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7. 17. 20:03

 

세상에는 수많은 기준치가 우리의 섣부른 접근을 가로막는다. 음식이든 약이든 먹으려 할 때 “잠깐 기다려!”하듯 기준치를 확인했는지 묻는다. 먹는다는 걸 의식하지 않아도 몸에 들어오는 물질에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대기오염 전광판을 밝히는 온갖 물질들, 집안에서 사용하는 분무기에서 나오는 화학물질들, 큰 맘 먹고 새로 장만한 가구에서 발산하는 물질들, 거기에다 전자제품에서 나오는 전자파까지 ‘기준치’를 만족하는지 먼저 확인하라고 성가시게 귀띔한다.

 

멈칫거리게 만드는 온갖 기준치들. 없는 것보다 낫다는 그 기준치들을 누가 어떻게 정했는지 알 수 없는 소비자들은 정신이 없다. 고개 돌릴 때마다 신경 써야할 기준치, 그 기준치는 인체에 안전하다는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한다. 식품이든 화학제품이든 만든 이가 안전을 확인한 뒤 어느 정도의 양을 허용할 수 있는지 그 수치를 표시하도록 규정돼 있다는 건데, 그러므로 믿을 수 있을까.

 

다른 건 다 그만두고, 먹을거리에 넣는 첨가물을 보자. 유난히 까다로운 소비자가 아니라면 들어갔다고 기록된 물질들이 기준치를 지켰을 거로 신뢰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회사의 제품이라고 해도 기준치 준수와 관계없이 안전을 확신할 수는 없다. 가공식품에 넣는 첨가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 같이 기준치를 지켜도 첨가물 사이의 화학반응에 의해 독성이 상승될 가능성이 있는데, 거기까지 조사해서 기준치를 정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특이한 물질에 민감할 수 있는데 그런 데까지 일일이 연구된 바도 없다.

 

수많은 기준치는 동물 실험으로 정하는데, 그 결과를 사람에게 당연히 적용할 수 있을까. 많은 전문가들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실험동물의 절반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할 경우, 그때까지 먹인 첨가물의 양을 측정해 기준치를 정하는데, 첨가물에 따라 동물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아도 사람에게 치명적인 경우가 있다는 거다. 또한 실험동물의 종류에 따라 결과가 판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준치는 무작정 믿기 어려운 게 사실일 것이다.

 

기준치가 없는 것보다 있으니 다행이라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기준치가 필요 없는 식품처럼 안전한 건 없다. 바로 경험과 문화로 먹어오던 식품들이다.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밥과 반찬과 간식이 그렇다. 지역의 농산물을 사용해 먹어오던 음식이 그렇다. 문화가 깃든 음식이다. 어떤 재료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눈으로 확인 가능한 음식, 아는 사람이 조리해 내놓는 음식이 대개 그렇다.(<> 해나무 출판사발행 박스 글)

 
 
 

서평·추억

디딤돌 2007. 2. 8. 09:51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레이 그릭ㆍ진 스윙글 그릭 지음,

김익현ㆍ안기홍 옮김, 다른세상, 2005.



대학원 시절, 친하게 지내는 후배의 연구실에 놀러갔는데, 실험용 흰쥐 케이지를 늘어놓던 연구원이 놀라운 재주를 보여주겠단다. 1분에 쥐 60마리를 죽이는 신기를 구경하라는 거다. 한 마리 씩 꺼내, 한손으로 귀를 움켜쥐고 한손으로 꼬리를 잡은 연구원은 순간 강력한 스냅을 준다. 찰라 그 실험동물은 절명했다. 척수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신기는 50초 만에 마무리됐고, 실험 테이블에는 간이 떼어질 운명인 쥐 60마리가 얌전하게 포개졌다. 그 연구실은 의과대학의 약리학실이었다.

