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10. 1. 15. 15:22

 

기상관측 이래 하루 최대 강설량을 기록한 이번 겨울은 몇 년 만에 최저 수은주 눈금을 기록하더니 이제 한풀 꺾였다. 슈퍼컴퓨터를 돌리는 기상청은 예년 제트기류에 묶여 북극에 멈춰 있던 시베리아의 한랭전선이 남쪽으로 풀려 혹한이 세계 곳곳에 몰아치게 되었다고 현상을 분석하지만 왜 제트기류가 풀렸는지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 혹 지구온난화와 관계없는 걸까. 아무튼 모처럼 눈이 녹은 길을 마음 놓고 걷게 되면서 마음은 벌써 봄을 기다린다.

 

봄은 언제 오나. 어린이에게 물으니, 눈이 녹으면 온다고 했다던데, 반짝 추위가 없지 않겠지만 1월 초순부터 계속되던 한파는 대한이 지나면서 봄기운에 녹아내리겠지. 대한 뒤에 입춘이 기다리지 않던가. 옛 시인은 들판에 노고지리가 울면 봄이 왔다고 노래했다. 그렇게 학교에서 배웠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며, 봄이 왔으니 부지런한 농부는 쟁기 들고 밭에 나간다고 했다. 한데 요즘 노고지리, 다시 말해 종달새는 통 보이지 않는다. 종달새가 알을 낳는 초원이나 봄보리 밭이 동네에서 사라지기도 했지만 겨울이 지나치게 더워 언제 왔는지 모르게 봄이 후다닥 지나가는 일이 그만큼 잦았기 때문일까.

 

끝 부분이 검고 다리만큼 긴 부리를 가진 알락꼬리마도요는 우리 갯벌을 봄가을이면 어김없이 찾는 나그네새지만 뉴질랜드 마오리족에게는 봄의 전령이다. 마오리족은 알락꼬리마도요를 보아야 비로소 봄이라는 걸 깨닫고 시인을 명상에 잠시고 화가는 화구를, 농부는 쟁기를 챙긴다는 거다. 한데 요즘 마오리족은 춘래불사춘(春來不思春), 봄이 와도 봄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갯벌을 본격적으로 광활하게 매립하면서 이동 중간에 충분한 휴식과 먹이를 먹지 못한 알락꼬리마도요가 뉴질랜드 해안을 예년처럼 찾기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오리족은 한국에 매립 자제를 당부한다는데, 우리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살리기’를 빙자하는 4대강 사업이 거대한 예산의 뒷받침 하에 얼음이 단단히 언 낙동강 일원에서 본격적으로 착공되고 있다. 국민 절대다수가 반대하거나 말거나, 일방적으로 “지구온난화 시대의 선택이 아닌 필수” 라면서 ‘녹색성장’의 기치를 함부로 드높인다. 한데, 녹색성장에 대한 개념은 우리 사회나 세계나 정립된 바 없다. 4대강 사업이 과연 온실가스 감축에 기여하는 바 있을까. 동원되는 중장비가 쏟아내는 온실가스만이 아니다. 막대하게 들어가는 각종 토목건설 자재들도 에너지를 투여해야 가공, 운송, 시공된다. 시멘트는 온실가스 배출 없이 생산된다던가. 한데 더 큰 문제는 10미터가 넘는 대형 보 아래에서 썩어들어갈 유기물질이다. 상류에서 홍수 때마다 휩쓸려 들어와 쌓일 낙엽이나 축산폐기물들은 무시할 수 없는 온실가스를 배출한다고 세계의 댐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토목과 생태 관련 수천 명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4대강 사업은 지구온난화의 대책일 수 없으며 돌이킬 수 없는 생태계 파괴로 후손에게 영속적인 피해를 안길 것이라 구체적이며 양심적 논거를 가지고 목이 터지게 주장하지만 귀를 틀어막은 정부는 텔레비전을 비롯한 주요 언론을 장악한 상태에서 국민을 그저 홍보대상으로 여긴다. 납득할만하게 투명하고 민주적인 토론회는 물론 열리지 않았다. 창세기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처럼, “4대강은 지구온난화의 대안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일류대학교 법학대학을 나와 고시를 척 통과한 국회의원도, 과외공부 지독하게 한 뒤 외국어고등학교 나온 정부고관들과 건설업계와 결탁된 이른바 영재들도 “할렐루야!”를 외친다. 교활하다. 삽자루가 두드리는 돈의 장단에 자칭 똑똑하다던 사람들의 얼이 빠져나갔다. 세종시의 경우는 아니 그런가.

