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7. 12. 15. 17:40


건조한 겨울철, 안방에서 가습기 역할을 하는 작은 어항을 누비던 열대어가 죽었다. 태국 원산인 베타라는 종류로 지느러미가 비단 한복의 치마폭처럼 펼쳐지는 4센티미터 정도의 열대어다. 아침저녁 먹이를 줄 때마다 얼마나 보채는지 조금만 늦어도 우리를 책망하는 듯했는데, 며칠 전부터 수초에 몸을 기대며 먹이를 마다하는 게 이상했다. 옆구리에 점점 자라는 혹이 암이라고 어항을 설치한 큰애가 귀띔했는데, 그 때문이었을까?


투견의 존재는 알지만 투어라니. 원산지 태국은 베타 두 마리를 한 어항에 넣어 싸움을 시키며 돈을 건다고 한다. 치마폭 같은 지느러미를 잘 발달하게 하려고 아이는 이따금 어항 밖에 거울을 놓았다. 거울 속 자신을 보고 어항 유리를 뚫을 듯 덤벼들던 녀석은 안방에서 한 해 겨울을 보냈다. 이번 겨울, 베타가 사라져 휑해진 어항에 무엇을 넣어야하나? 어항 속 장식물 아래 웅크려 죽은 녀석을 건져내면서 마음 한 쪽이 시리다.


수년 전 큰애는 열대어 아스트로 두 마리를 거실에 키웠다. 커다란 어항이 어색할 정도로 앙증맞던 녀석은 2년 만에 30센티미터 이상 자랐다. 성장 속도가 더딘 녀석을 그렇게 괴롭히더니 어항을 독차지했고 어항이 작아졌다. 수세에 몰리던 녀석은 어항을 탈출, 현관의 신발 사이에 뻣뻣하게 누워있었다. 라면 굵기의 먹이를 우적우적 먹으며 징그러울 정도로 자란 녀석은 별안간 먹이를 외면하더니 조용히 어항 바닥에 내려앉아 누웠다. 이후 큰애는 한동안 열대어 반입을 꺼렸는데, 베타가 죽은 뒤에 무엇을 들이려나?



사진: 반려동물의 본성을 배려하는 입양은 자연에 대한 애틋함을 함양하게 된다. (출처는 페이스북) 


작더라도 정을 주었던 생명이 죽으면 마음이 아프다. 실험동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연구자나 대학원생은 절대 실험동물에 감정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철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실험동물로 줄기세포를 연구하던 어떤 학자는 생명윤리를 논의하는 토론회에 나와 동물에 복지를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펴 청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하면 연구결과의 객관성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거 같다.


한 미국인 작가의 경험담이다. 대학원 시절 실험용 쥐를 키웠는데, 일부러 그 중 한 마리에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이름을 붙여 먹이를 줄 때마다 다정하게 불렀다는 것이다. 연구를 위해 주사를 놓을 때는 거부감이 없었는데, 자신이 다가갈 때마다 반갑게 반응하던 실험쥐를 차마 죽일 수 없었다고 그는 실토했다. 지도교수 몰래 후배에게 부탁한 사실이 드러나 대학원을 중도에 포기할 위기에 몰렸다는 게 아닌가.


실험쥐도 그러한데 달려와 안기는 애완견은 어떨까? 우리는 대표적 애완동물인 개나 고양이를 집에 들여올 때 흔히 입양한다고 말한다. 주인에게 귀여움을 떨거나 충직한 애완동물이라기보다 식구와 마찬가지인 반려동물이라고 말한다. 애틋함의 발로일 테지만 입양하는 동물에게 동의를 구한 건 아니다. 입양하면서 우리는 그 동물의 생태 습성을 무시할 때가 많다. 그 동물이 자신을 들인 사람과 얼마나 마음을 맞출 수 있는지 살피는데 대체로 인색하다. 식구와 다름없다지만 내 집의 반려동물을 이웃이 어떻게 생각할지 살피지 않는 경우도 있다.


