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2. 6. 11. 14:58

    62일은 유기농의 날

 

33일은 삼겹살 데이라고 한다. 3자가 두 번 겹치기 때문일 테지만 그냥 삼겹살의 날이라고 하는 게 어떠했을까 싶은데, 62일은 유기농의 날이라고 한다. 정부에서 공식 등록한 경축일은 아니지만, 벼와 같이 겉이 거친 씨앗을 뿌리는 절기인 망종65일이므로 62, 육이를 유기로 읽어 유기농의 날로 칭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보인다.


서울시는 유기농의 날을 맞아 서울 도시농업 원년 선포식을 한강 노들섬에서 열었다. 한강대교가 통과하는 노들섬은 서울시민 극히 일부만 즐기는 테니스장으로 이용되었다. 이후 디자인을 유난히 강조한 오세훈 전 시장은 6300여억 원을 들여 휘황찬란한 오페라하우스와 청소년을 위한 콘서트홀을 지으려했으나 박원순 시장으로 교체되면서 무산되었고, 도시텃밭과 마을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하는 현 시장의 뜻을 받아,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까지 시민들의 농장으로 활용하기로 했다고 서울시 담당자는 밝혔다.


오페라하우스가 주는 즐거움보다 풋풋한 농산물이 자라는 걸 보는 즐거움이 더 클 것으로 평가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손으로 모를 낸 논은 맹꽁이 논으로 이름 붙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오페라하우스를 번지르르하게 지으려할 때 보호대상종인 맹꽁이가 나타나 환경단체에서 문제를 집요했던 바로 그 지점이기 때문이다. 한때 환경운동했다는 걸 훈장처럼 자랑하는 시장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서울시는 당시 하는 수없이 공사를 중단해야 했고, 공사 종료 후 되돌려 보낸다는 철석같은 약속 하에 노들섬의 맹꽁이는 뚝섬 근처 서울숲으로 거처를 억지로 옮겨야 했다.


곧 장마철이 다가올 텐데, 서울숲에 세 들었던 맹꽁이가 노들섬으로 귀환했는지 알지 못한다. “흙을 밟고 농사짓는 일은 생명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5년 이내에 서울을 세계 도시농업의 수도가 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 올 상반기 중에 관련 위원회를 구성하고 조례를 제정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고 언론은 전했다. 모내기를 마치고 즐거웠고 행복했다.”고 소회를 밝힌 서울시장은 도시농업에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고 서울이 도시농업의 수도가 될 수 있도록, 또 서울이 정말 행복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는데, 서울보다 농사지을 땅이 많은 인천은 왜 이리 삭막한가.


세계 제1이 중요한 건 아니다. 이제 시작인 서울시가 세계 제1을 선언하는 것은 섣부르다. 가까운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을 보라. 그 나라들은 도시농업이 시민사회에 생활화된 지 오래다. 쿠바는 아바나의 도시농업으로 식량 위기를 극복하기까지 했다. 5년 이내에 세계 제1이 되려는 성과주의는 시민들의 능동적인 참여 없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관에서 억지로 밀어붙인다면 역효과가 클 것이다. 서울에 도시농업이 정착되는 걸 은근히 방해하려는 심사가 아니라면 담당자는 세계 제1로 엄한 사람들 현혹시킬 이유가 없다. 참여하고자하는 시민들을 위한 마당을 깔아주는 게 훨씬 중요하다.


서울시는 도시농업의 정착을 위한 도시농업 10계명을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했다. 10계명에는 자투리땅 활용, 도시농업 교육, 도시농업으로 마을공동체 회복, 생태 순환형 친환경 농업 실현, 농어촌과 전문 농어민의 네트워크, 그리고 관련 조례 제정 들을 담고 있는데, 꼭 서울시에 적용되는 사안은 아니다. 공동체 의식이 다른 도시보다 약한 것으로 평가되는 인천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조용하다. 일상적인 행정이 마비되는 한이 있더라도 경작지를 메워 일회성 경기장을 짓는데 혈안이 되었는지, 없는 돈을 끌어내는 인천에서 도시농업은 한가한 모양이다.


