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9. 12. 27. 22:01

 

《갯벌 이야기》, 김준 지음, 이후, 2009.

 

 

예외는 있지만 요즘 갯벌을 황무지라고 떠드는 이는 드물다. 지난해 갯벌을 매립한 자리에서 펼친 인천도시축전의 첫무대에서 대통령이 갯벌이 초고층빌딩 숲으로 바뀐 걸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인 양 칭찬했지만 환경운동가와 해양학자, 갯사람과 시민들이 무진 애를 쓴 이후, 갯벌의 가치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매립이 중단되거나 취소돼 갯벌이 보존된 예를 당최 찾을 수 없다. 새만금, 인천공항, 송도신도시처럼 광활했던 갯벌만이 아니다. 매립한 자에게 소유권을 안기는 공유수면관리법이 온존하는 한, 갯벌은 여전히 매립을 위해 유보된 공유수면으로 치부될 것이다. 매립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을 세금이나 투자로 끌어들일 권능이 있는 탐욕스런 정권과 자본에 의해 갯벌의 가치는 허공에서 맴돌 뿐이다.

 

갯벌을 인체의 장기와 비교하는 환경운동가와 해양생태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갯벌을 허파요 콩팥이고 자궁이라고 강조한다. 플랑크톤이 생산해내는 산소가 열대우림보다 많고 탄산칼슘으로 형성된 조개껍질이 제거하는 이산화탄소로 지구온난화를 예방하니 허파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드넓은 조간대와 하구 갯벌에 수많은 어패류들이 알을 낳고 성장하며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무한히 제공하니 자궁이라고 말한다. 육지에서 토해내는 영양염류를 하수종말처리장 이상으로 정화해주니 콩팥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듣는 이는 시큰둥하다. 도무지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바지락칼국수, 백합죽, 가을전어, 주꾸미볶음, 꼬막전, 세발낙지연포탕, 홍탁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갯벌에서 생산하는 먹을거리에 취한다. 주부들이 저녁상 차릴 때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내 고향 어쩌고 하는 프로그램의 절반은 갯마을의 일상사를 소개하고, 리포터들은 갯벌에서 맨손으로 수집한 어패류의 진미에 호들갑을 떨지만 시청자의 마음은 거기까지다. 갯벌이 위기를 맞았다는 데까지 인식하지 못한다. 상처받은 갯벌에서 가슴앓이 하는 고향의 삶까지 편집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갯벌의 아름다움, 기원, 면적, 생태적 다양성, 문화와 역사적 의미, 그리고 역동성들을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 학자들은 이 땅에도 적지 않다. 논문에 관심이 없지만 갯벌의 생태적 경관적 경제적 가치를 알리려 애를 쓰는 환경운동가도 많다. 그들은 적지 않은 책을 썼다. 갯마을의 먹을거리를 찾으며 신문과 잡지에 맛을 소개하는 프리랜서들도 나름대로 애를 썼다. 도감도 여러 권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갯벌과 몸과 마음의 거리를 느낀다. 갯벌을 살갑게 여길 기회가 없어 그런지, 우리 갯것이 시장에 없으면 수입한 거 먹고, 남의 갯것마저 없으면 삼겹살을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매립한 자리에 초고층빌딩이 솟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

 

이즈음에서 김준을 소개한다. 그는 분명 갯벌을 연구하는 해양학자지만 거의 갯사람이다. 갯벌에 취해 갯바람을 맞으며 갯일 하는 아낙과 어울리며 갯것을 먹는다. 갯벌이 오염되는데, 매립되는데 가슴앓이하며 때로 분개한다. 그가 《김준의 갯벌 이야기》를 썼다. 자신의 이름을 앞에 붙인 건 출판사의 기대심리가 유인했을 테고, “사람과 자연과 삶이 만나는 곳, 갯벌”이라고 부재를 붙인 《갯벌 이야기》는 우리나라 갯벌 곳곳을 뜨겁게 누빈 그의 가슴과 발이 고통을 토해낸 글이다. 학자이면서 전혀 현학적이지 않고, 갯사람이면서 투박하지 않다. 기행문을 쓰는 작가의 글처럼 유려하고 부드러울 뿐 아니라 비범한 환경운동가처럼 뜨겁다. 자고로 그가 갯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말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20년 동안 절절하게 깨달은 갯벌의 가치를 독자에서 각인시키고 싶은 갯학자의 절규로.