10년 넘게 동거동락하던 애완견이 죽자 대성통곡을 한 누이는 다시는 개를 입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파트 실내를 벗어나지 못한 그 애완견은 누이의 식구에 앙큼했지만 방문객을 몹시 경계해 민망하게 만들었다. 몸집은 작아도 매섭게 짖고 으르렁대는 통에 방에 가둬야할 때가 많았다. 현관을 열면 누이를 보고 반갑게 달려드는데 날카로운 발톱이 무색하게 미끄러지기 일쑤였으니 집안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그 애완견도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반갑지 않은 사람이 쓰다듬으려 하면 이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같은 종류에 치열할 경쟁심을 드러내는 베타와 같은 열대어도 있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사회성을 가진다. 애완견이든 고양이든. 아이가 장성해 독립한 뒤 홀로 남은 사람은 적적하다. 혼자 살아가는 젊은이도 마찬가지인데 외로워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이가 많다. 사람의 고독을 달려주지만 사람이 밖에 나가면 반려동물이 외톨이가 된다. 외톨이 반려동물을 위한 인공지능 기기가 등장했지만 스킨십과 냄새로 감응하는 동물에게 위안이 될 성싶지 않다. 집안에 틀어박힌 반려동물의 스트레스는 다양한 증세로 나타나겠지.


우울증 치료제가 반려동물에게 가장 많이 처방된다는 전문가의 소견을 들었다. 평소 하지 않던 짓을 반복하거나 잔병에 시달리는 반려동물을 수의사에 데리고 가면 우울증 치료제를 처방한다는 건데, 반려동물의 배설물에 섞인 우울증 치료제의 성분이 상수원에서 검출될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애완동물을 제대로 반려하고 있을까? 동물의 눈높이에서 동물복지를 배려하는 걸까?


공원을 걷다보면 선글라스에 신발까지 신은 애완견을 이따금 본다. 귀와 꼬리를 염색한 개도 보인다. 사람 피부에 자극을 주는 염색약이 애완견에 어떤 피해를 주는지 알지 못하지만 선글라스와 신발은 개의 행동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사람 보기에 귀여울지 모르지만 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닐 것이다. 그 애완견은 스트레스가 쌓이고 우울증이 커지겠지. 최근 애지중지하던 반려동물이 이웃에 상해를 입한 뉴스를 듣는다. 목줄을 하지 않은 개에 물린 이웃이 사망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키우던 개에 물려 사망하는 노인이 있고 심지어 젖먹이가 치명상을 입는 사례도 보도된다.


요사이 자신의 애완견과 근린공원을 걷는 사람은 대부분 목줄을 채웠다. 하지만 어린이를 위협하는 개가 없는 건 아니다. 입양하기 전에 훈련을 시키면 이웃에 위협 주는 행동은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주장이 있지만, 유럽과 달리 입양 전에 훈련시키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거의 없다. 개에 인식표를 달아 놓은 사람도 많지 않다. 떠도는 애완견의 임자를 찾아줄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는 만큼 보호소에서 안락사되는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 공원 후미진 곳에 방치된 애완견의 분변도 여전하다.


길고양이에 먹이를 주는 이른바 캣맘은 고양이 사료를 가방에 넣고 다닌다. 사람 눈을 피하며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는 길고양이도 먹이를 주면 다가오고 익숙해지면 스킨십을 허용한다. 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뒤지던 길고양이는 모처럼 별식을 맛보겠지만 사료는 사실 이빨이 날카로운 개나 고양이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 곁에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 대안도 없다. 사료에 익숙해지면 타고난 습성도 잃어간다.


개나 고양이, 열대어나 새장 안의 새들은 원래 자연을 자유롭게 누비던 생명이었지만 사람 곁에 다가오면서 보살핌이 없으면 생명을 이어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품종개량을 앞세운 사람의 과학기술은 타고난 습성을 상당히 없앴다. 식용을 위해 극단적으로 육종한 가축은 말할 것도 없고 다채롭게 육종된 애완동물도 본성을 잃었다. 하지만 그 동물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환경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다.

동물을 반려하려면 그 동물의 본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본성이 억압되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갈등이 유발되며 병이 도진다. 애완동물의 본성을 배려할 최소한의 환경을 보장할 수 없다면 입양을 포기하는 게 옳지 않을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다면 애완동물보다 장난감을 권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캥거루나 이구아나 같은 타국 야생동물의 입양은 자제해야 한다. 야생동물 카페는 터무니없다. (야곱의우물, 20181월호)

- 작더라도
정 을 주었던 생명 이 죽으면
마음 이 아프다.

