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3. 15. 00:15

《청부과학》, 데이비드 마이클스 지음, 이홍상 옮김, 아마고, 2009.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창회 자리에서 만나는 대학생들. 그들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친구들이 한 쪽으로 편중돼 있다는 걸 어렴풋 느낀다. 다시 말해, 이공계는 이공계와, 인문계는 인문계와 대화를 나누는 거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갈린 ‘두 문화’는 자신의 전공을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만나기 어려운 강을 건넌 셈이다. 대학생이 된 ‘두 문화’는 동창회에서 이따금 마주 앉지만 상대의 이야기가 어렵거나 재미없고, 때로 공허하게 들린다. 그래서 이내 자기 문화로 돌아가게 된다. 어차피 친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이공계는 흔히 인문계의 이야기가 따분하다고 하는데, 인문계가 듣는 이공계의 이야기는 어떨까. 천박하지 않을까. 그런 인문계에 ‘사회학’이란 분야가 있다. 사회 현상을 나름대로 과학적으로 해석한다고 주장하는데, 섣부르거나 외골수인 이공계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을 새삼스레 짚거나 구름 잡는 이야기를 쓸모없이 늘어놓는 내용”으로 간단히 넘겨버릴 수 있겠다. 아무튼, 사회학을 ‘사회과학’이라 말하려는 이가 많아서 그런지, 사회학에도 분야가 다양하다. 농촌을 연구하면 ‘농촌사회학’, 여성을 연구하면 ‘여성사회학’, 음식을 연구하면 ‘음식사회학’이다. 노동사회학, 정치사회학, 환경사회학이 있고 과학을 연구하면 ‘과학사회학’이다.

 

과학사회학에서 푹 발효되었을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과학이 아직도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 그 묵은 이야기는 “‘과학’은 진실을 파헤치는 영역이고 ‘기술’은 손재주의 영역이라는 과학자의 믿음은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대중목욕탕의 욕조에서 불현듯 부력의 원리를 찾아낸 아르키메데스가 기쁨에 넘친 나머지 미처 옷을 입지 못한 상태에서 “유레카!”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갔다는 ‘과학’ 신화와 그리고 주둥이로 먹이를 먹고 배설까지 하는 자동 오리인형을 만드는 르네상스 장인의 ‘기술’ 신화가 주도하는 시대에서 지금은 멀리 벗어났다고 지적하는 과학사회학은 호기심 영역인 과학과 손재주 영역인 기술이 ‘과학기술’로 만나면서 거대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개개의 과학자와 기술자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과학기술은 유지를 위해 거액의 연구비를 요구하는데, 그를 위해 이윤을 먼저 생각하는 자본과 결탁하거나 패권을 먼저 생각하는 국가의 지배 품에 안기게 되었거나 반대로 자본과 국가의 요구에 응하려고 몸집을 부풀렸는지 모른다. 거대해진 만큼 사회와 소통되는 공간이 좁아진 과학기술은 그들만의 이해관계 속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공간에서, 다시 말해, 이른바 ‘암흑상자’ 안에서 정책이 결정된다고 과학사회학은 간파한다. 이윤과 패권을 챙기는 자본과 국가와 달리 소비자와 유권자는 소외될 따름이다.

 

과학자는 아직도 가치중립을 과학의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을까. 밝힌 이론과 갈고 닦은 재주로 빚어낸 도구가 문명의 이기로 이용될 테지만 경우에 따라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데 과학자나 과학사회학자가 선뜻 동의한다. 그러면서 과학사회학자는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동원했을지라도 도구 자체는 응징할 수 없다”는 주장을 아직도 과학자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간직하는지 묻는다. 언젠가 언론은 여성의 하이힐이 살인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도했다. 뾰족한 뒤축으로 정수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한 남성이 결국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당연히 문제의 구두를 압수하고 범행을 저지른 여인을 구속했을 테지만, 그 구두를 만든 기술자까지 찾아내 가담 여부를 추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이권을 다투는 조직폭력배끼리 서로 휘두른다고 야구 방망이를 팔거나 만든 이를 검찰은 피의자로 몰아가지 않을 것이다. 도구의 가치는 선도 악도 아닌, 중립이기 때문이다.

