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20. 3. 26. 18:07

 

21대 총선이 눈앞이다. 하지만 후보의 변명을 보니 기운이 빠진다. 4년 뒤를 다시 기다려야 하나. 참담해야 했던 기억이 이번 선거에 반복되려나?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 출마자의 인식을 미리 파악할 수단이 여전히 없다. 초선을 기대하는 후보는 물론이고 재선 이상을 바라는 후보 역시 대의제 민주주의 본령을 제대로 이해할까? 이해한다면 당선 이후 본분을 다할 수 있을까? 21대 총선 유권자는 여전히 미덥지 않다.


험지? 평소 지역에 뿌리내리려 노력하지 않던 후보가 타의든 자의든, 연고 없는 선거구를 도전하려 할 때 내뱉는 말이다. 정치권에 영향력이 큰 인물이라면 연고 없는 지역의 유권자들도 자신을 환영할 거라 믿는 걸까? 연고 없는 지역에 출마하고자 하는 정치 초년생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대의제 의원의 포부를 밝히기보다 자신의 화려한 이력을 앞세우지 않던가. 서울의 유명한 대학 출신에 해외 유수 대학의 박사학위가 지역을 대의할 자격이라도 된다는 건가? 유권자를 우습게 여기는 게 분명하다.


국가 차원의 입법을 위해 의원이라면 반드시 지역 주민의 의견을 묻고 논의하며 수렴해야 하건만, 통 그런 노력으로 분주한 모습을 지난 임기 내에 보기 어려웠다. 당론 때문이라고? 당론을 정하려 논의할 때 지역의 의견을 얼마나 반영하려 노력해왔던가? 지역보다 계파 이익에 몸을 바치지 않았던가? 정치 초년생은 출발부터 계파에 소속되려는 행태를 보인다. 그래야 공천이 되나? 구태가 아닐 수 없다. 구태를 대의하는 후보가 당선되면 지역 주민의 의견은 있으나 마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회를 왜 다시 구성해야 하나. 폭력배의 조직 키우기 같은 모습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하다.


인천시는 다른 지역과 분명히 다르다. 문화와 지리와 역사, 그리고 사회적 성향은 인천의 선거구마다 또 다를 텐데, 후보들은 무슨 각오로 자신이 출마하려는 지역구를 선택하는가? 초선이든 재선 이상이든, 출마 전부터 유권자 그리고 장차 유권자가 될 청소년들과 지역에 맞는 주제를 놓고 평소 진정성 있는 토론 자리를 가져본 적 있는가? 단체장 선거가 아니므로 개발이나 행정을 주무르는 공약은 의원 후보의 최우선 덕목일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신기루를 현혹하려는 선동에 가깝다.


지역 후보는 물론이고, 계층이나 직능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하는 비례대표 후보들은 대의제의 본령을 각인하고 출마를 고민하는가? 국가와 민족의 내일을 염두에 두고 나섰는가? 이번 21대처럼 비례대표 후보를 종잡기 어렵게 내세운 총선은 일찍이 없었다. 4년에 고작 한 차례 주어지는 주권을 행사하는 유권자는 어떤 마음으로 투표장을 향해야 하나. 자신과 가족의 오늘과 내일의 행복을 위해 대의원 후보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유권자는 오늘도 무력하다. 21대 후보들과 정당들, 유권자에게 무례하다고 느끼지 않나?


지난 총선 투표장처럼 이번에도 무력하질 테니 답답하다. 차라리 투표용지에 칸이 추가되길 바란다. “지지할 후보 없음지지할 정당이 없음칸이 더 있다면 그곳에 기표 도장을 정확하게 찍고 싶다. ‘지지할 후보 없음지지할 정당 없음이 가장 많은 표를 받는다면 재투표를 해야 하는 제도가 있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정당은 정당과 계파 이기주의로 후보를 공천하지 못할 게 아닌가. 대의제 본령에 가까운 후보를 찾지 않을까?


지역의 경선 과정에서 유권자의 의견이 반영된다고? 그렇게 주장하고 싶겠지만, 당원이 아닌 대부분 유권자는 시큰둥하다. 관심이 없다기보다 경선 후보들이 지역에서 주권자들과 의미 있는 활동을 한 기억이 없는 탓이리라. 느닷없이 나타나 의원 후보를 자처하니, 후보의 됨됨이를 살피려는 유권자들을 시들하게 만들지 않았나? 기득권 정당은 유권자의 주권의식을 혐오하는 게 아닐까?