실험(( 용)) 동물 도
마찬가지 라고
한다.

연구 자 나 대학원 생 은
절대( 로)
실험 동물 에
감정 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철칙 이 라고
한다.’

- ‘사람 이나
(인간 이나 )
동물 이나
본 성 이 억압 되면
stress 가 쌓이고
갈등 이 유발 되며
병 이 도진다.

---

- “(동물) 동물을 반려한다는 것”

- “작더라도 정을 주었던 생명이 죽으면 마음이 아프다. 실험동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연구자나 대학원생은 절대 실험동물에 감정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철칙이라고 한다.”

- “사람이나 동물이나 본성이 억압되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갈등이 유발되며 병이 도진다.”

---

- “(동물) 동물을 반려한다는 것”
“http://blog.daum.net/brilsymbio/13735770”

- “2017.12.15 17:40”

- “작더라도 정을 주었던 생명이 죽으면 마음이 아프다. 실험동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연구자나 대학원생은 절대 실험동물에 감정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철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실험동물로 줄기세포를 연구하던 어떤 학자는 생명윤리를 논의하는 토론회에 나와 동물에 복지를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펴 청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하면 연구결과의 객관성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거 같다.”

- “10년 넘게 동거동락하던 애완견이 죽자 대성통곡을 한 누이는 다시는 개를 입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같은 종류에 치열할 경쟁심을 드러내는 베타와 같은 열대어도 있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사회성을 가진다. 애완견이든 고양이든. 아이가 장성해 독립한 뒤 홀로 남은 사람은 적적하다. 혼자 살아가는 젊은이도 마찬가지인데 외로워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이가 많다. 사람의 고독을 달려주지만 사람이 밖에 나가면 반려동물이 외톨이가 된다. 외톨이 반려동물을 위한 인공지능 기기가 등장했지만 스킨십과 냄새로 감응하는 동물에게 위안이 될 성싶지 않다. 집안에 틀어박힌 반려동물의 스트레스는 다양한 증세로 나타나겠지.”

- “동물을 반려하려면 그 동물의 본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본성이 억압되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갈등이 유발되며 병이 도진다.”

--- ---

- “(25) 김성경 - - 작더라도 정 을 주었던 생명 이 죽으면 마음 이 아프다. 실험(( 용)) 동물 도 마찬가지 라고...”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961238620805053&id=100007568021435&pnref=story”

- “<b>김성경</b>”
“방금”. 17.1216토.2342.

… …
월요일 오후에 다녀갑니다.
소중하고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

 
 
 

서평·추억

디딤돌 2012. 12. 15. 11:07

   역지사지로 배려하는 아주 좁은 공간

 

생추어리농장, 진 바우어 지음, 허형은 옮김, 책세상, 2011.

 

 

남녀 젊은이들 짝 맞추기 프로그램은 언제나 인기리에 방영된다. 요즘 방영하는 그런 프로그램은 출연자의 이름을 생략하고 1, 2호라 부른다. 그래서 어색한데,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하면 객관적으로 시청하기 어렵다고 제작팀이 판단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동물을 입양하면서 이름을 붙인다. 그래야 반려동물에 사사로운 감정을 북돋을 수 있다. 저명한 침팬지 학자 제인 구달은 침팬지에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선배의 비난을 받은 적 있다. 1호 침팬지 2호 침팬지라 해야 연구 결과가 객관적일까.


비슷비슷한 반려동물을 여럿 입양한 사람은 한 마리 한 마리를 구별한다. 개성이 있기 때문일 텐데, 집안이나 울타리 안에서 쓰다듬는 동물이라면 오래 키우며 개성을 구별할 수 있지만 가끔 방문하는 객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다. 동물이 제 이름을 얼마나 기억하고 간직하는지 궁금한데, 그 여부와 관계없이, 동물이든 사람이든, 개성이 배려되는 공간에서 살아간다면 객관을 위장한 번호보다 사사로운 감정을 바탕으로 정하는 이름이 필요할 것 같다.


