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4. 3. 18. 09:32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섬겼기 때문일까? 성직자의 자세를 평생 잃지 않은 이반 일리치는 20021276세의 나이로 숨질 때까지 고통이 심한 암을 수술은커녕 치료조차 하지 않았다. 50대 중반부터 자신의 턱에 암세포가 자라는 걸 알았지만 그는 암과 친구하기로 했다. 몸을 무리해 암 덩어리가 커지면 쉬며 기도와 명상에 잠기고, 가라앉으면 일을 했던 일리치는 목을 돌리거나 침을 삼키기도 어려운 상황에도 암과 친구처럼 지냈다. 다음날 발표할 글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지난 310일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제한 대통령이 쓸데없는 규제는 우리가 쳐부술 원수,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몸이 죽는다는 암 덩어리라고 언급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한 여당과 야당의 목소리와 별개로, 한 국가를 대표하는 이가 구사하기에 부적절하게 섬뜩한 용어가 듣는 이의 귀를 잠시 자극할지언정 진정성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 원수는 반드시 쳐부숴야 할 대상이 아니고 암은 곧 죽음이 아니지 않은가. 쓸데없는 규제는 완화 또는 철폐해야 옳지만, 이제 와 왜 쓸데없어졌는지 잘 따져야 한다. 규제를 도입한 당시에 이유가 없지 않았을 게 아닌가.


현신하라 한국경제에 이어 블랙오션을 써낸 박창기는 이권에 취한 대기업의 담합 문제를 주의 깊게 살핀다. 설탕이나 석유의 국내 유통가격을 담합으로 국제시세보다 터무니없게 높게 책정한 대기업은 막대한 이익을 부당하게 챙기지만 소비자 한 사람이 입는 손해는 얼마 되지 않는다. 개개 소비자는 담합을 의심해도 문제 제기하기 귀찮아 넘겨버리는데, 기업의 담합이 많아질수록 소비자 불이익의 합은 적지 않다고 한다. 일인당 평균 소득이 높아져도 살기 어려워지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블랙오션저자는 분석하는데, 우리나라 기업들이 담합을 유난히 일삼는 이유는 무엇일까?


담합은 수요와 공급에서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경제의 근간을 위협한다. 자본주의 본산을 자처하는 미국은 물론이고 상거래의 정의를 중요시하는 국가는 담합을 철저하게 단속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적발했을 때 담합으로 챙긴 이익을 크게 초월하는 징벌적 배상을 요구해 재발 가능성을 원천봉쇄한다.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배상이 적더라도 집단 소송제가 시행되는 까닭에 웬만한 배짱이 아니라면 기업은 담합을 시도하지 못한다는 건데, 담합의 폐해가 심각한 우리나라는 무슨 영문인지 국회에서 관련 제도의 도입을 한사코 가로막는다. 담합을 일삼는 기업과 담합하는 의원이 다수를 점하기 때문이리라.


원당이나 원유를 수입해 정제 또는 정유하는 기술은 우리나라가 독보적 위치를 점유하지 않는다. 관련 노동자가 많은 것도 아니다. 수입한다고 우리의 기술 수준이 뒤떨어질 리 만무하고 수요가 줄어들지 않으므로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지 않건만 우리나라는 설탕과 석유의 수입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관련 기업의 담합에 장단을 맞추는 정부의 규제가 있기 때문이다. 맥주도 마찬가지라고 블랙오션은 지적한다. 시설이나 투자 규모를 규제해 진입장벽을 높였기에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국제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감당하게 되는데, 담합을 배려하는 정부의 규제야말로 쓸데없다고 볼 수 있겠다.


대통령의 독한 발언이 나오자 지레 겁먹었는지, 개발부서의 입김에서 여태 자유롭지 못한 환경부가 자신의 알량한 규제인 환경영향평가법의 일부 조항의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앞에 나섰다. 개발을 주도하는 기업이 환경영향평가 업체를 선정하는 기존 환경영향평가법은 조항이 아무리 엄격해도 제도의 취지를 살리기 어려웠다.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한지 10년이 지나도록 공사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재평가를 받도록 조항에 규정돼 있건만 천성산 터널을 지나는 KTX구간은 무시했다. 그래서 지율스님은 목숨을 건 단식에 나섰던 건데, 지금 터널이 지나는 천성산 주위의 습지는 점점 말라가고 있다. 기업이 환경부의 알량한 규제를 무시했던 건데, 환경부는 그마저 완화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환경부는 뚱딴지 같이 투자 활성화 명분을 내건다. 그래서 환경영향평가서 초안을 작성해야 하는 의무와 그때 주민의 의견을 반드시 듣도록 규정한 조항을 바꾸려 든다. 주민 의견이 규제라고 본 것인가? 녹색연합이 지적하듯, “실질적인 환경피해가 예상되는 실시설계 단계에서 주민들이 환경피해 저감 방안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게 해 사업자가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제도의 취지이건만 주민 의견을 앞장서 무시하려 드는 환경부는 자신의 권한마저 위축시키려 애를 쓴다. 부실하게 제출한 환경영향평가서를 몇 번이고 보완 요구할 수 있는 조항을 2차례로 제한하겠다는 게 아닌가.


환경부의 담당자는 보완 요구의 횟수를 따지지 않고, 이행 의지 없으면 환경영향평가서를 반려하면 될 거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제까지 환경부는 환경영향평가서를 반려한 사례가 거의 없다. <한겨레> 신문은 “2008~2012년의 환경영향평가 협의 1282건 가운데 환경부가 평가서를 반려한 경우는 6건으로, 0.5%에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밀양 초고압송전탑 공사는 자신이 제출한 환경영향평가서 내용을 명백하게 위반하고 있지만 환경부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개발부서의 눈치를 살피는 환경부가 환경영향평가의 보안요구마저 양보한다면 이 땅의 환경은 어떻게 될까. 후손에게 남길 생태계는 온전할 수 있을까.


투자 활성화는 환경부가 염려할 분야가 아니다. 투자 하려는 기업의 돈벌이보다 다음세대가 누려야 할 환경과 생태계의 건강을 보전하기 위해 오히려 규제를 강화해야 할 부서가 환경부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정작 쓸데없는 규제는 탐욕에 눈이 먼 기업들의 담합을 조장하는 규정이 아닌가. 대통령이 암 덩어리라고 단정했으니 쓸데없는 규제의 완화는 항암제일까? 탐욕이 개발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규제가 없거나 완화될 때 암 덩어리가 커질 수 있다. 암은 탐욕으로 몸의 균형을 무너뜨렸을 때 발생한다. 규제완화보다 투명한 투자환경을 보장해야 경제가 건강해지고 생태계를 보전하는 불편부당한 규제로 생명은 건강해진다. (지금여기, 2014.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