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4. 27. 22:56

《세컨 네이처》, 마이클 폴란 지음, 이순우 옮김, 황소자리, 2009.

 

20세기 독일의 실존철학을 대표한다는 마르틴 하이데거. 프라이부르그대학의 교수였던 그는 인근 슈바르츠발트에서 사유에 잠겼다고 한다. 멀리 새소리를 들으며 울창한 숲을 조용히 걸으면 꼬리에서 꼬리를 무는 생각을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대지의 윤리’를 강조해 미국에서 ‘현대 환경윤리의 아버지’로 추앙되는 자연주의자 알도 레오폴드는 위스콘신의 허름한 농장에서 일 년 동안 변하는 풍광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남겼다. 비록 모래땅이지만 자연이 게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육체적 노동이 전혀 없거나 있더라도 강도가 낮고 절박하지도 않은 지식인에게 숲과 자연은 사유의 장소로 그만일 텐데, 그런 호강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다. 육체노동에 종사하거나 지시나 대본에 충실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와 달리 재깍재깍 다가오는 마감에 맞춰 원고를 보내야하는 지식 노동자에게 사유처럼 중요한 일도 드물 것인데, 어디에서 생각에 잠겨야 하나.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이 드나드는 도시의 사무 공간이나 아스팔트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으로 귓전이 어수선한 거리도 탐탁하지 않다. 회색도시에 거주하는 지식인은 하이데거나 레오폴드가 부럽기만 할 게다.

 

마이클 폴란은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책을 쓰는 지식 노동자다. 환경운동가로 지칭되기도 하는 그는 정원에서 사유한다. 흙이라고 한 뼘도 구경할 수 없는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에 살 때에도 교외의 텃밭에서 사유했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선 뜰에 기필코 정원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생각에 잠겼다. 무려 1000주 이상 베스트셀러가 된 《세컨 네이처》가 그 결과물인데, 농한기 없이 땀 흘려야 먹고살 수 있는 농사꾼이라면 불가능했을 터. 생계를 보장하는 원고료가 있기에 농작물과 장미 묘를 심으며 즐겁게 사유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 사유가 독자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글을 완성하게 했을 테고.

 

중산층이 모이는 미국 교외의 주택들은 거의 강박이다 싶을 정도로 현관 앞에 잔디를 깔았다. 그것도 푹신하게. 영국 대저택을 흉내 내고 싶은 성공한 이민자 심리의 표상이라고 마이클 폴란이 분석하는 미국 주택의 잔디는 중산층의 거국적 일체감이다. 낮거나 아예 없는 이웃 사이의 담을 뛰어넘어 동네 끝까지 탁 트이며 이어지는 잔디를 관리하는데 미국에서 해마다 300억 달러를 쓴다고 한다. 퍼붓는 물도 상당하겠지. 그 잔디를 관리하는 일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날이 뜨겁거나 건조하다 싶으면 물을 흥건히 뿌려야 하고 조금만 자라도 즉각 깎아야 할 뿐이 아니다. 때때로 비료를 주고 잡초도 수시로 뽑아야 한다. 내 집의 잔디라고 방치한다면 쟁송에 휘말릴 수 있으니 이웃 사이의 평화를 생각해서라도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

 

굴러 떨어질 바위를 연실 산꼭대기로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묵묵히 예초기를 들던 어느 날 마이클 폴란은 문득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는다. 이건 땅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잔디를 깎는 행위가 썼던 문장을 다시 베껴 쓰는 일이라면 정원 가꾸기는 언제나 새로운 문장을 쓰는 일이라는 걸 각성하면서 땅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로 작심한다. 그렇다고 미국의 거국적 일체감에 대놓고 반기를 들 수 없기에 잔디의 강고한 권위를 조금씩 잠식하기로 한다.

