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20. 7. 1. 16:25

플라스틱 제로로 가는 여정

 

세종시 정부청사에 근무하는 중견 공무원은 허건 날 저녁이 고민이다. 밖에서 해결하고 집에 들어가자니 쓸쓸하고 무료하다. 가끔 총각 후배들 초대하는데 처음 환호하더니 이내 시큰둥한 게 아닌가. 맛이 뻔하기 때문이란다.

 

일주일 한 번에서 한 달 한 차례, 서울의 집을 다녀오면 잠깐 신선했던 냉장고의 풍요로움이 이내 시들해진다. 퇴근하며 반찬가게를 들리는데, 배고프면 조심해야 한다. 얇은 비닐에 둘러싸인 스티로폼 접시의 소담한 반찬마다 맛나 보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사면 냉장고에 남아돈다. 먹성 좋은 후배를 모시지만, 그들도 지친다. 냉장고를 속절없이 차지하던 반찬들은 한꺼번에 쓰레기통으로 향하기 일쑤다.

 

은퇴를 앞둔 직장인의 저녁도 녹록한 건 아니다. 텔레비전 앞 소파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삼식이를 면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가? 요리학원에 등록하는 남성이 많다는데, 무슨 재료가 어떤 맛을 내는지 알지 못하는 한 사내가 묵은김치에 순두부를 넣고 끓여 보았다. 김치와 순두부의 오묘한 섞어찌개가 완성될 거라 굳게 믿었는데, 웬걸. 아무 맛도 내지 않았다. 사방팔방에 은근한 도움을 청했다. 귀한 친구의 묘방은 라면스프였고, 에라, 넣었더니 먹을만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아내에 이실직고 못 했다. 그랬다간 소파를 지키기 어려울 거 같아서.

 

라면스프는 작은 비닐봉지에 담겼다. 라면도 비닐봉지에 담긴다. 생각하니, 라면은 필시 비닐과 제 운명을 키운 거 같다. 비닐이 없었다면 늦도록 소파 고집하는 야식이, 나트륨 중독에서 당뇨로 직행하는 배불뚝이도 드물었겠지. 비닐 이후 기저질환자가 대거 늘었고, 오호통재라! 젊은이들이 가소롭게 여기는 코로나19가 중년 이상의 연령층에 무섭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우리집 감자를 누가 재배했는지 잘 알던 시절, 짚으로 만든 꼬투리에 달걀 한 꾸러미나 반 꾸러미 담아 팔던 동네 가게는 주전자를 가지고 가야 막걸리를 한 되 퍼담아 주었다.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 가며 두부 한 모 사오던 아이는 이웃 농부가 광에 감자를 쏟아넣었다는 걸 짐작하면서, 신문지 없으면 두부와 생선은 사고 팔 수 없을 거라 믿었다. 유튜브가 신문을 대신하는 요즘은 어떨까? 비닐 없으면 두부부침과 고등어구이는 꿈꾸기 어렵겠지.

 

언제부터 전복을 라면에 넣을 생각을 했을까? 완도 일원에 여객선 드나들기 빠듯하게 집중된 전복 양식장 덕분인데, 그 양식장은 태풍을 조심해야 한다. 뒤집히면 스티로폼 조각들이 바다를 한동안 더럽힌다. 스티로폼으로 양식장을 띄우지 않는다면 전복이 라면에 들어갈 수 없고 우럭 매운탕이 주당의 최애메뉴로 등극할 수 없다. 비닐이 없다면 편의점에서 온갖 과자를 쉽게 만날 수 없고 짜장면과 짬뽕의 배달이 원활할 수 없다. ‘배달의민족은 대기업의 지위를 넘보기 어려웠겠지.