 

‘LD50’이라는 수치가 있다. ‘lethal dose 50%’의 약어로, 굳이 해석하자면 ‘실험에 사용한 동물의 절반을 죽이는데 들어가는 수치’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화장품 회사에서 새로운 마스카라를 개발한다고 치자. 회사는 상품성 뿐 아니라 안전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해야 하는데, 그럴 때 동원되는 수치가 LD50이다. 연구원은 개발 중인 마스카라를 여러 마리의 실험동물에 억지로 먹인다. 실험동물의 종류와 개체수와 마스카라를 처리하는 방법은 연구 설계에 따라 다르겠지만, 연구원은 실험 중인 동물의 절반이 죽으면 마스카라 먹이기를 중단하고, 그때까지 먹인 양을 실험동물의 무게와 대비한다. 그렇게 LD50을 밝힌 연구원은 마스카라를 사용할 사람의 몸무게와 죽은 실험동물의 무게를 견주어야 한다. 이제 화장품 회사는 까다로운 고객의 질문에 답할 것이다. 기준치가 몇 PPM이므로 마스카라를 몇 박스를 한꺼번에 먹지 않는 한 위험성은 없다고.

 

화장품만이 아니다. 수많은 유기화학물질의 안정성이 그렇게 산정된다. 대기오염 기준치도 다르지 않다. 무수한 실험동물의 희생으로 기준치가 작성되지만 아무도 희생된 실험동물을 애도하지 않는다. 가끔 ‘위령제’를 지내지만 어디 죽은 동물을 추도하는 자리던가. 죽여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연구원을 위안하는 술자리로 이어지는 게 보통 아닌가.

 

눈을 깜빡일 수 없고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고정된 토끼를 생각해보자. 토끼의 눈에 화학물질 녹인 액체가 똑똑똑, 사정없이 떨어질 테고, 절반의 눈에 치명적 이상이 발생해야 고문은 종료될 터. 토끼는 얼마나 괴로울까. 그런데 혹독한 실험을 용케 견딘 토끼는 해방되는가. 그럴 리 없다. 나머지 눈도 활용해야 한다. 마스카라를 먹고 살아남은 실험동물은 다른 실험을 위해 잠시 안정을 취할 수 있을까. 아니다. 죽일 가능성이 높다. 치료는 언감생심. 비싼 사료를 아껴야 한다. 연구 결과의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이미 엉망이다.

 

사람은 아침에 발생하는 메스꺼움도 참아내지 못하나. 메스꺼움을 치료하기 위해 ‘탈리도마이드’라는 진통제가 개발되었다. 메스꺼움은 임신 초기에 잦다. 탈리도마이드는 임산부에게 많이 팔렸고,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임산부 중 일부는 손이나 발, 그 두 가지 다 없는 아기를 잉태하거나 출산해야 했다. 한데 끔찍한 부작용을 일으킨 탈리도마이드는 즉각 회수하지 않았다. 동물실험으로 문제가 당장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바람에 만 명의 신생아들이 결함을 갖고 계속 태어나야 했다고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을 쓴 의사와 수의사는 분노한다.

 

의약품을 개발할 때, 제약회사는 시판 전에 반드시 동물실험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실험동물이 셀 수 없게 죽어 나간다. 연구자는 동물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위험성과 안전성을 확보했다 믿을 텐데, 만일 동물실험 결과가 사람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 안전을 믿고 시판했다가 문제가 나중에 발생하면 누가 어떻게 책임져야 하나. 탈리도마이드만이 아니다. 동물실험에서 정당성을 확보한 수많은 의약품이 문제를 드러냈다. 문제가 없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 정도다.

 

비교의학을 논의할수록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의 저자들은 당혹했다. 동물과 사람의 임상은 상식과 달리 터무니없이 달랐던 것이다. 사람에게 유용한 의약품이 동물에 치명적이거나 무기력한 경우가 상당했고, 그 반대 현상도 많지 않은가. 의기투합한 그들은 동물실험에 대한 강요된 상식에 저항하며 진실을 추적한다. 동물실험은 부정확하고, 불필요하며, 사람에게 위험부담을 가중시킨다는 사실을 두루 실증한다. 그리고 호소한다. 동물실험 로비단체의 기만전략으로 유지된 대중적 혼란과 관습에 젖은 타성에서 벗어나자고. 그들이 볼 때 동물실험은 전혀 정당화될 수 없었다.

