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8. 1. 7. 09:48

 

     디디티. 꿈의 약인 줄 알았다. 관리에게 어렵게 부탁해 뿌리면 온 집안의 벼룩과 빈대가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625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들어온 미군은 돌아오는 피난민을 한 줄로 세워 하얀 분말을 뒤집어씌웠다. 그땐 좀 굴욕적이어도 눈 질끈 감고 참아야 했다.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이가 마술처럼 한 순간에 없어지므로. 게다가 사람에게 아무 탈이 없다니 사람이 만든 정말 신기한 약이 아닐 수 없었다.

 

디디티의 살충효과를 밝힌 스위스의 과학자 뮬러는 그 공로로 1945년 노벨상을 받았는데, 그럴 만했다. 모기가 사라지면서 모기가 옮기는 병이 눈에 띄게 줄지 않았던가. 해마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던 말라리아가 그랬다. 어디 그뿐이랴. 산과 강과 들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지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이지만, 하늘을 가리며 내려앉아 수확을 앞둔 알곡은 물론 줄기와 뿌리까지 갉아먹고 날아가던 메뚜기 떼를 깨끗하게 처리했다.

 

열광했던 과학의 성과는 언제나 뒤늦게 허점이 드러나는 법. 디디티도 그랬다. 화학적으로 안정적인 디디티가 바다로 흘러들더니 생물의 호르몬 분비에 혼란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낮은 농도인 바다의 디디티가 먹이사슬로 이어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축적, 물새는 알을 품지 못하게 되었다. 칼슘이 부족해 품으면 부서졌지만 부화해도 기형이 많았다. 급기야 사람에게 암이 발생하는 게 아닌가. 뒤늦게 사용을 금지했지만 더 큰 문제가 발생한 뒤였다. 내성을 가진 곤충이 나타난 거다.

 

어릴 적의 동네에 거지가 많았다. 손가락질 당하기는 했어도 동네는 거지를 내차지 않았다. 상갓집이나 잔칫집에서 밥 한 사발 얻어먹은 거지는 허드렛일을 마다않았다. 그 거지의 몸에 이가 많았나보다. 거지는 눈 내린 날 이를 잡는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눈 쌓인 마을에서 거지는 유난히 눈에 잘 띌 것이다. 따사로운 처마 밑에 앉아 내복을 뒤적이는 거지는 솔기에 고물거리는 이를 오른손과 왼손의 엄지손톱으로 틱, 틱, 눌러 죽인단다.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던 어른들은 공부 안 하면 그리 된다고 일렀는데, 몸에 이가 사라진 요즘, 동네에서 거지를 보기 어렵다.

 

한데 아닌가. 사라졌다 믿은 이가 초등학생 사이에 늘어난다고 질병관리본부가 얼마 전에 발표했다. 교육청에 구제 지침을 보낸 당국은 초등학생 10퍼센트가 감염되었다고 염려했다는데, 머릿니는 우리만의 사정은 아닌 모양이다. 미국과 유럽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머리까락 사이에서 두피 속의 피를 빠는 이는 머릿니, 옷의 솔기에서 몸의 피를 빠는 이는 옷니라고 하는데, 보이지 않던 이는 요즘 왜 다시 나타난 것일까. 겨울철에 머리를 잘 감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 디디티에 대한 내성이 더욱 강화된 까닭이 아닐까.

 

디디티 사용이 금지된 이후 농약회사는 망하지 않았다. 디디티보다 훨씬 강력한 살충제를 팔며 더욱 커졌다. 그런데도 이가 나타났다. 새로운 살충제에 노출될 때마다 우수수 죽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한 달이면 300개의 알을 낳는 이는 사람의 눈부신 과학을 견뎌낸 것이다. 이제 이에게 무서운 살충제는 그리 많지 않다. 의사는 여전히 퇴치 약품을 처방하지만 잠시 주춤할 뿐 결국 소용없을 것이다. 살충제가 사람의 건강까지 직접적으로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어도 이는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날개와 겹눈이 없는 이는 곤충이다. 머리와 가슴과 몸으로 나눠있는 이는 3밀리미터에 불과하지만 무시할 수 없다. 질병을 옮기기 때문이 아니다. 이가 옮기는 질병은 그리 많지 않고, 별 것도 아니다. 이보다 사람이 전염시키는 병이 훨씬 많고 치명적이다. 교통사고나 전쟁은 아니 그런가. 문제는 성가시게 가렵다는 거다. 다른 곤충처럼 가슴마디에 달린 세 쌍의 다리로 머리까락이나 솔기를 기어다니며 피를 빨아 먹는데, 피부를 뜯을 때 어떤 물질을 집어넣기 때문이리라. 남 보기에 흉할 뿐 아니라 가려우니 잡아야 한다.

 

따뜻한 물이 철철 나오는 요즘, 옷니는 거의 없다. 머릿니부터 잡자. 머리까락을 뒤져 엄지와 검지로 진분홍색 이를 잡아 양손의 엄지손톱으로 꾹 누르면 배마디 안에 진한 갈색으로 저장된 피가 틱, 터지며 죽는다. 끝난 게 아니다. 머리까락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하얀 작은 점이 머리까락에 꽉 달라붙어 있으면, 그건 이의 알, ‘서캐’다. 서캐는 여간해서 떨어지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따뜻한 물에 한참 담갔다 참빗으로 밀어내야 하는데, 대나무로 촘촘하게 만든 참빗은 몹시 드물다. 참빗이 뭔지 아는 사람도 드물다. 머릿니 구제하는 샴푸를 처방하는 의사는 서캐용 빗을 권장한다.

 

“빨래, 끝!” 텔레비전의 광고는 세탁기에 세재만 넣지 말라고 주문한다. 섬유린스와 표백제가 옷의 색상을 선명하게 하고 올이 살아난다고 소비자에게 화학물질 의존성을 세뇌한다. 자연에 없는 화학물질이 피부가 좋을 리 없다는 고백은 물론 생략한 채. 더 심한 광고도 있다. 널어놓은 빨래와 입은 옷에도 뿌리란다. 냄새도 좋다면서. 아토피와 알레르기는 음식 때문만은 아닌 이유를 제공하는 순간인데, 한 환경단체는 그 광고를 ‘나쁜 광고상’으로 선정해 발표했다. 시상식장에 광고주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환경단체의 기발한 행동은 소비자의 경각심을 한동안 끌어냈다.

 

곱게 빗은 머리를 뒤로 틀어 비녀를 끼우던 할머니는 꼭 참빗을 쓰셨다. 아랫목의 이불 속만 따뜻한 겨울이면 옷을 껴입었던 시절, 머리를 자주 감지 못하는 사람을 간질이던 이는 엄지손톱과 참빗이 해결했는데, 겨울이 여름 같은 요즘은 화학약품에 맡긴다. 메뚜기와 모기를 보자. 사람과 함께 지냈던 대개의 곤충들은 화학약품이 강력해질수록 저항력을 강화했다. 이도 그렇다. 앞으로 화학약품이 이를 구제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떤 대책을 마련할 수 있을까. 더 강력한 약품일까.

 

휘황찬란해진 도시에 거지는 언뜻 보이지 않는다. 사라졌는가.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가난한 이는 늘어난다. 다만 도시의 구석에 처박혀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세금으로 조성한 복지자금으로 구제한다. 불현듯 다시 나타난 머릿니는 어떻게 구제해야 할까. 곁에 없는 친지를 서로 ‘그이’ ‘저이’ 하는 사람은 이제 참빗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이도 어쩌면 참빗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 아닐지. (물푸레골에서, 2008년 2월호)