 

사진: 무심코 버리는 플라스틱, 비닐 쓰레기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석유에서 비롯된 썩지 않는 제품의 생산과 소비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석유는 고갈이 머지 않았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국은 선진국보다 선도국이 되어달라!” 코로나19 방역에 남다른 성과를 보이는 우리나라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서양학자의 당부가 그렇단다. 뿌듯하다. 4차산업이 궤도에 오르는 시점에서 한국은 방역을 넘어 민주주의와 경제의 선도국이 되어 달라고, 저명한 미래학자가 조언했다고 우리 언론이 전했다. 그도 그럴 게, 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마스크와 방진복은 물론, 코로나19 감염을 빠르게 확인하는 진단키트를 세계 각국의 호응으로 수출한다. 우쭐해진다.

 

비닐과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우리는 코로나19커녕 일본의 수출규제도 이길 수 없었다. 플라스틱으로 적절하게 전기를 차단하거나 표면을 코팅하지 않으면 반도체가 정교하면서 가벼울 수 없다지 않던가. 결국, 석유다. 석유를 가공해 얻는 비닐과 플라스틱이 있어야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고 초고층빌딩으로 하늘을 찌를 수 있으며 제3세계 앞바다의 물고기 씨를 말릴 수 있다. 대형 어선으로 바닥에서 훑는 쌍끌이어업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거대한 그물이 있기에 가능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젊은 기자는 석유종말시계에서 갤런당 2달러인 석유 가격이 4달러가 되면 고등학생은 운전을 포기하고 부모차에 의지하면서 대화가 무르익을 거로 전망했다. 12달러로 오르면 승용차 포기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웃이 살가운 마을이 도심에 늘어나고, 16달러가 되면 원양어선이 사라져 초밥은 자취를 감출 거라 예상했다. 나아가 20달러 이상 치솟으면 전투기를 띄울 수 없으므로 세계는 평화로워질 거라 상상했다. 재치 있는 상상인데, 석유가 고갈되면 비닐과 플라스틱은 귀중품으로 등극할 게 분명하다.

 

2007년 한 저널리스트는 파티는 끝났다에서 2005년 즈음 유정에서 퍼올리는 석유를 소비량이 초과했다고 분석했다. 코로나19로 잠시 주춤하지만 머지않아 바닥을 드러낼 거라는 주장인데, 기껏 100여 년 전 존재를 알기 시작한 석유는 인류 역사에서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질 게 틀림없다. 지금은 석유 파티 중이다. 한데 파티는 일상이 아니다. 잠깐 즐긴 뒤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석유를 모를 때 인류는 불행했을까?

 

패스트푸드는 석유 없이 불가능하다. 공장식 축산은 옥수수가 필수 사료이고 옥수수는 옥수수에서 얻는 열량의 10배의 석유를 동원해야 생산할 수 있다. 한 계절만 입으라는 패스트패션도 석유가 창조했다. 면직물에 개성을 넣어 염색한 티셔츠는 젊은이 방에 가득한데 못 입으면 유행에 뒤처지니 우울한가? 그렇게 광고하는데, 많은 옷에 플라스틱인 인조견이 섞인다. 세탁기 한 번 돌릴 때, 옷 한 벌에서 마이크로플라스틱 1500개 이상이 나온다고 영국 연구팀이 발표한 적 있다. 그 플라스틱은 하수종말처리장을 거침없이 통과해 바다로 나간다.

 

등지느러미 없는 돌고래 상괭이는 우리 서해안이 터전이다. 천연기념물이지만 죽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괭이 사체의 위를 조사하면 비닐이 가득하다. 쥐치 같은 물고기를 즐기던 상괭이가 왜 비닐을 삼킬까? 남획이 한몫했다. 쥐치가 없으니 아열대화된 서해안에 몰려드는 열대성 해파리라도 먹어야 산다. 양식장에서 빠져나오는 배설물은 해파리를 유인하는데, 허기진 상괭이 눈에 바닷물에 흐물흐물 찌든 라면봉지가 해파리로 보인다. 허겁지겁 먹었겠지.

 

바닷물에 삭으면 마이크로플라스틱으로 분리돼 우유처럼 해저로 내려간다는 비닐봉지들은 요즘 대형 식품점에서 찾기 어렵다. 하지만 바다로 이미 들어간 비닐, 스티로폼, 플라스틱은 막대할 텐데, 세포막을 통과하는 마이크로플라스틱은 생물의 생식과 성장을 방해한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소금에 포함되는 마이크로플라스틱은 수돗물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먹이사슬을 따라 인체에 스며들기 때문인가? 불임클리닉을 두드리는 부부가 늘어난다고 한다.