한 마리의 소에 개성이 있을까. 당연하다. 젖소를 십 여 마리 키운 친척은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새벽에 주인 발소리를 반기며 다가오는 젖소마다 별명을 붙여 구별했다. 새침이, 욕심이, 고집통, 그런 식이다. 닭 우리에 새로운 무리를 넣으면 난리가 난다. 서로 쪼아대지만, 서열이 정해지면 다시 조용해진다. 닭은 99마리의 서열을 기억한다고 하니, 술만 마시면 선후배 사이에도 멱살을 잡는 사람은 머쓱할 밖에. 한데 요즘 대부분의 사람은 동물의 개성을 살필 기회가 없다. 한 마리만 키우는 반려동물에 구별할 개성이 없지만, 요사이 목장은 농부가 일일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축을 사육한다.


제가 낳은 자식도 많으면 언제나 애지중지할 수 없는데, 가축은 사람에게 오죽할까. 지난 구제역 파동 때, 목장주들은 가족처럼 사육한다고 말은 꺼냈지만, 살처분할 때 무참했다. 자식의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공들여 키우던 소 한 마리라면 아쉬운 마음으로 도축업자에게 넘길 테지만, 수많은 가축을 모아놓고 사육하다 일제히 도축업자에 넘기는 요즘 목장이야 어디 그런가. 가축의 개성을 구별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함부로 다뤄지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가축들이 다치거나 죽는다. 공장에서 불량 부품이나 파손된 제품을 마구 버리는 것처럼. 하지만 이름이 붙지 않은 가축들도 살아 있고 개성이 분명히 있다. 기계 부품처럼 다뤄지는 과정에서 가축들은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진 바우어는 동물, 그 중에 가축의 개성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 개성을 말살하며 사육하는 목장에서 다쳤거나 그런 상태에서 방치되는 동물을 구조해 안전한 공간으로 옮겨 보살핀다. 타고난 개성을 발산하며 남은 수명 동안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는 일을 미국에서 시작했다. 사육 가축이 대단히 많은 미국에서, 물론 그 혼자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공장식 축산 과정을 볼 기회가 없고, 보더라도 외면하겠지만 그는 직시했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마음을 모아 고통 받는 동물을 구조하는 일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통 농장에서 한두 마리 키우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공장식 축산이 일으키는 가축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차피 고기를 위해, 또는 가죽을 위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므로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진 바우어는 달랐다. 비록 살코기를 위해 사육하고 어린 나이에 도축될 운명이라고 해도,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닌가. 살아 있는 동안 타고난 개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온당하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사육장을 돌아다닌다. 어린 상태에서 몸집이 부풀려진 가축들이 폭력에 가까운 사육으로 기진맥진해 쓰러진 모습을 보고 분노하고, 그런 가축들을 구조하지만, 거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인도적인 사육과 도축을 위한 제도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아무런 제지 없이 경제적 방식으로 사육해왔던 목장주들은 돈만 많은 게 아니라 권력도 크다. 로비력을 총동원해 진 바우어가 개선하려는 동물학대 방지 법률을 차단하는데 번번이 성공한다. 물론 그런다고 포기할 진 바우어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성 프란체스코라는 호칭에 걸맞게, 언론을 통해 축산 환경의 문제를 지적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의원을 설득해 법률 개정으로 이끈다. 비단 동물의 학대 방지에서 그치는 건 아니다. 그런 축산환경에 종사하는 이의 인성도 황폐화되지 않던가. 하지만 어렵게 개정한 관련 법률은 변죽만 울린 뿐이다. 탐욕스런 축산, 고기를 탐하는 사람들의 식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동물의 눈높이에서 만족스런 개선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진 바우어가 제아무리 성탄절의 산타클로스처럼 동분서주한다고 해도, 미국 땅에서 사육되는 가축의 일부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다. 즉각 생추어리농장으로 옮겨도 그 혜택은 일부 가축만 받을 뿐이다. 땅을 아무리 확보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구조된 동물의 일부를 진 바우어는 살갑게 소개한다. 개성이 배려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행복한 모습을 독자에게 전하는데, 우리는 어떤가. 미국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가축을 사육하는 우리는 동물의 개성을 배려하고 있을까. 개나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을 구조하는 기관이 없지 않지만 목장에서 사육하는 가축은 방치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축의 개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최근 정부는 멧돼지는 한 마리에 10만원, 고라니는 2만원, 꿩은 3천원이라고 수렵인들에게 고지한 모양이다. 그 사실을 알 자연의 이웃은 사람의 객관적 가격을 되묻고 싶을 텐데, 일부 사람들은 동물을 물건처럼 가격으로 거래하고 피해 보상하는 동물보호법을 개정하려 애쓴다. 하지만 아직 개정을 확신할 수 없는 동물보호법 개정안은 가축을 여전히 소외한다. 진 바우어 같은 이가 이 땅에 없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도 동물인데, 진 바우어처럼 동물의 처지를 역지사지할 수 없을까. (우리와다음, 2012년 겨울호)

