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6. 3. 24. 12:00
 

밑도 끝도 없는 음모론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사회학자들이 해석하듯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애국주의의 발로일까. 박정희 식 개발주의의 성마른 소산일까. 줄기세포로 치료 가능하리라 믿는 불치병이나 난치병 환자가 집안에 있거나 배타적 국가부가가치를 염원하기 때문일까. 파면이 예고된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의 황우석 교수와, 그의 배아줄기세포 관련 연구를 ‘사기’로 규정한 발제자에게 뛰어들어 폭력을 행사하려던 이른바 ‘황빠’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음모론만 적당히 유포하면 정치인도 과학자도 책임회피가 가능하고 과학기술자가 장밋빛 상상력을 발휘하면 언론이고 정치고 죄 최면술에 걸리는 마당이 된 원인은 무엇일까. 세상사에 사유가 소외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허구헛날 실험에 몰두하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대학원생이 있었다. 보다 못한 지도교수가 “생각은 언제 하누?” 핀잔을 주었다던데, 연구든 실험이든 사유가 전재되지 않는다면 천박하거나 공허하다. 핵산업이나 생명공학을 예로 들 필요도 없이, 거대화나 첨단화된 과학기술일수록 인문적 사유를 생략한다면 사회나 생태계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황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논문이 날조로 판명된 이후, 환자들에 대한 황 교수의 약속은 허구였고 부르짖던 국가부가가치는 환상이라는 것은 상식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황빠 중에 의외로 지식인이 많다. 체세포 핵이식으로 맞춤형 줄기세포를 황 교수가 만들어야 불치병과 난치병이 획기적으로 치료되고 국가부가가치가 반도체의 예 이상 증진될 것으로 철석같이 믿는 까닭일까. 체세포 핵이식 배아줄기세포가 함의하는 비윤리성과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식인에게 인문적 사유의 결핍을 짐작한다면 지나칠까.


고등학교 2학년부터 갈라지는 인문계와 이공계는 전공이 깊어질수록 대화가 줄어든다. 칸트를 모르는 이공계가 그린 화려한 애드벌룬에 정신을 빼앗기는 인문사회계는 열역학을 모르는 채 신문기자가 되고 정치, 경계, 행정, 문화와 종교계들을 두루 지배한다. 공돌이를 격멸하는 샌님이나 말만 앞세우는 자를 무시하는 손이 앞서는 자들은 자기 분야가 더 중요하다고 우긴다. 대화가 없는 두 문화는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상대의 영역에 끼어들어 자신의 언어로 섭정하려 든다. 불화는 증폭된다.


40여 년 전, 영국의 스노우 경은 인문계와 이공계로 대표되는 ‘두 문화’의 분열된 간격을 메우자고 호소했는데, ‘대한민국 지성사 최초의 프로젝트’라고 출판사에서 의미부여한 『대담』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작년 말 세상에 나왔다. 반가운 일이다. 인문과 이공계를 대표해 4년 동안이나 만난 대담자는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 지성임에 틀림없으니 또한 다행이다. 진보적 시각으로 획일 문화와 환경 악화를 안타까워하는 영문학자 도정일은 책 읽는 사회를 위한 운동에 적극적이고, 동물행동학을 우리나라의 인기학문 반열로 올려놓은 최재천은 인문학적 글쓰기에도 능한 자연과학자가 아니던가. ‘이공계 위기론’과 ‘인문계 고사론’이 우울한 쌍곡선으로 비껴가는 우리 처지에서 『대담』은 영양가를 기대할만한 프로젝트다.


배아줄기세포의 환상을 놓고 인문학자는 문제를 제기하고 자연과학자는 우려와 두둔으로 받아넘기며 시작한 대담은 신화와 예술을 뛰어넘어 문화와 생명체의 공존을 꿈꾸면서 마무리한다. 인문과 이공계의 상호 이해를 타진한 도정일이 소박한 대담을 기대했다면 융합을 타진한 최재천은 기대가 장했다는 느낌이다. 한없는 늑장으로 대담을 마치는데 4년이나 걸리게 한 자신에게 화내지 않는 최재천을 칭찬하는 도정일은 자신의 지식세계를 펼쳐내느라 시종일관 분주하고, 때로 배웠고 때로 다투었다며 소회를 밝힌 최재천은 도정일의 거침없는 언어에 파묻히지 않으면서 인문학을 생물학으로 해석하려 애쓰는 모습으로 애틋하다. “생물학이란 이름을 여기저기 갖다 붙이는 건 좋게 말해서 통합학문적 열정이고, 나쁘게 말하면 생물학의 제국주의”라고 지적하는 도정일은 ‘아무리 말 잘하는 자연과학자라고 해도 어디 인문학자에 당하겠는가? 여기는 듯 짐짓 여유를 부리고, 인문사회를 생물학으로 통합하려는 최재천은 ‘제발 내 말 좀 들어보소!’ 라는 듯 조급하다.