 

유럽은 적어도 2040년까지 자동차나 석탄화력에 필수인 내연기관을 없애겠다 선언했지만, 석유를 포기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고갈 앞둔 석유를 태워 없애기보다 어떻게든 활용하겠다는 의지인데, 산업문명을 조금이라고 고수하려면 대안이 없기 때문이리라. 석유 고갈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인류는 생존해야 하고 코리아19보다 심각한 감염병도 견뎌야 하는데, 비닐 없이 두부 한 모 살 수 없는 우리는 어떤 준비에 나서야 할까? 시장바구니는 아니다.

 

자동차 없이 살 수 있을까? 도로를 대거 없앤 자리를 온갖 생물이 어우러지는 생태공간으로 바꾼다면 코로나19는 지금처럼 전파될 수 없다. 비행장이 사라지면 세계 경제를 마비시키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넘나들지 못한다. 자동차와 비행기를 모르는 인류 조상은 해외여행을 인생 바구니의 마지막 목록에 넣지 않았다. 열대과일을 사시사철 먹지 않아도 배곯지 않았다. 해안의 드넓은 갯벌이 복원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안전하고 맛있는 전통음식을 실컷 맛볼 것이다. 마을에서 자급자족 가능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땅을 살려낸다면, 석유가 거의 필요 없을 텐데.

 

머리 회전이 빼어난 인류는 석유 없이 행복한 내일을 구상할 텐데, 어쩌면 조상의 삶에서 힌트를 얻을지 모른다. 그런데 걱정이다. 혹시 석유 분해하는 미생물이나 곤충의 유전자를 분리하는 건 아닐까? 벌써 그럴 조짐이 있다. 과학기술이 탐욕스런 산업의 노예가 된 요즘, 불길함을 엄습한 생명공학 기술로 석유 분해 유전자를 이 생물 저 생물에 넣는 게 아닐까? 그럴 경우, 생태계가 한꺼번에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대안은 무엇일까? 인류의 초심이다. 석유 모르던 시기를 눈여겨보자. 진정한 코로나19 이후의 새로운 일상이 거기에 있을지 모르는데, 땅과 물과 사람이 살아나는 마을이다. 간디는 인도가 70만 개의 마을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자립을 의미한다. 의식주에서 에너지와 돌봄까지 자립할 수 있는 마을이다. 그런 마을에 비닐과 플라스틱이 뭐 필요하겠는가? 몽상이라고? 무슨! 인류의 생존이 달린 문제 아닐까? 그 길을 우리가 선도하면 어떨까? 후손으로 이어질 지속 가능한 행복의 어쩌면 유일한 길일지 모르는데. (가톨릭일꾼, 2020년 여름호)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9. 12. 20. 17:52

 

배고플 때 시장가지 않기.


5, 6년 전인가? 회의 때 만나는 오송생명과학단지 중견 연구원의 철칙이 그랬다. 주중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그이는 저녁이 고민이라 했다. 밥만 짓고 반찬은 사먹는데, 배고플 때 반찬가게를 가면 모두 맛있어 보인다는 거였다. 골라도 결국 남기니 냉장고에 넣는데, 뜯지 않은 반찬이 가득한 냉장고를 열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날 잡아 젊은 직원들에게 대접했는데, 이젠 외면한다는 게 아닌가. 하루 이틀이지 선배마다 불러대니 진저리를 친다는 거였다. 그래서 배고플 때 반찬가게 가면 민폐를 부른다고 너스레떨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나는 중년 남성만이 아니다. 도시 아파트단지의 반찬가게는 날로 성황이다. 조리할 여유가 부족한 맞벌이 부부는 물론이고 자녀가 집에서 밥 먹는 일이 드문 가정도 사정이 비슷하다. 반찬을 만들어도 며칠 그대로니 낭패다. 하는 수 없이 시장에서 필요한 반찬을 조금씩 고르지만, 여전히 남는다. 반찬만이 아니다. 스티로폼 그릇과 비닐과 플라스틱 쓰레기가 쌓인다. 먹어치우지 못한 반찬은 음식쓰레기가 되니 분리 배출하는데, 잘 발효시켜 질 좋은 유기질 비료로 거듭나길 바라지만 확인한 적은 없다.