경기장과 지하철 만드느라 정신이 없는 인천시야 관심 없겠지만 시민까지 도시농업에 무관심한 건 아니다. 시민단체나 종교단체에서, 또는 농사에 지친 나이 든 농부가 원하는 시민에게 텃밭을 분양하는 사례는 없지 않다. 일부 구청은 상자텃밭을 제공하거나 산하의 의제활동을 지원해 도시농업을 지원한다. 시민 개개인도 엽채소나 고추, 토마토나 오이와 같은 채소를 화분이나 스티로폼 박스로 베란다에서 재배하기도 한다. 알음알음으로 귀농학교를 노크하거나 무작정 텃밭에 뛰어들어 하나하나 배워하기도 한다. 다만 세금을 내는 시민의 한 사람이건만 인천시의 외면으로 관심을 가진 도시농업을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못한다.


도시농업을 위한 텃밭은 지하철이나 경기장 건설에 비해 턱없이 작은 비용으로 시민의 만족도를 매우 높일 수 있다. 개발이 보류된 땅 뿐 아니라 나이 들어 농사를 접으려는 농민의 농토도 인천에 적지 않다. 유럽에서 보듯 그런 농토를 시 차원에서 장기 임대해 시민에게 텃밭으로 재임대할 수 있다. 경험이 많은 농민을 도시텃밭의 강사나 관리자로 의뢰할 수 있다. 농기구와 씨앗을 빌려주거나 보급할 수도 있다. 그렇게 분양한 텃밭은 도시의 훌륭한 녹지가 되며 함께 농사짓는 시민들을 인천에 뿌리내리게 한다. 삭막했던 회색도시의 익명의 시민들을 공동체의 따뜻한 이웃으로 거듭나게 만든다.


      번쩍이는 건물은 더 번쩍이는 건물이 생기는 순간 빛을 잃는다. 건물이 반영하는 도시의 가치는 천박할 뿐 아니라 오래가지 못한다. 그에 비해 삶이 뿌리내리는 공동체는 길다. 도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 구성원에게 어쩌면 영원할 수 있다. 이웃이 모여 함께 땀 흘리며 농작물을 재배해 나누는 도시농업은 도시의 정주를 살갑게 만든다. 삭막한 인천에서 더 늦출 수 없는 정책이 되어야 한다. 유기농의 날은 이미 지나갔으니, 내년을 위해 인천시와 의회는 10개 구군과 논의하며 관심을 가진 시민과 협의해, 체계적으로 준비하면 어떨까. (인천in, 2012.6.11)

 
 
 

도시·인천

디딤돌 2012. 5. 3. 13:33

 

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셨다. 근린공원의 나무들은 꽃잎을 접고 겨우내 준비해왔던 연초록 잎사귀를 조심스레 펼친다. 이맘때면 산록이 아름답다. 나뭇가지마다 펼쳐지는 초록의 숨결에 햇살이 비치면 삼라만상이 깨어나는 느낌이다. 일 년 동안 광합성하며 나무를 키워낼 잎사귀가 펼쳐질 무렵, 땅에는 작은 풀이 싹을 내놓는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을 일으켜 가까운 시골로 나서는 아낙들은 봄나물 캐기에 여념이 없는데, 때를 놓치면 억세져 먹기 어렵다. 하지만 도시 근린공원과 아스팔트 도로 언저리는 피했으면 좋겠다. 자동차에서 배출한 중금속을 흠뻑 빨아들였을지 모르므로.

 

봄나물은 저장식품에 물린 사람에게 활력을 준다. 나물 캐러 다니며 가벼운 운동을 할 뿐 아니라, 쌉싸름한 나물은 입맛을 돌아오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봄나물은 양이 많지 않으니 저장된 농산물을 더 먹어야 하고, 그 농산물이 떨어지기 전에 씨앗을 뿌려야 한다. 땅을 뚫고 올라온 풀들을 뽑아낸 뒤 사람이 먹을 잎사귀나 열매를 맺는 농산물을 심어야 한다. 그를 위해 대부분의 농촌은 석유를 사용하는 농기계를 쓴다. 얼마 안 남은 농부가 수많은 도시인들을 먹이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농산물의 가격이 낮으니 농부도 많이 심어야 하고, 그러자니 화학농업을 거부하기 어렵다. 곤충도 좋아하는 농작물이 다른 풀과 경쟁하도록 방치할 수 없는 노릇이다.