22대 총선은 나아질까? 고개를 끄떡이기 어렵다. 그렇다면 경선이나 415일 선거에서 낙선한 후보는 실패한 게 아니리라. 계파에 귀를 쫑긋하며 민의 파악에 거리를 두는 의원과 다른 행동을 할 기회가 열리지 않겠는가? 진정성 있는 차기의 대의를 준비할 수 있지 여지가 있다. 지역에 뿌리내리는 행동에 진정성이 보인다면 기회는 열린다. 그런 후보에게 지역은 험지가 아니다. (인천in, 2020.3.26.)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8. 2. 1. 17:20
 

독일의 아우토반은 속도 무제한이라고 믿지만 모든 차에 해당하는 건 아니다. 버스는 시속 100킬로미터, 트럭은 80킬로미터가 제한속도다. 반드시 좌측 차선으로 추월한다. 우리 고속도로처럼 꽈배기처럼 돌아다니는 차를 거의 볼 수 없다. 감시카메라와 교통경찰이 보이지 않는 아우토반에서 독일 자동차들은 왜 규정을 잘 지킬까.

 

독일의 교통위반 벌금은 우리보다 월등하다. 감시카메라나 경찰도 없이 위반한 운전자를 어떻게 알까. 시민의 고발이다. 독일인은 야박해서 이웃을 고발하는 게 아니다. 선량한 운전자의 피해를 예방하려는 차원이지만 무엇보다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교포는 말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민들의 참여와 동의로 만든 법규를 지키지 않았기에 고발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회적 합의’가 갖는 힘이다.

 

집행자나 똑똑한 사람이 잘 판단해서 만드는 규정은 이해당사자에게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하거나 힘이 약하다. 규정 자체를 무시하거나 집행하려는 자에게 저항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공평무사하게 참여한 이해당사자들이 민주적으로 논의해 투명하게 합의해 만든 규정은 집행할 때 힘을 갖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가진 이해당사자가 모두 참여하여 규정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이해당사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대신할 수 있는 대의원을 선출하고 그들에게 합의를 맡긴다.

 

대의원은 이해당사자가 납득할 수 있게 선출되어야 하고 대의원은 자신을 선출한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먼저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대의제는 힘을 잃는다. 이해당사자의 의견이 다양하거나 첨예할 경우 대의원 사이에 합의가 어렵다. 그럴 경우 대의제는 위원회를 설치해 합의를 위임하기도 한다. 그런 위원회는 다수결을 배제해야 한다. 다수결이 불가피하다면 다수결 처리 여부를 먼저 합의한 다음 임해야 한다. 논의가 충분하다면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만일 강압적 다수결로 규정을 만든다면 그 규정은 사회적 힘을 잃는다.

 

독일의 교통법규는 그런 방식으로 제정되었으므로 힘을 가진다. 한데, 우리는 어떤가. 대의원은 자신을 선출한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먼저 청취하고 충분한 논의로 합의했던가. 각종 위원회는 다수결을 강행하지 않았던가. 어렵게 합의한 제도를 집행기구에서 파기하는 일은 발생되지 않았던가. 예가 수두룩하지만, 새만금 간척사업과 경부고속전철이 그랬다. 논의 과정에서 이해당사자의 의견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문제 제기가 빗발치는 가운데 다수결로 밀어붙였다. 우리 시민들이 교통법규를 쉽게 위반하는 이유는 뭘까.

 

두고 보아야 할 테지만, 이른바 ‘한반도 대운하’로 치장된 경부운하는 어떤 방식으로 결정될까. 세간에 알려졌듯, “반대 의견은 듣겠지만 반드시 진행”하는 방식이라면 결코 사회적 합의가 아니다. 국민이 선출한 정권이므로 선출자의 의견은 곧 국민의 의견이라고 착각한다면, 국민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전체주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도 투표로 선출되었다. 국민들은 자신의 의견을 잘 수렴해달라고 선거에 임한다. 선출자의 의지에 굴종하려고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는 시간이 오래 걸려 번거롭지만 합의된 결과는 힘을 갖는다. 사회적 합의가 거듭된다면 사회 구성원 사이에 신뢰가 구축된다. 확립된 신뢰는 합의 과정을 점차 순조롭게 이끈다. 번거롭다고 사회적 합의를 회피한다면 민주주의는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고 집행하는 제도에 대한 이해당사자가 저항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생계비 지원을 놓고 분출되는 태안 주민들의 항의는 어디어서 비롯되었을까. 숱한 노사분규와 재개발 지역의 세입자 집단행동은 사회적 합의를 외면한 데 기인하는 건 아닐까.

 

인천에 추진되는 경인운하와 계양산 골프장은 사회적 합의가 생략된 대표 사례 중의 하나다. 주민 찬성을 들먹이지만 설악산 개발을 지역에 맡길 수 없듯,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주는 시설의 이해는 지역에 국한하지 않는다. 새 정권의 출범을 앞두고 사회적 합의를 다시 생각해본다. (인천신문, 2008.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