 

일체감에서 과감히 일탈해 개나리, 라일락, 조팝나무를 울타리 삼아 심고 마음에 드는 장미도 주문했으며 퇴비까지 만들었다. 근사한 정원의 그림을 기대하며 코스모스와 백일홍과 해바라기를 비롯해 30여 가지 꽃을 심은 것인데, 그만 복병을 만났다. 한 치의 공간도 허락하지 않고 비집고 올라오는 잡초는 신참 정원사의 기대를 형편없이 뭉개버리고 마는 게 아닌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스승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랠프 왈도 에머슨을 평생 정원사로 소개한 마이클 폴란은 누구나 사용하는 “잡초라는 말은 그 풀이 지니고 있는 미덕을 우리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말한 적 있다는 사실을 귀띔하면서 자신도 잡초와 어느 정도 공존하리라 다짐했건만, 그리 지독할지 미처 몰랐다.

 

히피와 조동조합과 잡초를 가장 싫어했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잡초는 모조리 뽑아냈지만 마이클 폴란은 잡초의 기세에 질리고 말았다. 그래서 또 사유한다. 19세기의 정원사는 잡초를 야만인으로, 일부러 심는 식물을 개화된 문명인으로 간주했는데 오늘은 잡초에서 장미까지 계급구조가 뚜렷하다는 걸 간파한다. 맹렬하게 원예종을 공격하는 프롤레타리아 때문에 애써 심은 화초가 보이지 않게 되자 마이클 폴란은 잡초는 “잘못된 곳에서 자라는 식물”인가 아니면 “재배되는 식물에 비해 유난히 공격적인 속성을 가진 식물”인가, 고민하며 책을 뒤진다. 소로우가 “해와 비와 이슬을 지원군으로 둔 무수한 트로이의 전사”라고 묘사한 잡초는 결국 승리자였다. 지쳐버린 마이클 폴란은 잔디를 들어내 만든 정원에 이랑을 파기로 한다. 이웃이 뭐라 하던, 밭이 될 차례다.

 

그렇게 당근을 심었다. 퇴비도 충분히 주고. 그런데 뽑아보니 관절염 걸린 손가락 마냥 짧고 못생긴 게 아닌가. 초보 정원사의 어수룩함이었을까. 러시아워 지하철의 승객들처럼 빼곡한 당근을 아깝다고 솎아내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 마이클 폴란은 그렇게 정원사가 가져야 할 ‘제2의 천성’을 배운다. 또한 연약한 모종을 땅 속으로 꾹꾹 누르고 여분의 잎사귀를 가차없이 잘라내는 이른바 ‘초록엄지’의 중요성에 눈을 뜬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글쟁이답게 정원에 관한 책들을 진작 섭렵하는 마이클 폴란은 어느새 이론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정원사로 거듭나고 있었던 거다.

 

가을이 되면 탄소동화작용에 남은 힘을 다하며 열매를 맺던 식물들은 이내 노랗게 풀이 죽지만 정원사는 할 일이 많다. 정원의 열매가 정원사 허락도 없이 다람쥐, 두더지, 너구리, 사슴, 멧돼지 들을 초대하면서 그들의 잔칫상을 벌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지체하면 곰팡이와 박테리아까지 동참하니 겨울에 들기 전에 부지런히 걷어들여야 한다. 왁자지껄했던 정원이 고요해지는 겨울이라고 정원사가 쉴 수 있는 게 아니다.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며 내년의 정원을 설계해야 한다. 그렇다. 정원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의 생물이 사람의 방임 하에 제멋대로 어우러지는 공간일 수 없다.

 

솔직히 정원은 인간 중심적이므로 할아버지처럼 반듯하고 철두철미하게 관리해야 할까. 비닐이나 농약을 거부하면서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유지하면 어떨까. 마이클 폴란은 후자를 택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원사 철학의 문제일 텐데, 새삼 우리의 처지와 비교된다. 《세컨 네이처》는 우리의 현실과 거리가 있다. 아파트 일색인 도시에서 정원사를 겸하는 시민은 드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원사가 되려는 의지가 있어도 실천이 몹시 어렵다. 가까운 일본이나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들이 대개 그렇듯, 지방자치단체에서 근교에 텃밭을 임대해주면 좋을 텐데, 우리는 비닐하우스를 철거한 그린벨트에 아파트를 또 세운다. 우리에게 《세컨 네이처》는 꿈이런가. (사이언스타임즈, 2010년 4월 ?일)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8. 10. 19:33