 

마오리족은 알락꼬리마도요를 보고, 우리 조상은 노고지리의 울음소리를 듣고 봄을 느끼는데, 한 시인은 이제 강가에 나와 시를 쓰거나 읊지 못하게 될 내일을 생각하며 시름에 잠긴다. 아폴로11호가 달에 내려간 날, 1969년 7월, 미국에 종속된 우리도 덩달아 급작스런 공휴일을 맞았지만, 어떤 이의 얼굴은 달나라에 계수나무와 토끼가 더는 살지 않을 거라며 어두워졌다. 4대강 곳곳을 15개의 철근콘크리트 보가 가로막고 주변 강가에 물깊이보다 훨씬 깊고 높은 콘크리트 제방이 지천과 사람의 접근을 차단한다면 우리는 오랜 정서를 잃을 것이다.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며는 임도 오겠지. 임이 안 타면 편지야 타겠지” 하며 강가에서 노래하던 가곡도 용도 폐기될 것이다.

 

인천시가 갯벌을 보존하려 나섰나? ‘습지보호지역’을 지정고시하겠다고 나서기에 이르는 말이다. 단순히 그 내용만 듣자면 시민들이 드디어 인천시의 처사를 전향적으로 평가하게 될 것으로 상삼이사들은 생각할지 모르지만, 환경단체들은 기망행위라며 발끈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천시가 지정한 6.11제곱킬로미터의 갯벌은 요란스런 개발 행위로 철새들이 외면하는 송도매립지 6과 8공구의 일부를 굳이 포함했지만 정작 보호가 요청되는 11공구의 대부분을 매립하겠다는 속셈이 아닌가. 지금까지 53.4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송도갯벌을 거의 매립한 결과, 작년부터 세계적 희귀조인 저어새를 품던 10.3제곱킬로미터만이 가녀리게 남았건만 그 11공구의 60퍼센트 가까이 추가로 매립하겠다는 의지를 인천시는 습지보호지역 지정고시로 위장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2천 여 마리만 남은 저어새는 습지 생태계의 위기를 알리는 탄광의 카나리아와 같은 존재다. 주걱처럼 생긴 부리를 습지에 넣어 휘저으며 먹이를 찾는 습성이 이채로워 세계 생태학자와 탐조객의 주목을 받는 저어새는 사람의 방해를 피해 인천 주변 서해안의 작은 무인도에서 번식을 해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작년에 공사차량이 밤낮없이 질주하고 온갖 소음과 자동차 전조등이 난무하는 송도신도시 개발현장의 근처에 둥지를 틀었다. 무턱대고 접근하는 사람들의 등쌀 때문에 무인도를 피하려한 건지, 거듭된 매립과 오염으로 멀쩡했던 갯벌이 급속히 사라지자 그 무인도를 찾는 새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 성가셨기 때문인지, 악취가 진동하는 남동산업단지의 유수지의 작은 인공 섬을 찾은 것이다.

