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12. 13. 20:32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근절되었다 확신할 수 없는 동물학대의 현장 중에 곰 쓸개즙 착취가 있을 것 같다. 수년 전, 커다란 사탕을 문 채 몸 밖으로 늘어진 플라스틱 관으로 자신의 쓸개즙이 새어나가는 걸 기진맥진 바라보던 반달곰이 텔레비전 뉴스에 적나라하게 방영되었고 이어 드세진 동물학대 반대운동에 힘입었는지 비슷한 뉴스는 다시 전파를 타지 않았지만, 사라졌을 거라 믿기 어렵다. 아직 분명히 존재하는 곰 농장은 살코기를 위해 사육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질 낮은 해외 여행상품을 거푸 고발한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베트남의 어떤 곰 농장에서 마취된 반달곰에 길고 두꺼운 주사바늘을 찌르고 쓸개즙을 뽑아내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농장에서 우리말로 어줍지 않게 떠벌이는 약효를 듣던 관광객들은 얼마 뒤 봉투 하나 씩 들었는데, 현지 가이드에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관행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베트남 그 농장의 반달곰 처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반달곰의 처지를 역지사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농장의 곰을 그저 웅담으로 볼 뿐이다.

 

동물은 사람과 다른가. 르네 데카르트는 동물을 프로그램된 기계처럼 묘사했다. 걷어차인 개가 깨갱거리는 건 그리 행동하도록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결과일까. 사람의 행동도 유전자 프로그램에 의한다고 주장해 파란을 일으킨 생물학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외롭거나 반갑다는 표정이 역력한 개나 고양이와 같은 애완동물에게 감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요즘 거의 없다. 우리가 표정을 읽지 못해서 그렇지 뱀, 개구리, 금붕어도 감정이 있고 고통을 느낄 게 틀림없다. 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통증을 가진 동물을 사람과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 평등주의다. 그렇다면 동물은 사람의 동정 속에 보호받는 존재일까.

 

동물이 사람의 동정을 받는 존재에 불과할 때, 사람에게 해가 되는 동물은 가차없이 응징해도 무방하게 된다. 쥐나 모기만이 아니다. 기상이변으로 산기슭에 도토리 같은 먹을거리가 모자라 서열이 낮은 멧돼지는 도시로 나올 수밖에 없는데, 자동차가 질주하고 낯선 사람들이 길을 막자 당황해 허둥대던 멧돼지는 결국 사살되고 만다. 사람 목숨을 위협하는 난폭한 동물이므로. 길을 잘 못 든 멧돼지만이 아니다. 제초제를 하도 뿌린 농촌에서 벌레를 구할 수 없는 까치도 과수원을 축내는 유해조수가 되었다. 그뿐이라. 야심한 밤에 아기 울음소리를 내는 고양이도 참을성을 깬 죄목으로 응징 대상이 된다.

 

날카로운 하이힐 굽으로 고양이를 눌러 죽이는 중국발 동영상이 나와 네티즌들을 경악케 하더니 단단한 널빤지로 토끼를 깔아뭉개 죽이는 동영상도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중국만이 아니다. “내게 욕설과 모독감을 주지 않으면서 설득하지 못하면 이 가엾은 차차는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가겠지” 하며 섬뜩한 제안을 남긴 한 네티즌은 잘린 제 다리를 물고 공포에 휩싸인 어린 고양이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한 젊은 여성은 남의 집 고양이를 콘크리트 바닥에 나동댕이치다 고층건물의 창밖으로 내던지고 말았다. 수년 전에는 고양이 이마와 옆구리에 못을 쏜 사건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있던 일이다. 그뿐인가. 병아리를 옥상에서 날리고 엄동설한의 아파트 주차장에서 그나마 따뜻한 자동차 아래 웅크린 고양이를 향해 장난감 총을 난사하는 아이들은 우리 동네에 있지 않은가.