 

채식인들은 채식주의를 지칭하는 영어 베지터리어니즘(vegetarianism)은 채소의 베지터블(vegetable)이 아니라 ‘온전한’과 ‘건강한’을 의미하는 라틴어 ‘베게투스(Vegetus)’에서 왔다는 걸 강조한다. “채식은 우리에 온전한 육체와 정신을, 지구에 온전한 환경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2000년 1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국제 채식주의자 모임’에서 “인간에 동물성을 길러 공격적으로 만들고 지구와 끊이지 않는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육식을 피하면서 “광범위하게 퍼지는 기아와 질병,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채식 중심의 식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천명한 채식주의자들은 ‘채식 천년 선언’을 했다.

 

진화된 이후 이제까지, 살아온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렵채취 시절, 인류는 월등하게 수렵보다 채취에 의존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대략 수렵이 1이라면 채취가 4, 식단의 20퍼센트만 육식이고 80퍼센트는 채식이었다는 거다. 송곳니와 어금니의 비율과 꼭 같다. 그렇다면 영구치가 없는 어린이는 어른보다 고기를 더 먹는 게 나을까. 한참 자라는 나이에 단백질과 지질, 석회질과 철분은 아무래도 고기로 보충하는 게 편할 테니 그럴지 모른다. 같은 이유로 더 자랄 일이 없는 어른에게 육식은 20퍼센트 정도가 적당하다는 건데, 육식에는 우유와 계란, 해산 어패류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유럽에는 채식인을 위한 식단이 잘 개발돼 있고 채식인을 배려하는 식당이 많다고 한다. 워낙에 고기를 많이 먹어와 발생한 부작용이 채식의 가치를 인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그런가, 유럽에서는 채식인들을 별스럽게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러워한다. 철학자나 정치인은 물론이고 발군의 기록을 가진 체육인 가운데 채식인이 있다는 걸 홍보하며 채식의 가치를 알리려는 노력이 효과를 발했을지 모른다. 반면 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던 아시아에는 채식인을 위한 별도의 식단이 거의 없다. 물론 채식인을 배려하는 식당도 드물다. 이제야 마음껏 고기를 먹기 시작한 마당이라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거부현상이라는 주장이 있다. 일본이 그렇다는데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우리 전통 음식을 보면 대부분 채식이다. 밥과 국, 김치와 깍두기, 각종 나물들, 가끔 찌게와 부침개에 고기가 들어가기도 하지만 거기에도 채소와 곡물이 압도적이다. 채식인이 따로 없을 정도다. 조리 방법도 아주 바람직하다. 영양소를 파괴하지 않으려면 채소를 그대로 먹는 게 가장 좋고 발효시켜 먹는 게 다음으로 좋다던데, 깨끗이 씻어 그대로 먹는 각종 쌈과 고추는 발효시킨 된장 고추장이나 간장과 곁들여 먹었다. 신선한 채소를 발효시키면서 먹는 김치 종류는 어떤가. 끓이기보다 데치는 게 낫고, 튀기는 거보다 굽는 게 낫다는데, 우리의 숱한 나물들은 대부분 데치고 국은 끓인다. 생일이나 명절이 되어야 고기를 굽고 전을 부치지만 기름에 풍덩 빠뜨려 튀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음식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튀기는 음식이 가장 나쁘다고.