 

한데, 생각해보자. 상대 조직을 위협하거나 제압하려고 야구 방망이를 변질시켰다면 우리는 문제의 도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무에 못들을 날카롭게 박아달라고 주문해 납품받은 방망이라도 가치중립이므로 양해해야 하나. 질투에 눈이 먼 여성에게 은근히 다가간 기술자가 뾰족한 뒤축을 단단하게 처리한 구두를 살인을 위한 도구로 팔았더라도 용서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서슬 퍼런 경찰과 검찰은 변질된 야구 방망이를 주문한 자와 뾰족한 구두의 뒤축을 개조한 기술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변질시킨 야구 방망이나 구두는 기술 영역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여전히 가치중립일 뿐일까. 미국의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과학기술과 공공정책을 연구하는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청부과학》에서 다시 묻는다.

 

한때 클린턴 행정부에서 에너지부의 환경ㆍ안전ㆍ보건 분야의 차관보를 역임한 적 있어서 그런지, 그는 패권을 위해 국가가 주무르는 과학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기업에 종속된 과학은 경험과 근거를 바탕으로 가차 없이 비판한다. 그가 공직에서 벗어난 뒤 권력을 이어받은 부시 정권이 기업을 두둔하던 사례는 더러 지적하기는 한다. 아무튼, 그가 생각하기에 기업의 이해에 충성하는 과학은 과학적 방법을 활용해 ‘진실 흐리기’에 앞장선다는 것이다. 담배와 석면 산업이 그랬다고 고발하는 그는 플라스틱과 납과 크롬에 얽힌 사례를 밝힌다. 심지어 극장에서 파는 팝콘에 기생한 과학의 실체를 벗긴다. 기가 막힌 것은 제약회사마저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담배회사는 자신의 제품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으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사실을 날조하고 진실을 회피하는데 과학을 사용했다고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폭로한다. 홍보회사와 과학자를 고용해 ‘건전 과학’을 내세우는 뻔뻔함까지 과시했다고 덧붙인다. 이른바 ‘쓰레기 과학’이다. 1950년대 담배 피우는 사람이 피우지 않는 이보다 50배 높은 폐암 발생 확률을 가진다는 논문이 《영국의학저널》에 발표되자 담배회사가 고용한 과학은 어떠한 결과물을 거푸 생산해냈던가. 물론 과학적 방법을 가장했지만 정직과 거리가 멀었다. 제조된 결과의 목록은 길기만 하다. “폐암 증가는 결핵 감소와 관련이 있다”던가, “가족적 요인이 폐암의 원인”이라던가, “담배 속의 타르가 부작용의 주범”아라던가, 심지어 “대머리는 폐암이 드물다”는 얼토당토아니한 자료까지 늘어놓았다. ‘불확실성’으로 대응하면서 정상 과학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담뱃갑의 경고문 삽입 의무화를 업계의 승리라고 본다. 경고문이 붙었으므로 흡연자는 담배회사가 자신을 속였다고 항의할 수 없게 되었다는 주장인데, 과연 그럴싸하다.

 

“갑자기 공장 바닥에 쓰러져 죽지 않고 다만 그저 숨을 쉬려 안간힘을 쓰다가 시야에서, 마음속에서 사라진” 석면 노동자의 고통은 과학이 철저하게 농락했다는 걸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이어 고발한다. 기업의 청부에 응한 과학의 실체는 데이터 마사지! 불리한 자료를 통계에서 빼는 수법을 사용한다. 조사관이 들이닥치기 전에 석면폐증 앓는 노동자를 대거 해고한다면? 졸지에 수입을 잃은 노동자는 병원에 가서 진단과 치료받을 여력조차 잃지만 기업은 편안한 결과를 챙길 수 있다. 더는 회피할 수 없게 석면의 문제가 드러나자 업체는 흡연에 원인을 전가한다. 인과관계를 흐려놓으면 놓을수록 석면을 오래 팔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석면회사는 결국 피해보상 때문에 파산하고 말았다는데, 보상금을 받는다고 고통스런 노동자의 건강이 회복되는 건 아니다. 방광암 발병 위험을 알면서 30년 동안 판매한 염료의 성분인 베타-나프틸아민도 마찬가지였다. 그 물질을 생산하는 다국적기업 듀폰이 내세운 ‘과학적 알리바이’가 주효한 까닭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는 사례는 넘치고, 결국 시민들이 들고일어나면서 규제기관과 관련 법률들이 연이어 만들어졌지만 ‘사전예방 원칙’에 의거하지 못하는 규제는 노동자나 시민들에게 만족할만한 안전과 안심을 약속하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 이야기다. “강력한 규제가 노동자와 대중은 말할 것도 없이 업계에도 이익이 돌아가는 것”이건만, 기업에서 과학을 지독하게 제멋대로 이용했기 때문으로 《청부과학》의 저자는 풀이한다. 규제의 기준치 제정도 주먹구구였다. “처음에는 부인으로 일관하며 혼란을 유발하다 노골적인 기만으로 옮겨”가는 업체에서 검열을 하니 오죽하겠는가.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이 자신의 세대보다 더 똑똑한 이유를 가솔린과 페인트에 납이 제거된 데에서 찾는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대중을 혼란시키려는 목적으로 기업은 ‘납’ 대신 ‘에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분노한다. 문제의 제품명이 ‘테트라에틸납’이었던 거다. 우리나라는 좀 나을까.