 
 
 

서평·추억

디딤돌 2007. 2. 8. 09:51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레이 그릭ㆍ진 스윙글 그릭 지음,

김익현ㆍ안기홍 옮김, 다른세상, 2005.



대학원 시절, 친하게 지내는 후배의 연구실에 놀러갔는데, 실험용 흰쥐 케이지를 늘어놓던 연구원이 놀라운 재주를 보여주겠단다. 1분에 쥐 60마리를 죽이는 신기를 구경하라는 거다. 한 마리 씩 꺼내, 한손으로 귀를 움켜쥐고 한손으로 꼬리를 잡은 연구원은 순간 강력한 스냅을 준다. 찰라 그 실험동물은 절명했다. 척수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신기는 50초 만에 마무리됐고, 실험 테이블에는 간이 떼어질 운명인 쥐 60마리가 얌전하게 포개졌다. 그 연구실은 의과대학의 약리학실이었다.

 

‘LD50’이라는 수치가 있다. ‘lethal dose 50%’의 약어로, 굳이 해석하자면 ‘실험에 사용한 동물의 절반을 죽이는데 들어가는 수치’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화장품 회사에서 새로운 마스카라를 개발한다고 치자. 회사는 상품성 뿐 아니라 안전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해야 하는데, 그럴 때 동원되는 수치가 LD50이다. 연구원은 개발 중인 마스카라를 여러 마리의 실험동물에 억지로 먹인다. 실험동물의 종류와 개체수와 마스카라를 처리하는 방법은 연구 설계에 따라 다르겠지만, 연구원은 실험 중인 동물의 절반이 죽으면 마스카라 먹이기를 중단하고, 그때까지 먹인 양을 실험동물의 무게와 대비한다. 그렇게 LD50을 밝힌 연구원은 마스카라를 사용할 사람의 몸무게와 죽은 실험동물의 무게를 견주어야 한다. 이제 화장품 회사는 까다로운 고객의 질문에 답할 것이다. 기준치가 몇 PPM이므로 마스카라를 몇 박스를 한꺼번에 먹지 않는 한 위험성은 없다고.

 

화장품만이 아니다. 수많은 유기화학물질의 안정성이 그렇게 산정된다. 대기오염 기준치도 다르지 않다. 무수한 실험동물의 희생으로 기준치가 작성되지만 아무도 희생된 실험동물을 애도하지 않는다. 가끔 ‘위령제’를 지내지만 어디 죽은 동물을 추도하는 자리던가. 죽여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연구원을 위안하는 술자리로 이어지는 게 보통 아닌가.

 

눈을 깜빡일 수 없고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고정된 토끼를 생각해보자. 토끼의 눈에 화학물질 녹인 액체가 똑똑똑, 사정없이 떨어질 테고, 절반의 눈에 치명적 이상이 발생해야 고문은 종료될 터. 토끼는 얼마나 괴로울까. 그런데 혹독한 실험을 용케 견딘 토끼는 해방되는가. 그럴 리 없다. 나머지 눈도 활용해야 한다. 마스카라를 먹고 살아남은 실험동물은 다른 실험을 위해 잠시 안정을 취할 수 있을까. 아니다. 죽일 가능성이 높다. 치료는 언감생심. 비싼 사료를 아껴야 한다. 연구 결과의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이미 엉망이다.