 

동정이든 응징이든, 받을 상대의 기분 따위는 고려되지 않는다. 싫증나는 애완동물, 멋모르고 다가오는 자연계의 동물이 그렇다. 농작물을 축내는 동물과 연구실의 실험동물이 그렇다. 그들의 처지는 고려할 대상이 아닌데 사람은 어떤가.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며 입시 공부만 강요하는 경쟁사회에서 값싼 동정심은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권력과 금력이 제 기분에 따라 이웃을 동정이나 응징할 수 있다. 지저분한 슬럼에서 밥 한 끼 구걸하는 난민, 마약에 취해 범죄를 일삼는 빈민가 부량인만이 아니다. 막대한 자본력에 가게를 잃고 길거리에 나앉은 이웃은 얼마 전까지 통닭과 피자를 팔았다. ‘노동유연성’으로 직장을 잃은 이웃을 비정규직으로 몰고간 자본은 생계를 위해 파업한 노동자에게 어떤 동정과 응징을 준비하고 있을까.

 

1992년 엘에이 코리아타운에서 일부 주민 사이에서 난폭한 약탈과 총격전이 벌어진 뒤 한 언론인은 그 동네 어린이와 인터뷰한 내용을 상기하며 안타까워했다. 장전하는 소리만 들어도 자동소총을 구별할 수 있다는 자랑은 어린이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였다. 만약 그 지역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숲이 우거진 자연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구별할 수 있었다면 서로 총격전을 벌이지 않았을 거라며 탄식했다. 그는 왜 자연을 예로 들었을까. 그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생태계는 동정심으로 줄 세우거나 우월한 힘으로 응징하지 않고 다채로운 생명체들을 본성 그대로 배려하는 자연 공간으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철학자는 작고 털이 뽀송뽀송하며 둥글다는 걸 테니스공과 새끼 토끼의 공통점으로 들면서 그렇다고 테니스 선수가 새끼 토끼를 높이 들어올린 뒤 테니스라켓으로 네트 너머의 상대 선수에게 강서브를 넣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당연한 말이다. 토끼가 테니스공처럼 잘 튀기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작고 둥글며 털이 뽀송뽀송해도 새끼 토끼의 본성은 어미 토끼의 보살핌 속에 풀과 열매를 갉아먹으며 자라야 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호피가 비싸 수달피에 만족했던 이들이 토끼와 양의 가죽을 벗길 때 동정심을 가져도 큰 이의를 달지 않았지만 고양이의 가죽을 벗기자 발끈했다. 고양이는 적어도 모피를 위해 사육해선 안 되는 본성을 가진 동물이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개는 어떤가. 잡아먹으려 키우는가. 개의 본성이 살코기에 있나.

 

구제역 안전반경 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살처분된 한우 때문에 정신적 충격에 빠진 농민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마스크와 하얀 가운을 입은 권력, 다시 말해 수의사와 관료들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마취시켜 트럭에 싣고 떠난 뒤 식음을 전폐한 노인은 외양간에 돌아오지 못하는 소를 평생 가족처럼 지냈을 것이다. 애완용 개와 고양이가 한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죽자 땅에 묻고 눈물 흘리는 시민, 서울대공원을 탈출한 말레이 곰이 제발 건강하게 돌아오길 바라던 시민, 아니 차라리 청계산에서 잘 살기 바라는 시민들은 동물을 본성 그 자체로 이해하려 애를 쓴 것이리라. 고기나 가죽이나 쓸개를 탐내지 않았다. 멧돼지에게 먹이를 내주며 과수원에 까치밥을 남기는 이도 동물을 본성으로 바라보려 노력한다. 개성을 살리며 학생을 가르치려는 교사는 입시 위주의 성적으로 비교하지 않고, 그런 교육을 받는 학생은 성적 때문에 옥상 아래로 뛰어내릴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함께 살아갈 가족과 이웃이 늘 곁에 있지 않은가.

 

자신의 행복을 더해주는 이웃에는 사람만 포함되지 않는다. 그 이웃의 개성이 배려되지 않을 때, 내 개성이 배려되지 않는다는 걸 느낄 때, 사회는 불안해진다. 약한 동물부터 학대받는다. (작은책, 2011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