 

‘황금암을 낳는 생쥐’를 우리 연구진이 개발했다. 사람의 난소암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른바 ‘질병모델 동물’로, 수백만 원을 호가할 것으로 언론은 예찬했다. 그 생쥐, 과연 사람의 난소암을 치료해줄까.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저자들의 조언을 고려하면, 그럴 리 없을 것 같다. 생쥐의 난소암은 사람과 다를 뿐더러 생쥐 연구로 얻은 결과를 사람에 적용할 수 없는 까닭이다. 지금까지 퍼부은 엄청난 자금으로 사람이 아닌 실험동물의 질병을 정복했지만 사람의 경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치료제를 찾아낸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직접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역학조사와 임상연구다. 동물실험은 실험동물에 얽힌 자본과 연구자의 복지에 이바지할 뿐이라고 혹평하는 저자들의 견해를 상기할 때, 난소암을 갖고 태어나는 불행한 생쥐는 황금암을 낳는 생쥐다. 생쥐의 암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훨씬 비싸지 않은가. 그 생쥐, 도대체 몇 마리를 죽여야 생쥐 난소암 치료제가 개발될까.

 

개를 복제한 서울대학교 연구팀은 복제된 개를 사람의 질병모델 동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값 싸고 생애주기가 짧은 생쥐도 많은데 개를 사용할 연구자가 있을지 궁금한데, 우리 언론은 열광했다. 어떤 치료제의 효과가 동물실험으로 입증됐다면 흥분하는 언론은 그 약품을 사람에 적용할 수 없다는 연구결과엔 침묵한다고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저자들은 꼬집는다. 우리가 그 꼴이다. 저자들은 이종이식을 ‘파멸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돼지 장기를 이식하면 에이즈보다 훨씬 위험한 돼지 바이러스가 사람 사이에 창궐할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치료제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경고하는데, 우리 과학기술부는 이종장기이식 연구비로 거액을 책정했다고 홍보하고, 언론은 대서특필한다.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저자들은 동물실험의 어이없는 기원을 탐색하고 동물실험에 대한 과대망상을 고발하며 위험사례를 구체적으로 적시할 뿐 아니라 대안을 모색한다. 짐작하듯, 인간을 직접 연구하라는 거다. 저자들은 줄기세포 연구를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황우석 전 교수의 사기극에서 이야기된 줄기세포는 아니지만 걱정도 생긴다. 줄기세포의 연구윤리를 거의 언급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오랫동안 ‘기만당한 상식’을 바로잡게 될 것이므로. (출판저널, 2007년 3월호)

 
 
 

서평·추억

디딤돌 2005. 11. 7. 19:04
 

레이 그릭, 진 스윙글 그릭 지음, 김익현, 안기홍 옮김(2005),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다른세상.



미국의 어느 연구소 실험실. 지하실로 천천히 내려가니 어두컴컴한 가운데 커다란 철창상자가 눈에 들어오고 그 안에는 침팬지가 멍하니 앉아있다. 가는 불이 커지고 인기척도 들었겠지만 침팬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침팬지의 복지를 염려해 찾아온 제인 구달은 이미 저명한 상태다. 연구소장은 사육실을 굳이 보아야겠다는 제인 구달을 제지하지 못한다. 어린 침팬지가 갇혀있는 철창상자로 다가간 제인 구달은 안내인의 만류를 가볍게 뿌리치고 철창 안에 손을 넣는다. 그리고 초점 잃은 침팬지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눈물을 흘리면서.


비닐장갑을 끼워야한다는 규칙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제인 구달은 이 어린 침팬지가 어떤 경로를 겪고 이 연구소 지하로 끌려왔는지 짐작한다. 다 자린 침팬지는 운송 도중 쉽게 죽어버려 손해가 많다. 어린 침팬지를 생포해야하는데, 그를 위해 백인 상인에게 고용된 밀렵꾼들은 주변의 성체들을 모조리 쏘아 죽였을 것이다. 달려드는 어미는 물론 멀리서 위협하는 수컷들까지 모조리. 겁에 질린 어린 침팬지를 나무상자에 밀어놓곤 상인에게 넘긴 밀렵꾼들은 달아난 녀석들을 아쉬워하며 마대자루에 집어넣은 사체를 고기로 먹고, 남은 것은 시장 좌판에 늘어놓을 것이다.


자급자족하던 터전을 백인들에게 빼앗긴 원주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침팬지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갔고 국제자연보호단체의 압력을 받는 정부는 마지못해 침팬지 보호구역을 설정한다. 굶주림에 지친 원주민들은 달러 서푼을 받고 밀렵꾼이 되고, 밀렵꾼에 희생된 침팬지는 제인 구달이 봄베에서 첫 연구를 시작할 때의 백분의 일로 줄어들었다. 이제 명맥이 걱정될 정도다. 밀렵꾼의 총구에 저항하던 가족이 처참하게 쓰러지는 걸 기억하는 어린 침팬지는 잘 사는 나라의 동물원과 곡마단으로 팔려나가고, 그중 일부는 세계 유수 연구소의 사육실에서 만나게 된다.