 

그래도 학자인 까닭에 《갯벌 이야기》 초입에 갯벌의 가치를 이야기해야 했으되, 학술적 냄새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그랬다간 독자들이 책장을 덮어버릴 터. 뒤이어, 이토록 아름다운 갯벌은 사람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이 얽히고설킨 공동체이자 문화요 역사라는 걸, 작가의 솜씨로 직접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며 쉽게 이야기한다. 갯벌이 사라지는 실상을 느끼는 독자들이 스스로 안타까워하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갯벌이 있기에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이고, 국토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아도 영양 넘치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걸,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여기저기에서 보고 듣고 맛본 경험을 구구절절 풀어놓는다.

 

갯벌은 어쩌면 한반도에 들어온 우리 민족의 최초의 터전일지 모른다. 그 증거를 그는 발로 모았다. 고흥, 태안, 함평, 장흥, 여수, 군산, 태안, 고창, 그리고 제주에 이르기까지 갯벌에서 살림살이를 마련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걸 펼쳐놓는다. 갯벌을 밀고 나는 바닷물은 경험이자 과학이다. 그 시공간에서 갯살림 하는 오이도의 할머니의 생태적인 지혜, 생태적 고기잡이의 대명사인 독살, 돈과 기술이 필요 없는 맨손어업, 바다에서 얻는 비료인 잘피, 제주도의 고망낚시를 독자들이 눈으로 보듯 다정하게 설명하며 조상이 물려준 갯벌의 삶을 안내해준다.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지속가능한 삶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갯사람들은 갯벌에 예를 갖출 수밖에 없다. 동해와 서해안이 공통으로 갯벌에 제사를 지낸다. 무안에도, 원산도에도, 완도에도, 진도에도, 제주에도….

 

그런 갯벌이 오염으로 매립으로 개발로 신음하는 현장을 고통스레 알리면서 바닷물을 다시 통하게 하라고 절규하는 김준은 갯벌과 사람이 한반도에서 맺어온 삶의 희로애락을 전한다. 그 중 세계최장 제방으로 갇힌 새만금에서 삶을 마감한 류기화도 다시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준은 17군데 갯벌만큼은 꼭! 지켜야한다는 다짐을 새겼는데, 어떨지. 얼핏 보아도 대부분 바람 앞의 등불 신세의 갯벌 목록이다.

 

수평선과 지평선을 동시에 보여주는 갯벌은 한반도에 머무는 사람에게 삶과 정취를 한없이 베풀지만 수많은 철새와 나그네새가 운집했다 떠나는 곳이고, 그 철새를 보아야 봄을 느끼고 시를 쓰고 농사를 짓는 시베리아의 이누잇과 뉴질랜드의 마오리에게 희망을 주는 공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방 갯벌을 지키지 못한다. 오로지 돈 때문인데, 돈을 가지고 무덤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은 《갯벌 이야기》를 읽고 느낀 후, 행동하길 기대하고 싶다. (우리와다음, 2010년 3-4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12. 1. 21:04

 

식탁의 고기가 요즘처럼 풍요롭기 전, 우리는 동물성 단백질을 어디에서 보충했을까. 사위가 와야 닭 한 마리 잡던 조상은 마을 어떤 집의 특별한 날에 돼지 잡아 가끔 동네잔치를 벌였어도, 소를 잡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여름철 몸이 허해졌을 때 키우던 개 잡는 사람이 좀 있었고, 겨우내 영양 부실했던 산골 마을 주민들은 개구리로 단백질을 보충했지만 그 양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조상이 먹었던 단백질은 상당 부분 바다에서 나왔다. 돈줄이나 있는 집은 조기, 민어, 대구 따위를 밥상머리에 올렸을 테고 그리 못되는 집은 망둥이나 꽁치, 조개젓과 꼴뚜기젓에 의존했을 것이다. 그래도 삼면이 바다인 덕분에 사시사철 동물성 단백질원은 끊어지지 않고 밥상에 올라갈 수 있었을 터.