 

겉으로 과학인 듯 위장하는 보고서는 불확실성을 퍼뜨리는 과학자들이 기업을 위해 양산한다. 진행을 방해하여 당국의 규제 과정을 더디게 하려는 업계의 과학은 순풍에 돛단 듯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며 성장해갔다. 이른바 ‘제품 방어 산업’이다. 담배, 석면, 베타-나프틸아민, 납에서 그칠 리 없다. 염화비닐, 크롬, 먼지…, 제품 방어 산업의 아이템 목록은 길게 이어진다. 자료를 마사지할 뿐 아니라 취사선택하는 ‘쓰레기 과학’의 작품들이다. 그들이 제조해내는 자료는 터무니없이 방대하다. 그래야 과학에 무지한 배심원과 판사가 호의적으로 바라볼 거라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결과를 주로 출간하는 학회까지 창설하니, 법원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팝콘의 버터 향료에 들어가는 휘발성의 디아세틸 유기합성물이 폐암을 유발한다는 의혹이 구체화되었을 때, 규제기관이 업계의 방패막이가 되기도 했다. 산업안전보건부는 “우리가 기준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관할 범위가 벗어난다.” 며 회피했고 식품의약품은 “증거가 없으니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며 버틴 것이다. 기업 친화적 정권 시절이었다. “데이터를 수입하지 마라. 그러면 부상자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이게 당시 규제기관의 신조였다고 《청부과학》의 저자는 꼬집는다.

 

‘택시 기준’은 또 무엇인가. 핵산업에서 중성자 감속재로 사용하는 희소 금속 베릴륨이 매우 낮은 농도에도 폐암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핵산업에 관계하는 전문가들이 택시 뒷자리에 앉아 기업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 범위에서 기준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처럼 엄격한 역학적 증거도 없이, 기업의 이해와 무관하지 않는 자들이, 생색내려는 목적으로, 적당히 만들어낸 기준치를 ‘택시 기준’이라고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냉소한다. 문제는 그렇게 창조한 기준치를 사수하려고 업계는 ‘쓰레기 과학’을 총동원한다는 건데, 거기에 예의 불확실성이 적극 활용되는 건 불문가지! ‘펀딩 효과’는 제약회사가 과학자에 주로 구사한다. 연구비를 제공하는 제약회사의 요구에 맞춰 결과를 납품하는 연구가 그것이다. 납품하는 자들은 ‘전략적 무지’를 선호한다. 당연한 연구를 생략하는 거다. 부작용을 아예 모르는 편이 속편하지 않은가. 뇌졸중을 일으키는 식욕 억제제, 자살을 부르는 항우울제, 《청부과학》의 저자는 목록을 지면상 그 정도로 줄였지만 훨씬 더 많을 게 틀림없다.

 

문제가 있다는 걸 완벽하게 밝히도록 규정한 법조항이 오히려 문제를 증폭시킨다고 주장하는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대안도 제시한다. 새로운 분석 방법에 의해 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이론이 도출돼 기존 이론에 도전할 때, 강고한 기존 이론에 밀려 새 이론이 패퇴하거나 치열한 경합 끝에 기존 이론을 전복하는 게 과학 패러다임의 진면목이거늘, 누가 감히 완벽한 이론과 증명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겐가. 판사의 명령에 따라 피해자인 원고가 거대과학의 문제점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하려다 그만 재산을 탕진하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다면, 앞으로 청부과학이 저지르는 피해로부터 노동자와 시민들은 누가 어떻게 보호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묻는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정보공개와 독립적 연구의 보장, 그리고 기업과 규제당국의 책임과 의무를 다시금 강조한다. 규제당국의 눈높이를 기업과 국가, 그들의 과학자가 아니라 노동자와 대중에 맞춰달라는 부탁이요 호소다. 아울러,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심판자가 되는 법원은 노동자와 대중의 처지에 서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피해자와 기업 사이에 만연된 비밀 합의를 중재하지 말아줄 것을 법관에서 신신당부한다. 숱한 경험으로 볼 때, 그런 비밀 합의는 문제를 근절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키지 않았던가.