 

바람직한 전통 음식을 가진 우리도 최근 튀기거나 굽는 고기를 먹는 비율이 전에 없이 높아졌다. 동경을 넘어 교과서를 활용하면서까지 서구식 음식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면서 채식 위주의 전통 음식은 고급 식당에서 그만 설자리를 잃었다. 식당은 물론이고 가정마저 국과 나물에 고기를 넣기 시작하더니 고기 없는 쌈은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고기를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상식이 어느새 주입되면서 채식인을 회식자리를 귀찮게 만드는 유난스러운 자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장이 더 짧은 우리에게 부작용은 피할 수 없는 법. 예전에 없던 질병이 감당하기 어렵게 늘어나면서 채식의 가치를 인식하고 채식인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는 있는데, 아직 손님에게 고기를 대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약해진 건 아니다.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지 않고, 어울려 들어간 식당에서 주문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채식인들이지만 그들이 육식을 즐기는 이를 비난하거나 백안시하는 건 아니다. 식문화를 쉽게 바꾸기 어렵다는 걸 인식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식성은 존중해야 할 개인의 취향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다만, 우리가 현재 먹는 육식이 어떤 과정으로 식탁에 올라오게 되는지 알고 먹기를 희망한다. 동물의 본성을 억압하는 공장식 축산만이 아니다. 아무리 입맛이 당겨도 자주 과식할 경우 몸에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이 육식이 채식에 비해 높다는 점을 잊지 않기를 바라면서 요즘과 같은 에너지와 환경위기, 그리고 지구온난화가 내일을 위협할 때에는 낮은 단계의 먹이사슬, 다시 말해 육식보다 채식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를 권하고 싶어 한다.

 

많은 이들이 채식만으로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지 묻는다. 물론 가능하다고 대답하면 자라나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고기를 먹여야하는 게 아니냐고 되묻는다. 주입된 상식의 집요한 허점이다. 필요한 아미노산을 쉽게 충당하려면 아무래도 고기가 편하기야 하지만 고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면 견과류나 두부로 충분할 수 있다. 차리는 데 다소 수고롭거나 비용이 더 들어갈 수 있고, 고기에 익숙한 아이들이 잠시 꺼릴 수 있지만 그건 식재료의 공급을 다양하게 늘리고 맛과 영양을 개선하면서 극복할 수 있고, 현재 극복되고 있다. 채식만 고집한다면 비타민12의 결핍이 우려되지만 전통 발효식품으로 필요한 만큼 섭취할 수 있고 약간의 젓갈이면 충분하다고 채식인들은 주장한다. 어떤 이는 수술 후 단백질 보충을 위한 고기까지 만류할 것인지 묻는데, 그런 고기라면 약이다. 확실한 진단에 근거하는 치료를 반대할 채식인은 없을 것이다.

 

채식이므로 모두 바람직하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술이나 담배는 물론 아니고, 화학비료와 농약을 다량 투입해 대규모로 재배한 농작물은 에너지를 과소비했으니 피하는 게 낫지만 그보다 그렇게 재배한 곡물을 산업적으로 정제한 탄수화물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유전자조작 옥수수를 대량으로 가공한 옥수수시럽이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인데, 맥아를 뺀 흰 밀가루와 쌀눈을 제거한 흰 쌀도 통밀이나 현미보다 나을 게 없다. 대량으로 수확한 곡물을 한꺼번에 저장해 놓고 이 나라 저 나라에 팔아넘기는 국제곡물상은 변질이 쉬운 맥아와 쌀눈을 제거하고자 하므로 수입곡물에 의존한다면 정제 탄수화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지역에서 생산한 곡물을 먹는다면 영양이 풍부한 곡식을 먹을 수 있다. 수입 과정에서 농약을 살포해야하는 과일이나 채소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해야 한다.

 

자연스런 음식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잡식동물의 딜레마》(다른세상, 2008)에 이어 《행복한 밥상》(다른세상, 2009)을 쓴 마이클 폴란은 암호 같은 표시가 붙은 ‘제품’이 아니라 ‘음식’을 먹자고 제안한다. 정제된 탄수화물의 문제를 덮거나 벌충하려 알쏭달쏭한 물질을 넣어서 파는 슈퍼마켓의 상품은 음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는 영양소가 살아 있는 음식을 직접 조리해 먹자면서도 주로 채식을 하되 과식하지 말자고 당부한다. 마이클 폴란도 지적하듯, 내가 재배하는 농산물이 최선이지만 그럴 수 없다면 내 식구를 아는 이웃이 재배한 유기농산물을 먹자는 거다. 나는 물론이고 함께 식탁에 둘러앉은 식구와 이웃, 그리고 후손을 살리기 위해, 또한 농부와 땅을 살리는 ‘행복한 밥상’을 차리자는 마이클 폴란은 경험에 의한 전통 식단을 제안하는 것이다. 마이클 폴란만이 아니다. 우리의 많은 음식 전문가들도 전부터 권하는 밥상이 대개 그렇다. 가장 자연스런 밥이 먹는 이의 몸을 가장 건강하게 하고, 채식이 자연스런 밥상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리라. (사이언스올, 2009년 8월)