 

위험하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야 하는 농기계, 그리고 석유로 가공하는 화학비료와 제초제와 살충제를 농부들이 피하려면 획기적 전환이 여러모로 필요하다. 농기계나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으니 땀을 많이 흘려야 하고, 생산량이 줄어든 볼품없는 농작물을 도시의 소비자들이 흔쾌히 사주어야 한다. 영농비와 인건비를 충분히 보상할 정도로 공정하게. 바로 신뢰를 협동조합으로 이어주는 생활협동조합이 추구하는 공정거래. 한데 많은 농부들은 아직 기계와 석유를 화학물질에 의존하는 관행농업을 거부하지 못한다. 농협 대출금에 몸과 의지가 구속된 탓이다. 유기적인 농업으로 전환한 이웃 농부가 생활협동조합의 생산자조합원이 되면서 지친 몸과 마음도 추스르며 경제적 여유를 찾는 모습을 보고 농사법을 바꿔보려 해도 대출금 상환이 발목을 잡지 않던가. 그래서 유기농산물은 여태 도시의 소비자 협동조합원에게 충분히 돌아갈 정도로 재배되지 못한다.

 

도시의 소비자 협동조합원이 관행농업으로 지친 농부들을 유기농업으로 인도하려면 생활협동조합에서 유기농업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할 수 있을 때까지 지원하는 금융 장치를 만드는 걸 긍정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는데, 당장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생활협동조합 소비자조합원들은 아쉬움을 더 달래야 한다. 달랠 수 없다면 농사를 직접 지으면 된다. ‘도시 농업이 그 길을 안내해준다. 봄비가 촉촉이 적신 도시에 농사지을 땅이 없는 건 아니다. 찾아보자. 도시화되기 오래 전부터 농사를 지었던 나이 든 농부가 시민들에게 텃밭으로 제공하려는 땅이 더러 있다. 의식이 깬 지방자치단체장이 주민을 위해 개방하려는 텃밭도 있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상자에 흙을 담아 아파트 베란다에서 농산물을 재배할 수도 있다. 이른바 상자 텃밭이다. 그런 텃밭은 대개 유기농일 테고, 도시인은 그 텃밭에서 농부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농산물을 보탤 수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한강변에 시민 텃밭을 조성해 시민들에게 분양하려 했으나 정부가 거부해 계획을 거두어야 했다. 우리가 먹는 식량의 4분의3을 수입하는 국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미국과 유럽과 중국과 FTA협상을 밀어붙이며 농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정부다웠다. 농부들만 괴롭힌 게 아니라 시민들이 내 나라 땅에서 제철 농작물을 유기적으로 재배해 먹겠다는 걸 방해한 셈인데, 박원순 시장은 호화찬란한 오페라하우스와 부속 건물과 아스팔트로 뒤덮일 뻔했던 한강의 노들섬을 텃밭으로 개간해 시민에게 제공했다. 좁지만 시작이 반이므로 더욱 확장되리라. 그렇다면 인천에서 텃밭은 불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텃밭으로 일굴 땅은 인천이 서울보다 넓다.

 

의제21추진위원회의 주관으로 작년 유기질 비료가 섞인 흙을 담은 상자 텃밭’ 2000개를 노인정, 학교, 어린이집, 그리고 원하는 주민에게 분양했던 연수구는 올해 도시 텃밭을 분양하고 도시 농업 아카데미로 도시 농업의 활성화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를 위해 조례를 제정한 연수구는 도시농업위원회까지 가동하기 시작했다. ‘학교 텃밭옥상 텃밭을 지원해 주민들이 신선하고 청정한 채소 재배를 통해 공기 질을 개선하는 것은 물론 어린이들에게는 식물 성장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체험교육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연수구는 텃밭으로 노인들에게는 소일거리를, 주부들에게는 건강한 여가와 웰빙 식재료를 제공하는 등 다양한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했다.

 

연수구 관계자가 주민의 여가선용뿐만 아니라 정서 순화와 이웃과의 소통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평가한 도시 농업은 이미 많은 국가에서 일반화되어 있다. 가까운 일본도 그렇지만,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지방자치단체에서 확보한 대규모의 땅에 시민들을 위한 텃밭을 조성한다. 원하는 시민에게 가구 당 100제곱미터의 텃밭을 저렴하게 임대해주는 독일은 텃밭이 가족과 이웃의 소통공간이 되었다. 주말마다 농사를 짓거나 정원을 가꾸는 텃밭은 도시의 중요한 녹지축이 된다. 따라서 독일의 도시 당국은 텃밭을 도심지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련하고, 주말이면 재배한 농작물을 교환하는 장터를 시내의 광장에서 열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한다.