 

고위 공직자 출신인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과학 전부를 백안시하는 건 물론 아니다. 돈을 쥐어주는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결과를 납품하는 《청부과학》과 그에 탐닉하는 과학자를 비난하는 것이다. 다만, 국가 권력이 좌지우지하는 과학의 실체는 들추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책에도 좋은 책과 나쁜 책이 있듯, 과학도 좋거나 나쁠 수 있다. 《청부과학》은 ‘나쁜 과학’이다. 한데 표지만 보고 책이 나쁜지 좋은지 잘 모른다. 내용을 읽어도 전문가가 아니라면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게다가 전문가끼리 좋다 나쁘다 논쟁을 벌이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던가. 과학은 특히 그렇다. 따라서 과학에 대한 평가를 이해관계가 있는 동료 과학자에 맡기는 건 위험할 수 있다. 독립적인 과학자는 물론, 사회와 역사와 문화와 법과 윤리의 측면에서 검토할 수 있어야 실수가 줄어들 것이다. 바로 인문사회다. 다음세대의 처지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중요하고 과학기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문사회의 평가도 빼놓을 수 없다. ‘과학기술’에 ‘사회’라는 창문을 달자는 제안이 과학사회학에서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청부과학》의 저자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새삼 언급하지 않았지만, 《청부과학》과 같은 ‘나쁜 과학’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지 않으려면, 이공계와 인문계는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바탕으로 서로 충분히 소통해야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울리히 벡은 1986년 4월 구소련의 체르노빌에서 돌이킬 수 없는 핵발전소 폭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칸트의 명제를 빌어, “과학적 성찰 없는 사회는 맹목이고 사회적 성찰 없는 과학은 위험하다”고 설파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 2학년부터 소통을 가로막는 우리의 이공계와 인문계 분리는 이제 중단해야 옳지 않을까. (녹색평론, 2010년 5-6월호)

 
 
 

서평·추억

디딤돌 2007. 8. 6. 23:03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 이인식 외 8명, 고즈윈, 2005.



이른바 황우석 사태가 소용돌이치기 직전인 2005년, 어떤 유명 시인은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들어온 미덕들 - 겸손, 사랑, 천진성, 공정성, 소박함 같은 것들이 황우석이라는 사람에게 수렴되어 2005년 한국 땅에서 육화(肉化)되어 나타났다는 느낌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며 윤리 운운하는 사람들을 향해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는 인문학을 대표한다. 한데 그 인문학은 근본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윤리 운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않았다. 아니, 들으려하지 않았다. 황우석 전 교수의 발언과 겉모습에 스스로 빠져들었을 뿐이다. 한데 이상타. 꽤 많은 시인은 황우석 전 교수의 태도에서 불온한 기운을 직감하던데, 적지 않은 인문학자는 뚜렷한 근거 없이 자신만만해 하는 황우석 전 교수의 모습에 의아해하던데, 왜 그 시인은 장삼이사처럼 열광했을까.

 

치료에 대한 호언은 돌팔이의사일수록 심한 건 많은 사례가 증명한다. 한 생명의 치료를 위해 훨씬 더 많은 생명이 위태로워져야 한다면 우리는 그런 치료를 윤리적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았다면 황우석 전 교수가 장담한 줄기세포 치료가 가난한 자와 후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치료가 보편화된다면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얼마나 처참해질지 그 시인은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울리히 벡은 “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며,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라고 주장한다. 맞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나누어지는 이공계와 인문계는 일찌감치 의사소통을 단절한다. 연구비가 많아야 능력이 인정되는 대학 풍토에서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가 생태계와 사회에 미칠 영향을 근본적으로 살피기 어렵다. 그래서 허풍을 앞세운다. 인문학자도 마찬가지다. 과학의 허풍을 파악하지 못해 황우석 신드롬에 쉽게 빠져들었다. 참다못해 이 땅의 과학논객 9명이 인문학에 한마디씩 했다.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하고.