 

커다란 부리를 휘두르며 새끼들을 거의 다 키운 재갈매기들을 내쫒은 저어새들은 송도11공구의 갯벌에서 새끼들을 먹일 먹이를 챙길 수 있기에 지독한 악취를 참았을 것이다. 주변 송도신도시에 솟아오른 타워크레인을 요리조리 피하며 유수지의 인공 섬과 갯벌을 연실 왕복했을 것이다. 한데, 인천시는 그 갯벌의 대부분을 기필코 매립하고야 말겠단다. 여전히 최첨단 타령을 배경음악으로 깔면서. 하지만 최첨단은 곧 구닥다리가 된다는 의미와 통한다. 숱한 경험을 미루어볼 때 제아무리 최첨단이라 해도 그것은 지역에 정착된 문화와 역사에 어떤 행복도 얹어주지 못한다. 돈 잔치에서 이권을 챙길 세력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어김없이 과학기술을 앞세우지만, 멀지 않은 역사가 증명하듯 사회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 과학기술은 쉽게 재앙을 불러오곤 했다. 핵이 그랬고 앞으로 생명공학이 그럴 것이다.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칸트의 명제를 빌어 “과학적 성찰이 없는 사회는 맹목이지만 사회적 성찰이 없는 과학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갯벌은 지구온난화를 예방한다. 갯벌 1그램에 수억 마리로 분포하는 플랑크톤이 생산하는 산소와 갯벌에서 탄산칼슘 껍질을 키우는 조개와 게들은 이산화탄소를 잡아주지만 그뿐이 아니다. 완만하게 드넓은 갯벌은 뜨거워지는 바다에서 몰려오는 파고를 완충해준다. 이미 우리나라의 바다는 세계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뜨거워졌다. 서해안도 마찬가지다. 그 갯벌을 매립한 자리에 솟아 올린 초고층빌딩 숲은 막대한 에너지 사용 없이 단 한시도 온전하게 가동되지 않는다. 냉난방만이 아니다. 창문을 열 수 없으므로 환기장치를 온종일 가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첨단을 내세우는 그런 건물들이 갯벌을 깔고 앉아도 우리는 내일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있을까. 거대한 쓰나미가 해안을 덮치는 영화 해운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 겨울의 추위만이 아니다. 해마다 경신되는 더위, 종잡을 수 없는 기상이변은 지구온난화가 그리 멀지 않았다는 걸 웅변한다. 해안이 몇 십 센티미터만 상승해도 파고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이미 동해안은 너울성파고로 고통을 받기 시작하지 않았나. 갯벌을 매립한 송도신도시. 마냥 안심해도 될까.

 

철새는 고향을 찾아온다. 찾아오지 않으면 삶을 영속할 수 없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향의 정서를 잃은 사람,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은 싫든 좋든 혜택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사회에 내몰리게 되고, 그럴수록 남을 배려하기 어렵다. 거주하는 익명의 공간에서 정주의식은 깃들지 못한다. 그런 사회는 강호순 사건과 같은 ‘묻지마 범죄’가 빈발할 수 있다. 인천의 오랜 정서는 바다, 그 중에도 갯벌에 있다. 갯벌과 얽힌 숱한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전설이 곳곳에 깃들어 있지 않은가. 10여 년 전, 인천의 문인들은 《인천에 바다가 없다》라는 무크지를 발간했다. 갯벌을 잃은 고향에서 살가운 이웃을 만날 수 없느니 더는 시나 소설을 쓰기 어렵고 그림도 그릴 수 없다는 걸 호소한 책이었다.

 

가녀리게 남은 송도11공구는 인천의 마지막 갯벌이다. 저어새가 찾기 시작했고 알락꼬리마도요가 봄가을이면 반드시 찾는 고향이다. 마오리족에게 어쩌면 수 만년 봄을 선사해준 갯벌이기도 하다. 삼라만상이 그물코처럼 엮여 있는 세상에서 우린 알락꼬리마도요나 저어새, 그리고 마오리족 없이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 건강하고 행복한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남들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투기보다 다정한 이웃을 배려하는 인천을 생각한다면 최첨단이나 초고층빌딩을 짓기보다 갯벌을 보존하는 것이 정당하다. 돈 벌면 뜨려는 거주민보다 주민등록을 옮기고 싶은 시민이 늘어나는 인천으로 거듭나려면 자연과 정주의식을 고민해야 한다. 이제 곧 봄이 올 것이다. 알락꼬리마도요가 날아오고 저어새가 날아 올 테지. (인천IN, 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