반찬가게에서 파생되는 비닐과 스티로폼, 그리고 크고 작은 플라스틱 쓰레기는 썩지 않는 석유화합물이다. 재활용된다고 하니 분리 배출하지만 역시 확인하지 못한다. 음식물이 묻으면 재활용이 어렵다지만 소비자는 그저 표시만 믿을 뿐이다. 작으면 쓰레기통에 버릴 때가 많다. 쓰레기봉투에 담겨 소각장으로 직행하겠지. 쓰레기통에 담긴 라면과 과자봉투, 냉동만두와 소시지 봉투, 그리고 요구르트 통들도 여김 없이 소각될 텐데, 지역난방 열량을 보태겠지만 소각장 굴뚝에서 다이옥신을 배출할 때가 있다고 들었다. 인간이 만든 최악의 독성물질을.



사진: 생각 없이 버린 비닐봉투가 빙상의 일각처럼 보여도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의 그림(인터넷 자료).  


착한 이웃들은 일회용 컵을 줄이려 텀블러를 사용하는데, 텀블러가 넘친다. 장바구니에 들고 슈퍼마켓에 가지만 여기저기에서 받은 장바구니가 집안에 굴러다닌다. 미처 장바구니 챙기지 못했다면 지역 쓰레기봉투에 농산물과 가공식품을 넣는데, 하나같이 비닐이나 플라스틱에 담겼다. 새벽에 가정으로 배달되는 음식도 마찬가지다. 손쉽게 받아 바쁜 가족이 아침을 서둘러 해결할 수 있지만 비닐과 플라스틱 쓰레기가 수북해진다. 택배산업이 흥할수록 플라스틱 쓰레기는 집집마다 넘치고, 마이크로플라스틱은 땅과 바다를 오염시킨다.


요즘 도시의 가정은 농산물을 손질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다듬어 작은 양으로 나눠 포장한 식재료를 가까운 슈퍼마켓에서 조금씩 구입하거나 오래 저장할 수 있는 가공식품에 의존하면서 플라스틱 쓰레기는 늘었고 배송산업이 커지면서 쓰레기는 상상을 초월해졌다. 텀블러로 일회용 컵을 줄이지 못하듯 장바구니는 비닐과 플라스틱 쓰레기를 해결하지 못한다. 택배는 사회의 파편화를 상징한다. 파편화된 사회에서 쓰레기는 넘친다. 아파트단지가 거대해도 주민들이 파편화되었다면 배송산업은 더욱 흥하고, 마이크로플라스틱은 넘칠 수밖에.


독일 베를린 한 복판에 우파공동체가 있다.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만든 영화사를 68세대가 일찌감치 점거한 우파공동체는 텃밭에서 생산한 농산물로 만든 빵과 가공식품을 주민과 나눈다. 공동체 안에 식당이 있어 공동체 식구는 물론이고 주민과 음식을 조리해 먹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서울 마포구의 성미산 공동체에 마을식당이 있다. 신선한 농산물을 그때그때 구입해 함께 조리해서 먹는다.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하는 그 식당은 이따금 공동체의 모임방으로 활용된다고 한다.