 
 
 

서평·추억

디딤돌 2008. 6. 22. 02:37
 

도대체 뭘 어떻게 먹어야하지?

《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다른세상, 2008



옥수수는 멕시코가 원산지다. 멕시코 일원에 일찍이 옥수수가 있었기에 잉카와 마야와 아스텍을 비롯한 많은 문명이 싹트고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옥수수 예찬이 끝없이 이어지는 멕시코인의 주식은 당연히 옥수수다.

 

미국인은 옥수수를 그리 즐기지 않는다. 아침에 우유 부어 먹는 옥수수 제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걸 주식이라 하긴 그렇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멕시코인과 그렇지 않는 미국인의 몸을 조사했다. 옥수수 섭취량을 비교하기 위해. 결과는 뜻밖이었다. 미국인은 차라리 움직이는 콘칩이라고 마이클 폴란은 말한다. 왜? 고기와 음료수를 막대하게 소비하기 때문이다. 멕시코인은 고귀한 옥수수를 가축에 먹이지 않는다.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밀집해 경작하는 옥수수는 석유 없이 경작과 수확이 불가능하다. 무거운 농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석유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밀집해서 단작하는 농작물의 씨앗이 대개 그렇듯, 옥수수 역시 유전적 다양성이 결여되었고, 그런 만큼 질병과 해충에 약하다. 많은 살충제와 제초제, 그리고 농약과 화학비료가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런 농화학제품은 석유로 가공했다.

 

석유 10칼로리를 퍼부어야 1칼로리의 옥수수를 얻는다. 하지만 옥수수의 가격은 터무니없이 싸다. 농부는 도저히 수지를 맞추지 못해 미 정부는 막대한 보조금을 지불한다. 그래도 농가는 빚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옥수수를 가공하는 다국적기업은 횡재를 한다. 정부 보조금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사료와 음료수의 주요 구성물로 팔아넘기는 까닭이다. 미국에서 비만은 가난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이 무슨 불경한 역설인가.

 

우리나라가 얼마 전 수입한 유전자조작 옥수수는 설탕을 대신하는 시럽으로 가공돼 음료수에 포함될 것이다. 대략 미국의 비만은 옥수수 시럽이 양산되면서 늘어났다. 옥수수 시럽 들어간 콜라를 담는 1회용 컵은 용량이 1리터에 달하지 않던가. 옥수수는 갈아서 소에 먹인다. 곱게 간 사료는 되새김질을 방해한다. 소는 안절부절 못하지만 쑥쑥 자란다. 옥수수 10킬로그램을 먹으면 살코기가 1킬로그램 늘어난다. 그렇게 자라는 송아지는 덩치가 크다. 그렇게 품종을 개량했을 뿐더러 성장호르몬을 수시로 처방하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는 금방 먹는다. 하지만 금방 먹게 만들기 위해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 파종에서 수확까지, 가공에서 판매까지, 맛에서 소비자의 행동반경까지 예측 가능해야 하는 패스트푸드는 상표와 성분은 물론 맛과 영양이 세계가 공통이다. 그를 위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무시한다. 농작물과 축산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획일화시켰다. 가격경쟁을 위한 표준화다. 그런 음식을 먹는데 격식 따위는 필요 없다. 다만 생태계와 땅과 내 몸과 후손의 건강에 이상이 초래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식물이나 동물은 물론, 버섯과 미생물도 먹을 수 있는 잡식동물은 먹기에 앞서 고민이 많다. 유칼립투스 잎만 먹으면 그만인 코알라와 처지가 다르다. 경험이나 상식이 없다면 어떤 걸 먹어야 문제가 없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밭에서 나왔다고 다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유전자조작도 있고 농약도 경계해야 한다. 사료를 축낸 가축도 믿기 어려운건 마찬가지다. 그런 농작물과 고기를 가공했을 경우, 딜레마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진다.

