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5. 17. 14:20

《김예슬 선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느린걸음, 2010.

 

 

김연아는 대학생이다. 자신이 몸담은 대학에서 키운 것처럼 광고한 총장이 네티즌의 힐난을 받은 적 있는 대학의 학생이지만 그가 선수권자로 활동하는 동안 그 대학은 김연아에게 가르칠 게 거의 없을 것이다. 김연아를 만든 건 일류대학도 능력이 빼어난 코치도 아니다. 그들이 교육, 다시 말해 가르쳐 키우는 일을 일부 맡을 수 있지만 자라나는 건 자신이다. 공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이라는 거다. 김연아 만이 아니다. 특기생이나 아니나, 내 나라나 남의 나라나,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나 아니나, 다 마찬가지다.

 

침팬지 연구로 저명한 제인 구달 박사는 고교 졸업 후 비서학교를 다닌 게 학력의 전부였다. 대학을 다닐 여유가 없던 제인 구달은 동물행동의 연구방식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막연히 노트 한 권을 들고 탄자니아 곰베 숲으로 들어갔고, 가식 없이 접근하는 그를 받아들인 침팬지 무리와 호흡할 수 있기에 자연스런 행동을 정직하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 대상에 식별번호를 붙이지 않았다. 식구처럼 애완견에 이름을 주듯 침팬지 하나하나에 개성 있는 이름을 붙였고, 덕분에 침팬지 무리의 감정까지 논문에 담아낼 수 있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은 그의 업적을 기려 1965년 학위를 수여했지만 제인 구달은 학위논문은 따로 쓰지 않았다. 그를 지도할 인물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올 3월 10일,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하던 김예슬 학생이 교정에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인 뒤 스스로 대학생 칭호를 떼어냈다. 그것도 평생 훈장처럼 따라다니는 이른바 일류대학 꼬리표를. 여느 대학 못지않게 역사와 전통을 자부할 그 대학에서 특히 입학 경쟁과 점수가 높은 경영학과는 나름대로 학식을 자랑하는 교수들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며 학문을 가르칠 것이다. 그 학과를 거쳐간 선배들이 그랬듯 김예슬도 다른 대학, 다른 학과의 졸업생보다 취업 경쟁에서 유리할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그만두겠느니 거부하겠느니 떠들썩하게 선언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그날 바로 자퇴서를 제출한 까닭은 무엇일까. 세상물정 모르는 한 젊은이의 치기였을까. 우리는 그의 주장을 듣지 않고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이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어렵싸리 학한 그 대학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교정과 인터넷에서 대자보를 읽은 많은 이들이 먼저 어리둥절했을 테지만 누구보다 당사자가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부모는 물론이고 친구와 선후배도 설득하기 대단히 어려웠어도 대학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건 오늘날 이 땅의 대학에서 하등의 가치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리탐구는 언감생심. 오로지 취직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도전한 첫 번째 관문일 따름인 대학 안에서 김예슬은 어떤 고뇌에 사로잡혔을까. 취직될 때까지 쌓는 자격증 꾸러미는 교육과 전혀 관계가 없다. 내 이상을 위해 매진하려는 공부와 아무 상관이 없다. 좌절이 두려워 친구를 제쳐야 하는 트랙일 뿐이다. 언어연수도 유학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취업에 성공하면 자기의 이상을 드디어 추구할 수 있을까. 승승장구하는 직장에서 오만한 자세를 잠시 연출하는 선배도 내일이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특별하게 선택받은 일부를 제외하고 공정을 가장하는 트랙에 결국 뒤쳐져 자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눌러가 되라며 짐짓 나를 응원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교수와 학교, 그 뒤에 도사린 자본과 권력을 위해 소비되는 부품이 아닌가. 단맛을 잃으면 뱉을 뿐인 껌처럼.

 

김예슬의 말처럼,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大學 없는 대학”에서 내는 누구이고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다. 누가 대답해주던가. 우정도 낭만도 사제 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다. 그 뿐이 아니다. 피가 뜨거운 젊은이답게 현실을 극복하려는 저항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곳이 현실의 대학이다. 대자보는 취업을 위한 자격증 꾸러미를 위해 인생을 허비하는 이 땅의 무수한 젊은이에게 각성을 안내한다. 학생을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납품하려는 대학교는 물론이고 그 강고한 구조에서 철밥통을 꼭 끌어안고 있는 교수에게 교육의 가치를 묻는다. 하지만 자본과 권력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졌거나 그 구성원이 된 교수와 대학에서 답을 구할 수 없는 일.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 키우며, 자신을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대학생들은 무한 트랙을 달리기만 하다 삶이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간다. 김예슬은 그들이 정한 기준을 만족하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탈주하고 저항하겠다!”고 선언했다. 앞으로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며, 행동한 대로 살아가는 용기를 내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런다고 이 거대한 대학과 자본의 탑이 당장 무너지지 않겠지만 자신의 몫인 “돌멩이 하나를 뺐으니 균열은 시작된 거”라고 믿는다.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대학생의 첫 발을 사회에 내딛은 한 인간, 김예슬은 자신이 거부한 것들과 일전을 앞두고 약속했다. 그래서 세상에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 두고 볼 일이다!”

 

그렇게 자신의 고뇌를 대자보로 집약한 김예슬은 한 권의 작은 책을 내놓았다. 경쟁이 아니라 나누는 친구들과 고전과 책을 읽고 토론하고, 사회의 약자들의 현장을 방문해 불의와 맞서고, 뜨거운 농사 체험과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행동을 하고자하는 젊은이를 불러 모으는데 지렛대가 되기를 희망하기에, 대자보를 구체적으로 풀어서 쓴 《김예슬 선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를 펴낸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삶의 대학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고 덧붙이면서.

 

물웅덩이가 썩지 않는 건 어디선가 맑은 물이 샘솟아 올라오기 때문이다. 김예슬의 책은 탁한 웅덩이에 스미는 맑은 샘물이다. 먹구름 속에서 비치는 한 줄기 햇살이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 어둡다. 암흑을 밝히는 촛불이어야 한다. 심지가 끊어지지 않으면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뿌리와 새싹’ 운동을 펼치는 제인 구달의 이유처럼, 젊은이의 행동이 이어져야 한다. 자본과 권력에 길들여진 애늙은이는 행동이 불가능하다. 문제의식으로 저항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심지가 되어 행동해야 한다. 《김예슬 선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길들여지길 거부하는 젊은이에게 행동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인천in, 2010.6.13)

예슬양은 새로운 사회를 이끌 수 잇는 개척자가 될 거 같아여
정말 좋은 서평 잘 읽고 갑니다!! 저번에 한번 제목은 봤던 책인데 꼭 읽어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