 

구소련이 시세의 5배로 설탕과 담배를 구입해 식량을 수입해 해결해오던 쿠바는 소련 붕괴 이후 한동안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이 경제봉쇄를 즉시 단행하자 식량을 수입할 수 없기 때문이었는데, 도시 텃밭이 성공적으로 확산된 지금, 미국의 경제봉쇄는 힘을 잃었다. 수입할 화학비료와 농기계가 없어 시작한 도시농업이었어도 현재 아바나를 비롯한 주요 도시의 텃밭에서 식량을 자급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량이 늘어난 까닭이다. 그뿐 아니다. 약품마저 제 때 수입하지 못해 걱정스러워했던 민중들의 건강도 크게 향상되었다. 신선한 농산물을 제철에 먹고, 텃밭을 가꾸며 시민들이 적당한 운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적극적 지원으로 도시농업이 정착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생하는 식물에서 의약품을 찾으면서 의료비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도시 텃밭의 용지로 개발을 앞둔 빈 터나 자투리땅을 활용하는 임시방편도 있지만 앞서가는 국가처럼 안정적으로 텃밭을 제공하려면 넓은 농토를 사전에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로해 농사를 계속 짓기 어려워하는 농부와 장기 임대 계약을 맺거나 경우에 따라 농토를 구입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되도록 주민들의 주요 주거지역과 멀지 않아야 좋은데, 가까운 곳에서 넓은 농지를 확보할 수 없다면 셔틀버스를 제공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옥상도 물론 활용할 수 있다. 쿠바는 허리 높이에 흙을 담은 용기를 여럿 마련한 도시 농장에서 신선한 채소를 생산한다. 퇴비를 잘 활용하면 뿌리가 내리는 흙의 깊이가 깊지 않아도 대부분의 채소는 기를 수 있다. 허리 높이라면 초보자도 쉽게 농사에 접근한다.

 

한 때 대구시는 학교나 관공서 마당에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열도록 지원해 주말마다 모인 농부와 소비자들로 활기를 띈 적 있다. 쿠바는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가져와 판매하는 장소를 도시 곳곳에 마련한다. 전업 농부가 중간상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신선한 농작물을 판매한다면 서로 도움이 되고, 오래 거래하면서 서로 신뢰를 쌓을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나 종교단체가 제공하는 광장에서 도시텃밭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이웃과 나눌 수 있다면, 시민들은 서로 돈독해질 수 있다. 우정이 쌓이는 주민들은 주민등록을 둔 지역에 애정을 느낄 테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삶이 지역에 뿌리내리면서 이른바 정주의식이 높아질 것이다.

 

도시의 어린이들은 밥이 어떻게 식탁에 올라오게 되는지 거의 관심이 없다. 김치와 된장, 깻잎과 채소들이 어떻게 재배되어 대형 마트에 쌓이는지 볼 기회가 없다. 농산물의 실상을 모르는 많은 도시 어린이들은 지나치게 달거나 짠 가공식품에 길들여졌거나 고기 위주의 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학교와 학원을 왕복하면서 적당한 운동조차 하지 못해 비만이 많고 성인병에 시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아이 손을 잡고 분양받은 텃밭에서 채소를 재배한다면 아이는 제가 기른 채소를 먹으며 편식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몸을 움직이면서 건강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땅의 가치를 인식하면서 잃어버린 고향 정취를 뇌리에 남길 수 있다.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농촌이 소외되지 않는다. 곡식과 축산물을 생산하는 농촌은 도시 텃밭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는 채소와 과일과 같은 농산물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 도시 소비자에게 농사법을 알려주며 신뢰가 쌓이면 일손 바쁜 농번기에 도시의 소비자는 농촌을 도울 수 있다. 그렇듯 도시의 텃밭은 시민과 시민, 농촌과 도시, 생산자와 소비자, 주민과 지역,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 지방자치단체와 생활협동조합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충분하다. (푸른두레생협, 20125월호)

 
 
 

서평·추억

디딤돌 2012. 1. 20. 22:28

내일을 위해 먼저 연착륙한 쿠바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 요시다 타로 지음, 송제훈 옮김, 서해문집, 2011.

 

2008년 초, 멕시코 칸쿤 공항에서 쿠바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작은 종이 한 장이 대신하는 비자는 여권에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쿠바를 다녀왔다는 기록이 없는 여권이므로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미국 여행에 불이익은 없을 거라고 가이드는 전했다. 아바나의 아담한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며 본 풍경은 시계를 수십 년 뒤로 돌린 느낌이었다. 6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봤을 승용차와 트럭을 개조한 버스, 그리고 객실을 매단 자전거가 시내의 도로를 메웠는데, 거리의 시민들 표정은 한결같이 편안해보였다.