바쁜 주민, 단출한 가구, 맞벌이 부부가 많은 아파트단지에 그런 식당이 활발하게 운영되는 건 불가능할까? 인터넷 가상공간에서 아파트 가격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데 그치지 말고, 조합으로 모이는 주민들이 현실공간인 마을식당에서 함께 밥을 나누고 대소사를 논의한다면 정주의식이 돈독해지는 건 물론이고 음식과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는 상당히 해결되지 않을까? 요즘은 아파트단지 내에 운동시설과 휴식공간을 마련한다. 공동식당을 더 마련해 능동적으로 활용한다면 장바구니가 해결하지 못하는 마이크로 플라스틱을 크게 줄일 텐데, 그런 식당을 구상하는 아파트단지 어디 없을까? (인천in, 2019.12.19.)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8. 5. 30. 17:06


수용소 같은 다세대주택들에 파묻힌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어릴 적 참중나무로 둘러싸인 인천 변두리의 집은 장독대와 이어진 처마 아래 욕조를 겸한 작은 물탱크가 있었다. 사각형으로 쌓아올린 벽돌에 시멘트를 발라 만든 물탱크에 어머니는 부엌에서 이어진 호수로 물을 채웠고 참중나무 가지에 참새들이 모여들어 재재거리는 아침에 일어난 꼬맹이들은 그 물로 세수를 해야 했다. 물탱크엔 언제나 바가지 하나가 떠 있었다.


박으로 만든 바가지였다. 요즘 그런 바가지는 공예품 전시장에 가야 작품으로 알현할 수 있지만 60년대 부엌의 필수품이었다. 컵도 흔하지 않았던 시절, 바가지는 손님이나 식구 구별 없이 목마른 자의 다정한 물컵이었고 부엌의 소중한 계량컵이었다. 부엌에서 은퇴한 바가지는 처마 아래 물탱크에서 유용했는데, 어머니는 깨진 부분을 굵은 무명실로 듬성듬성 꿰매놓았다. 땡볕에서 하염없이 놀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집에 들어온 우리는 꼬질꼬질한 몸에 물을 끼얹었고 그때 깨진 바가지가 요긴했다.


언제 플라스틱 바가지가 집에 들어왔을까? 1960년대가 끝날 즈음이 아닐까? 깨질 염려가 없는 그 바가지가 가볍기도 해 박 바가지를 몰아내고 물탱크를 한동안 차지했는데, 집안에 욕조가 들어선 이후 플라스틱 바가지도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요즘은 플라스틱이 지천이다. 크기와 모양이 여간 다양한 게 아니다. 석유로 가공한 플라스틱의 무한한 다채로움은 버거울 지경이다. 플라스틱이 없으면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 세상에 내몰린 사람들은 시방 허우적거린다. 사람만이 아니다. 생태계의 삼라만상이 아연, 플라스틱 공포에 휩싸였다.


냉장고에 빠질 수 없는 두부. 생활협동조합이든 대형 마트의 지하 식품매장이든, 대부분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에 담아 판매한다. 두부를 직접 만드는 전통시장이라면 적어도 두 겹 이상의 비닐봉투에 담아 파는데, 플라스틱과 비닐봉투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은 두부를 어떻게 포장했을까? 신문지였다. 두부를 한 모 씩 잘라 신문지로 감싸서 건네주었으니 며칠 묵지 않은 신문지라면 잉크가 묻었을지 모른다. 당시 두부를 파는 가게에 신문지 보관은 필수였는데, 인터넷이 책상에서 손 안으로 들어온 요즘, 신문을 정기 구독하는 이 보기 드물어졌다.


지난 2월 스페인 남부 해안에서 향유고래 사체가 파도에 밀려왔다. 배를 가르니 29킬로그램에 달하는 비닐봉지와 폐그물이 드러났다. 삼킨 비닐과 플라스틱이 긴 시간 소화기관을 막아 복막염으로 죽었을 거로 전문가는 짐작한다는데, 오징어를 즐겨먹는 향유고래가 비닐을 거부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먹이를 찾지 못해 한동안 굶주렸을지 모른다. 오징어를 찾지 못하니 해파리라도 건지고 싶어 기진맥진한 몸으로 커다란 입을 벌렸는데, 아뿔싸, 비닐일 줄이야. 그것도 29킬로그램이나.