 

10여 년 전, 세계적인 과학 잡지 네이처는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혜택을 돈으로 환산하면 해마다 33조 달러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33조 달러? 33조 달러면 우리나라 백년 예산에 맞먹는 물경 4경원이다. 그런데 네이처는 33조 달러 중 3분의2가 바다에서 나온다고 덧붙였다. 바다가 제공하는 단백질원만 따졌을 리 없다. 지구에서 만들어지는 산소의 약 70퍼센트가 바다에서 나온다. 자연정화 능력은 또 어떤가. 거기에 심미적 가치, 경관적 가치까지 더한다면 바다의 가치는 육지의 두 배에서 머물지 않을지 모른다.

 

바다 중에서 생태적 가치가 가장 높은 곳은 대륙붕이고, 대륙붕 중에서 단연 갯벌이다. 세계의 해양학자들은 면적으로 5번째이지만 생태적 가치로 볼 때 최고라고 우리나라 갯벌의 가치를 평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조수간만의 차가 큰 만큼 조간대가 드넓지 않던가. 서해안 갯벌은 해안에서 수 킬로미터로 펼쳐진다. 그 넓은 조간대에 날아드는 도요새와 물떼새, 오리와 기러기 종류의 종다양성은 철새를 연구하는 조류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우리 갯벌은 반드시 보전해주기를 권고하는 람사 국제 보호 습지에 해당하는 세계 3대 철새 이동통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서편, 드넓은 갯벌의 펄 1그램에는 10억 마리 이상의 식물성플랑크톤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생물 밀도가 대단히 높고 식물성플랑크톤이 생산하는 산소 생산량도 엄청날 게 틀림없다. 따라서 식물성플랑크톤을 먹는 동물성플랑크톤이 많을 게고, 그 플랑크톤을 먹는 온갖 동물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펄을 조금만 뒤집어보자. 백합, 가무락, 바지락, 동죽과 같은 조개 무리가 그 모습을 켜켜이 드러낸다. 갯벌이 게 있기에 꽃게, 박하지, 칠게, 밤게, 콩게 들이 어우러지고 각종 새우들이 바다에 몸을 숨기는데, 이들은 대개 탄산칼슘(CaCO3) 껍질을 가지고 있다. 대기 중의 대표적 온실가스, 다시 말해 이산화탄소(CO2)를 효과적으로 제거해준다.

 

갯벌이 육지의 서쪽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큰 자랑이다. 산소가 충분된 신선한 바람을 서해안에서 육지 쪽으로 언제나 공급해 줄뿐 아니라 넓은 갯벌에서 증발하는 막대한 수증기를 몰고와 금수강산을 촉촉하게 적시지 않던가. 광활한 갯벌의 빼어난 정화능력도 주목해야 한다. 1평방킬로미터의 갯벌은 대형 하수종말처리장 하나 이상의 정화 능력과 맞먹는다니, 갯벌 보전돼 있다면 민원이 시끄러운 하수종말처리장이 없어도 수질오염을 자연스레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한때 건물을 세울 수 없고 자동차도 다니지 못하는 까닭에 갯벌을 못 쓰는 땅이라 치부했던 적이 있었다. 갯벌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안타깝게도 아직도 그 관행을 버리지 못하는 이가 바닷가의 개발을 주도한다. 최근에도 논으로, 공장부지로, 공항으로, 아파트 부지로 갯벌을 매립해왔고 매립한 곳에 조성된 공장과 건물은 자동차들과 더불어 이산화탄소와 대기오염 물질을 낮밤을 가리지 않고 내뿜는다. 갯벌에서 채취하는 단백질의 가격에 비해 개발로 벌어들이는 돈이 더 많다는 논리를 여전히 내세우면서.

 

사실 갯벌 매립은 고려 시대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농민들이 삽으로 소박하게 매립할 적에 갯벌의 생태적 피해는 대체로 무시될 수 있었다. 하지만 땅의 부가가치에 눈이 어두운 기업과 정부가 중장비를 집중 동원하며 본격적으로 매립하면서 갯벌은 돌이킬 수 없게 파괴되었다. 한없이 제공하던 단백질을 물론, 생태적 안정성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매립한 갯벌에 농토를 일궈 쌀을 수확하게 한 후,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몽땅 빼앗아갔던 일제가 제정한 이른바 ‘공유수면매립법’이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일 텐데, 그 법은 누구의 소유물일 수 없는 공유수면을 매립하면 매립한 자에게 소유권이 돌아가도록 탐욕을 보장한다. 현재 우리나라 갯벌의 대부분은 위기에 처해 있다.