 

쿠바에서 이솝의 개미와 베짱이이야기는 개미와 매미로 바뀌었다고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으로 쿠바의 도시농업을 2004년에 소개했던 요시다 타로가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에서 전한다. 그 사이 공무원에서 교수가 된 그는 한국 독자에서 이유를 전한다. 베짱이처럼, 겨울철 먹을 게 없어 찾아가자 내가 땀 흘리며 일할 때 너는 무얼 하고 있었지?” 하고 심술궂게 묻는 개미에게 매미는 열심히 노래해서 모두를 즐겁고 신명나게 만들어주고 있었지라고 대답했다는 거다. 그러자 일 밖에 몰랐던 개미는 깊게 반성하고 이제부터 함께 춤추며 살자고 약속했다는 이야기.

 

등 뒤에 차가 다가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여유로워진다. 다정한 친구와 천천히 움직이며 상가에 진열된 물건을 요모조모 살필 수 있다. ‘차 없는 거리에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대개 그렇다. 갑자기 어려워지더라도 누군가, 그 누군가가 국가든 이웃이든, 도와줄 거라는 신뢰가 있다면, 빈자든 부자든, 그의 삶은 편안해진다. 열광하는 관중을 향해 땀에 젖은 몸을 던지는 무대 위의 인디밴드처럼,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다면, 시민들의 삶은 편안할 것이다. 우리 눈에 많이 남루한 쿠바에서 본 시민들의 모습이 바로 그랬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대처할 여유도 없이 맞닥뜨려야 했던 배고픔을 도시농업으로 극복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일러준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은 많은 한국 사람들을 쿠바로 안내했다. 2008년 아바나 구시가지에 거치적거리는 아시아인의 대부분이 한국인이었으니 말해 뭐하랴. 한데 북한보다 형편없이 식량 자급률이 낮은 우리는 그 사이 변한 게 있나. 생각 있는 사람들이 옥상에 상자텃밭을 들여놓거나 교외로 주말마다 농기구 챙겨 나가는 일이 다소 늘었지만 도시 유기농업 단지는 언감생심이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강을 철근콘크리트로 틀어막아 재해와 오염 위험을 높인 우리는 오랜 유기농업 단지를 놀이 시설을 위해 매립하려 든다.

 

요시다 타로는 쿠바를 몰락 선진국이라 했다. 저자가 일본이 쿠바를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로 부제를 단 일본판 제목은 몰락 선진국이었다. 쉽게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주저앉은 상태를 몰락이라 할 텐데, 암울한 경제 터널을 여태 빠져나가지 못하는 일본도 아니고, 왜 입이 닳도록 상찬하는 쿠바를 몰락 선진국이라 한 걸까. 경제성장을 이루며 에너지를 펑펑 쓰고 살아도 더 이상 사람들은 행복해지지 않는다. 더 검소한 생활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 프랑스 정치경제학자의 하강 개념을 강조하며 요시다 타로는 쿠바는 사회적 연대와 전통 지식의 부활에 힘입어 부드러운 몰락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석유 없이 상상할 수 없는 현대의 산업문명은 장담하건데, 무너질 수밖에 없다. 머지않았다. 석유 생산의 정점이 이미 지나간 상황에서 한계는 분명하다. 석유가 희귀해지거나 아예 없어질 사회를 대비하는 행동이 벌써부터 필요했건만, 우리를 포함한 세계는 한사코 외면하고 있다. 녹색평론최근호(122)에 소개된 요르크 프리드리히스의 주장을 인용하는 요시다 타로는 역사적으로 석유의 급작스런 단절을 경험한 3개 나라를 비교한다. 미국 석유를 의존하다 경제봉쇄가 두려워 침략을 도모했다 큰 낭패를 본 1940년대의 일본과 더불어 소련 붕괴로 석유 도입이 차단되면서 해마다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북한이 그렇다. 비극인 두 나라와 달리 쿠바는 연착륙했다. 구소련의 패망 이후 유기농업과 의료의 자급으로 쿠바는 부드럽게 몰락했다는 거다.