 

대기업의 이윤을 위해 생태계와 문화의 개성을 무시하는 패스트푸드는 최악이다. 재료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없도록 마구 섞었다. 그렇다면 안심할 수 있는 유기농산물을 먹는 게 나을 성 싶다. 그런데 농약만 치지 않으면 유기농인가. 그뿐이어야 하나. 아니다. 농산물에도 개성이 있다. 유전적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한두 가지 품종을 대량으로 심는 경작이라면 농약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유기농이라고 봐줄 수 없다. 땅도 생태계도 농부와 소비자의 건강을 유기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유기농이다.

 

소는 풀을 뜯는 동물이다. 그렇게 진화됐다. 목초를 뜯던 소를 다음 목초지로 이동시키면 쇠똥이 남는다. 그 자리에 풀어놓은 닭은 제 세상을 만끽한다. 쇠똥에서 벌레를 찾아먹으며 거름을 퍼뜨려 목초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다. 겨울이 지나 소들이 빠져나간 축사는 돼지가 차지한다. 코를 벌름거리며 먹이를 찾는다. 돼지가 지나간 축사에는 실한 유기질 비료가 남는다. 그건 목초에 뿌리면 된다. 어느 하나 버릴 게 없다. 하지만 목장의 일은 넘친다. 신념이 없다면 힘에 부칠 것이다. 그런 목장을 믿는 소비자가 있기에 신념은 유지될 수 있다. 목장에서 소와 돼지와 닭이 건강하게 순환하는 목장에서 땀을 흘린 마이클 폴란은 목장의 음식으로 식탁을 차려 이웃과 맛있게 먹는다.

 

사람이 개발한 씨앗이나 가축은 아무리 유기적으로 경작하고 사육하더라도 자연스럽지 않다. 더구나 육식을 위해 사육해 도축하는 동물은 너무 어리다. 잠시 채식주의를 고민하던 마이클 폴란은 가장 자연스런 식탁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수렵과 채취다. 유럽에서 들어와 야생화 된 멧돼지를 잡고 버섯을 딴다. 그리고 요리해 먹는다. 맛이 그만이다. 감탄할만하지만 그런 방식의 식탁은 시방 자연스럽지 못하다. 인구가 많고 자연은 매우 줄어들지 않았던가.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끝나지 않았다.

 

산업화 된 식탁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메뉴는 무엇일까. 식량이 남아도는 가운데 3초에 한 명씩 기아로 사망하는 시대에서 뭘 먹을까 고민하는 일은 불경한 노릇이지만, 비만이 가난의 상징이 돼버린 미국의 현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뭘 먹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먹는가가 더욱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광우병과 조류독감과 유전자조작만이 아니다. 패스트푸드와 가공식품도 문제투성이 아닌가. 넘치는 먹을거리에서 안심하고 먹을 게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의 건강은 물론, 후손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생태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의 저자 마이클 폴란은 가족과 패스트푸드를 먹고, 이웃과 유기농산물과 수렵과 채취를 유쾌하게 체험하면서 진지하게 사유한다. 그리고 역시 잡식동물인 독자에게 묻는다. 어떤 먹을거리를 어떻게 차려 먹을 것인가를. 독자는 그이의 글로 풍요로워진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마음의 양식이 되었다. (우리와다음, 2008년 7-8월호)

진보신당 게시판에서 먹거리에 대해 얘기가 나와서 이곳을 안내했어요..
괜찮으시죠..^^
물론 괜찮습니다. 필요한 글이 있다면 얼마든지 활용하십시오. 저는 copyleft 운동을 지지하니까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