자신을 어루만지며 눈물짓는 제인 구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린 침팬지는 손을 내밀어 제인 구달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주변 사람들도 감동어린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침팬지는 좁은 철창상자에서 넓은 실내로 옮겨질 수 있었지만 아프리카로 돌아가지 못했다. 연구진들의 주사와 채혈도 중단되지 않았다. 침팬지의 복지를 염려하는데 그칠 뿐, 제인 구달도 침팬지를 해방시키진 못한다. 인류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연구소의 주장을 이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동물실험과 관련돼 형성된 거대한 시장은 제인 구달의 눈물어린 호소에 감복해 보장된 탐욕을 거둘 리 없다.




최근 ‘세계줄기세포허브’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문을 열었다. 대외 만방에 알릴 자존심이 우리나라에 둥지를 튼 것이라는데, 이어 만 명이 넘는 환자들이 자신을 연구해달라며 이틀 만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세계줄기세포허브는 서울대학교 수의대학 황우석 교수가 소장을 맡고 있는데, 황우석 교수는 체세포 핵이식 방식으로 배아를 복제해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핵을 빼낸 난자에 환자의 체세포 핵을 넣어 14일 이전의 배아 상태까지 복제한 후 줄기세포를 유도, 환자에게 필요한 세포조직을 그 줄기세포로 분화시켜 거부반응 없는 치료를 성취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선 배아줄기세포의 비윤리성을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지면도 모자라거니와 이 글의 논점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배아줄기세포의 안정성은 확보돼 있는가. 전혀 아니다. 배아로 유도한 줄기세포는 200여 가지 세포조직으로 분화할 가능성을 가지지만 아직 원하는 방향으로 분화시키지 못한다. 그뿐이 아니다. 특정 세포조직으로 분화되었다가 나중에 주변 상황에 따라 엉뚱하게 바뀔 수 있다. 암세포로 바뀌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그래서 위험하다. 배아줄기세포의 안전성 확보도 없이 연구에 사용할 환자부터 모집하는 태도는 용인해도 좋은 것일까. 그 점도 여기에서 언급 않기로 한다.


세계줄기세포허브는 환자 1만 명 중 오직 10명의 체세포가 연구대상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응모한 환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치료를 기대했건만 대부분 선정되지 못해 서운했을 것이다. 환자의 기대와 달리 실용화는 5년에서 10년 이후일 것으로 예정하는 연구진은 우선 영장류 실험을 거쳐야한다고 주장한다. 벌써 확보한 영장류에서 안정성을 확인하면 인체에 시도할 모양인데, 사람의 치료를 위해 희생될 철창상자 속의 영장류를 애도하기에 앞서, 과연 영장류 실험에서 얻은 결과는 인체에 적용 가능할지 궁금해진다.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을 들여다보자.


동물실험에 대한 생명과학과 생명윤리의 진실은 어떤가. 신체의 구조는 물론 생리작용이 인간과 거의 같다고 배워온 동물이므로 의약 실험용으로, 신약을 위한 안전성 실험용으로 실시하는 동물실험은 당연할까. 동물 질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계획이 사람과 다르다는 걸 이상스럽게 여긴 의사와 수의사는 동물실험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용기 있는 책,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을 세상에 내놓는다. 탐욕과 오만으로 실시하는 동물실험의 결과는 세계줄기세포허브에서 10마리의 영장류를 확보한 사실과 관계없이, 제인 구달의 눈물을 닦아준 연구소의 어린 침팬지의 고통과 상관없이, 사람에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개를 세계 최초로 복제한 황우석 교수는 개와 공유한 60가지가 넘는 사람 질병에 대한 연구를 기대한다. 실험용 개도 흔한 마당에 굳이 복제한 개가 필요할까. 그 타당성도 예서 따지지 말기로 하고, 사람 질병 치료를 위해 개를 연구할 필요가 있을까. 개 질병 치료를 위해 사람을 연구할 필요가 없듯, 사람의 질병은 직접 사람을 연구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유전자와 생리적 해부학적 특징이 비슷한 까닭이라면 개보다 생쥐가 합리적이다. 자료가 풍성한 생쥐는 체구가 작아 사육 조건을 유지하기 쉽고 사료 소비량이 적을 뿐 아니라 세대의 길이가 짧아 실험결과를 빠른 시간에 도출할 수 있다.


