 씨받이용으로 옮겨지던 늑대 수컷 한 마리가 나무우리를 뜯고 청계산으로 달아난 적 있다. 사육사가 던져주는 먹이만 먹으며 길들여진 늑대였건만 뉴스를 본 시민들은 불안에 떨며 청계산에 얼씬도 하지 않았고, 모처럼 파란 하늘 아래 자유를 만끽했던 늑대는 수백 마리의 개들과 엽사의 포위망이 좁혀지는 가운데 수면제 들어간 먹이를 외면하다 결국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마취총에 굴복하고 말았다.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이라면 늑대를 충분히 복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복원된 늑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지리산의 반달곰처럼 자연에 풀어줄 것인가. 유전적 다양성이 무척 한정돼 자연 방생되어도 집단이 유지되기 어렵을 거로 판단한다지만 늑대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는 시민들의 공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사람의 체취가 지배하는 우리나라에서 늑대 복원은 방생이 아니라 종 보전 차원에서 그쳐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복원에 앞서 우리들은 늑대에 대한 편견부터 고쳐야 하지 않을까. 팔리 모왓은 늑대는 늑대가 아니라고 우리에게 귀띔하는데. (사이언스타임즈, 2010년 2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