인간의 본성도 진화의 산물이라는 해석에 대해 인문학적 성찰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를 생물학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며 반론을 펴는 대목에서 불꽃이 잠시 튀기고, 생명공학의 비윤리성을 개탄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진지하지만 두 지성의 대담은 대체로 겉돈다. “제대로 된 과학자라면 자신의 연구에 대한 인문학적 분석을 할 줄 안다”면서 이미 열린 판도라 상자를 황우석가 잘 열 수 있게 도와주자고 제안하는 최재천은 생명윤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연구는 짧다하면서도 황우석을 믿잔다. 대담을 할 당시 황 교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열광은 대단했지만, 『나의 생명 이야기』를 황 교수와 공동저자로 출판한 저간의 사정이 있다고 해도, 최재천의 황 교수 두둔은 지나치다 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황 교수의 주장에서 인문학적 성찰을 감지할 수 있나.


‘과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과학화’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최재천에게 “지금 우리사회의 주술문화는 조선시대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대응하는 도정일은 황 교수로 상징되는 이 시대의 주술문화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지 궁금하다. 인문적 주술문화를 과학기술 주술로 몰아낸 요즘, 대중을 행복해졌던가. 인문학이 인문과학으로 개칭되는 풍조에 황 교수를 음모론으로 감싸는 대중심리는 인문적인가 과학적인가. 두 지성은 요즈음 어찌 생각할까.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식하라”는 ‘디엔에이 사령부’의 지시를 어기고 콘돔을 끼고 섹스를 하는 ‘특히 잘 된 브레인’은 누구인가. 산업사회의 성공한 백인인가 그런 백인을 숭상하는 일부 황인인가. 산업사회를 수렵채취나 농경사회보다 우월하게 인식하는 최재천은 인간이 디엔에이 사령부에서 우선 폐기할 대상이 될까 우려한다. 자신의 생존공간까지 위협하는 환경파괴 때문이다. “선진국 인구는 감소하고, 후진국일수록 마구 낳는다는 통념”을 인정하는 진화생물학자 최재천과 “사회적 약자들을 얼마나 보살펴줄 수 있는가가 문명의 품질을 좌우한다!”는 언설은 진화의 섭리에 맞는 것인지 묻는 영문학자 도정일은 결코 서로 융화하지 못한다. 대한민국 최초로 대담 프로젝트에 참석한 두 지성은 단지 자신의 재담을 나눌 뿐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를 『통섭』으로 번역 출간한 최재천은 인문학을 생물학으로 ‘통섭’하자고 거듭 제안하지만 ‘통섭’이라는 고압적 용어를 ‘통합’으로 수정하는 도정일은 부정적이다. 인문학은 생물학으로 해석될 수 없는 영역이므로 협력이 필요할 뿐, 통합은 언급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자나 깨나 경제를 부르짖는 마당에서 인문학마저 실용주의에 넋이 빼앗긴지 이미 오래인데, 두 문화의 상호 이해와 대화 가능성이라도 제대로 모색한다면 그나마 다행이 아니겠는가.


성찰이라는 딴죽을 걸지 못하면서 스스로 심각한 고사사태에 빠진 인문학은 어쩌면 이공계에 반쯤 통합되었는지 모른다. 과학기술을 모르며 실용주의에 탐닉된 까닭이다. 인문적 성찰이 없는 과학기술에 의해 더욱 고사되지 않으려면 인문학은 통섭이나 통합이 아니라 한시바삐 과학기술과 성찰적 소통을 모색해야 한다. 재담으로 장식된『대담』이 그 점을 충분히 상기하지 못해 못내 아쉽다. (출판저널, 2006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