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5. 10. 10. 01:04
 

텃밭에 심은 고추는 왜 잘 붉어지지 않을까. 주말이면 교외 텃밭으로 달려가는 초보 농군들은 풋고추를 그때그때 고추장에 찍어 맛보곤 하지만 붉은 고추는 어쩌다 한두 개, 김치담글 만큼 따내지 못한다. 붉어지면서 병에 휩싸이는데 실력이 없기 때문일까.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경험 많은 농군에게도 농약과 화학비료 없는 노지에서 붉은 고추를 재배하는 일은 쉽지 않다. 비 피하는 설비를 구비하거나 농약과 화학비료를 충분히 뿌려야 목적한 소출을 기대할 수 있다. 종묘상을 통해 구입한 고추씨는 이미 그렇게 재배해야 소출이 보장되도록 품종개량되었기 때문이다.


마당에 돌아다니는 닭들과 달리 양계장 비닐계사의 닭들은 왜 우박이 내리면 위험할까. 비닐하우스를 뚫고 내리치는 우박의 충격은 마당보다 덜할 텐데. 온도 습도 엄격히 조절되는 비닐계사 안에서 엄선된 사료만 먹는 닭들만 죽어 널브러지는 까닭은 종묘상에서 구입해야하는 고추씨처럼 유전적 다양성이 거의 없게 품종개량되었기 때문이다. 효율 뿐 아니라 예측과 계산과 통제가 가능하게 똑똑한 사람들이 유전적 다양성을 과학적으로 제거하자 적은 사료를 먹고 빨리 살찌던 닭들이 들이닥친 찬바람에 삽시간 죽어버리는 것이다. 병이 돌면 걷잡을 수 없게 감염되는 고추처럼.


조지 리처는 효율적이며 예측과 계산과 통제 가능하게 관리하는 시스템을 ‘맥도날드화’라고 주장한다. 손님이 차 몰고와 돈 내며 주차하고, 손님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 비정규직 종업원의 판박이 인사를 받으며 줄서고, 세계 공통의 재료와 조리법이 만든 예측 가능한 맛과 향기를 지닌 햄버거를 불편한 자리에 앉거나 서서 먹고, 쓰레기까지 손님이 치우면서도 저렴하게 느끼도록 만든 맥도날도햄버거와 같은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다. 종자회사에서 만들어 종묘상을 통해 파는 고추씨와 뚝배기 크기에 맞춘 닭도 맥도날드화의 한 모습이다. 맥도날드화하면 돈벌이가 보장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큰 낭패를 본다. 요즘 대부분의 농업은 그래서 ‘모’ 아니면 ‘도’다.


땅에 맞는 씨앗들을 다양하게 갈무리했다가 이듬해 심었던 시절, 개개 농작물의 생산량은 일정치 않았다. 늘 들쭉날쭉했다. 잘 안된 농작물이 있지만 잘 된 농작물도 있어 이웃과 나누며 견딜만했다. 가족 중심의 노동집약적 자급자족 농촌공동체였다. 공동체의 환경과 전통에 따라 씨앗의 차이가 있어 특산품이 있고 그에 따르는 문화가 다양했으며 언어와 식성이 그렇듯 문화와 전통에는 우열은 존재하지 않았다.


1940년대 초, 멕시코 소노라 주에서 시험한 녹색혁명은 가히 혁명이었다. 몇 안 되는 특정 씨앗에 맞게 농토를 개조하고 적기 적량의 물과 비료를 투여하니 예상보다 많은 소출이 있었고, 이모작에 삼모작까지 가능하니 농부들은 늘어난 농작물을 팔아 큰 부자가 될성싶었다. 그래서였나. 녹색혁명 연구책임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런데 늘어난 식량은 굶주리는 지역으로 거의 공급되지 않았다. 맥도날드햄버거나 맥도날드화되어 세상에 쏟아져 나온 공산물처럼, 녹색혁명 수확물도 상품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자급자족했던 전통 농토가 다국적기업의 플랜트농장으로 독점되고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일부 주민마저 기계화된 농장에서 쫓겨나면서 굶주리게 된 것인데, 부자 국가에서 기획해 과다 생산된 농산물은 굶주리는 지역으로 공급되지 않는다. 녹색혁명을 부탁하지 않은 굶주리는 지역에는 돈이 없는 까닭이다. 미국에도 굶주리는 3천만 명이 있다.


늘어난 농작물은 부자들의 지역에서 사료로 전용됐다. 그러자 생일과 명절에나 고기 먹던 부자나라 가난한 계층의 아이들도 고혈압과 당뇨병과 비만과 같은 성인병에 시달리게 된다. 고기와 우유를 가공 포장하는 기업들은 어릴 적부터 육식을 해야 건강하다는 신화를 학교와 언론을 통해 집요하게 유포하기 시작했다. 고기산업은 의료산업의 파이를 키웠고, 늘어난 비만 인구는 다이어트 상품을 새롭게 각광받게 이끌었다. 이제 비만은 가난한 계층의 상징이 되었다. 다이어트 비용의 반으로 세계 기아 인구를 충분히 배불릴 수 있다. 굶주리는 지역의 자급자족 기반도 꽤 확보될 것이다.