기초적인 신진대사와 해부학적 특징을 공유한 사람과 네발짐승은 인류를 위한 의학발전에 크게 기여한다고 믿었는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질병이 네발짐승에서 드문 이유, 개와 사람의 예방접종이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사람은 관상동맥 질환으로 이어지는데 개는 갑상선 장애로 발전한다. 자궁을 없애면 고양이는 오래 사는데 사람은 골다공증으로 연결되기 쉽다. 왜 그럴까. 수의학자와 의사는 함께 고민하기로 한다. 페니실린은 모르모트를 죽이고 토기에게 효과가 없었지만 숫한 사람들을 살렸다. 동물실험을 거쳐 합법적 지위를 가진 의약품으로 해마다 10만 명이 사망한다. 이는 불법 의료로 희생되는 환자 수를 능가한다.


동물실험의 신화는 누가 만들었을까. 저자들은 탐구한다. 인간의 시체해부를 금지한 교회령에 따라 사람대신 동물을 해부한 로마의 의사 갈레노스는 임상 가치를 역설한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을 전복했다. 천년 이상 계속된 갈레노스의 오류는 르네상스 시대에 깨지고, 이후 등장한 많은 의학자들이 인체해부와 사람의 증상을 연구하여 의학의 진전을 이룰 수 있었는데 그것도 잠시, 19세기 중반 의학부로 전과한 실패한 극작가 끌로드 베르나의 노력이 동물실험의 신화가 정착된 이유라고 저자들은 밝힌다. “의학에 가장 위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수단으로서 임상이 아닌 실험실을 극찬”한 베르나는 동물에서 재현되지 않는 질병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엘리트라면 반드시 동물실험을 거쳐야한다는 인식을 의학계에 확고하게 심었다는 주장이다.


어떤 치료법이 쥐에 효력이 있다면 호들갑을 떠는 언론이 몇 달 후 그 치료법이 사람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입증되면 가볍게 취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성 낮은 기자들이 선정성을 좇기 때문일 것이다. 부각되는 생명공학의 윤리적 문제에 외면하며 스타과학자가 언급한 증명되지 않은 가능성을 침소봉대하는 우리 언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병리학자는 말한다. “우리는 나이든 사람의 사망 원인에 대해 아는 것보다 늙은 쥐의 죽은 원인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미국의 국립암센터의 한 박사는 연구 최전선에서 희생된 생쥐들을 추모하며 “암 연구의 역사는 생쥐의 암 치료 역사”이며 “수십 년 동안 생쥐의 암을 치료했지만, 솔직히 그것은 사람에게 효과가 없었다.” 실토했다고 저자들은 전한다.


동물실험이 정착되어도 부작용을 경험한 의사들이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관련 산업의 탐욕과 연계되면서 동물실험은 법제화하기에 이른다. 1950년대 동물실험을 거쳐 시판된 탈리도마이드는 메스꺼움을 치료하려는 신약이었는데 임산부의 몸에서 작용, 팔 다리 없는 신생아를 유발시킨다는 임상의사의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동물실험으로 확인할 때까지 판매는 금지되지 않았다. 이 동물, 저 동물에게 사람보다 10배에서 300배 정도 투여하며 부작용을 억지로 확인하고야 겨우 리콜 할 수 있었다. 한데, 그때는 이미 10000명 이상의 신생아들이 불구로 태어난 뒤였다.


한 제약회사를 파산하게 한 탈리도마이드만이 아니다. 유산방지를 목적으로 개발한 합성 에스트로겐인 DES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실험을 뺀 동물실험 결과만으로 판매가 허용되었다. 하지만 DES는 자연유산, 조산, 신생아 사망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복용한 여성의 딸과 딸이 낳은 손녀에게 자궁경부암을 발생시켰다. 부작용을 일으킨 약물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소개하는 명단은 길다. 항발작성 약물, 항생물질, 관절염과 천식치료제, 피임약, 관절염약…, 동물실험으로 허가된 거의 모든 약품을 고발한다.