고래뿐이 아니다.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켠 여객선 이용객이 바다로 호기 있게 버린 비닐 고리는 거북의 성장을 틀어막아 등딱지를 심하게 왜곡시킨다. 맥주 6캔을 묶었던 고리가 얼마나 썩지 않으면 해양생물들을 기형으로 만들까? 고래 폐사는 스페인 해안의 사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해양 휴양지에서 드물지 않지만 20여 년 전, 우리 서해안에서 사체로 떠오른 작은 돌고래 상괭이의 몸에서 수많은 비닐이 꾸역꾸역 나온 적 있다. 당시 인천의 환경단체가 해안에서 수거한 폐비닐과 플라스틱을 분류했더니 중국과 북한에서 약간 흘러들었고, 서울과 경기와 인천에서 내버린 쓰레기가 대부분이었다.


눈에 띄지 않은 마이크로플라스틱은 속수무책이다. 언론은 황해에서 분포하는 어패류 97%의 몸에 마이크로플라스틱이 발견되었다는 2016년 한국해양과학기술진흥원의 분석결과를 보도했다. 비닐봉투 한 개가 바다로 스며들면 175만 개의 마이크로플라스틱으로 나눠진다는 연구결과를 최근 발표한 영국 플리머스 대학은 6킬로그램의 옷을 세탁하면 70만 개의 마이크로플라스틱이 세탁기에서 배출된다고 분석했다. 그 플라스틱은 먹이사슬을 타고 결국 사람 몸까지 들어왔을 게 틀림없다. 부메랑이다.



사진: 쓰레기로 오염된 습지의 어린이들(인터넷에서 퍼옴)


바닷가 가두리양식장에 빼놓을 수 없는 스티로폼은 태풍을 만나면 산산조각난다. 미세스티로폼은 플랑크톤의 생존과 성장률을 위축시킨다고 하니 마이크로플라스틱도 마찬가지일 텐데, 중국과 우리나라 대도시의 하수가 집중될 황해는 얼마나 심각할까? 상상을 초월할지 모르는데,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멸종위기인 특산종 상괭이가 비닐로 사경을 헤매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우리나라는 스페인 해안의 향유고래가 죽었다는 외신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올 초부터 중국에서 플라스틱 쓰레기의 수입을 거부하자 난리가 났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중국에 넘겨왔던 건 재활용의 편의보다 업자의 돈벌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중국에 처리를 맡겨야 재활용업계의 이익이 크기 때문이었을 텐데, 중국 미세먼지에 민감한 우리는 그동안 무책임했다. 환경부는 PET병이나 스티로폼의 설계와 제작부터 무색의 단일 재질과 분리가 쉬운 라벨의 사용을 의무화하겠다고 천명했다. PET병과 스티로폼은 플라스틱의 일부일 뿐일지라도, 환경부의 정책이 소비자보다 재활용업자의 편의를 고려했을지라도, 수긍할 이유는 있다. 발생장소에서 재활용해야 문제가 최소화되지 않던가.


언론은 고리타분한 정책의 실효성을 의심하는데 환경부는 신묘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 플라스틱 쓰레기의 근원 대책은 환경부보다 산업자원부이나 지식경제부의 영역이 더 크다.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하려면 상품의 생산과 포장, 보관과 유통에 얽히는 모든 과정을 정비해야 타당하지 않은가! 상품을 경쟁력 있게 디자인해서 더 많이 판매하려는 기업의 의지를 환경부의 현재 힘으로 통제하지 못한다. 신문지를 마련하지 못한 두부 가게 주인도, 장바구니를 귀찮아하는 소비자도, 대뜸 민원을 제기할 것이다.