 

사람은 아침에 발생하는 메스꺼움도 참아내지 못하나. 메스꺼움을 치료하기 위해 ‘탈리도마이드’라는 진통제가 개발되었다. 메스꺼움은 임신 초기에 잦다. 탈리도마이드는 임산부에게 많이 팔렸고,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임산부 중 일부는 손이나 발, 그 두 가지 다 없는 아기를 잉태하거나 출산해야 했다. 한데 끔찍한 부작용을 일으킨 탈리도마이드는 즉각 회수하지 않았다. 동물실험으로 문제가 당장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바람에 만 명의 신생아들이 결함을 갖고 계속 태어나야 했다고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을 쓴 의사와 수의사는 분노한다.

 

의약품을 개발할 때, 제약회사는 시판 전에 반드시 동물실험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실험동물이 셀 수 없게 죽어 나간다. 연구자는 동물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위험성과 안전성을 확보했다 믿을 텐데, 만일 동물실험 결과가 사람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 안전을 믿고 시판했다가 문제가 나중에 발생하면 누가 어떻게 책임져야 하나. 탈리도마이드만이 아니다. 동물실험에서 정당성을 확보한 수많은 의약품이 문제를 드러냈다. 문제가 없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 정도다.

 

비교의학을 논의할수록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의 저자들은 당혹했다. 동물과 사람의 임상은 상식과 달리 터무니없이 달랐던 것이다. 사람에게 유용한 의약품이 동물에 치명적이거나 무기력한 경우가 상당했고, 그 반대 현상도 많지 않은가. 의기투합한 그들은 동물실험에 대한 강요된 상식에 저항하며 진실을 추적한다. 동물실험은 부정확하고, 불필요하며, 사람에게 위험부담을 가중시킨다는 사실을 두루 실증한다. 그리고 호소한다. 동물실험 로비단체의 기만전략으로 유지된 대중적 혼란과 관습에 젖은 타성에서 벗어나자고. 그들이 볼 때 동물실험은 전혀 정당화될 수 없었다.

 

‘황금암을 낳는 생쥐’를 우리 연구진이 개발했다. 사람의 난소암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른바 ‘질병모델 동물’로, 수백만 원을 호가할 것으로 언론은 예찬했다. 그 생쥐, 과연 사람의 난소암을 치료해줄까.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저자들의 조언을 고려하면, 그럴 리 없을 것 같다. 생쥐의 난소암은 사람과 다를 뿐더러 생쥐 연구로 얻은 결과를 사람에 적용할 수 없는 까닭이다. 지금까지 퍼부은 엄청난 자금으로 사람이 아닌 실험동물의 질병을 정복했지만 사람의 경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치료제를 찾아낸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직접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역학조사와 임상연구다. 동물실험은 실험동물에 얽힌 자본과 연구자의 복지에 이바지할 뿐이라고 혹평하는 저자들의 견해를 상기할 때, 난소암을 갖고 태어나는 불행한 생쥐는 황금암을 낳는 생쥐다. 생쥐의 암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훨씬 비싸지 않은가. 그 생쥐, 도대체 몇 마리를 죽여야 생쥐 난소암 치료제가 개발될까.

 

개를 복제한 서울대학교 연구팀은 복제된 개를 사람의 질병모델 동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값 싸고 생애주기가 짧은 생쥐도 많은데 개를 사용할 연구자가 있을지 궁금한데, 우리 언론은 열광했다. 어떤 치료제의 효과가 동물실험으로 입증됐다면 흥분하는 언론은 그 약품을 사람에 적용할 수 없다는 연구결과엔 침묵한다고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저자들은 꼬집는다. 우리가 그 꼴이다. 저자들은 이종이식을 ‘파멸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돼지 장기를 이식하면 에이즈보다 훨씬 위험한 돼지 바이러스가 사람 사이에 창궐할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치료제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경고하는데, 우리 과학기술부는 이종장기이식 연구비로 거액을 책정했다고 홍보하고, 언론은 대서특필한다.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저자들은 동물실험의 어이없는 기원을 탐색하고 동물실험에 대한 과대망상을 고발하며 위험사례를 구체적으로 적시할 뿐 아니라 대안을 모색한다. 짐작하듯, 인간을 직접 연구하라는 거다. 저자들은 줄기세포 연구를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황우석 전 교수의 사기극에서 이야기된 줄기세포는 아니지만 걱정도 생긴다. 줄기세포의 연구윤리를 거의 언급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오랫동안 ‘기만당한 상식’을 바로잡게 될 것이므로. (출판저널, 2007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