 

국제 시세보다 몇 곱절로 설탕과 담배를 구입하던 소련이 무너졌을 끊었을 때, 감당하기 두려운 시행착오를 거치며 도시 유휴지와 자투리땅에 농작물을 심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식상하다. 본래 기름진 쿠바는 인구에 비해 땅이 넓다. 유기농업을 받아들일 최상을 조건을 가지고 있다. 민간의 참여와 정부의 적극적인 배려로 도시에 농산물을 심어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된 배경에 공동체의 연대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중의 돈이 많은지 적은지 여부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존중되며 배려되는 사회에서 자신이 소외될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은 시민들의 행동을 이끌었을 것이다. 이웃과 자식의 내일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은 먹을거리는 물론이고 의료와 주택의 자립으로 이어졌을 테고.

 

도시 유기농업만이 위기 극복의 기재가 아니었다. 지구온난화로 더욱 강력해지는 허리케인은 쿠바를 자주 관통했고, 제대로 보수할 수 없었던 주택들은 여지없이 허물어졌지만 결국 극복했다. 석유도 자재도 드문 쿠바는 때때로 속수무책이었어도 어느새 옛이야기가 되었다.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 건축가 프로그램이 큰 역할을 했다. 기획과 설계 단계부터 집주인들의 의견을 반영하며 자긍심을 심는데 그치지 않았다. 자원이 부족할 뿐 아니라 허리케인의 피해가 많은 쿠바에서 자립할 수 있는 건축을 생각해냈다. 화산재와 대나무를 이용하는 건축을 실용하자 비용은 물론 이산화탄소 배출까지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늦지 말고 쉬지 말고 일하지 말고로 표현되는 공무원에 의해 수행되는 농장의 생산력은 형편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특징을 가진 다양한 종자를 보전하며 나누는 생태농업으로 마을이 자급하고, 남는 걸 시장에 내놓으면서 아바나는 물론이고 지역 구석구석까지 만족하게 되었고, 삶의 자세도 달라졌다. 허리케인에 대한 희생자가 카리브의 다른 나라는 물론이고 미국보다 현저히 적은 건, 재해를 대비하는 음료수와 보존식품을 갖추고 예보에 임하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요시다 카로는 말한다. 빈곤층부터 배려하는 그들의 공동체 자세라는데, 국가와 이웃에 대한 전폭적 신뢰가 바탕에 있기 때문이리라.

 

지속 가능한 건축을 연구하는 호주인이 생활수준은 선진국에 필적한 만하면서 환경적으로 검소한쿠바의 방식을 전 세계가 받아들인다면 지구는 지속가능할 것으로 평가했고 맞는 이야기일 테지만, 그렇다고 시민 사이의 불만이나 사회에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니다. 미국의 자본주의를 경험한 세대는 드물어졌어도 코앞의 미국문화가 여과 없이 전파되는 쿠바에서 돈의 위력이 클 수밖에 없다. 쿠바에서 실력을 쌓은 야구나 농구선수가 미국으로 건너가는 행렬에 화가라고 빠지지 않지만 그들은 조국에 무시할 수 없는 돈을 부친다. 정작 문제는 시민 사이의 빈부격차다. 전에 없던 위화감이 조성된다.

 

시민들을 위한 일반페소로 근사한 가전제품을 구할 수 없다. 달러와 거의 11로 교환되는 전환페소가 있어야 하는데, 외국 관광객이 사용하는 전환페소는 쉽게 손에 들어오지 못한다. 관광 가이드를 비롯해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상인, 숙박업소 종사자들이 전환페소를 얻을 수 있고, 전환페소를 위해 외국 남성에게 몸을 파는 여성도 드물지 않은 게 현실이다. 2008년 묵었던 호텔에서 은근히 다가온 지배인이 쿠바 산 시거를 내밀기도 했다. 그만큼 불만도 잠복되었겠지만 쿠바인의 표정들은 밝다. 미국이 코앞에서 으름장을 놓아도 낙천적인 건, 50여 년 전 악랄했던 독재정부를 물리친 현 정부에 대한 지지뿐이 아니라 사회적 결속일 것이다.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한 자신의 저력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굳다.

 

지금의 쿠바처럼 느리게 살며 자연과 조화롭고 풍요롭던 에도시대를 그리워하는 요시다 카로는 쿠바에서 일본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믿는데, 식량과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하면서 낭비하는 우리의 대안은 무엇이어야 하나. 몰락할 준비가 돼 있는가. (프레시안, 2012.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