 

매립으로 인한 막대한 이익은 당장 개발자의 수중에 들어가겠지만 한시적인데, 피해는 영구적이며 후손에게 전가된다. 억척 아낙들이 맨손으로 채취했던 갯벌의 다채로운 단백질원이 퇴출된 이후 농약 흥건한 수입 사료로 살찌운 육류의 소비가 늘어났지만 우리 시민들의 몸은 전에 없던 질병에 노출되고 말았다. 고혈압, 뇌와 심혈관 질환, 당뇨병, 대장암과 유방암과 같은 퇴행성질환이 그것이다. 그런 식단은 가난한 나라의 식량 사정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세계의 기후와 환경은 그만큼 악화되었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우리 어린이들의 아토피성 피부병운 무엇을 웅변하나. 언론마다 걱정을 더하는 지구온난화와 세계 곳곳의 기상이변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눈앞의 탐욕이 빚은 필연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해양연구소는 일찍이 갯벌의 생산성은 육상 생산성의 최고인 논보다 무려 3배가 넘는다고 발표한 바 있다. 심미적 가치까지 따지면 5배가 넘을 것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갯벌에서 단백질원을 채취하는 어부들은 김을 매지 않아도 비료와 농약을 뿌리지 않아도 농한기 없이 사시사철 일정한 소득을 챙길 수 있었다. 이렇다 할 장비도 기술도 힘도 필요 없이 그저 억척스러움만 있으면 누구나 채취할 수 있기에 ‘맨손어업’, 또는 ‘관행어업’이라 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시할머니가 처음 시집왔을 때도 그 시할머니의 시할머니가 시집왔을 때도 그랬다. 썰물을 따라 들어가 힘이 부칠 때까지 허구헛날 한 가마니 이상 잡고 또 잡아도 언제나 그만큼의 먹을거리를 내주는 갯벌은 갯일하는 아낙네만의 소득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우리 민족 역사의 오랜 단백질 원천이자 문화였다.

 

봄과 가을 무렵 넓은 갯벌을 뒤덮을 듯 몰려다니는 도요새와 물떼새, 겨울철이면 습지마다 빼곡하게 모이는 수많은 오리와 기러기 무리는 우리나라에서 흔한 나그네와 철새지만, 그들이 정작 펴져 사는 지역에는 무척이나 보기 어려운 존재라고 한다. 도요새와 물떼새를 보아야 그 지역의 농부들은 기쁜 마음으로 들로 씨 뿌리러 나가고, 화가는 화구를 챙기며, 시인은 시를 쓴다고 한다. 최근 호주와 뉴질랜드 일원의 원주민들은 우리나라 당국에 갯벌 보전을 간절히 부탁한다고 조류학자와 문화인류학자들은 전한다. 그 지역에서 도요새와 물떼새들은 봄의 전령이요 희망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마르지 않는 산소와 수분 공급처인 갯벌은 생명체의 필수 원소인 황의 절대적 순환장소라고 제임스 러브록은 자신의 저서 《가이아》에서 주장했다. 갯벌은 자연정화 장소일 뿐 아니라 수많은 어류의 산란장이고 해산물의 무궁한 보고다. 육상의 모든 생물은 바다에서 기원했고, 지금도 동물 분류군의 대부분은 바다에 산다. 인간도 결국 바다에서 진화한 것이리라. 따라서 바다는 지구촌 수많은 생명체의 자궁인 셈이고, 그중 현재 그런 가치가 빼어난 갯벌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생명의 끈’이다.

 

지구 생명체의 마지막 존재라도 되는 양,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도록 이끈 자궁을 마구 오염시키는 와중인데, 우리나라는 특히 갯벌 매립으로 자신의 내일마저 질식시키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후손도 먹고 숨 쉴 수 있어야 산다. 요란한 장밋빛 개발 구호도 생명이 건강할 때 비로소 효과를 빚을 수 있다. 내내 건강해야 할 자신의 노후를 생각해보더라도 갯벌 보전은 물론이고, 복원을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식량의 4분의3을 수입에 의존하는 처지에 더는 주저할 일이 아니다. (사이언스올, 2009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