 

이제까지 인문학이 과학에 쓴소리를 던진 예는 더러 있었다. 이번엔 몹시 드문 일이다. 과학이 인문학에 싫은 말을 건넨 것이다.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는 인문학을 향해 과학과 의사소통하고 당부한다. 열역학 법칙을 모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문학자, 그런 인문학과 만나는 걸 시간낭비라 믿는 과학자들은 할 말이 있어도 꾹 참아온 게 실상인데, 이번 논객들은 달랐다. 본질을 헤아려야 할 인문학자들이 논란 중인 과학의 문제점을 헤아리기는커녕 덮어놓고 감격하기에 참을 수 없었던 거다.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의 저자들은 과학의 인문학적 가치를 높게 인식한다. 책머리에 지적하듯, “과학기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며,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는 논리의 뒤에 숨어서 가능한 한 가치판단을 회피하는 대개의 과학자와 다르다. 화학을 전공한 과학사학자,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철학자, 전자공학을 전공한 과학문화 평론가, 의사학(醫史學)을 전공한 의학자, 대중을 위한 과학교육을 주장하는 물리학자, 재료공학을 전공한 기술사회학자, 생물학을 전공한 환경운동가, 그리고 디지털을 전공한 사회학자와 물리학자는 과학과 소통하는 인문학을 주문한다. 사회적 성찰 없는 과학을 통제할 역할이 인문학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말을 들어보자. 논란이 끊이지 않는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를 놓고 한국 최고 인문학자들이 벌인 토론회는 수준 이하였다. “인문적 시각의 날카로운 비판이 감성에 호소하는 자연과학을 단번에 찔러 들어가” 균형 잡히길 기대했던 한 저자는 감격에 겨워 찬사를 바치는 인문학자의 모습에서 한계를 절감한다. 도구적 이성에 사로잡힌 자연과학을 성찰적 이성으로 인도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파괴해도 좋은가?”라는 명제를 놓고 머리 싸맬 연구가 얼마나 많은데 ‘인문학 위기’라니. ‘인문학 위기’에 자조하며 지원금을 바라는 자세에 실망한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조언해야 하는 학문이 인문학이거늘, 인문학이 현재 인간의 삶을 구속하는 과학을 모른다면 어찌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겠는가 되묻는다.

 

한 저자는 1996년 미국에서 벌어진 ‘과학전쟁’을 소개하며 그 의미를 짚는다. 인문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에 분통이 터진 수리물리학자가 인문학자는 과학을 모른다며 조롱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과학을 논하는 인문학자들을 옹호하는 엉터리 논문을 난삽한 논리로 써서 인문학 학술잡지에 기고했던 과학자가 다른 학술잡지에 자신의 논문은 엉터리였다며 폭로한 사례였다. 과학용어도 모르는 주제에 과학을 논한다며 인문학자를 조롱한 과학자와, 과학자의 비열한 속임수에 분노한 인문학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그는 인문사회와 이공계의 뿌리 깊은 반목과 몰이해를 분석하며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해본다.

 

‘두 문화’로 대표되는 과학과 인문학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두 문화가 만나면서 탄생한 ‘제3의 문화’를 한 저자는 제시한다. 인지과학이나 복잡성과학이다. 과학과 인문학이 만나야 해결할 수 있는 분야라는 거다. 지금은 종잡을 수 없이 복잡한 디지털 시대다. 디지털 시대에 지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선택과 혼합과 무한복제가 자유자재인 세계에서 지식을 분석하는 저자의 글은 새로운 환경에 부딪힌 인문학의 위기와 대안을 생각하게 한다.

 

생명복제 연구에 얽힌 숱한 논쟁에서 우리는 인문학적 성찰을 충분히 거쳤을까. 생명공학과 의료계는 물론 인문계와 종교계와 시민단체가 같은 수로 참여한 위원회에서 양보와 타협으로 어렵사리 합의안을 마련했는데, 그 위원회를 주도한 정부가 합의안을 부정하고 말았다. 그래도 저자는 생명과학과 생명윤리가 논의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달라질 것이므로. 세계관은 물론 윤리마저 지배하려는 과학, 그런 과학에 맞설 수 있는 인문학을 기대하는 저자의 글, 그리고 과학기술의 양면성과 그에 대한 인간사회의 대응을 고려하는 학제간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기대하는 저자의 글이 이어서 소개된다.

 

참된 지식인은 지배계층에 충성하는 엘리트는 아니어야 한다. ‘책머리에’의 저자 주장처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기 위해 실천의식을 되새기는 지식인, 곧 참된 지식인은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은 ‘새로운 인문주의자’일 것이다.(출판저널, 2007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