과학이 아니라 법률적 이유 때문에 실행되는 동물실험의 막강함 힘은 좋지 않은 약도 승인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미국 FDA 관리들의 부작용 발표까지 제지될 정도라고 한다. 동물실험은 의학 분야의 논문 작성을 가장 손쉽게 한다. “쥐는 약물이 들어가면 논문을 토해내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연구비의 대부분도 임상보다 동물실험에 주어진다. 덕분에 수많은 연구기관과 연구원, 제약회사는 막대한 이익을 차지한다. 물론 사람이 피해보지만 동물이 책임질 뿐이라고 저자들은 냉소를 던진다. 이는 ‘동물실험 산업의 어마어마한 이권’이 달렸기 때문이다. 동물실험은 논문과 연구비를 낳고, 돈 번 기업이 광고를 수주하니 언론은 고분고분하다. 환자는 죽을 맛이지만 동물실험 산업은 꿩 먹고 알 먹는다.


유전자의 작은 차이가 일으키는 동물과 사람의 커다란 면역 차이는 동물장기를 인체에 넣을 때 특히 심각하다. 사람의 장기를 이식할 때 발생하는 부작용도 넘어서기 어려운데 동물은 오죽할까. 동물의 유전자 내에 존재하는 바이러스가 장기를 타고 인체로 넘어갈 경우, 에이즈와 같은 질병이 인류 사회에 치명적으로 창궐할 수 있다고 전하는 저자들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만이 부작용 없는 치료를 가능하게 한다고 못 박는다. 부검과 역학조사를 비롯하여 컴퓨터를 이용한 수학적 모델링, 유전학과 진단영상과 같은 첨단 연구를 제안한다. 동물실험은 그 자체가 사람에게 독이기 때문이다.




동물실험을 혐오하는 저자들은 대안의 예로 역학조사를 들지만 역학조사는 이윤을 밝히는 기업에서 악용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아 아쉽다. 동물실험으로 안전성을 법률적으로 확보한 제약회사는 판매 전에 역학조사를 실시할 텐데, 거약의 투자비가 들어간 약물로 이익을 챙기고 싶은 마음은 안전과 효능을 예단한 채 역학조사에 임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들은 추진논자들의 역학조사로 얻은 수돗물불소화를 긍정적으로 소개하지만, 최근 등장하는 역학조사는 축적된 불소로 인한 골격암과 골절을 의심한다. 이럴 경우 역학조사는 특정 결과를 기대하고 있지 않는 제3자가 수행해야 가장 정확하다. 수돗물불소화를 바라는 사람이 실시한 역학조사는 엉터리 여론조사와 같이 유도된 질문을 던질 수 있고, 편중된 시각으로 자료를 해석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객관적 사실을 담보할 수 없다.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의 타당성을 강조하느라 유전자조작과 줄기세포의 위험성을 간단히 취급하는 단점도 옥 속의 티처럼 있지만,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동물실험을 당연하게 생각해온 시민들은 물론 의사들까지 진실 앞에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게 한다. “동물실험이 과학적 연구방법의 심각한 배반행위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논증한 책”으로 제인 구달이 호평한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동료 의사가 지적했듯 “동물실험은 완벽하게 실패했다”는 진실을 천명한다. 저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신약의 안전성을 위해 동물실험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신화는 거짓이라는 게 밝혀진 셈이고, 이에 발맞춰 미국 외과대학협회의 한 회원은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에서 아무런 문제점을 찾을 수 없다고 증언한다.


제인 구달은 이제 어떤 신약을 개발하더라도, 어떤 의약 연구를 실시하더라도, 동물실험은 불필요하다는데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세계줄기세포허브에 대기시킨 영장류도 동물실험에 관련된 업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면 붙잡아둘 이유가 없어진다. 한 해 사라지는 수억 이상의 실험동물도 해방되어야 한다. 인간의 질병을 안고 태어나는 질병모델동물과 같은 극단적인 실험동물은 개발되지 않아야 한다. 유전자조작 동물과 장기이식용 미니돼지에 대한 환상도 지워져야 한다.


그런데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동물실험 산업계의 탐욕과 의학실험계의 오만은 오늘도 계속될 것이다. 그로 인한 부작용도 동물실험으로 검증하는 한, 줄어들 기미가 없을 것이다. 저자들의 눈부신 노력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다만, 탐욕과 오만으로 눈이 먼 세상에서 진실은 빛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동물인 인간도 결국 실험대상이고, 그래서 여전히 희생되는가 싶다. (환경과생명, 2005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