신문지가 아닌 전용 종이로 싸서 두부를 건네면 소비자는 믿고 받으려 할까? 예전과 달리, 가게 주인은 콩을 자신의 밭에서 유기적인 방법으로 생산하지 않았다. 콩의 원산지와 생산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비자는 종이로 포장한 두부를 냉장고에 보관하며 며칠 먹고 싶을 리 없다. 비단보다 부드럽고 가격도 저렴한 인조견은 종류도 많다. 그걸 손으로 세탁해도 마이크로플라스틱이 나온다. 세탁기는 소비자보다 가전회사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일자리를 걱정하는 정부는 세탁기 사용을 자제하자는 대책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수돗물에 마이크로플라스틱이 들어가는 세상이다. 플라스틱을 소화 흡수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늦기 전에 반드시 대책을 세워야 한다. 프랑스는 비닐봉투의 사용을 94%까지 줄였다고 한다. 아직 대부분의 국가도 시도하지 못한 쓰레기 분리 배출과 수거를 성공적으로 실행하는 우리는 비닐봉투를 세계 최대로 소비한다. 플라스틱 쓰레기 발생을 줄일 묘안이 어려울까? 환경부에게 책임을 씌울 게 아니다. 우리네 삶의 방식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편리함에 젖어 비만해진 우리는 불필요한 물건을 더 사두려 몹시 두리번거리는 건 아닐까?


불편해야 쓰레기는 줄어든다. 우리는 이미 충분한 물건을 가졌다. 일자리는 불필요한 물건의 생산 이외 분야에서 창출해야 한다. 승용차로 헬스클럽에 가서 살을 빼기보다 자신의 손과 발로 움직이면서 불편한 삶을 흔쾌히 받아들인다면 비만과 플라스틱 쓰레기 공포는 크게 줄어들 수 있다. 텃밭의 콩으로 식구들 먹을 두부를 만드는 방법도 있다. 옷을 수선해 오래토록 입고 물병에 담은 보리차를 직장 동료와 나눈다면 마이크로플라스틱은 크게 줄어들 텐데. (작은책, 20186월호)

안녕하세요.
저는 김천에서 살면서 현재 사회복무(공익근무)중인 24살 청년입니다.
작가님께서 쓰신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읽다 글을 씁니다. 요즘 환경-특히 자원과 에너지 그리고 지구온난화-에 대해 혼자 고민할 때가 많은데, 책에서 제 고민과 맞닿는 부분이 참 많다고 느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말씀드리면, 한국은 자원과 에너지를 절약하는데 아직까지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근무하는 곳에선 아무도 없는 회의실의 조명을 그냥 켜놓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을 잠그지 않고 이를 닦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도서관에선 선선한 날인데도 에어컨을 꼭 켭니다. 버스를 타면 에어컨을 추울 정도로 틀 때가 잦습니다. 음식을 포장할 때 비닐을 쉽게 쓰고 버립니다. 냉장고가 크면서도 썩어서 버리는 음식도 많습니다...
자기가 돈 내는게 아니라거나 값이 싸고 편리하다고 막 쓰는 모습이 얄밉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런 사소해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환경을 파괴하는데 일조한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문명을 다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명에서만 누릴 수 있는 유익함이 분명 있으니까요.
또 인간의 욕망이 무조건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적절한 수준의 욕망은 인간의 생활뿐만 아니라 환경을 보호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다만, 자원과 에너지를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때로는 좀 더 신경쓰이고 불편하지만 감수하는 것처럼, 환경을 배려하기 위해서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국도 양적인 ‘성장’이 아니라 질적인 ‘성숙’에 대해 논의해야 할때가 된 듯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속해 온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의 패러다임을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요. 기업에서 앞으로도 신제품을 계속 출시해야 겠지만 폐기되는 제품을 고스란히 재활용해야 하고, 물건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가능한 튼튼하게 만들고 오랫동안 지원해 주어야 하며, 생산하고 사용하고 폐기하는데 되도록 적은 에너지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생산하고 소비해야 일자리가 늘기에 낭비는 필요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생산이 줄어드는 대신 물건을 유지보수하고 자원과 에너지를 절약하는데 일자리가 늘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부족 국가’니 ‘전기는 국산이지만 원료는 수입’이니 하는 슬로건만 외칠 뿐 실천하지 않는 분위기 였습니다. 지난 2016년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치에 변화가 일어났던 것 처럼, 환경의식에도 변화가 일어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길고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신데 감사드립니다.
평안하세요.
진정성이 있는 공감 글, 감사합니다. 고민의 확장이 필요합니다. 더 깊어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