메뉴가 다양하지 않을수록 맥도날드화는 효율을 높이고 예측과 계산과 통제가 쉽다. 녹색혁명도 단작이 필수다. 끝 간 데 없이 넓은 농토에 단일 품종을 심는다. 똑똑한 사람들이 씨앗 이외의 식물들을 ‘잡초’라 싸잡으며 제초제를 권장하자 이번엔 잡초와 더불어 해충까지 바글거린다. 살충제도 뿌렸고, 내성이 강화된 해충을 죽이려 똑똑한 사람들은 더 독한 살충제와 제초제들을 판매한다. 이제 농약 없는 녹색혁명은 소출을 기대할 수 없다. 농업의 맥도날드화는 농약 시스템을 더욱 강화해야 하고, 농작물만으로 감당하기 어렵게 유지비용은 점점 늘어난다.


농약은 땅속 생태계를 말살시켰다. 땅을 비옥하게 하는 벌레와 미생물이 죽었고 흙속 유기물과 무기물은 조화를 잃었다. 그러자 황폐된 표토가 빗물에 씻겨 유실되기 시작한다. 똑똑한 사람들은 비닐멀칭을 개발했는데, 농작물로 돈벌이 힘든 농촌엔 젊은이가 없다. 지친 농부들이 영농회사에 파종과 수확을 맡기면서 찢어진 멀칭용 비닐들이 땅과 농촌과 하천과 바다를 오염시킨다. 비닐 걷어내지 않은 땅을 갈아 그 위에 다시 멀칭하자, 땅속에 박힌 비닐은 씨앗의 생장을 방해하고, 관행에 익숙한 농부들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더 뿌려 해결하려한다. 땅과 농촌과 농부와 강과 바다는 더욱 오염되고, 도시의 소비자들이 낳은 아이들의 80퍼센트에서 아토피 증세가 나타난다. 어떤 생태경제학자는 요즘을 ‘아픈 아이들의 세대’로 성격규정했다.


이제는 증산보다 감산이 두려워 농약을 친다. 옆집보다 덜 뿌리면 해충이 우리 밭으로 몰려들까봐 경쟁할 정도다. 지금은 한 알의 씨앗이 농부의 땀과 발소리, 바람과 물과 태양과 세월을 받아 수십 배 소출로 이어졌던 시절이 아니다. 수확량보다 많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뿌린다. 따라서 관행 농업은 진정한 생산이 아니다. 공산품처럼 농약과 화학비료라는 재료가 변형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관행농업의 소출마저 줄어든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아무리 퍼부어도 소용이 없다.


다국적기업의 부름을 받은 똑똑한 사람들이 유전자조작이 대안이라며 강요한다. 돈 안 되는 증산을 연구한 적 없는 다국적기업은 환경에 좋다는 억지논리를 유포하면서 제2녹색혁명으로 유전자조작을 포장한다. 획기적으로 돈 벌게 해줄 씨앗이라며 지친 농민에게 속삭인다. 굶주리는 지역을 위한 씨앗이라며 홍보한다. 유전적 다양성이 위축된 녹색혁명은 지역적 단작을 초래했다. 유전적 다양성이 아예 없는 유전자조작은 단작을 더욱 심화시킨다. 자칫 잘 못하다가 몇 안 되는 다국적기업의 손아귀에 세계 농민과 소비자의 목줄이 달릴지 모른다. 식량은 물론 식성까지 단순해진 세계인은 다국적기업에 종속될지 모른다.


유전자조작으로 걷어들이는 농작물도 대부분 사료로 전용된다. 더욱 늘어나는 소떼는 생태계 황폐화와 지하수 고갈을 부채질하고 확산되는 육식은 성인병을 늘이며 의료산업을 부풀릴 것이다. 몇 가지 예에서 드러나고 있듯, 조작된 유전자는 30억 년 이상 지속된 유전자 경계를 허문다. 위험하다. 이는 걷잡을 수 없는 생태계 교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스스로 이동하며 재생산하는 유전자는 똑똑한 사람들의 통제를 받지 않을 것이다. 맥도날드화도 소용없을 것이다. 퍼져나간 조작된 유전자는 사람들의 내일을 섬뜩하게 안내할지 모른다.


그래서 채식이 중요하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이 그렇지 않은 농산물보다 적은 이때 우리는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몰아내야한다. 관행농업이 한계를 드러낸 마당이므로 유기농업을 적극 장려하며 심어야한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서로 믿고 도우며 나눠야한다. 우리의 땅과 몸과 내일을 살릴 대안이기 때문이다. 물론 유기농산물을 먹어야 바른 채식이다. 우리 땅을 살리지 않은 수입 유기농산물은 바른 채식과 거리가 있다. 바른 채식은 ‘생태채식’이다. 후손이 포함된 우리의 건강한 내일을 위한 생태채식, 더 미룰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자 어쩌면 마지막 대안일지 모른다. (채식물결, 2005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